통영 구경 도우미
■ 용화사(일원이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0호)는 경상남도 통영시 봉평동 미륵산에 있다.
조선 광해군 9년(1617) 性和라는 승려가 통제사 尹天의 도움을 얻어 군인 막사 성격의 절로 창건하여 淨水寺라 하였다. 5년 뒤 폭풍으로 무너지자 1622년 삼장골에 중창하여 川澤寺라 하였다. 그러다가 인조 6년(1628) 불이 나 몽땅 타버렸다.
이렇게 바람 물 불의 삼재를 당하자 성화는 미륵산 제1봉에서 7일 밤낮으로 기도했다. 그때 한 신인으로부터 지금의 자리에 절을 지어 미륵불을 모시라고 계시를 받았다.
이어 碧潭 幸善이란 사람이 불타고 남은 천택사 건물을 옮겨 지어 용화사라 했다. 지금의 보광전 기둥은 그때 옮겨 온 것이라 한다.
보광전(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49호)에는 아미타삼존불을 모셨고,
용화전에는 미륵불을 모셨다.
명부전에는 지장보살상과 시왕상이 있다. 이 두 상은 1910년 무렵 함양 영은사에서 옮겨 온 것으로 고려 중기의 작품이라 한다.
용화사와 관음사 사이 길가에 慈嚴의 부도가 있는데, 형태가 온전하지 않다.
■ 절 서쪽에 부속암자 관음전이 있다. 관음전은 1618년 淸眼이 창건했다.
용화사 관음전
■ 洗兵館(국보 제305호)은 통영시 문화동에 있다.
조선 제14대 선조 36년(1603)에, 제6대 삼도수군통제사 李慶濬이 세운 객사이다.
선조 37년 삼도수군통제영이 통영으로 옮겨오면서 세병관을 중심으로 통제영성과 관아 등을 지었으나,
모두 스러지고 지금은 세병관만 남아있다.
1895년 제208대 통제사 洪南周까지 300여 년간 남해바다를 지켜왔다.
1973년에 보수하고, 경내도 정화했다.
경복궁 경회루, 여수의 진남관과 이 세병관을 우리나라 3대목조건물이라 한다.
唐나라 시인 杜甫의 <洗兵馬>란 시 마지막 부분에,
安得壯士挽天河 어찌하면 장사를 얻어 은하수를 당겨다가
淨洗甲兵長不用 갑옷과 무기들을 깨끗이 씻어 길이 쓰지 않을 수 있을까?
漢나라 劉向의 <說苑- 權謀>에,
周나라 武王이 出師에 비를 만나고는, '이것은 하늘이 병기를 씻고 닦는 것이다'라고 생각하였다. 뒤에 紂 잡고 商나라를 멸망시켜 전쟁이 그치게 되었다"라고 전해지는데, 일이 한 보인다.
이후로, ‘洗兵'은,
① 전쟁을 승리로 마침을 상징하는 말,
② 出師에 비를 만나다.
③평화를 길이 지키다'등의 뜻으로 뜻이게 되었다.
■ 止戈門은 세병관의 출입문이다.
‘止戈’를 글대로 풀이하면 ‘창을 거둔다’라는 뜻이다.
달리 보면 ‘武자를 파자한 것이기도 하다.
지과문의 가운데 두 기둥을 받치고 있는 신방목에는 해태가 새겨져 있다. 해태는 화재를 예방하는 상상의 동물이다.
지과문을 들어서면 세병관의 위풍당당한 모습을 드러난다.
현판은 제136대 통제사 徐有大란 사람이 썼다고 한다. 글자 한자의 키가 2m가 넘는다.
정면 9칸 측면 5칸의 팔작지붕 겹처마 집으로 사방으로 벽채가 없이 모두 개방되어 있다.
건물의 구조는 단순하다.
그렇지만 질서정연하게 배열된 기둥들은 마치 군대행진 같이, 절도있고 강한 인상을 주는 건물이다.
건물의 중앙 세 칸의 뒤쪽부분에 마룻바닥을 한 컨 높여 闕牌를 모셨다. 궐패가 놓이는 곳의 천장도 특별히 우물천장으로 만들고, 삼면에 窓戶를 만드는 등 다른 공간과 구분하였다. 창호 위쪽으로 사군자와 옛날 군인들의 전투 모습을 벽화로 그리고, 통제사들 이름과 통제사 휘하의 직제도 적혀있다.
궐패가 놓이는 자리 말고는 모두 연등천장이다.
일반적으로 객사는 임금의 궐패를 모시는 主舍와 그 좌우에 지붕을 한단 낮춘 翼舍로 구성된다. 그런데 이 세병관과 여수 진남관은 한 동짜리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 지과문 오른쪽에 있는 受降樓는 왜적으로부터 항복을 받은 곳이다.
숙종 30년(1677) 제57대 통제사 윤천뢰가 세웠다.
본디 중앙동 한일은행 근처에 있었는데, 1988년 이곳으로 옮겨왔다. 옮겨오기 전까지는 수항루 앞마당을 兵船마당이라 하여 매년 봄가을에 왜병으로부터 항복받는 모의행사를 했다고 한다.
■ 수항루 옆에 頭龍浦記事碑가 있다. 인조 3년(1625) 제19대 통제사 구인후가 세웠다.
제6대 통제사 이경준이 세병관 등 수군 본영을 창건한 사적을 기록한 비다. “頭龍浦”는 조선시대 통영의 지명이다.
중앙동 해변에 있던 것을 1904년 이곳으로 옮겨왔다.
■ 세병관 옆에 통제사의 비 50여 기가 있다.
통제사는 경상 전리 충청 삼도의 수군 총사령관이다. 정식 이름은 삼도수군 통제사다.
조일전쟁 중 조선의 수군은 경상 좌우도, 전라좌우도, 충청좌우도 도 나뉘어 각 도에 두 명씩 수군절도사를 두었다.
그러다가 조일전쟁 중인 선조 26년(1593) 원활한 지휘체계를 세우기 위하여 삼도의 수군 전체를 지휘하는 통제사 제도를 신설하고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초대삼도수군통제사를 겸하게 하였다.
그리고 제2대 통제사는 원균,
제3대는 다시 이순신으로 이어졌다.
그리하여 고종 32년(1895) 7월 통제영이 폐지될 때까지 모두 208명이 임명되었다.
통제영은 처음 한산도에 두었다. 보기에 따라서는 초대 통제사 이순신이 전라좌도수군절도사였으므로 첫 통제영은 전라좌수영이 있던 여수로 볼 수도 있다. 조일전쟁이 끝나고 거제 여수 등으로 옮겼다가 1604년 통영으로 옮겼다.
통제영 부속기관으로 6방 13공방이 있었다. 13공방은 부채 칠 그림 대장간 활통 신 말안장 놋쇠 금은 갓 말총 장롱 상자를 만드는 공방이다. 지금도 유명한 통영의 갓, 나전칠기, 소목장 등은 이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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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동벅수(중요민속자료 제7호)
1906년 1906년 마을 주민들이 마을에 재앙이 생기는 것을 막고 평안을 기원하기 위하여 세운 장승이다. 경남, 전남 등지에는 장승을 벅수 벅시 등으로 부른다.
본디 현재의 위치에서 약 25m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1983년 도로확장 공사를 하면서 이곳으로 옮겼다.
여느 장승들은 익살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는데 반하여 이 장승은 표정이 위압적이고 괴기하다. 19세기 말 전국적으로 농민항쟁이 일어나 어수선한 민심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높이는 2m쯤 된다. 장승 옆면에 “토지대장군”이란 글자가,
뒷면에는 “光武十年丙午八月同樂同立”이라 씌여있다. 광무 10년은 1906년, “同樂”은 문화동의 옛 이름이다.
■ 해저터널(등록문화재 제201호)은 통영시 堂洞과 美修2동을 연결하는 해저터널이다.
터널 양쪽 입구에 “龍門達陽”이라고 쓰여 있다.
‘용문을 거쳐 山陽에 이르다’라는 뜻이다.
용문은 황하 상류에 있는 곳으로 잉어가 이곳을 뛰어오르면 용이 된다는 곳이다. 여기서 말하는 산양은 미륵도의 산양이다.
본디 통영반도와 미륵도 사이는 좁은 물길로 가는 砂嘴(파도나 조류의 작용으로 강이나 해안의 수면 위에 둑 모양으로 이루어진 모래나 자갈의 퇴적지형)가 발달하여 반도와 섬이 거의 연결되어 있었다.
한산대첩 때는 쫓기던 왜선들이 이곳이 물길인 줄 알고 도망쳐 들어왔다가 배가 갈 수 없어 땅을 파고 물길을 뚫어 도망해Te k하여 판데목, 또는 판도목, 한자어로 착량이라 했고, 많은 왜군이 죽었으므로 송장목이라고도 했다.
이곳은 부산과 여수 사이 항로의 요지로 배의 출입이 잦았다. 이 판데목에는 돌다리, 그 이전에는 나무다리가 놓여있어 사람들과 마소가 건너다녔고, 다리 밑으로는 작은 배가 다녔다.
그후 일제가 다리를 허물고 길이 1.420m, 너비 55m, 깊이 3m 되는 운하를 파서 물길을 넓히고 운하 밑으로 굴을 뚫었다.
그 굴을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관명을 따서 太閤掘이라 했다.
일제가 이곳에 다리를 놓지 않고 굴을 판 것은 왜군들이 많이 죽은 지점 위로 걸어다니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굴은 길이 461m, 너비 5m, 높이 3.5m다. 1927년 5월부터 1932년 12월까지 근 5년이 걸려 만들었다. 당시에는 동양 최초의 해저터널이었다.
이후 1967년 충무교가 완공되기까지 통영반도와 미륵도를 연결하는 주요 통로였다.
현재 터널은 인도로만 쓰인다. 걸으면 대략 10분쯤 걸린다.
■ 착량묘(경상남도 기념물 제13호)는 통영시 당동에 있다.
충무공 이순신(1545∼1598)은 노량해전에서 전사한다.
이듬해 조일전쟁이 끝난 선조 32년(1599) 水軍들과 이곳 주민들이 공의 충절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하여 판도가 바라보이는 착량언덕에 초가를 지어 공의 위패를 모시고 춘추향사와 忌辰祭를 지냈다.
이 착량묘는 최초의 충무공 사당이다.
‘鑿梁’이란 ‘파서 다리를 만들다.’라는 뜻이다.
鑿梁은 통영반도와 미륵도 사이의 좁은 海峽(육지 사이에 끼어 있는 좁고 긴 바다)을 판 물길을 말한다.
조일전쟁 이전부터 이곳을 판데목으로 불렸다.
이곳에 물길을 만들어 미륵도를 돌아야 하는 번거로움을 해결한 운하이다. 파나마운하, 수에즈운하와 같은 기능을 한다.
당포해전에서 패배한 왜군들이 쫓겨 달아나다 미륵도와 통영반도 사이 좁은 협곡에 이르러 돌을 파서 다리를 만들며 도망한데서 붙인 이름이다.
그후 고종 14년(1877) 충무공의 10세손 李奎奭 제198대 통제사가 초가집을 기와집으로 고쳐 짓고 그 이름을 착량묘라 하였다.
이때 湖上齋도 같이 지어 지방민의 자제들을 교육시켰다.
1979년 동재를, 1980년 고직사를 새로 지어 서원 양식을 갖추었다.
착량묘는 비바람으로 퇴락된 채 오랜 세월을 견디어 오다가 1974년 도지정 기념물로 지정되자 그해부터 1985년까지 5차례에 걸쳐 정화사업을 벌여 동재와 고직사, 외삼문, 일각문을 신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의 목조건물로 기둥머리에 包作을 두지 않은 매우 검소하고 소박한 형식의 건물이다.
화강암을 잘 다듬어 만든 長臺石基壇과 둥근 正平柱礎는 원래의 것이 아니라 1974년 개축때에 만든 것이다.
서재는 2칸의 마루와 한 칸의 방으로 된 팔작지붕건물로 본래 講學用의 건물이거나 향사를 준비하는 용도로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동재는 서원의 양식을 갖추기 위해 일부러 축조한 것으로 보이나 건물형식이나 건축법식상 호상재와 차이가 많다.
착량묘는 현재 재단법인 통영충렬사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이곳에서 매년 음력 11월 19일 기신제를 봉행하고 있다.
■ 동피랑벽화마을은 통영시 동호동과 태평동에 걸쳐 형성된 동피랑 마을은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철거예정지였다.
통영시는 당초 이곳을 철거하여 "통영성 동포루"를 복원하고 주변을 정비하여 공원을 조성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한 시민단체가 미대재학생들과 일반인을 대상으로 공모전을 열어 벽화를 그린 이후입소문이 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 들기 시작했고,마을을 보존해야 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자 통영시는 동포루 복원에 필요한 마을 꼭대기의 집 3채만을 철거하고 나머지는 보존하기로 계획을 변경했다.
동피랑벽화마을, 3시 5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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