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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장사 답사자료

추연욱 2012. 12. 6. 15:17

 

남장사 답사자료

 

 

■ 골맥이 입석

지금은 폐교된 상주초등학교 남장분교장 교정의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에 있다.

본디 130cm였으나 윗부분 30cm만 남겨놓고 아래 1m는 지름 3.5m의 원통형으로 돌을 쌓고 시멘트로 고정시켰다.

마을의 액을 막아준다고 여겨 마을 사람들이 치성을 드린다.

군사정권 때 미신이라 하여 치웠다가 마을에 불상사가 많이 생겨 마을에서 다시 세운 것이다.

 

 

※ 남장동은 옛적에 남장사의 사하촌이었다.

지금은 곳감 마을이다.

 

 

* 돌장승(경북 민속자료 제33호)

자연석을 모서리만 다듬어 얼굴을 새겼다.

키 186cm로 퉁방울 같은 눈, 주먹코, 일자 입술, 비죽이 튀어나온 송곳니, 그 아래 턱 밑으로 고드름처럼 달린 수염 등 모두 제멋대로 생겼다. 멀리서 보면 남근의 모습이다.

몸통에는 ‘天下周將軍’, 그옆에는 ‘壬辰 七月立’이라 새겨져 있다.

임진년이라면 1592년, 1772년, 1832년, 1892년 중 어느 해일 것이다. 해학적인 모습의 장승은 대개 조선 후기에 많이 세워진다.

그중 1832년에는 남장사에 법당을 세우는 등 불사가 있었는데 그 해가 아닐까 생각한다.

 

본디 일주문에서 300m쯤 떨어진 길 오른편에 세웠던 것을 1968년 저수지를 건설하면서 옛길이 물에 잠기게 되자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이 장승은 절과 마을의 경계 표시이다.

 

 

 

 

■ 남장사는 상주시 남장동 露陰山(725m) 중턱에 있다.

식산 이만돈(1664~1732)이란 사람이 1716년에 지은 <南長寺사적기>에 따르면,

이 절은 眞鑑國師 慧昭(774~850)가 당나라에 유학하고 830년에 돌아와 이곳 노음산 長栢寺에 머물렀다.

이 무렵 장백사라는 이름의 작은 절이 이미 있었거나, 진감국사가 절을 지었을 수도 있다.

 

최치원 짓고 쓴 사산비명의 하나인 쌍계사 <海東故眞鑑禪師碑>(국보 제47호)에,

선사는 830년 당나라 유학에서 돌아와 “상주 노악산 장백사에서 석장을 멈추고는 의원을 열었다. 그러자 병자들이 많이 몰려와 마치 구름 같았다. 始憩錫於尙州露岳長柏寺毉門多病來者如雲”라는 기록이 있다.

 

2년 후 신라 제42대 흥덕왕 7년(832)에 무량전을 지으면서 대찰의 모습을 갖추었다.

진감국사는 옥천사(현재의 쌍계사)를 중창하여 대가람을 이루었으며, 중국에서 불교음악을 공부하고 돌아와서 옥천사에서 처음으로 우리 민족 정서에 맞는 범패를 만들었다.

고려 제19대 명종 16년(1186) 각원국사가 주석하면서 이름을 남장사로 바꾸었다.

그것은 북장사, 갑장사 등 상주지역 4장사의 하나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고려 때까지 번성하다가 조선 초기 억불정책으로 사세가 기울었다.

그러다가 四溟대사 惟政(1544~1610)이 당시 금당이던 보광전에서 수련하면서 선교 통합의 도량으로 자리잡았다.

조일전쟁 때 불타고 1635년에 중창했으나 절 전체의 모습을 잘 간직해 온 편이다.

일제강점기 일제는 지금의 설법전 자리인 요사체를 경찰지서로 만들었다.

 

남장사에는 보광전을 중심으로 설법전과 극락보전, 교남강당이, 주위에 영산전, 금륜전, 진영각 등이 있다.

진영각에는 조사진영 12폭이 봉안되어 있다.

부속 암자로는 관음선원과 중궁암이 있다.

 

 

 

 

쌍계사에 있는 진감선사 大空塔碑(국보 제47호)는

진진성여왕 1년(887)에 세웠는데 현재 비빋침 · 비신 · 비머리 모두 온전히 남아있다.

 

전체 높이가 3.63m이다.

신라 말기 부도 양식에 따라 귀부는 용머리로 만들었다. 생김이 부자연스럽고 목도 짧다. 등에는 큼직한 육각 귀갑문을 둘렀고, 네발은 작은 편이다. 등 중앙 비신받침 옆에 구름무늬가 조각되었으며 윗면에는 비신을 받치는 굄이 조각되었다.

비문은 최치원이 짓고 쓴 것으로 만수산 성주사 낭혜화상 부도비, 초월산의 대숭복사비, 희양산의 봉암사 지증대사 부도비와 더불어 四山碑銘의 하나이다. 모두 2,417자의 해서체 글씨가 2cm 정도의 크기로 한 자 한 자 짜임새 있게 새겨져 있는데, 자의 운과 율에도 고저장단이 화려하게 어우러져 신품이라는 평을 받는다.

비신의 손상이 커서 쇠틀로 겨우 모양이 유지되고 있으며 글씨의 마멸도 심해 내용을 읽을 수 없으나 영조 1년(1725)에 전문을 목판에 옮겨 새긴 것이 보존되어 있다.

1686년 8월 17일 이곳을 찾은 丁時翰(1625~1707)은 그의 기행문 <山中日記>에서,

“篆書가 불에 맞아 상한 곳이 있어 얼마 안가서 떨어져 나갈 것 같아 안타깝다”고 했다.

바받침은 산모양으로 운룡문이 힘차게 조각되었으며 앞면 가운데 “海東故眞鑑禪師碑”라는 전서체 제액이 쓰여있다.

꼭대기에는 앙화와 보주를 얹었다.

 

 

진감선사 大空塔碑(국보 제47호)

진감선사 大空塔碑 비받침[龜趺]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면 당나라의 영향으로 거북 모양의 비빋침을 받치고, 지붕돌로 이무기를 새긴 비머리[螭首]를 갖추는 형식으로 변한다.

9C에 들어오면 거북 등의 비신받침이 훌쩍 높아지면서 거북 머리가 여의주를 문 용머리로 바뀌고, 비머리는 직사각형에 가깝게 변화한다.

이런 형식은 고려 초까지 유행한다.
 

 

 

진감국사 진영/ 상주 남장사 소장


 

 

※ 일주문을 지나면 극락보전 영역,

그 위에 보광전 영역이 있어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부속 암자도 여럿 있는데, 관음선원이 가장 중요한 곳이다.

 

 

남장사 일주문

 

 

남장사 삼층석탑

 

 

* 극락보전은 1610년에 새로 지어 그때까지 금당이었던 무량전으로부터 본전의 지위를 물려받았다.

본디의 극락보전 건물은 1635년 불탔고, 지금 건물은 1776년에 새로 지어 1856년에 중수한 것이다.

정면, 측면 3칸의 맞배지붕집이다.

정면의 칸 사이가 넓어 직사각형을 이루고 있다. 조선 중기 건물의 장중함을 지니고 있다.

 

안에는 건칠 아미타불 좌상과 좌우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협시하고 있다.

업경대 두 점이 있다.

1701년에 그린 감로왕탱과 1741년에 그린 아미타불 후불탱화가 있다.

아미타후불탱화는 본존과 보살들의 두광이 강한 초록색으로 칠해져 있어서 매우 강렬한 인상을 주며 비파를 타고있는 사천왕상의 모습은 아주 섬세한 정밀묘사이어서 강약이 조화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또 이절에는 1788년에 그린 거대한 괘불탱화, 1790년에 그린 영산전의 16존상 탱화, 나옹화상이 조성했다고 전하는 옥석십륙나한상이 있다.

전각 군데군데의 벽화에는 토끼와 거북, 도깨비 얼굴, 이태백이 고래를 타고 하늘로 오르는 모습, 혜가가 달마대사에게 제자로 받아주기를 청하는 모습, 민화풍의 물고기 등이 그려져 있다.

 

남장사 극락보전/ 사진 아이해피

 

 

※ 극락보전 왼쪽 돌계단을 올라가면 삼문이 나오고,

삼문을 지나면 원래 본전이었던 보광전이 나온다.

남장사의 본전이었을 때는 무량전이었으므로 아미타불을 모셨을 것이다.

그러나 새 본전으로 극락보전을 짓자 보광전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비로자나불을 모시고 있다.

 

 

* 보광전 철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990호)은 고려 공민왕때 懶翁화상(1320~1376)이 조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상주에 관한 기록인 <상산지>에 병란이나 심한 가뭄이 닥칠 때에는 천년이나 된 철불이 있어 땀을 흘린다고 했다.

높이 1.33m의 등신대 좌상이다.

 

나발의 머리에는 큼직한 육계가 있다. 상호는 미려하며 가늘게 뜬 눈에는 그다지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코와 입술 등은 단아하게 조각되었다. 두 귀는 거의 어깨까지 길게 내려져서 목에 돌려진 삼도와 함께 원만한 얼굴과 잘 어울리어 위엄이 있어 보이면서도 자비로운 인상이다.

통견의 법의는 양팔에 걸쳐서 부드럽게 드리워져 양 무릎을 덮었고, 옷자락은 중앙부로 흘러내린다.

배꼽 앞에는 의대가 조각되어 있다. 결가부좌한 오른발은 왼쪽 무릎 위에 있고 왼발은 드러나지 않았다.

수인은 비로자나불의 지권인이다.

예로부터 오른손을 위로하고 왼손을 그 밑에 두는 것이 정상인데, 이 지권인은 일반적인 경우와 반대이다.

반대로 하는 현상은 통일신라 하대부터 밀교의 영향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여 고려시대에도 간혹 나타난다.

 

* 보광전 목각탱(보물 제922호)

길죽한 나무 7장을 잇대고 위쪽으로 1장을 덧대어 모두 8장의 목판에 像들을 牛肉彫(목판 두께의 반만 조각)로 돋을새김을 하고 금분을 입혔다. 테두리는 액자처럼 띠를 둘렀다.

높이는 226cm 폭 236cm 두께는 12cm이다.

 

중심부 가운데의 雲上座는 단엽 앙련이 중첩된 연화좌이다. 연화대좌에는 아래에서 솟은 연꽃 등 많은 문양을 조각하였다.

연화좌에는 결가부좌하고 설법인을 한 아미타불이 조각되었고, 뒤에는 거신화염광배가 있다. 좌우에는 화관을 쓴 관세음, 대세지를 비롯하여 각각 3줄로 1줄에 4구씩 보살상, 그 주위로 비천과 나한상 10구, 사천왕 등 모구 24구를 새겼다.

위쪽에는 아미타불의 두광에서 솟은 구름이 피어오르면서 두 줄기로 갈라져 천상계를 구획하고 비천상을 받들고 있다. 받침 부분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고, 像들 사이는 보상화, 연화무늬, 연봉 등으로 장식하였다.

보살들이 쓴 화관은 붉은색과 녹색을 따로 칠해 매우 화려하다.

이런 화려함은 조선 후기 새로이 일어나는 불교의 융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맨 아래 사천왕상은 개금을 하지 않았다. 무섭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사천왕상의 표정이 우는 듯하여, 전체적으로 위엄을 갖추기보다는 친근한 인상이다.

<普光殿 改金佛事因緣錄>에 따르면 1928년에 개금하였다.

 

현재 남아있는 목각탱으로는 예천 용문사 목각탱(보물 제989호),

남원 실상사 약수암 목조탱화(보물 제421호),

문경 대승사의 목각탱(보물 제575호) 등이 있다.

용문사 목각탱은 제작연대가 조선 제19대 숙종 10년(1684), 실상상 약수암의 목조탱화는 1782년으로 확실히 알고 있다.

이곳의 목각탱은 상들의 배치나 조각수법 등으로 보아 실상사 약수암의 목각탱과는 비교할 수 없고 대승사의 목각탱과 비교해 볼 수 있다.

대승사의 목각탱이 19C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므로 이곳의 목각탱 역시 19C에 조성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런 목각후불탱은 대부분 경상북도 북부 지역에 있다. 조선 후기 이 지역에 일어났던 어떤 독특한 불교문화 현상으로 생각된다.

 

 

보광전 철조비로자나불좌상과 목각탱

 

 

* 관음전 관세음보살상과 목각탱(보물 제923호)

5장의 목판을 이어붙여 중심부를 이루고 윗부분과 아래부분에 각각 1장씩 더 붙여 모두 7장의 판목에 우육조로 새겼다.

크기는 가로 195cm, 세로 162cm이다.

蓮池를 상징하는 밑부분에는 연잎과 연봉, 연줄기 등을 강한 릴리프로 조각하고 중앙 중심부에는 이중 연화대좌 위에 정면을 향하고 결가부좌한 아미타불을 봉안하였다. 아미타불은 설법인을 결하였고 뒷면은 거신화염문 광배로 장식하였다.

본존불 왼쪽 윗단에는 연지에서 솟아오른 연화대좌 위에 관세음보살상이, 오른쪽에는 역시 연지에서 솟은 연화대상에 대세지보살이 앉아있다. 이 두 보살상은 좌상임에도 큰 연화대좌에 앉았기 때문에 다른 여러 상보다 커 보인다.

윗단의 두 보살 옆으로 아난과 가섭이 합장하고 앉아있다.

아랫단에는 보현, 문수가 가운데 앉아있어 네 보살이 본존불을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다. 바깥쪽에는 사천왕이 지키고 있다.

 

아래쪽으로는 큰 연꽃이 활짝 피어 부처와 보살들을 받치고 있는 모습, 위에는 천상의 구름이 어우러진 가운데 타방 부처들의 모습을 새겼다.

사천왕들이 몸을 구부리거나 다소 자유로운 자세를 취함으로 자연스러운 율동감과 생동감을 느끼게 한다. 연지에서 솟은 연잎과 연줄기가 여러 상들 사이를 꾸미고 있는 점은 보광전 목각탱과 같은 양식이다.

 

<尙州露岳山觀音殿 佛像及後佛木幀 改金記>에,

“…… 佛像及後佛木幀 乃高麗懶翁禪師親成之佛幀也 去嘉慶己卯自天柱山想蓮庵移安于此歲旣久金彩……”라는 말이 있어 본디 이 관세음보살상과 후불 목각탱은 천주산 북장사의 상련암에 있던 것을 가경 기묘년 곧 조선 제23대 순조 19년(1819)에 이곳으로 옮긴 것을 알 수 있다.

 

나옹화상의 조성이라는 말은 믿을 수 없다. <天柱山北長寺事蹟記>에 “木幀佛像甲戌年造成化主僧凞善也 自想蓮庵移安于右殿”이란 말이 있는 것으로 보아 용문사 목각탱을 범본으로 하여 숙종 20년(1694) 조성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관음전은 1668년에 창건되었다. 이 목각탱은 용문사 목각탱과 함께 우리나라 목각탱의 수작으로 꼽힌다.

 

관음전 목객탱

 

 

 

보광전 앞 기둥에 걸린 柱聯,

靑山不墨天年屛 청산은 먹으로 그리지 아니하여도 천년의 병풍이요,

流水無絃萬古琴 흐르는 물은 줄이 없어도 만고에 거문고더라.

千江流水千江月 천강에 물이 흐르면 천강에 달이요,

萬里無雲萬里天 만리에 구름이 없으면 만리에 하늘이더라.

 

 

 

상주 ‘MRF 이야기길’은 낙동강, 이안천, 상주시내 등 3개 권역에 13개 코스로 구성되어 있다.

MRF란 산길(Mountain Road), 강길(River Road), 들길(Field Road)을 걷는 코스다. 

MRF 이야기길에는 산길, 강(하천)길, 들길이 포함되어 있고, 원점 회귀가 가능하면서 해발 200~300m로 낮은 산길로 이루어져 있다.   

또 이 길은 걷는 것만 아니라 상주를 상징하는 자전거를 타고 여행할 수 있게 구성되어 있다. 

 

 

 

 

1. 숨소리길은 상주 ‘MRF 이야기길’ 4코스다.

 

낙동강 한우촌에서 시작하여 ~ 나각산 등산롤 따라~ 나각산(240m)~ 소라바위~ 낙동강변길~ 찬물내기~

낙동강 한우촌으로 돌아오는 7.7km의 도보길이다.

 

 

 

마애보살좌상

의성군 낙동강변 낙단보 통합관리센터 부지를 조성하는 과정에,

고려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마애보살상이 땅속에서 발견됐다.

가로 550㎝, 세로 350㎝쯤 되는 화강암 벽면에 새겼다.

마애보살좌상은 높이 220㎝, 너비 157㎝, 얼굴 길이 32㎝, 어깨너비 72㎝, 무릎 너비 110㎝,

대좌 너비와 높이 157㎝×57㎝ 규모다.

머리에는 산들이 중첩된 모양의 三山形 보관을 쓰고 있고, 눈과 입술이 도드라지게 표현됐다.

문화재청은,

연약하게 처리한 팔과 옷의 형식, 평면적이면서도 도식적인 연화대좌가 고려 전기의 불상 양식의 일면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한겨레 신문>, 2010년 10월 22일.

 

 

2. 천년길은 상주 ‘MRF 이야기길’ 11코스다. 

북천시민공원에서 시작하여~ 연원교~ 서보다리~ 너라골마을~ 남장교~ 남장사~ 連水庵~ 사치미지~ 구서원~ 연원교를 거쳐,

북천시민공원으로 돌아오는 16km길이다.

 

 

 

 

 

영남이란 말은 고려 제6대 성종(981~997 제위) 14년(995) 10도제를 실시할 때,

조령과 죽령의 남쪽에 위치한 상주 지역을 嶺南道로 지칭하면서 처음 사용하였다.

 

지금처럼 경상남북도를 가리키는 의미로 쓴 것은 세종실록 세종12년(1430) 1월 22일 기사에 처음 등장한다.

 

영남이라는 말과 함께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 영동인데 지금의 경주 지역을 嶺東道로 불렀다.

영남도는 남해로 흘러드는 낙동강 수계인데 영동도은 동해로 흘러드는 형산강 수계이다.

지금의 진주지역은 산남도라 했는데, 소백산 남쪽에 위치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

산남도는 영남도의 남쪽으로 낙동강 하류 수계에 해당된다.

 

상주시에는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그 서쪽에 낙동면, 동쪽에 단밀면이 있다.

이 두 지역을 연결해주던 곳이 낙동나루였고, 지금은 나루터 위로 25번 국도가 지나면서 낙단교가 놓였다. 낙동나루는 조선시대 한양에서 조령을 넘어 동래로 가는 영남대로의 중요 나루였고,

낙동장터는 매우 번성했다.

 

상주는 한때 낙양으로 불린 적이 있다. 지금 낙양동이란 마을이 있다.

낙동강은 상주의 옛 이름인 낙양의 동쪽에 있는 강이란 뜻이다.

 

 

지금의 전라남북도 지방을 호남이라 부르는 것은 고려말이나 조선초이다.

국가에서 편찬한 사서에 호남이란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세종실록 세종 29년(1447) 11월 6일 기사이다.

호남은 호수의 남쪽이란 뜻인데, 호수에 대해서는 벽골제라는 설과 금강이라는 설이 있다.

이긍익(1736~1806)은 <연려실기술> 제16권 지리전고에서 “벽골제호를 경계로 전라도를 호남, 충청도를 호서라 부른다”고 하였다.



 

북천시민공원~(1.7km, 25분)~연원교~(1.7km, 25분)~서보다리(0.5km, 5분)~너라골마을(1.0km, 10분)~남장교(3.1km, 45분)~남장사~(2.1km, 35분)~연수암~(1.4km, 20분)~사치미지~(1.5km, 25분)~구서원~(1.3km, 20분)~연원교(1.7km, 25분)~북천시민공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