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시집

안도현/ 찔레꽃, 문경 옛길, 울진 금강송을 노래함, 가을 엽서

추연욱 2013. 2. 11. 21:27

 

찔레꽃

 

안도현

 

봄비가 초록의 허리를 몰래 만지려다가

그만 찔레 가시에 찔렸다

 

봄비는 하얗게 질렸다 찔레꽃이 피었다.

 

자책, 자책하며 봄비는

무려 오백 리를 걸어갔다

 

안도현 시집, <북향>, 문학동네, 2012.

 

 

문경 옛길

 

안도현

 

가파른 벼랑 위에 길이. 겨우 있다

 

나는 이 옛길을 걸으며 짚어보았던 것이다

당신이 없는 발소리 위에 내 발소리를 들여놓아보며 얼마나 오래 발소리가 쌓여야 발자국이 되고 얼마나 많은 발자국이 쌓여야 조붓한 길이 되는지

 

그해 겨울 당신이 북쪽으로 떠나고

해마다 눈발이 벼랑 끝에 서서 울었던 것은.

 

이 길이. 벼랑의 감지 못한 눈꺼풀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해보았던 것이다 

 

안도현 시집, <북향>, 문학동네, 2012.

 

 

 

울진 금강송을 노래함

 

안도현

 

소나무의 정부(政府)가 어디 있을까?

소나무의 궁궐이 어디 있을까?

묻지 말고. 경상북도 울진군 서면 소광리로 가자

아침에 한 나무가 일어서서 하늘을 떠받치면

또 한 나무가 일어서고 그러면

또 한 나무가 따라 일어서서

하늘지붕의 기둥이 되는

금강송의 나라.

여기에서 누가 누구를 통치하는가?

여기에서 누가 누구에게 세금을 내는가?

묻지 말고. 서로가 서로를 다스리며 그윽하게 바라보자

지금은 햇빛의 아랫도리 쨍쨍해지고

백두대간의 능선이 꿈틀거리는 때.

보이지 않는 소나무 몸속의 무늬가 

만백성의 삶의 향기가 되어 퍼지는 때.

우리 울진 금강송 숲에서

한 마리 짐승이 되어 크렁크렁 울자

 

안도현 시집, <북향>, 문학동네,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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