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시집

오세영/ 먼 후일, 이별의 날에

추연욱 2012. 10. 9. 10:06

 

 

 

 

먼 후일

 

세영

 

 

먼 항구에 배를 대듯이

나 이제 아무데서나

쉬어야겠다.

동백꽃 없어도 좋으리,

해당화 없어도 좋으리,

흐린 수평선 너머 아득한 봄 하늘 다시

바라보지 않아도 된다면

먼 항구에 배를 대듯이,

나 이제 아무나와

그리움 풀어야겠다.

갈매기 없어도 좋으리,

동박새 없어도 좋으리,

은빛 가물거리는 파도 너머 지는 노을 다시

바라보지 않아도 된다면

가까운 포구가 아니라

먼 항구에 배를 대듯이,

먼 후일 먼 하늘에 배를 대듯이.

 

 

이별의 날에

 

오세영

 

이제는 붙들지 않을란다

너는 복사꽃처럼 져서

저무는 봄 강물 위에 하염 없이 날려도 좋다, 아니면

어느 이별의 날에

네 뺨을 타고 흐르던 눈물의 흔적처럼

고운 아지랑이 되어 푸른 하늘을 아른거려도 좋다.

갇혀 있는 영원은 영원이 아니므로

금속 테에 갇힌 보석 또한

진정한 보석이 아닌 것

아무래도

네 손가락에 끼워준 반지에는

영원이 있을 성 싶지 않다, 그러므로

네 찬란한 금강석의 테두리에 우리 더 이상 서로를

가두지 말자.

이제 붙들지 않을란다.

너는 복사꽃처럼 져서

저무는 봄 강물 위에 하롱 하롱 날려도 좋다, 아니면

어느 이별의 날에

네 뺨을 적시던 눈물의 흔적처럼

고운 아지랑이 되어 푸른 하늘을 어른거려도 좋다.

 

 

사랑

 

오세영

 

잠들지 못하는 건

파도다. 부서지며 한가지로

키워내는 외로움,

잠들지 못하는 건

바람이다. 꺼지면서 한가지로

타오르는 빛,

잠들지 못하는 건 별이다. 빛나면서 한가지로

지켜내는 어두움.

잠들지 못하는 건

사랑이다. 끝끝내 목숨을

거부하는 칼.

 

너, 없음으로

 

오세영

 

너 없음으로

나 있음이 아니어라.

 

너로 하여 이 세상 밝아오듯

너로 하여 이 세상 차오르듯

 

홀로 있음은 이미

있음이 아니어라.

 

이승의 강변 바람도 많고

풀꽃은 어우러져 피었더라만

흐르는 것, 어이 바람과 꽃 뿐이랴.

 

흘러 흘러 남는 것은 그리움,

아, 살아있음의 이 막막함이여.

 

홀로 있음으로 이미

있음이 아니어라.

 

 

겨울 들녘에 서서

 

오세영

 

사랑으로 괴로운 사람은

한번쯤

겨울 들녘에 가 볼 일이다.

빈 공간의 충만

아낌없이 주는 자의 기쁨이

거기 있다.

가을걷이가 끝난 논에

떨어진 낱말 몇 개.

 

이별을 슬퍼하는 사람은

한번쯤

겨울 들녘에 가 볼 일이다

지상의 만남은

하늘에서 영원케 하는 자의 안식이

거기 있다.

먼 별을 우러르는

둠벙의 눈빛.

 

그리움으로 아픈 사람은

한번쯤

겨울 들녘에 가 볼 일이다.

너를 지킨다는 것은 곧 나를 지킨다는 것,

홀로 있음으로 오히려 더불어 있게 된 자의 성찰이

거기 있다.

빈 들을 쓸쓸히 지키는 논둑의 저

허수아비.

 

2002, 잠들지 못하는 건 사랑이다.

 

 

바닷가에서

 

오세영

 

사는 길이 높고 가파르거든

바닷가

하얗게 부서지는 바다를 보아라.

아래로 아래로 흐르는 물이

하나 되어 가득히 차오르는 수평선,

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자가 얻은 평안이 거기 있다.

 

사는 길이 어둡고 막막하거든

바닷가

아득히 지는 일몰을 보아라.

어둠 속에서 어둠 속으로 고이는 빛이

마침내 밝히는 여명,

스스로 자신을 포기하는 자가 얻은 충족이

거기 있다.

 

사는 길이 슬프고 외롭거든

바닷가

가물가물 멀리 떠있는 섬을 보아라.

홀로 견디는 것은 순결한 것,

멀리 있는 것은 아름다운 것,

스스로 자신을 감내하는 자의 의지가

거기 있다.

 

오세영 시선, <하늘의 시>, 황금복, 2003.

 

 

 

 

 

 

 

연꽃

 

오세영(1942~)

 

불이 물 속에서도 타오를 수

있다는 것은

연꽃을 보면 안다.

물로 타오르는 차가운 불,

불은 순간을 살지만

물은 영원을 산다.

사랑의 길이 어두워

누군가 육신을 태워 불 밝히려는 자 있거든

한 송이 연꽃을 보여 주어라.

달아오르는 육신과 육신이 저지르는

불이 아니라

싸늘한 눈빛과 눈빛이 밝히는

불,

연꽃은 왜 항상 잔잔한 파문만을

수면에 그려 놓는지를

 

오세영 시선, <하늘의 시>, 황금복, 2003.

 

 

 

 

 

'여백 > 시집'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밥그릇/ 고영민  (0) 2013.02.10
겨울나무를 보며/ 박재삼  (0) 2012.12.14
김용댁/ 섬진강 3. 11, 15  (0) 2012.10.05
김광섭/ 길, 추상, 비 개인 여름 아침  (0) 2012.09.20
變身, 꽃, 시인/ 김광섭  (0) 2012.09.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