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문화유산 답사자료

종남산 송광사

추연욱 2012. 10. 8. 17:06

 

■ 송광사

 

 

송광사는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읍 대흥리 終南山 기슭에 있다.

 

송광사는 전라남도 승주군에 있는 불보대찰 송광사와 이름도 글짜도 같다.

승주의 송광사의 "松" 자를 파자하면 "十八公"이 된다. 이곳에서 18명의 國師가 나온다고 한다.

그런데 현재까지 16명만 나왔다.

그런 의미에서 송광사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곳 완주의 송광사는 무슨 뜻인지는 일기 어렵다.

 

종남산은 밀양에도 있다. 두곳의 종남산 글짜도 똑 같다.

"남산"이란 이름의 산으로 마지막이란 뜻이다. "남산 중에 최고다., 그러니 더 이상 이곳 말고는 남산을 논하지 말라"란 뜻이 들어있다. 

그래서 아마도 합천 가야산 옆에 "남산제일봉"이란 이름도 만들어졌는가 보다.

 

각설하고,

 

<松廣寺 開倉碑>에 “옛날 고려의 보조국사 知訥(1158~1210)이 이곳을 지나다가 靈泉의 물을 마신 뒤, 기이하게 여겨 뒷날 큰절을 세울 수 있는 곳이라 판단하고 샘 주위에 돌을 쌓아 메워두고 昇平府(지금의 순천시)의 조계산으로 옮겨가서 송광사를 짓고 머물렀다. 뒷날 衣鉢을 전하면서 그 문도들에게 이르기를 종남산의 돌을 메워둔 곳은 후일 반드시 덕이 높은 스님이 도량을 열어 길이 번창하는 터전이 되리라 하였다. 그런데 수백 년이 지나도록 절이 열리지 못했으니 실로 기다리는 바가 있기 때문에 응호, 승명, 운정, 덕림, 득순, 홍신 스님 등이 서로 마음으로 맹세하되 보조스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여 정성을 다해 募緣하니 뭇 사람들이 두 그림자 쫓듯 하였다. 이에 天啓 임술년(1622) 터를 보고 방위를 가려 땅을 고르고 나무를 베어내며 산과 들을 깎아 가람을 이룩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그러므로 송광사는 조선 후기에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비의 이름이 개창비인데다가 비를 세운 해도 창건 불사가 마무리 된 1636년이니 착오가 있을 리 없다.

 

절에서 전해오는 이야기는 다르다.

신라 경문왕 7년(867)에 가지산문의 제3조 普照 體澄(804~880)이 창건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런 기록이나 유물이 전혀 없다.

아마 체징과 지눌의 호가 같고, 여기에 자기 절을 역사를 가능한 한 올려보려는 생각에 이와같은 주장이 제기되었을 것이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명부전, 응진전, 약사전, 관음전, 칠성각, 십자각, 천왕문, 금강문, 일주문 등이 있다.

 

송광사는 널찍한 대지 위에 펼쳐진 평지가람이다.

평지가람은 일주문 앞에 서면 전체가 눈에 들어온다. 일주문, 금강문, 천왕문, 대웅전의 중심축이 일직선상에 있어 이들 각 건물들의 문들이 틀을 만들며 점차 작아지다 열어놓은 대웅전 어칸 안의 어둠 속으로 빨려든다.

 

* 일주문(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호)은 원래 만수교 앞에 있던 것을, 1814년 조계교가 있었던 곳으로 옮겼다가,

1944년 克仁이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다포계 맞배지붕이다. 조선조 맞배지붕은 시대가 내려오면 공포의 생김새가 나약해지는 경향이 있다. 이 경우는 정도가 심해 섬약하여 가볍게 보이고, 날아오를 듯하다.

 

 

 

금강문

 

 

 

* 금강문을 지나 사천왕문을 들어서면 흙으로 빚은 소조 사천왕상이 있다.

이 사천왕상(보물 제1255호-1997년)은 제작연대가 분명하다. 오른손으로 당을 잡고 왼손 위에는 보탑을 올려놓은 광목천왕이 쓰고 있는 보관의 윗면 끝자락에 ‘順治己丑六年七月日畢’이라는 먹글씨가 남아있어 1649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 범종루(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3호)는 건물의 평면이 十자 모양으로 된 2층 누각이다.

이런 양식은 옛건물에서 보기 드문 예이다.

이 십자각 안에는 1716년(숙종 42) 주조한 범종, 법고, 목어 등이 있다.

 

 

 

 

2004년 2월 7일.

 

 

 

 

 

* 대웅전(보물 제1243호-1996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겹처마 다포계 팔작집이다.

처음 세울 대는 2층이었으나 중건하면서 단층으로 고쳐지었다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처마가 깊지 않아 집 전체의 조화가 잘 맞지 않다. 또 정면의 창방과 상방 사이의 공간을 벽면으로 처리하고 각각의 칸을 균등하게 셋으로 나눈 다음 칸칸이 벽화를 채운 것은 일반적인 방식이 아니다. 보통은 여기에 빗살무늬 교창을 둔다.  

 

 

 

 

천장은 가운데 3칸은 우물반자를 치고 나머지 외진부는 경사진 빗천장을 꾸몄다.

불상 위 천장에는 간단한 운궁형 보개를 씌웠으며, 우물천장에는 칸마다 돌출된 용, 하늘을 나는 동자, 반자틀에 붙인 갖은 물고기․게․거북 혹은 자라 따위 바다짐승 등 온갖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어디론가 바삐 줄지어 가는 자라, 새끼를 등에 업고 네 활개를 치는 거북도 있다.

 

빗천장에는 악기를 연주하거나 춤추는 모습의 비천도 20여 장면이 천장화로 그려져 있다.

19세기 중건 당시 완성된 것들로 생각된다.

 

 

 


 

대웅전 중앙에 석가, 동쪽에 약사, 서쪽에 아미타여래의 석가삼존불(보물 제1243호)이 모셨다.

흙으로 만든 이 불상들은 전체높이 565cm, 530cm, 530cm, 불신 높이가 543, 510, 510cm로 국내 소조불상으로는 가장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공간 활용이 매우 비합리적이다.

 

 

 

 

도난사건이 있어 복장유물(보물 제1274호)이 수습되었다.

세 불상에 똑같은 내용의 <佛像造成記>가 들어있었다. 내용은 “以此彫像功德奉爲 主上殿下壽萬歲 王妃殿下壽齊年 世子邸下壽千秋 速還國 鳳林大君增福壽亦爲還國……之願 이 불상을 만드는 공덕으로 주상전하는 목숨이 만세토록 이어지고 왕비전하도 목숨을 그와 같이 누리시며, 세자저하의 목숨은 천년토록 다함이 없고 속히 본국으로 돌아오시며 봉림대군께서는 복과 수명이 늘어나고 또한 환국하시기를……원하옵니다.”란 말과,

조성기 첫머리에 崇禎 14년과 崇德 6년(1641)이라는 명과 청의 연호를 나란히 기록하고 있다.

 

수미단 위에는 殿牌(또는 願牌)라 불리는 목패가 있다. 왕, 왕비, 왕세자의 만수무강을 비는 축원패이다.

셋 모두 2m가 넘어 전패로는 가장 큰 편에 속한다. 앞면에는 화염을 날리며 구름 속에서 꿈틀거리는 용무늬가 복잡하게 전체를 뒤덮고 있고, 뒷면에는 인조때 만들었다는 것과 정조때(1792)에 수리하였다는 내용의 먹글씨가 남아있다.

 

전패


삼존불 뒤에는1857년 조성된 벽지불탱화 1점과 1861년 조성한 시왕탱화 1점이 봉안되어 있다.

 

석가, 약사, 아미타 삼세불상의 최초의 예이다.

대웅전에는 원래 석가삼존이 봉안되는 것이 원칙이나 조선 후기의 큰 대웅전에는 석가 좌우에 약사와 아미타불이 봉안되는 형식이 유행한다.

수명장수와 극락왕생에 대한 국민의 열망 때문에 석가불에 약사와 아미타불을 배치했을 것이다.

석가정토와 약사정토, 아미타정토 세 정토의 세계는 시 ․ 공간적인 삼세불 세계를 것으로 이런 형식의 최초이다.

 

승군 대장이었던 벽암 각성 이하 전라도 총섭 승군 계통이 송광사를 창건하고 이 삼세불을 조성했다.

조선 후기 불상양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조선후기 제1기(인종~숙종기) 불상이다.

 

법신 · 보신 · 화신의 삼신불 사상은 화엄종 성립 때부터 등장한 것으로 보이지만 법신 비로자나, 보신 노사나, 화신 석가의 삼신불이 조형화 된 것은 중국의 경우 당나라 중기인 9C이후이며 우리나라는 나말여초경이다.

징관은 천태의 圓融三諦 사상을 채용하여 三聖원융관을 수립한 이래 비로자나 · 문수 · 보현의 삼존불 불신관을 확립했다.

이후 또 천태의 삼신불관을 받아들인데서 유래하여 화엄불신관으로 정착되었다.

천태종에서는 석가 위주의 삼불사상이 핵심이다.

 

9C 후반 삼신불관은 조형화되어 널리 인정된다.

982년 금강산 장안사의 비로자나 노사나 석가 삼신불을 대광명전, 대적광전 등에 나란히 봉안했다.

해인사, 화엄사, 통도사, 대흥사 등 화엄종파절에 봉안했다.

 

천태종은 삼불 또는 삼세불을 봉안했다. 남산 윤을곡에서 보듯이 통일신라 때부터 석가 약사 아미타 또는 미륵을 봉안하기 시작했다. 이런 삼세불은 조선시대부터 성행한다.

 

조선 초 태종, 세종 때 불교가 통합된 이후 삼신불과 삼세불을 한 전각에 모두 봉안하는 경우도 있다.

화엄과 천태 · 법화 사상이 합쳐져 나타난 조선시대의 특징이다. 이 경우 5불, 4불, 3불 등 다양한 형식이 전개된다.

삼신불과 삼세불 6불에 공통되는 두 석가불 가운데 1존을 제거하면 5불이 되는데, 5불 형식을 봉안하기도 하고 삼신불의 본존과 삼세불의 협시불을 합치는 형식도 유행한다. 이런 형식은 화엄종 내지 화엄사상이 지배적인 사원에서 주로 시행되었던 것 같다.

 

1. 화엄사 대웅전, 통도사 대광명전 삼신불과 법신 비로자나가 중앙 지권인 불형이고, 왼쪽의 보신 노사나는 보관을 쓴 보살형이다. 아미타 중품중생인이다. 오른쪽 석가는 불형으로 시무외 여원, 항마촉지이다.

2. 삼세불 가운데 법신만 불형이고 좌우는 보살형이다.

3. 선운사, 기림사 - 삼신 삼세불이 다양한 형식으로 구성되었다. 좌우 불상이 노사나불과 석가불 삼신불과 삼세불의 약사 아미타불 등 5불 또는 삼신불의 본존과 삼세불의 액사 아미타불 등 3불 등으로 구성된다.

 

이런 형식은 가장 이른 조선 전기의 특징이다. 삼신 삼세불상은 화엄종계 사찰의 대광명전(대적광전과 대광전) 등 大 字가 붙는 비로자나불상 계의 대형 전각에 봉안되는 것이 원칙이다. 삼신삼세불을 함께 봉안할 경우 대광대웅전이라 하기도 하고 그냥 대광명전 또는 대웅전으로 간략화시키기도 한다. 대광대웅전이 맞을 것이다. 삼신 삼세불의 복합 신앙과 불상 봉안은 강제적인 불교 통합과 관련있는 조선적 현상이다.

기림사 대적광전은 법신 비로자나, 좌 약사 우 아미타 삼신불과 삼신불을 최소한의 3불로 간략화시키는 방법으로 모색되었을 것이다. 조선시대 삼신불과 삼세불을 함께 봉안하는 신앙 경향이 나타나는데, 한 전각 안에 이들을 모두 봉안하기 힘들기 때문에 삼신 삼세불에 공통되는 두 석가불 가운데 1불을 제외하여 5불로 하거나 4불 3불로 구성되는 최소 단위로 본존불은 삼신불의 본존 비로자나, 좌우불은 삼세의 약사, 아미타를 봉안했다. (문명대, 삼매와 평담미, 예경, 2003. 360쪽)

 

 

송광사 절 입구에는 각성, 虎一, 秋溪 有文(1614~1689), 無竟 子秀(1664~1737),

自察, 西峰, 性心, 寒溪 등 큰스님 20인의 부도가 있다.

또 1636년 申翊聖이 편찬한 송광사개창비를 비롯하여 목각칠층다보탑판, 조계교비, 석조 등이 있다.

 

※ 마수교에서 송광사에 이르는 2.5km 구간은 길 양옆으로 해묵은 벗나무가 우거져 있다.

봄에는 만개한 벗꽃으로 터널을 이루고 가을에는 단풍터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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