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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6월 20일/ 수요일] 경주시내 문화유산 답사 2

추연욱 2012. 6. 19. 20:01

 

[부산/ 6월 20일/ 수요일] 경주시내 문화유산 답사 2

 

 

 경주역

 

 

 

노서리고분군을 지나며 

 
보리수, 미산, 뿌리, 약수터, 청죽, 꿈이지, 쥬니, 푸른불루, 풍금, 영아,
아해, 소정네, 은산, 길위에서서, 수여니, 석윤, 바른척추사랑, 화산, 유심초, 찌릉소,
물찬제비, 별사모, 자리, 해파랑, 풀잎이, 연이, 워크뷰, 레이디윤, 빛들, 는개,
무등록, 달마루,
이렇게 32명입니다.

 

 

어제 인천은 33.8℃, 108년만에 가장 높이 올랐다고 한다.

서울은 33.5℃의 불볓더위,

영동지방은 20℃정도로 서늘하다.

 

 

경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노서동고분군으로 간다. 10시 40분. 

 

 

 

노서동고분군에서 

 

 

 

 

 

 

 

 

 

 

 

 

 

길가에 토우들을 돌로 조각하여 세워두었다. 

 

 

 

오늘 첫 답사지, 경주문화원, 11시 10분.

 

경주문화원 주변은 고려, 조선시대 경주관아가 있던 곳이다.

 

 

 

 

 

 

300살쯤 되는 산수유나무.

경주에 가장 먼저 봄을 전한다는 나무다.

이 사진은 금년 3월 21일

 


 스웨덴의 황태자 Oscar Fredrik Wilhelm Olaf Gustaf Adolf(1882~1973)


1926년 당시 일본식민지인 조선에 왔다.

서봉총 발굴 금관을 들어올리고,

박물관이 있던 이곳에 기념식수를 하였다.  

부왕이 죽고 스웨덴 왕(1950~73 재위)이 되었다.

 

 

 

 

 

 

 

 


 

 

 

 

 

 

 

향토문화연구소 앞마당에 있는 모과나무 

 

 

성덕대왕신종을 걸었던 옛 종각 

 

 

 

 

 

 

경주경찰서, 11시 30분.

 

 

 

 

 

 


 

 

하마비다.

 

 

집경전구기비

이 자리는 신라가 고구려, 백제를 정복하여 태평성대를 누리던 시기,

신라의 이궁으로 집경전이 있었던 곳이다.

삼국을 동일한 문무왕이 즉위식을 가졌고,

뒷날 조선태조 강헌대왕 수용(임금의 화상, 御眞)을 모셨던 곳이다.

지금 그 건물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으며 옛터엔 우리학교가 들어서 있고

조선 정조의 친필로 쓴 "集慶殿舊基"란 비석만 남아있다. 

 

 

왼쪽 나무는 500살쯤 된 회화나무다.

이 어름에 일제강점기 牛시장이 서던 곳이고,

그 옆에 '한탕'이라는 커다란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경주읍성

동쪽 성곽의 일부이다. 약 90m쯤 남아있다.

발굴된 석재들을 모아두었다.

 

 

 

 

 

 

 

 

 

 

 

 

 

 

 

 

 

 

읍성 옆 교회에 있는 나무 밑둥치다. 

 

 



 

서경사

 

 

오늘 참 운이 좋았다.

안에 들어가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서경사는 본디 일보 조동종 경주포교소였다.

그뒤 농촌지도소, 사방관리소, 해병대전우회 사무실 등 몇 차례 주인이 바뀌었다가,

지금은 박덕화(경상북도무형문화재 제28호)의 정가전수관이다.

 

서경사는 일본 에도[江戸]시대(1603~1867) 유행한 선종 양식을 따른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4칸의 규모로 정면에 6단의 계단이 둘러져 있다.

안에는 내진과 외진으로 구분해 바닥의 높이를 달리했다.

불단이 있는 내진의 천장은 우물반자, 바닥에는 다다미를 깔았다.

 

당시 건축자재를 일본에서 가지고 와서 지었다고 한다.

도리 끝 장식은 코끼리 모양을 하고 있어 우리 건축의 용이나 봉황과는 다르다.

 

일본 조동종은 1910년 국권강탈 이후 재빨리 이를 축하하는 칙서를 발표하고 축하식을 열었다고 한다. 그리고 종단에서 운영하는 조동종대학에 한국의 승려들이 유학할 길을 열어주었다.1906년에 창립된 조선불교종단 원종의 종정인 이희광은 일본의 포교 방법을 배워 조선불교를 중흥시킨다는 명문을 내세워 일본 조동종과 연합을 시도하기도 했다.

1910년을 전후한 시기, 6개의 일본종파가 한국에 설치한 포교소가 167개나 되었다. 처음에는 개항장을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나중에는 내륙 깊숙한 곳까지 진출했다. 본국의 재정적 후원을 얻어 교육사업과 빈민구제사업을 실시해 저항의식을 무력화했다.

 

1901년대 말까지 경북의 경우, 경산, 상주, 감포, 청도, 김천 등지에 이미 조동종 포교소가 설치되었는데, 정토진종은 이보다 먼저 대구와 구룡포에 진출해 있었다.

정토진종은 1914년 경주 부내 서부리에 경주포교소를 설립했는데. 지금 서경사의 주소가 서부동이라 서로 연관성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향토와 문화>, 62권, 대구은행, 2012.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28호 박덕화 정가보전회

 

 

이 건물이 문화재여서

현판을 걸지 못하게 한단다.

그래서 정가보존회 현판이 실내에 있다.

 

 

 

 

 

화랑수련원

일제강점기 경주 첫 서양식 의원이던 옛 야마구치병원 건물이다.

 

 



 

성동시장, 12시 45분. 

 

 

 

 

 

 

 

 

 

 분황사, 2시 10분.

 

 

분황사모전석탑(국보 제30호)

 

 

인왕상

동서남북에 각각 다른 자시의 인왕상이 있다.


 



 

바다가 있는 쪽(동쪽)을 지키는 물개

 

 

 

 

 

 

보광전

 

삼룡변어정

 

 

 

 

 

 

 

 

 

 

"此新羅和諍國師碑蹟"

추사 김정희가 썼다.

 

 사진/ 푸른불루

 

 

 

 

 

 

 

 

 

 

 

 

황룡사는 분황사 바로 이웃에 있다.

 

황룡사당간지주, 2시 45분.

 

 

 

 

 

 

 

황룡사 금당터

 

 

 

 

 

 

 

목탑지

 

 

 

 

 

 

 

 

황룡사를 발굴하여 찾은 석물들을 모아두었다.

 

 



 

 

 

 

사천왕상이 새겨진 팁의 몸돌

 


 


 

 

지붕돌이 하나 더 있다.

 

 

 

 

 

 

 

국립경주박물관, 3시30분.

 

숭복사지에서 가지고 온 쌍귀부

 

 

성덕대왕신종

연꽃당좌

연꽃은 모든 만물이 생성되는 창조의 모태이다.

부처, 보살, 비천도 연꽃에서 탄생한다. 연꽃에서 모든 무늬가 나온다.

 

 

비천상

사진/ 청죽 

 

 

 

 

"경덕왕은 황동 12만 근을 내놓아 그 아버지 성덕왕을 위하여 큰 종 하나를 만들려 하다가 이루지 못하고 죽으니,

그 아들 혜공대왕 대력 경술(770년) 12월에 유사에게 명하여 공장이들을 모아서 기어이 완성시켜 봉덕사에 안치했다.

이 봉덕사는 효성왕이 개원 26년 무인(738)에 그 아버지 성덕대왕의 복을 빌기 위해서 세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그 종의 명문에 '성덕대왕신종지면'이라 했다.

조산대부 전태자사의란 한림군 金弼오가 임금의 명을 받들어 종의 명을 지었으나 글이 너무 길어 여기에 싣지 못한다."

<삼국유사>, 제3권, 탑상 제4, 황룡사종, 분황사 약사, 봉덕사 종

 

 

종신 앞뒤에 명문이 있다.

앞에는 이 종은 주조한 목적, 동기, 성덕대왕의 치적, 후원자, 주조에 참여한 사람 등을 기록했고,

뒤에는 앞의 내용을 노래로 반복하였다.

 

 

 

東海之上 동해바다 위에

衆仙所藏 뭇 신선이 사는 곳

地居桃壑 땅은 복숭아 골짜기에 있고,

界接扶桑 경계는 해 뜨는 곳에 닿았네.

爰有我國 여기서 우리나라는 (이에 원)

合爲一鄕 합하여 한 고장을 이루었네.

元元聖德 어질고 성스러운 덕이

曠大彌新 대가 뻗을수록 새로워라.

妙妙淸化 오묘하고 청명한 교화여

遐而克臻 먼 곳일수록 더 잘 이르네.

將恩被遠 은혜가 멀리까지 미치어

與物霑均 모든 것을 고루 적시리라.

茂矣千葉 일천 세대에 이르도록 무성해,

安乎萬倫 만 가지 윤리가 굳건하리다. 



글을 지은 사람은 金弼奧,

翰林郞 급찬이다. 외교문서를 포함해 글쓰는 일을 두루 맡은 기관에 종사한 사람이다.

급찬은 9등급으로 육두품 직급은 하위직이다.

 

앞면 명문 첫구절에,

“무릇 지극한 도는 형상의 밖에 있어 보아도 능히 그 근원을 볼 수 없으며 大音은 천지 사이에 진동하나 들어도 그 울림을 들을 수 없습니다. 그르므로 부처님께서 隨機說法인 方便假說을 열어 진리에 깊은 이치를 관찰하신 것처럼 신종을 매달아 중생으로 하여금 一乘의 圓音인 종소리를 듣고 깨닫게 하려 합니다”

 

원음은 원효의 <대승기신론소>에

“진리의 소리가 十方에 두루하여 근기가 성숙한 정도에 따라 들리지 않은 곳이 없기 때문에 원음이라 한다”고 하였다.

 

 

 

 

 

 

 

 

 

 

 

 

 

 

 

원 안에 나무를 가운데 두고, 나무 좌우에 대칭으로 공작을 새기고,

원 밖에 연주문으로 띠를 돌렸다.

90년쯤 전에 경주 어느곳에선가 발견되었다.

이런 무늬는 사산(이란)계 무늬이다. 신라에서 그 새김기법을 도입한 것이다.

 

 

 

 

 

 

고선사터삼층석탑

덕동호로 고선사터가 수몰되자 탑을 이곳으로 옮겨 복원하였다.

 

 

야외전시장에 있는 석조물들

 

 

 

 

 

안압지관과

고고관 "X선으로 본 우리문화재" 특별전을 구경했다.

피곤하다. 고고관 복도에서 잠깐 쉰다.

 

 

 

 박물관에서 본 유물 2점.

미추왕릉 출토

상감유리옥달린목걸이(보물 제634호)

 

 

황금장식보검(보물 제635호)

 미추왕릉 지구 계림로 14호 고분에서 나왔다.

칼자루는 반타원형이고, 칼집은 끝이 넓으며 표면은 금 알갱이와 옥으로 상감하였다.

이렇게 화려한 장식을 한 검은 동아시아에서는 유일한 것이다.

이런 기법은 그리스 로마의 전형적인 양식임을 고려할 때,

로마나 로마문화의 영향을 받은 곳으로부터 선물이나 교역품으로 들어왔을 것이다.




 

승소골삼층석탑, 남산 승소골에서 가지고 와 복원하였다. 

 

 

교동최씨고택으로 간다.

 

 

월정교복원

 

 

 

 

 

 

교동최씨고택(주요민속속자료 제27호), 4시 50분.

 

 

龍庵古宅

 

 

대우헌

"大愚"는 마지막 12대 최부자 汶坡 崔浚(1884~1970)의 할아버지 최만희의 호다. 

 

 

"鈍次"는 11대 최부자 최현식(1854~1928)의 호다.

재주가 둔해 으뜸가지 못한다.어리석은 듯 드러나지 않고 버금감

汶坡 崔浚(1884~1970)의 아버지다. 

 

 


 

 

 

 

 


 

안채 

 

 

 

 

 

 

 

 

다른 계획은 포기하고 돌아간다.

 

 

 

 

대릉원 정문 왼쪽 담장 옆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5시 40분에 고속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버스는 6시에 출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