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문화유산 답사자료

영남루

추연욱 2012. 3. 2. 20:21

  

 

■ 영남루는 밀양시 내일동에 있다.

 

현재 영남루가 있는 이곳에는 본디 嶺南寺라는 절이 있었다.

영남사는 신라 제35대 경덕왕(742~765 재위) 2년 왕이 초창한 신라 5대사찰 중 하나였다.

영남사는 고려 공민왕 8년 화재로 종각인 金碧樓만 남고 모두 불탔다. 

 

이에 본존불인 석가여래좌상을 무봉암에 안치하고, 공민왕 14년(1365)에 부사 金湊가 절터에 남아있던 종각인 금벽루를 중수하고 절의 이름을 따서 영남루라 하였다.

 

조선 세조 5년(1459) 밀양부사 강숙경이 크게 넓혀 짓고, 중종 37년(1542) 밀양부사 박세후가 중수하였다.

조일전쟁 때 몽땅 불탔다. 그후 인조 15년(1637) 밀양부사 沈興이 다시 지었다.

순조 34년(1834) 불타고 현종 10년(1844) 부사 이인재가 재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조선시대 영남루는 밀양도호부 객사 밀주관의 부속 건물로 관원들이 손님을 접대하거나 주변 경치를 바라보며 쉬는 곳이었다. 

 

영남루는 밀양강을 내려다 볼 수 있는 높은 절벽 위에 자리집고 있어 강과 시내를 내려다보는 경치가 시원하다. 그래서 그런지 영남루에는 밀양8경 중 영남루 秋月, 무봉암 晩鐘, 밀양강 夕照 등 3개가 있다.

예로부터 평양 대동강의 부벽루, 진주 남강 촉석루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누각의 하나로 생각했다. 

 

영남루는 정면 5칸 측면 4칸의 이층누각 팔작지붕집으로 규모가 매우 크다. 기둥이 높고 기둥 사이 간격이 넓어 더욱 웅장해 보인다. 거기다가 양쪽으로 부속 건물인 능파당과 침류각 등 익루를 거느리고 있다.

 

 

 

 

 

본루 앞면 현판, 관지에 "戊申 月日 書"라 썼다.

'무신'은 1788년이다. 松下 曺允亨(1725~ 1799)이 썼다. 

  

 

영남루 본루 앞면, 바라보아 왼쪽에 嶠南名樓('교남'은 문경새재 이남이란 뜻이다. 곧 영남지방을 말한다),

오른쪽에 쓴 江左雄府(낙동강 왼쪽의 아름다운 고을)라 쓴 편액이 걸려있다. 

橘山 李裕元(1814~ 1888)이 썼다.

 

 

누각 안에 걸려있는 이 현판은 星波 河東洲(1879~?)가 썼다.


누각 안에 걸려있는 이 현판은 款識에 "癸卯初夏下澣 李憎石十一書"라 했다.  밀양부사 李寅在의 큰 아들 이증석이 11세 때인 1843년 4월에 쓴 것이다.



 

왼쪽 건물이 익랑 陵波堂이다.

 

 

3개의 층단올 이룬 지붕은 枕流閣의 月廊(복도)이고, 그 오른쪽 건물이 침류각이다.

월랑은 본루 영남루와 침류각을 잇는 계단으로 3층지붕이 매우 율동적이다.

추녀 끝 망와에 도깨비장식도 보인다.

 

 침류각

 

 

 

영남루에서 밀양강을 바라본다.

 

 

 

 

天眞宮(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17호)

조선 현종 6년(1665)에 처음 건립하였다. 본디 이 건물은 역대 왕조 시조의 위패를 모신 拱振館의 부속 건물로 사용하다가 경종 2년(1772)부터 공진관을 대신해 위패를 봉안하여 객사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일제 헌병대가 역대 시조의 위패를 땅에 묻고 건물을 감옥으로 쓰기도 하였다.

 

천진궁은 남쪽을 향해 중앙에 단군의 영정과 위패를, 그 왼쪽 벽에 부여, 고구려, 가야의 시조 왕과 고려 태조의 위패를,

오른쪽 벽에는 신라, 백제의 시조 왕과 발해 고왕, 조선 태조의 위패를 각각 모셨다.

1957년 대종교산하단체인 단군봉안회에서 건물의 이름을 천진궁이라 하고 정문을 만덕문이라 하였다.

이후 매년 음력 3월 15일 御天大祭, 음력 10월 3일 開天大祭를 지낸다.

 

천진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 주심포식 건물이다. 대리석으로 기단을 쌓고 그 위에 높은 기둥을 세웠다.

 

 

천진궁의 정문 만덕문

 

 

천진궁

 

 

 

 

단군할아버지 상

"太上老君 七元聖君 三神帝王"라 쓰여있다.

태상노군은 도교를 창시한 老子를 신격화한 말,

칠원성군은 북두칠성을 신격화한 말,

삼신제왕은 환인, 환웅, 단군을 신격화한 말이다.



 

 

■ 石花

돌의 무늬가 국화꽃을 닮았다 하여 石花라 한다. 천진궁 앞으로 많이 분포되어 있다.

비가 와 돌이 물을 먹으면 무늬가 더욱 선명하게 보인다.

 

 

 

 

■ 阿嫏祠(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6호)

죽음으로 순결을 지킨 아랑 전설의 주인공 아랑을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조선 명종(1545~1567 재위) 때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여 마을 사람들이 사당을 세워 혼백을 위로했다고 전하지만 자세한 사실은 알 수 없다.

 

1930년 영남루를 중수하면서 ‘정순아랑지비’라는 비를 세우고 비각을 지어 아랑사라 하였다.

지금의 아랑사는 1965년 낡은 비각을 헐고 그 자리에 3칸짜리 사당과 삼문의 정문을 다시 지었다.  

4월 16일 아랑제를 지낸다. 

 

아랑의 성은 尹, 이름은 東玉 또는 貞玉이다. 그녀의 아버지가 밀양 태수로 부임하였을 때 함께 밀양에 왔다.

밀양 고을 통인 白哥와 유모의 음모 빠져 아랑은 어느날 영남루의 야경을 보러 갔다가 통인 백가에게 욕을 당하게 되었다. 그것은 아랑이 영남루에서 달구경을 하고 있을 때 유모는 벌안간 없어지고 백가가 숨어있던 기둥 뒤로 뛰어나와서 아랑에게 사모의 정을 말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아랑은 물론 거절하였다. 백가는 아랑의 가슴을 쥐었으므로 아랑은 더렵혀진 유방을 칼로 잘라버렸다. 백가는 맹렬히 위협하였으므로 싸움이 시작되어 마침내 아랑은 백가의 칼에 죽게 되고 그 시체는 강안의 대숲 속에 던져졌다.

 

다음날 아랑의 아버지는 여러 가지로 조사하였으나 알지 못하고, 필경은 자기 딸이 야간에 도망하였다고 믿게 되어 양반의 가문에 그런 불상사가 난 이상 근신하지 아니할 수 없다하여 사직하고 서울 본가로 가버렸다.

 

그뒤 새로 태수가 부임할 때 마다 부임 첫날밤에 귀신이 나타나고, 신관은 몸에 상처 하나 없이 죽어버렸다.

이로 인하여 밀양 태수를 원하는 자가 없으므로 조정에서는 자원자를 구하게 되어 李上舍란 사람이 자진 부임하게 되었다.

이상사는 부임 첫날밤 관사에 촛불을 밝히고 독서를 하고 있었다. 이때 별안간 음풍이 일어나서 닫았던 문이 저절로 열리고 산발하고 유방에서 피를 떨어뜨리는 여인이 목에 칼을 꽂은 채 태수의 앞에 나타났다.

여인의 호소로 관청 소속의 백가가 한 짓임을 알고 태수가 백가를 잡아 아랑의 원한을 풀어주었다. 

 

이 설화는 <靑邱野談>, 제1권, 雪幽寃夫人識朱旗 조에도 실려 있는데, 통인이 朱旗란 구체적인 이름으로 나타난다.

 

윤정옥이란 처녀가 그녀의 아버지와 함께 밀양에 있던 중 통인의 마수에 걸려 피살된 것은 사실일 수도 있다.

그러나 원귀로 나타나 신관 사또를 죽게 하는 등 일련의 사건은 물론 후세 사람들이 만든 이야기다.

  

이런 유형의 설화는 우리나라 각 지방에 분포되어 있고, 중국에도 있다. 대개 관청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며, 억울하게 죽은 여인은 관기였다. 아랑이란 구체적인 이름으로 나타나는 경우는 아랑 설화가 대표적이다. 그래서 이런 유형의 설화를 아랑형 설화라 한다. 

 

아랑형 설화에는 원시인들의 종교심리가 나타나 있다. 원시인들에게는 아직 채 죽지 못한 자를 버리거나 매장하면 그 자가 영원히 귀신도, 사람도 되지 못한다는 관념이 있다. 또 목이 찔려 죽었거나, 유방을 잘라 죽었거나, 옷이 벗긴 채 죽은 자는 유령으로 나타날 때 반드시 죽던 당시의 모습으로 보인다고 생각했다.

이런 모습을 본 사람의 기억에는 비참한 그 모습만 심각하게 각인되어 있으므로 죽은 자가 꿈속에나 환각으로 나타날 때 항상 피 흘리는 유방과 칼에 찔린 목, 옷을 벗은 몸을 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꿈을 현실과 동일시하는 원시인들은 죽은 자의 혼령은 죽던 당시의 형상으로 출현하는 것이라 생각하여 설화에도 그렇게 전해오는 것이다. 또 정상적으로 장례를 치르지 못한 혼령은 영구히 갈 곳으로 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환각을 실재라 믿으며 꿈을 현실로 생각하는 원시신앙을 인류학에서는 幻夢說[Dream theory]이라 한다.

손진태, <한국민족설화의 연구>, 을유문화사, 1984년판, 39~50쪽의 내용을 요약하며 표기를 현대로 바꾸었다.

 

 

 

아랑사 정순문

 

 

아랑사의 정문 현판 "貞純門"은 素筌 孫在馨(1903~1981)이 섰다.

 

 

 

 

아랑사에 봉안한 아랑의 영정

以堂 金殷鎬(1892~1979)가 그렸다.

 

 

아랑유지비는 아랑사 서쪽 숲 속에 있다.

비의 앞면에는 “阿娘遺趾”, 뒷면에는 “隆熙四年 五月日 李應悳 朴尙禧 立”이라 섰다.

1910년 5월에 이응덕과 박상희가 세웠다는 뜻이다.

이곳에 아랑의 시신이 3년동안 버려져 있었다고 한다.

 

 

 

■ 무봉사

신라 제36대 혜공왕 9년(773)에 法照선사가 蘇寒山 영남사에 주석하던 중 하루는 하늘 나라 큰 봉황새가 춤을 추며 이 절터에 내려앉는지라 대중이 상서라 하여 환희하며 큰 선사를 받들어 모셨는데 마침 혜공왕이 영남사에 참배하였다가 선사의 법문에 개심하여 법은을 갚고자 하여 암자를 지어 무봉암이라 하고 산 이름을 무봉산이라 하였다.

 

조선 선조 25년(1592) 조일전쟁으로 불타자 선조 38년(1605) 慧澄선사가 법당, 칠성각, 수월루, 요사를 중창하였다.

현대에 와서 허물어진 법당과 요사를 중창하고, 범종 2,500근을 조성하여 밀양 8경의 하나인 ‘무봉암 晩鐘’을 갖추었다.

1991년 법당 7칸과 요사 5칸을 중창, 종각, 일주문, 대문 등을 창건하고 5층석탑, 무봉사 사적비를 세웠다.

현재는 통도사의 포교당이다.

 

* 요사채 옆에는 밀양8경의 하나인 범종각이 있고, 밀양의 4대기적 중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마다 무봉사에 나타난다는 태극나비(고려때는 國成蝶이라 하여 보호했다)와, 눈 속의 무봉사 대숲에서 죽순이 솟아오르는 일 등 2가지가 있다.

 

* 대웅전은 정면 7칸, 측면 2칸으로 안에는 석조여래좌상을 중심으로 신중단, 지장보살, 대세지보살, 독성 산신탱이 봉안되어 있다.

 

대웅전 왼쪽에 5층석탑과 삼성각, 지장전이 있다.

지장전은 기둥에 지붕만 세운 그 아래 여섯 석조 지장보살상이 있다. 각기 손 모습을 달리하여 육도 중생을 구원하려는 지장보살의 대비원력을 표현했다.

지장보살의 본디 형상은 천관을 쓰고 가사를 입으며 왼손에는 연꽃을 오른손에는 보주를 든 모습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삭발에 석장을 짚고 여의주를 들고있는 모습을 한 경우가 많다.

 

 

 

* 석조여래좌상(보물 493호)은 높이 97cm로 본디 영남사터에 있던 것을 옮겼다고 한다.

현재의 대좌는 새로 만들었고 광배는 근처에서 발굴된 것을 붙였다.

결가부좌에 촉지항마인을 하고 있으며, 굵은 나발에 얕은 육계가 있고 네모진 얼굴에는 가는 입, 넓적한 코, 짧은 목에 삼도가 있다.

귀는 긴 편은 아니나 어깨는 넓고 둥글다. 가슴이 약간 움츠러든 듯하고, 양 무릎까지 덮은 법의는 두터워 몸의 선을 드러내지 않았다.

두터운 통견의 법의 사이로 군의와 띠매듭이 간략하고 형식적으로 표현되었는데, 이는 9C 이후의 양식이다.

오른손은 비교적 크며 왼손은 두텁고 약간 어색하다. 길상좌를 한 오른쪽 발은 유난히 길어 거의 왼쪽 무릎 끝까지 닿아있다.

광배의 가장자리에는 화염문이 새겨졌고 뒷면에는 결가부좌하고 있는 약사여래불이 돋을새김되어있다.

 

 

■ 사명대사 동상

1971년 4월 25일 세웠다. 

 

 

 

■ 밀양아리랑 노래비

 

 

 

■ 박시춘 흉상과 옛집

 

 

 

 

위의 사진들은 2010년 6월 26일 찍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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