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시집

산책/ 이성선

추연욱 2024. 5. 17. 16:56

산책

 

이성선

 

안개 속을 들꽃이 산책하고 있다

산과 들꽃이 산책하는 길을 나도 함께 간다

안개 속 길은 하늘의 길이다

하얀 무명천으로 몸을 열었다 닫았다 하는 안에

나도 들어가 걸어간다

그 속으로

산이 가고 꽃이 가고 나무가 가고 다람쥐가 가고

한 마리 나비가 하늘 안과 하늘 밖을 날아다니는 길

발 아래는 산, 붓꽃 봉우리들

안개 위로 올라와서 글씨 쓴다

북과 피리의 이 가슴길에

골짜기 고요가 내 발을 받들어 허공에 놓는다

써 놓은 글씨처럼 엎질러진 붉은 잉크처럼

아침 구름이 널려 있다

이 붓꽃에서 저 붓꽃으로 발을 옮길 때

안개 열었다 닫았다 하는 세상이

내 눈 안에 음악으로 산다

안개 속을 풀꽃 산 더불어 산책을 한다

 

<시인>, 2000,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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