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
이성선
안개 속을 들꽃이 산책하고 있다
산과 들꽃이 산책하는 길을 나도 함께 간다
안개 속 길은 하늘의 길이다
하얀 무명천으로 몸을 열었다 닫았다 하는 안에
나도 들어가 걸어간다
그 속으로
산이 가고 꽃이 가고 나무가 가고 다람쥐가 가고
한 마리 나비가 하늘 안과 하늘 밖을 날아다니는 길
발 아래는 산, 붓꽃 봉우리들
안개 위로 올라와서 글씨 쓴다
북과 피리의 이 가슴길에
골짜기 고요가 내 발을 받들어 허공에 놓는다
써 놓은 글씨처럼 엎질러진 붉은 잉크처럼
아침 구름이 널려 있다
이 붓꽃에서 저 붓꽃으로 발을 옮길 때
안개 열었다 닫았다 하는 세상이
내 눈 안에 음악으로 산다
안개 속을 풀꽃 산 더불어 산책을 한다
<시인>, 2000,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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