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나들이- 2022년 5월 27일
2시 55분, 경주 시외버스터미널
대릉원 후문, 3시 5분.
● 대릉원
대나무잎들이 누렇게 변해 죽었나 했더니,
꽃이 피었구나.
대숲 앞에 있는 목련나무
이쪽 대숲은 꽃을 피울 생각이 없는 듯.
미추왕릉
대릉원 후문으로 나왔다., 3시 40분.
● 동부지구 사적지대
한여름꽃, 늦여름꽃 접시꽃 벌써 활짝 피었다.
바늘꽃
작약꽃은 거의 다 떨어졌다.
남은 꽃은 이정도
수국도 활짝 피었다.
꼬마장미
꽃양귀비도 거의 졌다.
바람이 많이 불어 꽃사진 어려웠다. 특히 작약, 바늘꽃.
클레마티스
금영화
발굴 복원한 반월성 북쪽 해자
● 동궁과 월지
8월말쯤 공사가 끝난다고 한다.
● 황룡사 마루길
철로를 걷어 낸 빈자리. 철도가 신경주역 쪽으로 이어지면서 이곳 철도는 필요없게 된 듯.
● 황룡사터
황룡사터 맞은편 찻길 건너에 전에 없던 엄청나게 넓은 공간이 생겼다.
이 넓은 곳에 무슨 공사를 하는 것 같다.
갑자기 一陣狂風이 불어 먼지가 여기까지 쫓아왔다.
■ 사적 경주 황룡사지
황룡사는 경주 중심부에 위치한 신라 최대 사찰이다.
진흥왕 14년(553) 월성 동북쪽에 궁궐을 조성하다가 황룡이 나타나자 사찰로 고쳐 지었다고 한다.
이후 장육존상을 봉안하기 위해 금당을 지었고,
선덕여왕 14년(645)에 구층목탑을 건립하면서 완성되었다.
이처럼 황룡사는 93년에 걸친 대규모 국가사업으로 완성된 사찰이다.
황룡사는 중문과 목탑, 금당, 강당이 남북으로 놓여있다.
금당의 좌우에 작은 금당을, 탑의 좌우에 經樓와 鐘樓를 대칭으로 배치하고 주위 사방을 回廊으로 둘렀다.
금당은 금동삼존불을 모시기 위해 진평왕 6년(584)에 새로 지어졌다.
인도의 아소카왕이 삼존불을 만들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황금과 황철을 배에 실어 보냈는데,
이 재료로 신라에서 금동삼존불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후 선덕여왕 12년(843)에 당나라에서 돌아온 자장이 신라의 위용을 보여줄 수 있는 거대한 구층목탑을 세워 외적의 침입을 막을 것을 건의하였다.
이에 따라 백제의 기술자인 阿非知를 불러 공사를 시작한 지 2년 만에 구층목탑을 완공하였다.
경덕왕(742~ 765 재위)대에는 황룡사 대종이 완성되었다.
구층목탑은 낙뢰와 같은 사고가 있을 때마다 고쳐 지었는데,
고려 고종 25년(1238) 몽골 침입 때 황룡사와 함께 소실되었다.
신라 3보 -신라 왕실의 권위와 호국을 상징하는 보물, 진평왕의 天賜玉帶, 진흥왕대의 황룡사 장육존상, 선덕여왕대의 황롱사 구층목탑- 가운데 2개가 황룡사에 있을 정도로 황룡사는 신라를 상징하는 큰 사찰이었다.
이 밖에도 왕실의 사원을 관리하던 관청이 成典이 설치될 만큼 황룡사는 국가 관리 사찰로, 호국 사찰로 위상이 높았다.
1976년부터 8년 동안 조사한 결과, 원래 늪지대였던 곳을 메워 절터를 만들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4만여 점에 달하는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유물 가운데 높이 182cm의 대형 치미는 황룡사 건축의 웅장한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황룡사9층목탑 심초석 덮개동
금당터
■ 황룡사 중금당 불상
진흥왕 35년(574), 장육상과 2구의 협시불(금동장육삼존불상)이 주조되었다.
진평왕 2년(584)에 중금당이 완성됨에 따라 16구의 제자상이 추가되었다.
따라서 황룡사 중금당 내부에는 19구의 불상이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현재 17구의 대좌(받침돌)만 존재하고 있다.
또한 장육상의 높이는 1장 6척으로 5m가 이상의 신라 최대 금당불상으로 추측되나,
불상에 대한 크기, 제작 시기, 형태 등에 대하여 다양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 분황사
■ 보물 경주 분황사 당간지주
이 당간지주는 남쪽의 사적 황룡사지와 북쪽의 사적 분황사지 사이에 있다.
분황사에서 남쪽으로 50m 지점이기 때문에 이 당간지주의 소속 사찰을 분황사로 주정하고 있다.
사찰에서 의례나 행사가 열릴 때 깃발을 높이 달았는데,
그 깃발을 당 幢, 깃대를 幢竿,
긴 당간이 흔들리지 않게 지탱해 주는 지지대를 당간지주라 하며,
대개 사찰 입구에 세워졌다.
2021년 5월 21일 이곳, 이 당간지주에 대한 설명으로
구황동 당간지주(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92호)라 하였다.
2022년에 국가유산 '보물 경주 분황사 당간지주'로 바꾸어 게시하였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가 보물로 승격되었으며, 번호도 사라졌다.
이 당간지주의 아름다움은 간대를 받치는 이 동물이다.
무슨 동물인지는 모르지만, 불수록 우습고 즐겁다.
지금은 철책에, 보리밭에, 노란 코스모스에 가려 보기 어렵게 되었다.
아래 사진 두 점은 2017년 9월 19일에 찍었다.
국보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분황사 화쟁국사 비부
■ 분황사 화쟁국사 비부碑趺는 원효대사(617~ 686)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비의 받침돌이다.
고려 숙종 6넌(1101)에 원효대사 동방의 성인임에도 불구하고 그 덕이 크게 드러나지 않음을 애석하게 여겨,
大聖和諍國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비석을 세웠다.
그 후 추사 김정희가 절 근처에서 이 비석 받침을 발견하고 이를 고증한 글귀를 새겨 두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고려 평창사 韓文俊이 비문을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주변에서 찾은 비석 조각이 일부 전해지고 있다.
비석 받침의 윗면에 비석을 꽂아 세웠던 사각형 홈이 파여있고, 윗면의 모서리는 떨어져 나갔다.
옆면에는 엷은 안상을 새겼다.
眼象은 네모난 면의 모서리를 장식했던 기둥 문양. 코끼리 눈을 형상화한 문양이라고도 한다.
분황사 석정
■ 분황사 석정
이 石井은 분황사에 남아 있는 신라 시대 우물로 ‘나라를 지키는 용이 물고기로 변한 우물’이라고 해서
護國龍變魚井으로도 불린다.
<삼국유사>에 이 용에 관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있다.
분황사 우물과 금학산 東泉寺의 동지와 청지라는 우물에 신라를 지키는 세 마리의 용이 살았다. 원성왕 11년(795)에 당나라 사신이 주술을 써서 이 용들을 물고기로 둔갑시켜 잡아갔다. 이 용들의 부인이라는 두 여인이 왕 앞에 나타나 남편을 찾아 줄 것을 청하였다. 왕이 사람을 시켜 물고기를 다시 빼앗아 각각의 우물에 놓아주자 물이 한 길이나 솟아오르고 용들이 기뻐하며 뛰었다. 당나라 사람들은 왕의 지혜에 감복했다고 한다.
이 우물은 높이가 약 70cm로 외부는 팔각 모양이고 내부는 원형이다.
남아 있는 통일신라 시대 돌우물 가운데 가장 크고 우수하며 지금도 사용될 만큼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그러나 이 우물에는 조선 시대에 분황사에 있던 모든 돌부처의 목을 잘라 이곳에 넣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분황사 금당 보광전
우단동자
터미널까지 걸어갈까 했는데, 덥고 피곤하다.
분황사 정류장에서, 한 정류장 더 간,
경고네거리 정류장, 여기서 11번 버스를 탔다. 5시 20분.
5시 38분, 경주터미널
뛰어가서 5시 40분 버스를 타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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