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옛 도심과 옛 서라벌- 2019년 3월 8일
5시 40분에 집을 나와,
버스를 타고,
신해운대역 6시 19분 출발
미세먼지 나쁨, 천지가 뿌옇다.
울산을 지나자 까마귀떼 새카맣고,
땅에는 하얀 서리,
안개 자욱, 하얀 땅에 까만 까마귀 안개 속에 나타났다 사라지고,
미세먼지와 안개 섞이면 아주 나쁘다던데.
8시, 경주역
성동시장 노점
이른 시간, 부지런한 사람들
경주역에서 성동시장을 거쳐 읍성으로 가는 길에,
많이 추웠다. 손이 시려 주머니에 넣고 걸었다.
● 경주읍성
8시 15분.
경주읍성 동문 向日門
옹성이 철옹성이네.
雉城
성곽 바로 안, 어느 집 잎에 매화, 벚꽃이 피어 있어,
집 안에 우뚝 서 있는 매화꽃을 바라보고 있으니,
마침 집주인 노부부가 손님을 배웅하러 나오다가, 나를 보고,
집에 들어와서 사진을 찍으라 하신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와 커피를 끓여 주신다.
밥도 차려주시겠다 한다.
할아버지는 86세, 할머니는 82세.
할아버지 산림청 공무원이었고, 귀가 많이 어둡다.
앞으로 딸 넷, 막내 아들 하나. 딸 둘은 미국에 살고.
이것 저것 많은 이야기들을 했다.
요즘도 이런 분들이 있다니.
옛 성 남쪽 끝 경주교회 주차장, 나무
● 동경관
뒷담 너머에서 본 동경관
입구를 찾는다고 한 바퀴 뺑 돌았다.
열린 곳이 없다.
이리로 들어간다.
동경관 서쪽 현대식 건물에 三樂會 사무실이 있다.
동경관을 돌아보고 있는데,
어떤 분이 나타났다. 인사를 하고,
들어오라고 한다. 삼락회 사무실.
그는 82세, 교육구청, 요즘은 교육지원청이라 하는 기관의 공무원으로,
영주, 청송, 경주 등지에서 살았다고 한다.
딸 넷을 낳고, 다섯 번째 아들을 낳아 이제 손자를 보았다 한다.
커피를 얻어 마시고,
한참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듣다가 그곳을 나왔다.
오늘 참 기분이 좋았다.
나보다 한참 나이가 많은 분들, 그들은 푸근해 보인다.
● KT&G가 들어선 이곳은 옛 경주관아 집무실 동헌 자리다
옛날의 기억은 건물 뒷마당의 커다란 나무 두 그루.
뒷마당은 매우 넓다.
창고 앞마당이기도 하다.
동헌 건물은 법장사로 옮겨 대웅전이 되었다.
법장사는 대릉원 후문과 큰길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다.
법장사 대웅전
● 경주문화원
경주문화원 경내에는 네 채의 건물이 있다.
입구에서 바라보아 정면에 있는 건물이 향토사료관이다
가운데 통로 왼쪽에 양무당, 그 남쪽에 성덕대왕 신종을 걸었던 종각.
통로 오른쪽에 향토문화연구소가 있다.
향토사료관 앞에 스웨덴 황태자 구스타프 아돌프 6세가 기념식수한 전나무,
그 옆에 300살 산수유나무.
그리고 향토사료관 뒤에 경주동부동 은행나무 두 그루.
향토사료관
지금의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기기 전의 경주박물관이다.
그 전에는 경주관아 내아가 있었다.
양무당은 옛 병영관리소다.
경주읍성 북문쪽에서 옮겨왔다.
성덕대왕신종을 걸었던 종각
성덕대왕신종(국보 제29호)
종에 새겨져 있는 명문에 따르면,
경덕왕(742~ 764 재위)이 그 아버지 성덕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구리 12만 근으로 종을 만들려고 했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그의 아들 혜공왕이 부왕 경덕왕의 뜻을 받들어 왕 7년(771) 12월 14일에 완성했다.
그리고 이 종을 성덕왕이 세운 봉덕사에 봉안했다.
봉덕사는 성덕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절이다.
지금 우리는 봉덕사가 어디에 있었는제 알지 못한다.
그뒤 어느때인가 북천이 홍수로 넘쳐 절은 쓸려 가버렸고, 종은 폐사지에 버려진 채 있었다고 한다.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이 경주 금오산 속 용장사에 은거하면서 <금오신화>를 지을 때,
본 봉덕사의 모습을 이렇게 전한다.
寺廢汲砂礫 절은 쓰러져 자갈밭에 묻히고
此物委榛荒 종은 풀숲에 버려졌으니
恰似周石鼓 주나라 돌북인 양
兒撞牛礪角 아이들은 돌로 치고 소는 뿔을 가네.
<동국여지승람>에, 세조 5년(1460) 당시 경주부윤 金淡이 이 종을 靈廟寺 옆에 걸어두고 징병에 썼다 했다.
영묘사에는 불이 자주 났다는 기록이 있다.
아마도 어느때의 화재로 페사되었을 것이다.
흥륜사(사적 제15호)는 신라 최초의 절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미추왕 3년(264) 신라에 불법을 전한 고구려 승려 阿道 화상이 신라 공주의 병을 고쳐주고,
왕으로부터 天鏡林에 절을 세우도록 허락을 받아 지었다고 한다.
창건연대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며, 일반적으로 눌지왕대(417~457)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의 흥륜사는 1980년대에 새로 지은 절이다.
이곳에서 "영묘사"라 새겨진 기왓조각이 수습되어 선덕여왕 때 창건된 영묘사 터로 보는 견해도 있다.
<동경잡기>에, 중종 원년(1506) 당시 부윤 芮椿年이,
경주읍성 남문 밖 봉황대 밑에 종각을 짓고, 종을 옮겨와,
성문을 열고 닫을 때와 正午에 종을 쳤다고 한다.
성덕대왕신종은 이렇게 봉황대 밑에서 480년 동안 머물다가,
1915년 8월 옛 경주박물관 자리인 이곳으로 옮겨져 이 건물에 걸린다.
1975년 이른 봄부터 6월까지 새로 지은 현재의 국립경주박물관 자리로 옮긴다.
1991년까지 매일 아침 6시에 세 번 종을 쳤다.
지금은 듣는 종이 아니라 보는 종의 역할만 한다.
성덕대왕 신종은 모양만 보아도 아름답다.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창작과 비평사, 1993.
이 건물은 1700년대 말에 지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지금은 창고로 쓰는 듯.
행사에 섰던 것들인가?
석굴암 금강역사상 모조품, 그밖에 온갖 잡동사니들로 어수선하다.
향토문화연구소
이 건물은 모양이 좀 이상하다.
본디 정면 3칸의 맞배지붕 집이었을 것이다.
그 뒤 어떤 필요에 따라 양쪽에 퇴칸을 닷달아 지어 이런 모습이 되었을 것이다.
스웨덴 황태자의 기념식수
瑞典國王 구스타프六世 알돌프陛下慶州 訪問 紀念植樹
서기 1926년 10월 10일.
1926년, 당시 일본식민지인 조선에 와서 서봉총 발굴에 참여하고 직접 금관을 들어올렸다.
당시 박물관이었던 이곳에 기념으로 전나무를 심었다.
서봉총에서는 금관총, 금령총에 이어 세 번째로 신라시대 금관이 발굴되었다.
적석목곽분으로 금관을 비롯하여 금제 장신구, 유리 제품, 토기 등 수많은 유물이 나왔다.
스웨덴의 황태자 Oscar Fredrik Wilhelm Olaf Gustaf Adolf(1882~1973)는
부왕이 죽고 스웨덴 왕(1950~73 재위)이 되었다.
서봉총 출토 금관(보물 제339호)
서봉총 출토 금관의 봉황
서봉총이라는 이름은 스웨덴 곧 瑞田의 "서"자와 금관에 새겨진 "봉"자를 딴 것이다.
300살 산수유나무, 경주에 봄소식을 가장 먼저 전한다는 나무라 한다.
향나무 두 그루
경주동부동 은행나무(경상북도기념물 제66호)
나이는 약 500년이며, 높이 10m, 둘레 6.06m, 지름 2.1m, 수관 폭 20m로 생육상태가 비겨적 양호한 편이다.
또 30m 거리에 한 그루가 더 있으며, 두 나무는 모두 암나무로 열매가 풍부하다.
이 나무는 은행나무과에 딸린 낙엽교목으로 은행목, 행자목, 公孫樹, 鴨脚樹라고도 하며,
사찰, 社壇, 문묘, 묘사 등에 많이 심어졌다고 한다.
이 나무의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이곳에 경주부 동헌을 지을 당시 심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山棠花
작약
겅주문화원 맞은편 집 담안에 활짝 핀 白梅
가까이 갈 수 있을까?
매화나무 뒤 건물은 검찰청이었다.
담장의 산수유룰 구경하고
● 경주 경찰서 담장의 고운 미소들은 어디로 갔나.
2012년 6월 20일 도보 때 찍은 사진이다.
젊은 경찰에게 물어보았다.
묻는 내가 그르지.
● 화랑수련원
일제강점기 경주의 첫 서양식 의원 야마구치 병원건물이다.
지금은 화랑수련원이다.
일본식 절 서경사를 찾아 이리저리 다니던 중에,
명사마을 우방아파트 주변 매화꽃 구경.
● 경주감영 옥사터
명사마을 우방아파트, 102, 10동 사이에 .
● 판소리 전수관
본디 서경사로 일본 일본 조동종 경주포교소였다.
그뒤 농촌지도소, 사방관리소, 해병대전우회 사무실 등 몇 차례 주인이 바뀌었다가,
박덕화(경상북도무형문화재 제28호)의 정가전수관이다가,
지금은 판소리 전수관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서경사는 일본 에도[江戸]시대(1603~1867) 유행한 선종 양식을 따른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4칸의 규모이며, 정면에 6단의 계단이 둘러져 있다.
안에는 내진과 외진으로 구분해 바닥의 높이를 달리했다.
불단이 있는 내진의 천장은 우물반자, 바닥에는 다다미를 깔았다.
당시 건축자재를 일본에서 가지고 와서 지었다고 한다.
도리 끝 장식은 코끼리 모양을 하고 있어 우리 건축의 용이나 봉황과는 다르다.
일본 조동종은 1910년 국권강탈 이후 재빨리 이를 축하하는 칙서를 발표하고 축하식을 열었다고 한다.
그리고 종단에서 운영하는 조동종대학에 한국의 승려들이 유학할 길을 열어주었다.
1906년에 창립된 조선불교종단 원종의 종정인 이희광은 일본의 포교 방법을 배워 조선불교를 중흥시킨다는 명문을 내세워 일본 조동종과 연합을 시도하기도 했다.
1910년을 전후한 시기, 6개의 일본종파가 한국에 설치한 포교소가 167개나 되었다.
처음에는 개항장을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나중에는 내륙 깊숙한 곳까지 진출했다.
본국의 재정적 후원을 얻어 교육사업과 빈민구제사업을 실시해 저항의식을 무력화했다.
1901년대 말까지 경북의 경우, 경산, 상주, 감포, 청도, 김천 등지에 이미 조동종 포교소가 설치되었는데,
정토진종은 이보다 먼저 대구와 구룡포에 진출해 있었다.
정토진종은 1914년 경주 부내 서부리에 경주포교소를 설립했는데.
지금 서경사의 주소가 서부동이라 서로 연관성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향토와 문화>, 62권, 대구은행, 2012.
2012년 6월 20일,
고려 · 조선의 경주를 떠나 신라로 간다.
● 노동동 고분군에 있는 봉황대, 11시
목련, 이만큼 피었다.
노서동 고분군에 있는 금관총
금관총 출토 금관(국보 제87호)
서봉총
비제에 "瑞典國王 구스타프 六世 아돌프陛下 瑞鳳塚發掘紀念碑"라 쓰고,
"瑞典國王陛下의 이 紋章은 陛下께서 允許하시어 보내온 것을 옮겨 새겼다."
1926년 황태자 구스타프 공작이었던 시절에 일본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일제는 그가 고고학에 관심이 많은 취향을 파악하고,
서봉총 발굴작업 참가를 권했고 이에 직접 참가하였다.
Oscar Fredrik Wilhelm Olaf Gustaf Adolf(1882~ 1973)
1950년 즉위한다.
현재의 국왕 칼 구스타프 16세 Carl XVI Gustav(1946~ )의 할아버지
구스타프 아돌프(1906~ 1947)는 칼 16세 구스타프의 아버지
비행기 사고로 사망
서봉총을 발굴하고,
봉분은 없애고 평지로 만들었다.
서봉총 맞은 편 기념식수
기념식수비
"이 느티나무는 스웨덴 국왕 칼 구스타프 16세 Carl XVI Gustav(1946~ )께서 1994년 11월 17일
서봉총을 방문하시고 이를 기념하여 심으신 것입니다."
한서협회
대릉원 후문, 11시 1분.
대릉원 목련은 이만큼
미추왕릉
대릉원 정문, 11시 40분.
큰개불알꽃 → 봄까치꽃
1시에 출발한 부산행 고속버스
1시 50분에 노포동에 왔다.
'자료실 > 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금정산 얼레지 찾아- 2019년 3월 29일 (0) | 2019.03.31 |
---|---|
토함산 시부걸 노루귀 · 복수초와 경주 옛 도심- 2019년 3월 12일 (0) | 2019.03.12 |
봄나들이- 2019년 3월 2일 (0) | 2019.03.03 |
암남공원 치유의 숲길- 2019년 2월 22일 (0) | 2019.02.22 |
동백섬 · 해운대 해수욕장- 2019년 2월 21일 (0) | 2019.02.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