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정기도보] [대구방, 6월 9일~10일], 경주국립공원
9시 30분, 경상북도 산림환경연구원
오솔길 왼편 활엽수는 마로니에[七葉樹],
오른편 침엽수는 메타세콰이어.
마로니에, 메타세콰이어 길을 따라 가서, 어리연 단지로 돌아오는 길,
45분쯤 걸렸다.
.
시간이 남아,
동남산 가는 길을 따라 통일전으로 가서 서출지를 구경하고자 한다
동남산 가는 길
서출지
● <삼국유사 제1권 기1 제2>, 射琴匣 조에,
신라 제21대 비처왕(소지왕)은 즉위 10년(488년)에 하늘샘[天泉亭]에 행차하였다.
이때 까마귀와 쥐가 나타나서 "이 까마귀가 가는 곳을 잘 살피시오."라하였다.
왕이 신하에게 명령하여 뒤쫓게 했다.
신하가 남쪽 피촌(지금의 남산동 양피사터)에 이르러 보니, 돼지 두 마리가 싸우고 있었다. 이것을 한참 보고 있다가 그만 까마귀가 날아간 곳을 잊어버리고 길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이때 한 노인이 못 속에서 나와 글을 올렸는데,
겉봉에 "이것을 떼어보면 두 사람이 죽을 것이요, 떼어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을 것이다."라고 쓰여 있었다.
신하가 돌아와 왕에게 이 일을 알리자,
왕이 말하기를 "두 사람이 죽는 것보다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낫다."고 하고 봉투를 뜯지 않으려고 했다.
이때 日官이 "두 사람이란 백성이요 한 사람은 임금입니다."라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겨 글을 펴 보니,
"거문고 갑을 쏴라[射琴匣]"라 쓰여 있었다.
왕이 궁궐에 돌아가서 거문고 갑을 보고 활을 쏘니,
내전에서 焚香하던 수도승과 宮主가 거문고 갑 속에서 간통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곧 사형을 당했다.
이때부터 나라 풍속에 정월 상순 돼지, 쥐, 말, 날에는 모든 일을 조심하며 함부로 움직이지 않았다.
15일을 烏忌日이라 하고 찰밥으로 제사를 지냈다. 그 못을 書出池라 하였다.
● 신라에 불교가 공인된 것은 법흥왕 15년(528년)이다.
불교가 공인되기 전에, 토착신앙과 불교와의 갈등을 보여주는 설화로 이해할 수 있다.
● 사금갑 설화는 정월 대보름날 찰밥, 오곡밥을 먹는 풍속의 기원을 설명하고 있다.
이후 까막까치를 위해 오곡밥을 조금씩 담 위에 얹어 놓는 풍속이 생겼다.
● 소지왕 10년(488)에 대궐을 명활산성에서 반월성으로 옮겼다.
고구려가 장수왕 15년(427)에 도읍을 평양성으로 옮겼는데 그것은 중원을 포기하고 남으로 진출하는 것이다.
장수왕은 475년 백제 서울(지금의 서울)을 침공하여 백제 제20대 개로왕을 죽였다.
자비왕은 나라를 다스리기는 불편하나 험준한 명활산성으로 궁성을 옮기고 고구려의 침략에 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약 15년간 버려두었던 대궐을 반년동안 수리 정비하여 488년 정월 초 반월성으로 이사한 것이다.
그리고 정월 보름날 天泉亭으로 행차하였으니 이는 나라의 태평을 기원하는 기도차 행차한 것으로 짐작된다.
서출지에 한발을 담그고 서 있는 이요당.
○ 二樂堂(사적 제138호)
철와골 입구 남쪽 마을인 안마을 앞에 있는(통일전 남쪽), 연꽃과 배롱나무가 우거진 숲 속의 못 서출지에,
정면 삼칸 측면 두칸의 기역자형의 정자로, 반은 땅에 반은 물위에 떠 있다.
이요당은 1664년(조선 현종 5) 林勣이라는 사람이 연못 주변에 돌담을 쌓고 지은 정자이다.
연못 주위의 배롱나무도 이때 임적에 심은 것으로 추측된다.
통일전 주차장에서 이른 점심을 먹는다. 11시.
11시 30분, 이곳을 출발, 추령터널로 간다.
첫째 날 6월 9일 토요일,
흐림.
12시, 우리는 정확하게 집결지, 추령터널 앞에 왔다.
왕의 길, 곧 신문왕호국행차길을 향해 출발, 12시 40분.
● 신문왕은 만파식적을 얻으러 이 길을 따라 이견대로 행차하였다.
● 신라 제31대 신문왕(681~ 692 재위)
681년 신문왕이 즉위하였다.
그 이름은 政明으로 문무왕의 장자이며, 어머니는 자의왕후,
비는 김씨, 蘇判 欽突의 딸이다. 왕이 태자로 있을 때 비로 맞았으나 오래도록 아들이 없었고, 뒤에는 그 부친이 亂을 일으키는데 연좌되었으므로 궁에서 쫓겨났다.
1. 왕 원년(681) 8월에 소판 김흠돌(왕의 장인), 파진찬 흥원 등이 모반을 일으켜, 이를 평정하고 모두 죽였다.
2. 왕 2년(682) 정월에 친히 내을신궁에 제사지내고, 국학을 설립하였다.
3. 왕 3년(683) 일길찬 김흠순의 작은 딸을 맞아 부인을 삼기로 하고 먼저 이찬 문영과 파진찬 삼광(문영과 삼광은 金庾信의 아들)을 보내 기일을 정하고 대아찬 지상으로 하여금 納采를 보냈다.
10월에 보덕왕 高安勝(?~ 683년)을 소판으로 삼고 김씨의 성을 주어 경도에 살게 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는 보장왕의 아들, <신라본기>에는 연정토의 아들이라 하였다. 고구려 부흥운동 지도자이다.
4. 왕 8년(688) 장차 달구벌[大邱]로 도읍을 옮기려고 하였으나 실행하지 못하였다.
5. 왕 12년(691) 당의 중종이 사신을 보내 말하기를,
“우리 태종문황제(당태종)는 신공성덕이 천고에 超出하였으므로,
돌아가신 날에 太宗이라고 廟號를 정하였는데, 그대의 나라 선왕 김춘추도 이와 같은 호를 정하였다.
이는 몰래 남의 호를 따붙인 것이니 급히 개칭하여야 할 것이다.” 하였다.
이에 왕은 군신으로 더불어 이를 상의하고 대답하기를,
“소국의 선왕 춘추의 시호는 우연히 聖祖(당태종)의 묘호를 범한 것입니다. 칙령으로 이를 고치라고 하나 감이 이 명을 좇을 수 없겠습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선왕 춘추는 賢德이 있고, 항차 생전에는 良臣 김유신과 더불어 한마음으로 정사를 다스려 삼한을 통일하였으니. 그 공업은 실로 크다고 하지 않을 없고, 돌아가실 때에 일국의 신민들은 슬픔과 사모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追尊의 호가 성조의 호를 범한 것을 깨닫지 못하였는데. 이제 교칙을 들으니 공구함을 이기지 못하겠으나, 사신을 명하여 闕廷에 보내 복명하며 이로써 알리오니 이 뜻을 헤아리소서.” 하였다.
7월에 왕이 돌아가심으로 神文이라 諡號하고 狼山 동쪽에 장사지냈다.
<삼국사기> 제8권, 신라본기 제8, 31 신문왕.
● 신문왕은 왕실의 권위를 확립하기 위해 태조대왕, 진지대왕, 문흥대왕(김유신), 태종대왕, 문무대왕 등
다섯 선왕의 사당을 세워 왕실의 상징으로 삼았다.
또 만파식적 설화를 지어 왕권의 상징물로 백성을 이끌어 나가는 수단으로 삼았다.
왕권이 강화되고 새로운 지배질서가 확립되자 중앙집권적 지배질서를 다지는 중세적 갸혁을 단행한다.
중앙의 통치 조직은 6세기 초 지증왕과 법흥왕 때 기초가 이루어지고.신문왕 때 완성된다.
새로운 시대에 맞게 계속 고쳐나가다가 통일 뒤 몇 배로 불어난 영토와 인구를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대대적으로 개편한 것이다.
관료기구, 행정기구 등을 개편한다.
인사권을 왕의 권한으로 일원화 하기 위하여 위화부란 기구를 두었고,
국학을 설립하여 화랑 출신을 관리로 등용하던 일방통로를 다른 쪽에도 열어놓은 것이다.
그래서 귀족세력을 견제하고 새로운 신분 출신도 등용하려 하였다.
● 萬波息笛
제31대 神文王의 이름은 政明, 성은 김씨, 開耀(唐 高宗의 年號) 원년 辛巳(681년) 7월 7일에 즉위하였다.
아버지 문무왕을 위해 동해 가에 感恩寺를 세웠다.(절 안에 있는 기록에는 이렇게 말했다.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고자 이 절을 처음 창건했는데 끝내지 못하고 죽어 바다의 용이 되었다. 그 아들 신문왕이 왕위에 올라 개요 2년(682년)에 공사를 끝냈다. 금당 뜰 아래에 동쪽을 향해 구멍을 하나 뚫어 두었으니 용이 절에 들어와서 돌아다니게 하기 위한 것이다. 대개 유언으로 유골을 간직해 중 곳은 대왕암이고, 절 이름은 감은사이다. 뒤에 용이 나타난 것을 본 곳을 利見臺라 했다.)
이듬해 壬午 5월 초하루에 해관 파진찬 朴夙淸이 아뢰었다.
“동해 속에 있는 작은 산 하나가 물에 떠서 감은사를 향해 오는데 물결에 따라 이리저리 왔다갔다 합니다.” 왕이 이상히 여겨 日官 김춘질에게 명하여 점을 치게 했다. “대왕의 아버님께서 지금 바다의 용이 되어 三韓을 鎭護하고 계십니다. 또 김유신공도 삼십삼천의 한 아들로서 지금 인간세계에 내려와 大臣이 되었습니다. 이 두 성인이 덕을 함께 하여 이 성을 지킬 보물을 주시려고 하십니다. 만일 폐하께서 바닷가로 나가시면 반드시 값으로 칠 수 없는 큰 보물[無價之寶]을 얻을 것입니다.”
왕은 기뻐하여 그달 7일에 利見臺로 나가 그 산을 바라보고 사자를 보내 살펴보도록 했다. 산모양은 마치 거북의 머리처럼 생겼는데 산 위에 한 개의 대나무가 있어 낮에는 둘이었다가 밤에는 합해서 하나가 되었다.(혹은 그 산도 또한 낮과 밤을 대나무처럼 열렸다 합쳤다 했다고 한다) 사자가 와서 사실대로 알렸다.
왕이 감은사에서 묵는데 이튿날 점심 때 보니 대나무가 합쳐져서 하나가 되는데, 천지가 진동하고 비바람이 몰아치며 7일 동안이나 어두웠다.
그달 16일에 이르러서야 바람이 자고 물결도 안정되었다. 왕이 배를 타고 그 산에 들어가니 용 한 마리가 검은 玉帶를 받들어 바친다.
왕은 용을 맞아 함께 앉아서 묻는다. “이 산이 대나무와 함께 혹은 갈라지고 혹은 합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용아 대답한다. “비유해 말씀드리자면 한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지 않고 두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대나무란 물건은 합쳐야 소리가 나는 것이오니 聖王께서는 소리로 천하를 다스리실 징조입니다. 왕께서는 이 대나무를 가지고 피리를 만들어 부시면 온 천하가 화평해질 것입니다. 이제 대왕의 아버님께서 바닷속의 큰 용이 되셨고, 유신은 다시 天神이 되어 두 성인이 마음을 같이 하여 이런 값으로 칠 수 없는 큰 보물을 보내시어 나로 하여금 바치게 한 것입니다.”
왕은 놀라고 기뻐하여 오색 비단과 金과 玉을 주고는 사자를 시켜 대나무를 베어 가지고 바다에서 나왔는데 그때 산과 용은 갑자기 모양을 감추고 보이지 않았다.
왕이 감은사에 묵고 17에 기림사 서쪽 시냇가에 이르러 수레를 멈추고 점심을 먹었다.
太子 理恭(뒤에 효소왕이 된다)이 대궐을 지키고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 말을 타고 달려와서 하례하고는 천천히 살펴보고 아뢰었다. “이 옥대의 여러 쪽은 모두 진짜 용입니다.” 왕이 말한다. “네가 어찌 그것을 아느냐?” “이 쪽 하나를 떼어 물에 넣어 보십시오.” 이에 옥대의 왼편 둘째 쪽을 떼어서 시냇물에 넣으니 금시에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고 그 땅은 이내 못이 되었으니 그 못을 龍淵이라 불렀다.
왕이 대궐로 돌아오자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月城天尊庫에 간직해 두었는데, 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병이 나으며, 가뭄에는 비가 오고 장마 지면 날이 개며, 바람이 멎고 물결이 가라앉는다. 이 피리를 만파식적이라 부르고 국보로 삼았다.
효소왕 때에 이르러 天授(周 則天武后의 연호) 4년 癸巳(693년)에 夫禮郞(당시 화랑)이 살아서 돌아온 이상한 일로 해서 다시 그 이름을 고쳐 萬萬波波息笛이라 했다.
자세한 것은 그의 傳記에 실려 있다.
<삼국유사> 제2권 기이 제2 만파식적.
불영봉표, 2시 35분.
● 불영재 고개마루에 있는 불영봉표
"延慶墓 香炭山因 啓下 佛嶺封標"이라 적혀 있다.
"연경의 묘에 쓸 향탄 즉 목탄을 생산하기 위한 산이므로 일반 백성들이 나무를 베지 못하도록 임금의 명을 받아 불령에 봉표를 세운다"는 뜻이다.
"연경"은 조선 제23대 순조(1790~ 1834 재위)의 아들 孝明世子(1809~ 1830)의 묘호이다.
용연폭포(기림폭포), 3시 5분.
기림사, 2시 35분.
우리는 기림사 뒷문으로 들어왔다.
기림사의 법당 대적광전
기림사 일주문, 4시.
골굴암
● 骨窟庵 磨崖如來坐像(보물 제581호)
동남향으로 여래좌상을 양각하였다.
전체높이 4m, 머리 높이는 1m이다. 소발에 육계가 큼직하고, 상호는 원만하고, 미소가 어려 자비스럽다.
어깨부터 얼굴의 뒤쪽 암벽을 많이 깎아내어 본존을 강조한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무릎부분부터는 바위면에 음각만하여 자연에 조화롭게 했다.
옷주름은 음각으로 처리하였는데 약간 투박하다. 양어깨를 덮어 물결모양으로 무릎아래까지 덮었고 가슴에는 승기지가 오른편에서 왼편으로 비스듬히 흘러 있다.
손 모양은 항마촉지인을 취하고 있는 것 같은데 오른손은 풍화로 떨어져 나가 볼 수 없다.
구름무늬 위의 연화대좌에 앉아있어서 하늘에서 내려오는 형상을 하고 있다. 마모가 심하여 가운데 일부분만 구름무늬을 확인할 수 있다.
광배는 암벽을 다듬어 음각으로 하였으며, 머리 주변에는 單瓣蓮花文이 조각되고 바깥으로 유려한 화염문이 거신광으로 장식되어 있다.
높은 육계와 부피감 없는 얼굴, 가는 눈, 작은 입, 좁고 긴 코의 독특한 얼굴과 만면한 미소 등은 형식화가 진행된 9세기 불상이다. 큼직한 육계와 원만자비한 상호 및 광배의 유려한 화염문으로 보아 통일신라 전성기인 8세기 이상적인 사실주의 풍이 남아있다.
이곳의 석질은 모래가 많이 섞인 석회암이어서 비바람에 많이 파손되어 있으며 양어깨와 무릎쪽이 특히 심하다.
몇년의 보호 작업끝에 1988년 비를 맞지 않도록 둥근 돔형의 천정을 만들고 암면에 화학처리를 하였다.
오륜탑
5시 25분, 오늘의 숙소
숙소 한국관유스호스텔
저녁을 먹고,
7시 25분, 동궁과 월지 밤나들이 왔다.
[전국정기도보] [대구방, 6월 9일~10일], 경주국립공원 2
오늘의 모든 일정은 여기서 끝났다.
이제 숙소로 돌아간다.
둘째 날 6월 10일 일요일,
아침부터 비가 왔다. 오는 듯 마는 듯 그렇게 종일 왔다.
불국사 주차장
불국사 일주문, 8시 35분.
靑馬 유치환 시비
토함산으로 간다.
추령갈림길, 10 시 5분.
토함산, 10시 15분.
잣나무숲길
시부거리, 12시 45분.
오늘 토함산 산행, 여기서 마친다.
숙소 한국관유스호스텔로 가서 점심 먹고,
보문호반길로.
박목월 시비
보문호 수상공연장
마치는 지점
부산방에서 냉콩국을 준비해 기다리고 있었다.
석포 님 모든 경비를 부담해 콩국을 만들어,
미송 님, 마야님, 해인화 님, 노동을 더하고,
따로 차에 싣고 왔다.
전국정기도보 주관하신 대구방 벗님들께 감사드립다.
아울러 멀리서 오신 벗님들께도 감사드릷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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