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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3월28일, 화욧길 서른번째], 지리산 노고단~ 화엄풍경길~화엄사 흑매

추연욱 2017. 3. 29. 07:02

 

 

 

[부산/ 3월28일, 화욧길 서른번째], 지리산 노고단~ 화엄풍경길~화엄사 흑매

 

 

 

화엄사에서

 

 

 

 

 

 

10시 35분, 성삼재 주차장에 왔다.

 

 

 

 

 

 

 

 

 

 

 

 

 

 

 

 

 

 

 

 

 

 

 

 

 

 

 

 

 

 

 

 

 

 

 

 

 

 

 

 

 

 

 

 

 

 

 

 

 

 

 

 

 

 

 

 

 

 

 

 

 

 

 

 

 

 

 

 

 

 

 

 

 

 

 

 

 

 

 

 

 

 

 

 

 

 

 

 

 

 

 

 

 

 

 

 

 

 

 

 

 

 

 

 

 

 

 

 

 

 

 

 

 

 

 

 

 

 

 

 

 

 

 

 

 

 

 

 

 

 

 

 

 

 

 

 

 

 

 

 

 

 

 

 

 

 

 

 

 

 

 

 

노고단대피소, 1시 45분.

 

 

 

 

 

 

 

 

 

 

 

 

 

 

 

 

 

 

 

 

 

 

 

 

 

 

 

 

노고단 대피소, 여기서

아이젠이 준비된 분, "넘어져도 다치지 않으실 분" 등은

노고단으로 가시고,

 

그외 점심 준비, 산상 만찬.

 

 

  

 

 

 

 

 

 

 

 

 

 

 

 

 

 

 

 

 

 

 

 

 

 

 

 

 

 

 

 

 

 

 

 

 

 

 

 

 

노고단,

신라 때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라고 하는 선도성모를 지리산 산신으로 모시고,

나라의 수호신으로 여겨· 가을로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선도성모를 높이는 말 老姑와, 제사를 올리던 祭壇이 있어 노고단이라 했다.

신라시대에는 화랑의 심신수련장이었고, 吉祥峰이라고 불렀다.

 

 

 

1시, 내려 간다.

 

 

 

 

 

 

 

 

 

 

 

왼쪽 지름길로 가고, 오른쪽 임도로도 가고.

 

 

 

 

 

 

 

 

 

 

 

 

 

 

 

 

 

 

 

 

 

 

 

 

 

 

 

 

 

 

 

 

 

 

 

 

 

 

 

무넹기, 1시 35분.

 

 

 

1929년 구례군 마산면 소재지에 큰 저수지를 만들었다.

그러나 들어오는 물의 양이 적어 저수지를 채우지 못했다,

그리하여 이듬해 마을 주민들이 해발 1300m의 노고단에서 전북으로 내려가는 물줄기 일부를,

구례 화엄사 계곡으로 내려올 수 있게 유도 수로 224m를 만들어 저수량을 확보하였다.

그런 까닭으로 구례군에서 지금도 농업용수가 풍부하여 매년 풍년 농사를 아룬다고 한다.

 

"무넹기", "무너미" 등은 물이 산 또는 고개를 넘는다는 뜻이다.

 

 

 

 

 

 

 

 

 

 

 

 

 

 

 

 

성삼재 주차장으로 돌아왔다. 1시 55분.

 

 

 

 

 

 

 

 

 

버스를 타고 화엄사로 간다.

본디 계획인 코재에서 화엄사 계곡 따라 내려가는 길은 역시 아이젠 탓으로 포기하고. 

 

 

 

2시 40분, 화엄사 산문에 왔다.

 

 

 

 

여기서 차에서 내려 입장권을 사서,

다시 버스를 타고 들어간다.

좀 이상한 동선이다.

 

 

화엄사 주차장

 

 

 

 

 

南嶽祠

 

 

신라는 국토를 수호하는 다섯 개의 산을 정하여 五嶽으로 삼았다.

"南嶽"은오악 중의 하나로 지리산을 지칭한다.

남악사는 남악의 성모를 모신 사당이란 뜻이다.

 

지리산은, 왕건의 어머니 위숙왕후를 천왕봉에 성모사를 세워 모시고,

박혁거세의 어머니 선도성모를 남악사에 모시면서 성모신앙의 성지가 되었다.

신라는 매년 이곳에서 봄 · 가을에 나라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제사를 지냈다.

남악사가 세워진 시기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삼국통일 이전의 일인 것은 분명하다.

 

 

남악사 안은 이렇다.

사진은 2011년 12월에 찍었다.

 

 

 

 

 

 

 

 

 

 

 

 

 

 

 

 

 

 

 

화엄사 일주문, 2시 55분.

 

 

 

 

 

 

 

 

관지에 적힌, "皇明崇禎九年歲舍丙資仲秋義昌君珖書"

"숭정 9년"의 "崇禎"은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毅宗(1628~ 1644 재위)의 연호다.

숭정 9년은 1636년이다.

 

편액을 쓴 이는 義昌君 李珖(1589~ 1645)이다.

선조대왕의 8째 아들이며, 인조의 숙부다.

 

 

 

일주문,

지금 보수라는 중이어서 백골집이다.

 

 

이런 모습이다.

2011년 12월에 찍었다.

 

 

 

 

 

國壹都大禪師碑銘

 

 

 

 

 

화엄사 중창주 碧巖 각성(1575~1660년)의 탑비이다.

그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참전하여 크게 활약하였고,

승군을 이끌고 남한산성을 축성하는 등, 조선후기 사회에서 불교계의 위상을 높이는데 공헌하였다.

또한 전란 후에는 화엄사를 비롯하여 해인사,

법주사 등의 여러 사찰의 중수를 주도하여 조선후기 불교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바는 1663년에 세웠다.

 

 

 

 

 

 

 

 

 

 

 

 

 

 

화엄사는,

신라 진흥왕 5년(544), 인도에서 온 승려 연기조사가 세웠다.,

선덕영왕 11년(642) 자장율사가 중창하였다.,

의상대사가 장육전(현재의 각황전)과 화엄석경을 만들었다는 등등 창건설이 있다.

 

1979년에 발견된 <新羅華嚴經寫經>에 따르면 신라 제35대 경덕왕(742~ 765 재위) 때 화엄학 승려였던 연기가 창건하였다. 

임진왜란에 불탔고,

7년 후인 인조 8년(1630) 碧巖 覺性(1575~ 1660)이 중수하여 선종대가람으로 인정받았고,

숙종 28년(1702) 장육전이 중건되어 선교양종대가람의 지위를 얻었다.

 

 

 

화엄사 대웅전(보물 제299호)

 

 

 

화엄사의 중심 법당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집으로 단정하고 빼어난 모습을 보여준다. 

사적기에 따르면 임진뢔란에 불탄 것을 조선 인조 14년(1636)에 재건하였다고 한다.

 

대웅전은 대규모의 4중계단으로 연결된 높은 석축 위에 서 있다.

직각으로 꺾인 높은 석축 위에 대웅전과 각황전이 있는데,

대둥전은 석축 가까이에,

각황전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자리집게 하여 중심건물인 대웅전이 작아 보이는 것을 피하려 하였다.

 

 

 

대웅전 편액 관지에도 일주문과 똑같이

"皇明崇禎九年歲舍丙資仲秋義昌君珖書"라 적혀있다.

義昌君이 1636년 일주문 편액과 같이 써서 내려준 것 같다.

 

 

 

안에는 법신불 비로자나불,

보신불 노사나불,

법신불 대신 인간의 역사에 나타나 중생들을 구제하는 석가모니불 등 삼신불을 모셨고,

본존불 뒤에는 1757년에 그린 비로자나삼신불탱화(보물 제1363호)가 있다. 

 

 

 

화엄사 가람 배치도

 

 

 

 

 

각황전(국보 제67호)

 

 

 

 

 

 

 

 

우리나라 절집 가운데 가장 크다.

거대한 규모와 안정된 비례에 엄격한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위엄과 기품을 두루 갖추고 았다.

정면 7칸, 측면 5칸의 중층 팔작지붕 집으로 밖에서 보면 2층집이지만 안에는 툭 터진 통층이다.

 

조선 숙종 25년(1699) 공사를 시작하여 4년만에 완공하였다.

공사를 마무리하자 숙종으로부터 覺皇殿이란 이름을 하사받고,

절의 격이 또한 더울 높아져 선교 양종 대가람이 되었다.

 

본디 이름은 장육전이었다.

절집 벽면 돌에다가 <화엄경>을 새겨 장식했다.

이 석경은 화엄사가 세워진 신라 경덕왕 이훙에 조성된 것이다,

임진왜란에 크게 불탔고, 사방 벽면을 둘렀던 화엄석경(보물 제11040호) 수만 점은 타고 깨어지고,

파편만 1500점쯤 남아있다. 석경들은 영전에 보관되어 있다. 

 

 

 

 

 

 

 

覺皇

부처님은 깨달은 왕[覺皇]이란 뜻으로 각황전이라 했다고도 하고,

 

화엄사는 신라 경덕왕 때 창건되어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다.

당시 덕이 높고 어질기로 이름난 주지승은 절을 복구하기 위해 빔낮으로 부처님께 기원하였다. 

 

어느날 꿈에 한 도승이 나타나,

"주지승의 정성이 지극하기에 부처님이 나를 보내 너의 뜻을 이룰 방법을 일러주었다.

내일 아침 날이 밝거든 아랫마을로 내려가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너의 뜻을 이야기하고,

절을 지어주도록 부탁하라. 그렇게 하면 반드시 너의 뜻을 이루리라"라 하였다.

 

꿈에서 깬 주지승은 일찍 채비를 하고 아랫 마을로 내려갔다.

바로 그때 한 사람이 나타났는데, 절에서 잔심부름이나 하고 밥을 얻어먹던 할멈이었다.

주지승은 기가 막혔다.

 

하나 도승의 말을 믿고 꿈이야기를 해 주었다.

할멈은 놀라고 어이가 없었다.

자신은 화엄사를 새로 짓는데 어떤 어떤 도움도 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심한 죄책감을 느꼈다.

결국은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나중에 이 소식을 들은 주지승 죄책감에 괴로워하였다. 

한편 관가에서는 주지승에게 살인죄를 씌워 잡으려 하자 어쩔 수 없이 청나라도 피신하였다.

 

이 무렵 청나라 황제는 나이 60에 공주 하나를 얻게 되어 매우 기뻐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주는 나면서부터 울기 시작하더니 도무지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황제는 노하여 공주를 궁궐 밖에 내다 버리게 하였다. 그리하여 대로변에 누각을 짓고 그 위에 공주를 올려 놓았다.

이 소문을 들은 주지승은 호기심에 생겨 한 번 가 보기로 하였다.

주지승이 공주의 궁궐에 이르자 신기하게도 공주는 울음을 그쳤다.

공주를 지키고 잇던 황후는 매우 기뻐했고, 황제와 대신들도 뛰어 나와 이 광경을 보았다.

 

황제는 너무나 기뻐 공주를 안아 번쩍 들어 올렸다. 순간 공주는 웃으며 손가락을로 주지승을 가리켰다.

주위의 눈길이 주지승에게 쏠리자 주지승은 겁이 나서 도망치려 하였다. 그러자 공주는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그 기미를 알아차린 황제는 신하들에게 명하여 주지승을 모셔 오게 하였다.

 

주지승은 조선에시 있었던 일과 이곳까지 온 사연을 말하고,

"죽을 죄를 지었으니, 벌을 내려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황제는 "공주가 주지승을 보고 울지 않는 것은 전생의 인연이 있기 때문이며,

그때의 할멈이 공주로 환생한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 주지승의 소원인 절을 지어주기로 약속하였다.

 

그리하여 화엄사로 돌아온 주지승은 열심히 절을 짓고,

법당의 이름을 황제의 깨달음으로 절을 짓게 되었다는 뜻으로 覺皇殿이라 했다.

 

 

 

 

각황전 앞 석등(국보 제12호)

 

 

 

높이가 6.4m나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세계에서 가장 큰 석등이다.

간주석이 장구 모양이어서 고복형석등이라 한다.

통일신라시대 만든 것으로 추정한다.

 

 

 

 

 

 

 

동오층석탑(보물 제132호)

 

 

 

 

원통전 앞 사자탑(보물 제300호)

 

탑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이형석탑으로 보기도 이상하고.

그래서 '석탑형 건조물' 또는 '露柱'라고도 한다.

어떤 신앙의 대상물인지 모르겠고,

조형의 새련성이 부족한 것으로 보아 9C 이후에 만들었을 것으로 본다.

 

 

각황전 黑梅

 

 

 

 

 

 

 

 

 

 

 

 

 

 

 

 

 

 

 

 

 

 

 

 

 

화엄사 홍매는,

1703년 각황전과 원통전을 중건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계파스님이 심었다.

화엄사 홍매는 다른 홍매와 달리 홑꽃으로 꽃잎이 다섯 장이다.

다른 홍매보다 꽃 색깔이 검붉어서 흑매라고도 한다.

 

 

화엄사 흑매, 이때가 절정이다.

오늘이 절정이다.

 

 

 

 

 

 

 

 

 

 

 

 

 

 

 

 

 

 

 

 

 

 

 

 

 

 

 

 

 

 

 

 

 

 

 

 

 

 

 

 

 

 

 

 

 

 

 

 

 

 

 

 

孝臺로 가고 싶었는데, 막혔다.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겠으나 오래 막혔다.

 

 

 

 

 

 

효대에는 사사자삼층석탑과 석등(국보 제35호)이 있다.

 

 

 

 

 

 

 

 

 

석등 간주석 안에 있는 공양하는 상은 화엄사를 창건했다는 연기조사,

사사자석탑의 스님상은 연기조사의 어머니라 전한다.

 

 

 

 

 

 

절 뒤로 해서 연기암으로 간다.

 

 

 

 

 

 

 

 

 

 

 

 

 

 

 

 

 

 

 

 

 

 

 

 

 

 

 

연기암, 3시 55분.

 

 

 

 

 

 

 

 

 

 

 

 

 

 

 

 

 

연기암 文殊菩薩

 

 

 

 

 

 

 

 

 

 

 

 

 

 

 

 

 

 

 

 

 

 

 

 

 

 

 

 

 

 

 

 

 

 

 

 

 

 

 

 

 

 

 

 

 

 

 

 

 

 

 

 

왔던 길로 되돌아 간다.

 

 

 

 

 

 

 

 

 

 

 

 

 

 

 

 

 

 

 

만월당 白梅

 

 

 

 

 

 

 

 

 

 

 

 

 

 

 

 

 

 

 

 

 

 

 

 

 

 

 

 

 

화엄사 주차장

 

 

 

4시 50분, 모든 일정을 마무리하고 돌아오는 차에 올랐다.

차는 막힘없이 잘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