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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소포타미아 문명과 그 주변

추연욱 2016. 4. 18. 12:00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그 주변

 

 

 

 

1. 메소포타미아 문명

 

1. 비옥한 초승달 - 비옥한 초승달(fertile crescent) 지역과 메소포타미아 문명

비옥한 초승달 지역은 서쪽으로 지중해와 맞닿고, 남쪽으로 아라비아 사막과 접하며 북으로 타우르스 산맥, 동쪽으로 자그로스 산맥을 경계로 하는 지역을 가리킨다. 이 지역 내에서도 지중해 연안 지역 특히 티그리스 · 유프라테스 강 사이의 땅은 대단히 비옥하였다. 두 강은 상류로부터 흘러온 비옥한 퇴적층을 강 유역에 쌓아놓았으며 매년 범람하였다. 이러한 범람은 토양을 항상 비옥하게 만들었다. 먼 옛날 반농경 민족이 새로운 땅을 찾아나섰을 때 이 두 강 사이 유역은 그들에게 이상적인 곳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리스인들이 강 사이의 땅이란 뜻의 메소포타미아라 명명했다.

지금은 이 지역이 거의 사막이지만 6~7천 년 전에는 기후가 현재보다 온화하고 강수량도 많았다.

 

이라크는 문명의 요람이라 불린다. 이 나라 한가운데로 흐르는 유프라테스 티그리스 두 강이 상류에서 하류로 날라다 준 비옥한 충적토가 농경의 터전이 되면서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태어났다. 이 문명은 독립된 문명이 아니고 수메르, 바빌로니아, 아시리아 등 지금의 이라크 땅을 터전삼아 일어난 고대문명을 총칭하는 개념이다. 이 지역을 James Brested(1865~1935)가 명명한 비옥한 초승달 지역과 일치한다. 브레스테드에 의하면 메소포타미아 문명권과 나일 삼각주지역을 연결하면 초승달을 옆으로 뉘어놓은 형상이 된다는 것이다. ‘비옥한이란 충적토가 쌓임으로써 농경의 적지가 되었음을 말한다. 초승달은 생긴 모습, 다른 하나는 커간다는 뜻이니 문명의 발상지를 상징한다.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 하류에는 나일강과는 달리 불규칙한 범람으로 대로는 참혹한 재앙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따라서 메소포타미아인은 이집트인과는 달리 자연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이 지역의 생활은 전반적으로 투쟁적이었다. 그들은 현세적인 삶을 살았고 사후세계에서의 인간의 운명에 대한 희망을 거의 갖지 않았다. 신에 대해서도 사랑보다는 두려움으로 대했다. 예술은 이집트보다 한층 격렬했고 비인격적인 것이었다.

 

수메르는 강한 비바람, 태양이 농작물을 태우기도 하고, 들짐이 가축과 농산물을 파괴하기도 하고 홍수 시기를 예측할 수 없었다. 자연이 인간보다 위대한 힘을 가졌다고 생각 그 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자 한다. 자연계에 있는 여러 요소를 신적 존재로 숭배했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는 노예제와 제국주의, 억압적인 왕과 사제 등은 모두 관개와 국경문제라는 공통의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그 결과 수학에 놀라운 진보를 보였다.

 

이라크 북부 고도 모술 - 시몬바오로 교회와 성토마스성당이 있다. 기독교도 공동묘지도 갖추고 있다. 시리아 다마스크스 - 사도바울 교회, 성 아나니교회, -바울이 잠시 머문 곳. 아레포 - 성당 정교회, 시리아 기독교, 아르메니아 교회가 있다.

아르메니아는 러시아, 터키로부터 박해를 받아 이곳으로 와 살게 된 아르메니아 인이 많다. 이들은 4C경 기독교를 국교로, 이들은 단성론(인간이 된 신성)을 믿은 탓에 451년 칼케돈 종교회의에서 이단으로 주류 기독교에서 멀어졌다.

 

2. 수메르

4000~2000BC에 이곳에 확고한 뿌리를 내린 최초의 민족이다. 우르크, 우르, 라가시, 니푸르 등 도시 문명.

수메르 혹은 아카드 지역 - BC 4000년경부터 수메르인 정착, Ur, Erech, Kish 등 산악지역에서 매소포타미아 동북쪽 삼각주로 이주. 이들의 신화의 지리적, 자연적 배경 중에는 메소포타미아 주변환경과 전혀 다른 모습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2. 수메르인은 초승달 지대인 동부산맥 지대에 살다가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역으로 이주해 온 민족이다. 메소포타미아 남부지대에는 금속과 돌을 함께 사용하는 문명이 알주바이드, 우르크 등지를 중심으로 상당히 발달해 있었다.

 

수메르, 이집트는 다른 문명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고 발달한 순수하고 독자적인 문명이다. 수메르는 세메르에서 왔다. 셈족의 나라라는 뜻이다. 수메르인들은 북쪽의 자그로스 산맥 일대에서 살다가 비옥한 땅을 찾아 남하했다. 수렵 채취 단계를 벗어나 농경 가축시대로 들어갔다. 수렵, 채취 단계에는 한 사람당 20의 땅이 필요했는데, 농경 단계에서는 20의 땅에 6천 명이 살 수 있다. 이들은 잉여 생산물을 축적하여 우르에 창고를 지었다.

 

하부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창조한 수메르 민족의 내력은 수수께끼이다. 정확한 발원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중앙아시아 고원지대로 추정된다. 인도의 초기문화와 어느 정도 유사성을 보이지만, 그들의 언어는 교착어이다. 현전하는 언어이건 사어이건 우리에게 알려진 다른 어떤 언어와도 관계도 없다. 수염을 깨끗이 깎고 땅딸막하고 머리가 넓은 민족이다. 4000년경부터 하부 메소포타미아에 살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다른 세대의 셈족에 의해 절정에 달한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기초를 이룬다.

 

메소포타미아 문명 발상지이다. 메소포타미아 하부 지역을 지칭하는 이름이다. 바그다드 북쪽으로부터 페르시아 만에 이르는 지금의 이라크 지역과 거의 일치한다.

 

그들은 평화적인 상호교를룰 통해 당시 계곡 하류에 살고있던 원주민을 이끌기 시작하였는데, 이들 원주민은 이미 신석기문화 단계를 훨씬 넘어선 불가사의한 사람들이었다. 각각 독립된 만 명 내외의 도시국가 여러 개 건설, 바퀴를 만들었다. BC 3000년 중엽 야생 당나귀가 끄는 전차로 전쟁, BC 3000년대 초에는 청동기, BC 2700년 경 세습적 왕 출현

 

BC 2400년경부터 아카드의 지배를 받는다. 그 후에는 아카드를 정복한 구트족의 지배를 받다가 BC 2100~2000년 사이 잠시 독립을 회복한다. 회복 후 우르 제3왕조때 전성기이다. 3왕조 창시자 우르남무는 인류 최초의 법전 함무라비법전을 남긴다.

BC 1970년경 셈족 계열의 아모리족에 멸망한다. 후에 아모리족의 한 도시국가인 바빌론이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평정, 함무라비왕 시대가 열린다.

 

자연신을 섬기는 자연종교 다신교이다. 신은 대략 2~3천쯤 된다. 가장 상위의 신은 하늘의 신 Anu(An), 대기와 바람의 신 Enril, 물의 신 Enki, 어머니신 Ninhursag 등인데 이들은 창조신이다. 아누는 이론상으로는 우르의 수호신이고, 실제로는 그 아들이며 니푸르의 수호신 엔릴리 가장 활동적이고 탁월한 신이다. 신들 세계의 힘을 상징한다. 아누의 권위를 대변하고 명령을 집행한다.

엔키는 에리두의 수호신이다. 지하 淡水의 지배자이며, 지혜, 주술의 신이다. 태초에 자신의 지혜로운 계획에 의하여 세상이 만들어지도록 한 신이다.

닌후르삭은 지모신이다. 해마다 새로운 풀과 식물이 자라게 하고 사막이 비옥한 땅으로 바뀌게 하고 가축떼가 늘어나게 하고 풍성한 수확, 창고가 온갖 곡물로 넘치게 한다. 우주 안에 있는 모든 생산적인 힘들의 화육(incarnation)인 까닭에 신들의 어머니 인류의 어머니, 창조자 위의 네 창조신과 더불어 세 종류의 천체신 1, 달신 Nana, 2, 태양신 Utu, 3, 전쟁과 풍요의 여신 Inanna

난나는 달의 힘 상징, 우르의 수호신, 우투는 달의 신의 아들이다. 세계 질서를 조정 감독하하 정의의 신, 재판관으로 시파르의 수호신으로 숭배. 난나는 금성(Venus) 곧 전쟁의 여신, 살아과 풍요. 수메르 만신전에는 이상 7신 외에 상위 계층에 해당하는 50신들의 모임이 있었는데, 그모임은 Anunnaki라 한다. 이들 중 가장 유명한 신은 Dumuzi이다. 그는 본디 우룩의 왕이었으나 나중에 신의 지위를 부여받아 가축을 돌보는 목동신이다. 이난나 여신의 배우자로 죽었다 살아나는 죽음 - 부활의 의식을 대표하는 신이다.

 

EnkiNinmah - 상급 신들을 위해 일하던 하급 신들이 힘든 노력에 대해 불평한다. 그러나 지혜의 신 엔키는 깊은 잠에 빠져있어 그들의 불평과 탄식을 듣지 못한다. 이에 그의 어머니 Nimmu가 그를 잠에서 깨우고 엔키는 그녀에게 어떻게 하면 닌마흐여신의 도움을 받아 원시 태양신 Apsu 위의 진흙을 가지고서 신들의 노력을 거들 인간을 만들 수 있는지 가르쳐 준다.

홍수신화는 Ziusudra - Nippur에서 발굴.

 

아카드는 BC 2600ssurud부터 이라크 북쪽 지역에 정착하여 최초의 셈족문화를 이루었다.

Sargon1(2334~2279 BC)가 악카드왕국 건설, Naramsin(2260~2223 BC)때 전성기이다. 메소포타미아 동쪽 지역 자그로스 산맥으로무터 이주해온 구트족이 Bc 2150년경 아카드 왕국을 멸한다. 그 와중에 수메르가 100년동안 국운을 회복한다. 그런 kruf국 아모리인에게 멸망한다.

 

함무라비 왕에 의하여 시작된 고바빌로니아 왕국 - BC 14C 아수르의 우발릿(Asshhur-uballit, 1356~1321 BC)에 의해 시작된 셈족의 아수르 왕국이 당시 세계 제국으로 성장하여 BC 9~8C 전성기에 도달한다. BC 7C 같은 셈족의 갈데아인들이 아수르를 몰아내고 신바빌로니아 제국을 건설한다.

신바빌로니아는 BC 529년 페르시아에 멸망한다.

수메르 - 아카드 - 수메르 회복 - 고바빌로니아 - 앗수르 - 신바빌로니아 - 페르시아조 전개된다.

 

수메르 최고신 아누와 엔릴은 바빌론과 앗수르에서 제각기 MardukAshur에게로 옮겨가고 엔키의 이름 Ea, 닌후르삭은 Damki로 이름이 바뀐다. 난나는 Sin으로, 태양신 우투는 Shamash, 이난나는 Ishtar로 이름이 바뀐다. 마르둑, 아슈르, 에아는 우주적인 신, 사마쉬, 이슈타르는 천체신, 두무지는 Tammuz로 이름이 바뀌고 이슈타르 여신의 남편으로 나타난다.

 

Akitu 축제 - 춘분인 Nisan의 월의 첫 11일 동안 거행한다. 넷째 날 창조신화인 에누마 엘리쉬를 낭송하고 극화하는데, 이 제의에서 왕은 마르둑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는 오두막으로 들어가 여신을 상징하는 왕후나 여사제 또는 신전 창기와 성관계를 맺는 의식을 행했다. 이런 의식은 수메르 종교에서 거행되던 두무지와 이난나의 거룩한 결혼의식을 그대로 재현한다. 이와는 별도로 탐무즈와 이슈타르 사이의 성관계를 재현하는 의식이 왕실에서 나중에는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 널리 행해졌다. 신전에서 성행위는 다신과 풍요를 약속받으려는 풍요 제의의 한 중요한 특성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 왕과 왕후 사이의 성관계를 통해 왕조와 국가의 연속성을 확보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탐무즈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의식도 있었다. 이 죽음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풍요의 계절인 봄이 지나고 뜨겁고 메마른 여름이 시작됨을 뜻한다. 그의 죽을을 애도하는 의식이 행해지는 시기는 건조한 여름의 열기로 식물의 성장이 중지되는 때이다. 그의 배우자인 여신이 그의 몸을 찾기 위해 지하 세계로 내려가는 것은 곡물 창고의 음식 감소와 불안정한 삶의 dsu속을 의미했다. 다시 그가 살아나서 지상 세계로 복귀한다는 것은 그처럼 불안정한 삶이 끝나고 새로운 풍요가 시작됨을 뜻한다.

 

아카드 왕국은 수메르의 종교적 유산을 거의 그대로 물려받았다. 신화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수메르 신화보다 한층 발전되거나 새로 만들어진 것으로 창조신화와 홍수신화가 있다.

창조신화 에누마 엘리쉬는 Asshurbanipal(668~630 BC)왕의 궁중 도서관에서 발견된 7개의 토판 문서에 있다.

아무것도 창조되기 전의 상태를 원시 태양인 ApsuTaimat 부부 및 이들 사이에 태어난 Mummu(수증기 또는 안개)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압수와 타이맛은 계속해서 자식들을 낳는다. 그러던 어느날 압수는 자녀 신들의 번식과 그들로 인한 소음에 격분한 나머지 그들을 멸하기로 결심한다. 이를 알게 된 지혜의 여신 에아는 주문을 외어 압수를 깊은 잠에 빠지게 한 후 그를 죽인다. 이어 자신의 신전을 건축한 그의 아내 담키나와 결합하여 폭풍우의 신 마르둑을 낳는다. 남편을 잃고 상심하던 타이맛은 Kingu의 자극을 받아 복수를 결심하고 에아와 대적하기 위해 킹구를 남편 및 군대 장관으로 삼고 남편의 죽음을 동정하는 신들의 무리를 소집한다.

양대 세력의 싸움에서 처음에는 에아가 패배하지만 마르둑이 싸움을 자청하고 나서 사정이 달라진다. 다른 신들로부터 최고신의 권세와 전 우주에 대한 왕권을 부여받은 마르둑은 티아맛과 싸움을 벌인 끝에 승리를 거두고 그를 죽이고 그의 몸을 양분하여 상반신으로는 하늘을 하반신으로 땅을 만든다. 그후 마르둑은 해와 달, 별들을 만들고 타이맛 편에 가담한 신들에게 중노동을 시킨다. 그러나 중노동에 시달리던 신들이 그들의 고통을 하소연하자 마르둑은 그들의 짐을 덜고 그들을 섬기게 할 목적으로 킹구를 죽여 그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를 흙과 혼합하여 인간을 창조한다.

이는 함무라비 왕의 정치적 부상으로 인한 새로운 세계 질서의 형성을 신화적인 용어로 해설하려는 시도에서 비롯된 신화이다. 곧 일개 지방신에 불과하던 마르둑이 바빌론 만신전의 최고신으로 승격되었는가에 대한 우주적 설명이다. 이 신화는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의 연례적 범람으로 인한 세계 질서의 위기 및 생존의 위협을 중심 소재로 하여 마르둑이 태초의 혼돈을 상징하는 원시 바다의 세력을 정복함으로써 창조신으로 부상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홍수와 관련된 신화는 길가메시서사시에 포함되어 있다. 역시 아수르바니팔 왕의 도서관에서 발굴된 12개 토판의 서사시로 그 11번째 토판에 홍수이야기가 실려있다.

주인공 길가메쉬는 무한한 지혜와 지식을 가진 자로서 수메르 만신전의 최고신인 아누와 그의 딸 이슈타르여신에게 신전을 지어 봉헌한 우룩의 왕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의 무절제한 욕망과 정치적 억압은 신들로 하여금 그를 상대할 Enkidu창조하게 만든다. 그러나 길가메쉬는 엔키두와 싸워 이긴 후 도리어 그와 친구가 되어서는 삼목숲을 지키는 Humbaba라는 괴물을 대적하러 위험한 여행을 떠난다. 태양신 사마쉬의 도움을 받아 훔바바를 처치한 그들은 우룩으로 돌아온다.

한편 이슈타르 여신의 구혼을 거절한 길가메쉬는 그녀가 앙심을 품고 보낸 하늘의 황소를 엔키두와 함께 격퇴하지만 이 때문에 엔키두는 신들의 결정에 의하여 생명을 잃게된다. 그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길가메쉬는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힌 나머지 영생불사를 얻기 위한 여행을 떠난다. 우여곡절 끝에 홍수의 주인공 Utnapishtim을 만나 그로부터 영생을 얻게 된, 곧 홍수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다. 홍수 이야기를 끝낸 우트나피슈팀은 그에게 엿새 동안 잠을 자지 않으면 영생을 얻을 수 없다고 하나 그는 피곤을 견디지 못해 엿새 동안 줄곧 잠에 빠진다. 실의에 빠진 길가메쉬는 우트나피슈팀에게 다른 방도가 없는가를 묻는다.

이에 우트나피슈팀은 그에게 생명의 풀을 얻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길가메쉬는 그 가르침에 따라 생명의 풀을 얻는다. 그것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가던 길가메쉬는 생명의 풀을 연못가에 둔 채로 목욕을 하다가 뱀에게 그것을 빼앗기고 만다. 영생을 얻으려는 모든 시도가 실패한 그는 눈물을 머금고 고향 우룩으로 돌아간다.

 

Astarte

풍요와 사랑의 여신, 전쟁의 여신이다. 원시 지모신에서 유래한다.

수메르에서는 Inanna(하늘의 여왕), 바빌로니아, 아시리아에서는 Isstar()이라 했다. 페니키아(시리아, 레바논)에서는 아스타르테라 했다. 빛의 뜻이다. 금성과 동일시되었는데, 그녀의 후계자가 Venus이다. 구약에는 아스다롯이라 했다.

서아시아 여러 지역에서 왕이나 영주가 연례적으로 이 여신의 신전에 공물을 바치고 여사제와 성관계를 맺는 관습이 있었다. 이것은 여신과 그녀의 연인 간의 성행위를 모방한 것이다. 지역 주민들에게는 풍요를 비는 신성한 제식으로 여겨져 왔다. 왕들은 여사제를 통해 이난나와 결합해야 왕권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때로는 더 skl은 풍요를 위해 여신의 희생 제물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난나는 생명을 증식시켜 풍요를 베풀고 때가 되면 그 생명을 파괴하고 그로부터 새로운 생명을 끌어내는 자비로우면서도 잔인한 대모신이었다. 그리고 여사제는 강력한 여신의 대리자였다. 왕과 여사제의 성관계는 여사제가 왕에게 몸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왕이 여신의 대리자인 여사제에게 몸을 바치는 것이었다.

 

메소포타미아의 聖婚禮(Sacred marrage rite)는 매년 신년 행사로 도시의 통치자와 간택된 여사제 사이에 혼인을 올리는 관습이다. 여사제는 출산 여신의 역할을 대행하며 통치자는 여신과 혼인함으로써 도시민들에게 풍요를 약속하는 것이다. 성혼례 기간은 보통 12~13일이었다. 여사제는 층계탑(Ziggrat) 꼭대기 神房에 살았다. 지구라트 꼭대기에는 신당과 정원이 있었으며 여사제가 제사를 지내며 정원을 가꾸었다.

성혼례는 메소포타미아에 도성 국가가 성립되었던 기원전 40세기경부터 기원전 6세기 중엽까지 계속되었다.

인안나는 -안나하늘의 여주에서 파생된 이름이다. 메소포타미아의 인장 그림을 보면 전갈 그림이 있는 것으로 보아 성혼례 시기가 추분이었음을 암시한다. BC 4000여 년부터 BC 2000여 년까지 춘분에는 황소자리가 추분에는 전갈자리가 떴다.

성혼례를 통해 태어난 아들이 통치자가 된 경우도 있다. BC 25C경 우루크의 통치자였던 길가메쉬는 그의 어머니를 여신이라 했다. 루갈반다는 길가메쉬의 아버지이며 우루크의 왕이었다. 어머니를 닌순(들소 여신)이라 부른 것은 그가 성혼례로 태어났음을 알려준다. 닌순은 성혼례 역을 맡았던 여사제를 일컫는 것이다.

BC 21C초 우르 3왕조의 창시자 우르남무의 아들 슐기(2095~2048 BC 재위)는 자기 어머니가 닌순이라 했다. 두무지는 바드티비라의 양치기 왕이었다. 바드티비라는 우르크의 동쪽 중앙 메소포타미아의 티그리스 강변에 위치한 곳으로 목양을 주로 했던 곳이다. 수메르의 태초 홍수이야기에 하늘에서 왕권이 내려온 후 두 번째로 바드티비라를 왕자와 성녀에게 주었다는 내용이 있다. 왕자는 두무지를 성녀는 인안나를 가리킨다. 성혼례를 행하는 통치자와 여사제를 두무지와 인안나라 불렀으며 그득은 연인의 대명사로 사용되었다.

인안나는 밤세워 노래하고 춤추며 놀다가 두무지를 만났다. 첫 눈에 반한 두무지는 이난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녀가 집에 가야 한다고 말하자 두무지는 여자 친구들과 노래하며 춤추고 놀다가 동이 트는 줄도 몰랐다고 그녀의 어머니에게 거짓말하고 자기와 달빛에 잠자리를 같이 하자고 유혹한다. 이난나는 자기는 길거리에서 서성거리는 여자가 아니라고 거절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두무지는 이난나의 집으로 달려와 그녀의 어머니에게 청혼한다. 이난나의 어머니는 결혼을 허락한다.

가부장제가 강화되면서 여사제의 역할은 점차 수동적으로 변해갔고, 왕에게 자신의 몸을 파는 것으로 인식되어갔다. 나중에는 단순한 매춘으로 전락했다. 이와함께 이난나는 연애의 여신으로 격하되었다. 기독교가 서구 세계를 지배하면서 아스타로트는 악마의 이름이 되었다.

길가메시는 BC 2000년경부터 기록되었다. 그중 BC 7C 앗시리아 판본이 가장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다. 여기에는 이슈타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이슈타르는 길가메시에게 사랑을 호소하지만 거부당한다. 길가메시에게는 Tammauz를 비롯한 많은 애인이 있었다. 길가메시는 그들을 학대하는 이슈타르의 애인이 될 수는 없었다. 그러자 이슈타르는 아버지인 하늘의 신 Anu를 졸라 하늘의 황소를 풀어 공격하게 하여 복수하려했지만 길가메시가 황소를 해치움으로 복수도 성공하지 못했다.

BC 9C 앗시리아늬의 아슈르나시르팔이 이슈타르에게 바친 찬가에 그녀는 전쟁과 전투의 여주인, 바다를 휘젓고 언덕을 밟으며 나아가 적들을 지배하는 분이다. 또 그녀는 생명을 주시는 분이며 하늘과 땅의 여주인이고, 모든 신들의 강력한 여왕이다. 길가메시에서는 심술 많고 힘은 그리 신통치 않는 공주에 불과한 모습으로 나오고 있다. 이것은 여신의 권위가 도전받고 약화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이때 남성의 권리가 증대되고 남성들이 이 오랜 의식을 거부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난나의 명계 여행

이난나는 형부의 장례식에 참가하기 위해 지하세계로 간다. 죽음과 상극인 생명의 여신이 지하 세계로 내려가 그곳의 비밀을 알아내려 하자 언니 에리슈키갈의 분노를 사게 되었고, 다른 신들조차도 무모한 시도라고 비난했다.

지하로 내려가기 전 이난나는 7가지 신권을 모았다. 대초원의 왕관 슈구라목에 건 청금석 구슬, 가슴에 늘어뜨린 두 줄의 구슬 끈, 가슴에 댄 금속판, 손목에 건 금팔찌, 손에 든 청금석 홀, 예복 등. 7거지 의장으로 변화시켜 몸에 걸었다. 그리고 그녀의 호위 전사인 시녀 닌슈부르에게 만약 사흘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으면 물의 신 엔키에게 도움을 청하라고 일렀다.

이난나는 지하세계 입구에 이르러 문을 거칠게 두드리며 문을 열 것을 명령했다. 그녀가 도착했음을 알게 된 문지기 네티는 바로 에리슈키갈에게 고한다. 이어 네티는 이난나가 걸친 7가지 의장에 대하여 설명한다. 이 말을 들은 에리슈키갈은 지하 세계의 7개 문의 빗장을 지르고 하나씩 각각의 문을 조금씩만 열고 이난나를 들여보내라. 이난나가 들어올 때 그녀의 여왕 의장을 벗겨라. 에리슈키갈은 자신엑 pdnl협이 되는 이나난의 7가지 신권을 제거한 것이다. 또한 저승에 갈 때 이승에서 누리던 모든 권력을 버려야 함을 의미한다.

이렇게 7가지 신권을 빼앗기고 벌거벗은 채 왕좌가 놓인 방으로 들어갔다. 이난나가 들어서지자 에리슈키갈은 왕좌에서 일어나서 죽음의 시선을 그녀에게 고정시켰다. 그리고 그녀를 내리쳤다. 이난나는 시체로 변했다. 벽의 고리에 걸려 석어가는 신세가 되었다.

사흘이 지나도 이난나가 돌아오지 않자 닌슈부르는 미리 명령받은 대로 누더기만 걸치고 신들의 회당과 집들을 돌며 통곡했다. 그리고 하늘의 신 이난나의 할아버지 Enlil을 찾아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엔릴은 이난나가 애초에 지하 세계를 찾은 것은 잘못이라며 법도에 따라 그곳에 남아야 한다고 했다. 닌슈부르는 달의 신 이난나의 아버지 Nanna를 찾았지만 똑같은 대답만 했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이난나의 시아버지인 지하수의 신 엔키에게 갔다. 엔키는 손톱 밑의 대를 모아 쿠가라와 갈라투르라는 남자도 여지도 아닌 생물을 만들었다. 엔키는 그들에게 각각 생명의 양식과 생명의 물을 주고 그들이 해야 할 일을 일러주었다. 두 사람은 조금씩 열려 있는 지하 세계의 7개의 문으로 몰래 들어갔다. 왕좌가 있는 방에 들어가 보니 에리슈키갈이 머리를 풀어헤친 채 울부짖고 있었다. 죽은 남편을 애도하는 것이라고 한다.

쿠가라와 칼라투르는 엔키가 일러 준 대로 함께 울부짖으며 이리슈키갈을 위로했다. 두 사람의 위로에 고마워하던 에리슈키갈은 그들에게 답례를 하겠다고 하자 그들은 이난나의 시체를 요구해 받아낸다. 쿠가라는 시체에 생명의 양식을 뿌리고 갈라투르는 생명의 물을 뿌려 이난나는 일어서게 된다.

이난나는 서둘러 지상으로 올라가고자 했다. 그러나 이눈나가 그녀를 붙잡았다. 그리고 돌아가고 싶다면 대신할 사람을 한 명 남겨두어야 한다고 했다. 동시에 갈라라는 마귀들이 그녀를 붙잡았다. 갈라에게 에워싸인 이난나가 지하 세계 입구에 나오자 닌슈부르가 누더기를 입은 모습 그대로 기다리고 있었다. 갈라들은 닌슈부르를 대신 데려가려 하자 이난나는 거절했다. 결국 이난나는 갈라들에게 둘러싸인 채 계속 걸어야 했다. 그녀는 자신을 숭배하는 신전이 있는 여러 도시들을 지나게 되고 상복을 입고 죽은 그녀를 애도하는 자신의 아들들을 보게된다. 갈라는 이난나의 아들을 대신 데려가겠다고 하지만 거절한다. 곧 그들은 우르크라는 도시에 도착했다. 거기서 이난나는 남편 Dumiz(바빌로니아에서는 탐무즈)를 만나게 된다. 두무즈는 상복을 입지도 않고 빛나는 의장을 걸치고 화려한 왕좌에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이난나는 분노가 치밀어 갈라에게 두무지를 데려가라고 외친다. 그러자 저승사자들은 인안나를 붙잡는다. 양치기 두무지의 아내의 오빠인 태양신 우투에게 눈물을 흘리며 살려달라고 애원한다. 태양신 우투는 두무지의 손과 발을 도마뱀으로 바뀌게 하여 저승사자들에게서 빠져나올 수 있게 도와 주었다.

들판으로 도망간 두무지는 그의 누이 게슈틴안나(하늘의 포도)가 일하는 양조장에 숨었으나 날아다니던 파리가 이를 알아차리고 이난나에게 일러바쳐 결국 붙잡히게 된다.

두무지가 지하 세계로 끌려가게 되자 그의 누이 게슈티난나가 그와 함께 운명의 짐을 지겠다고 나섰다. 이 모습에 감동한 이난나는 에리슈기갈과 의논 끝에 남편 두무지와 그를 숨겨준 시누이 게슈티난나가 반년씩 나누어 지하 세계에 머물도록 했다. 지하 세계의 비밀을 체험한 그녀는 더욱 강력한 힘을 지닌 신이 되었다. 그녀는 두무지를 통해 삶과 죽음이 반복되는 자연의 순환 과정을 확립시켰다. 그와 함께 언니 에리슈키갈과도 화해하게 된다. Joseph Cambell(1904~1987)천의 얼굴들 가진 영웅에서 빛과 어둠을 상징하는 자매 이난나와 에리슈키갈이 두 얼굴을 가진 한 여신이라 했다.

James George Frazer(1854~1941)는 해마다 죽고 다시 돋아나는 곡물의 정령으로 지상과 지하를 왕복하는 두무지는 아도니스나 페르세포네에게로 이어진다고 한다.

 

양치기 두무지와 포도주의 여신 게슈틴안나가 각각 반년씩 저승에 내려갔다 돌아오는 주기는 건기와 우기가 분명하게 나누어져 있는 풍토에서 형성된 자연종교이다. 양치기의 죽음은 여름이 되면서 염소나 양의 풀을 찾아 헤매는 양치기의 광경을 표현한 것이다. 포도주의 여신의 죽음은 한 해의 포도를 수확해 포도주로 만들어 술통에 저장하고 지하에 보관하는 상황을 저승 신화로 이야기 한 것이다.

 

타무즈는 바빌로니아 신으로 봄의 태양과 식물의 생성을 신격화한 것이다. 이슈타르의 남편으로 그녀에 의해 살해당하는데 이슈타르는 이를 후회하여 저승에 내려가 많은 고난 끝에 생명수를 얻어 타무즈를 소생시키고 Attis의 이름으로 해마다 생의 쇠잔과 소생, 특히 식물적 삶을 재현시킨다. 그들은 한해 한번씩 죽고 또 죽음에서 소생하는 신으로 의인화시켰다.

시리아의 아도나이, 그리스의 아도니스와 동일한 신이며, 식물의 고사와 재생을 상징한다.

 

수메르인들은 역사의대부분을 도시국가들의 느슨한 동맹체를 이루고 살았고, 군사적 목적을 위해서만 연합했다. 각 도시국가에는 Patesi라 불리는 우두머리가 있었다. 파테세는 최고 재판장이자 군사령관이었으며 공동 관계체계의 감독이기도 했다. 때로 지배자 중 열 j도시에 자신의 권력을 확대하고 왕의 칭호를 취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아카드인, 또는 그후 바빌로니아, 아시리안인, 칼데아같은 제국을 세우지는 못했다.

생업은 농업이었다. 수메르인은 뛰어난 농부로 관개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었고, 그 덕택으로 다량의 곡물과 아열대성 과일을 생산할 수 있었다. 토지의 대부분은 지배자, 사제, 군장교들에 의해 대영지 형태로 소유되어 있었고, 일반 농민들은 소작농이나 농노신세였다.

상업은 두 번째 부의 원천이었다. 주변 모든 지역과 무역 거래가 활발했는데 북부와 서부에서 생산된 금속과 목재를 계곡 하루 지역의 농산물 및 수공업 제품과 교환했다. 이때 치폐, 영수증, 어음, 신용장 등 상거레 수단의 대부분이 일상적으로 사용되었다.

당초 그들의 종교는 다신교적 신인동형론이었다. 그들은 인간의 속성과 성격을 지닌 태양신, 비와 바람의 신, 자연의 생산력을 상징하는 신과 여신을 믿었다. 이 신들은 선을 행할 수도 있고 악을 행할 수도 있는 존재라 생각했다. 이들의 종교는 현세를 위한 것이었다. 내세에 대한 희망과 복락은 주지 않았다. 내세란 어둡고 무서운 곳-나중에 저승(shoel)이라 불렀다-에서의 일시적 체류일 다름이었다. 죽은 사람의 영혼은 여기에 잠깐, 대략 한 세대가량 떠돌다가 사라져 버린다고 생각했다. 아무도 현세에서의 불행에 대한 보상으로 다른 세계에서의 부활이나 복된 영생을 기대할 수 없었다. 죽음은 완벽한 승리였다. 다라서 시신에 대해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시신은 대개 관도 없이 가옥의 마루 아래 매장되었고 영혼이 사요할 부장품도 별로 묻지 않았다.

신들은 영적 존재가 아니라 대개 인간의 나약함과 열정을 지닌 인간으로 형상화된 존재였다. 신이 인간에게 이롭게 하는 것이 있다면 주로 물질적인 것-풍년, 사업의 번창이었다. 수메르인의 모든 주요 신들은 진리, , 전쟁의 애호자로 찬양되었다. 여신 닌쉬는 고아들을 위로하고 과부가 없게하며 강자에게는 파멸을 파멸을 안겨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듯 고상한 이상을 구현한 이 신들은 거짓과 다툼 같은 사악함도 창조했으며 모든 인간에게 죄악에 한 본성을 부여하기도 했다.

 

설형문자는 끝이 네모난 갈대로 진흙판에 새긴 쇄기모양의 문자이다. 처음 상형문자로 출발했다가 점차 약 350개의 음절기호 및 발음기호로 변형되었다. BC 3000년경에서 500년경까지 근동 거의 전 지역에서 상업적 계약의 표준 매개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수학의 경우 기하학을 제외한 모든 분야에서 이집트를 능가하였다. 곱셈과 나눗셈법의 발견, 제곱근과 세제곱근의 구하는 법도 알아냈다. 숫자 체계와 도량형법은 60을 가장 보편적인 단위로 사용하는 12진법과 물시계, 태음력을 고안했다.

수메르인은 점성술을 믿은 최초의 사람이다. 점성술에 대한 관심으로 천문학적 관측과 행성운동의 예측에서 선구자가 되었다.

의사들은 병의 원인이라고 믿어지는 사악한 영을 몰아내기 위해 부적을 사용하였다.

Samuel Noah Kramer"History Begins at Sumer"에서 수메르 인에 의해 이루어진 인류 최초의 것이 39가지라 했다. 학교, 촌지, 미성년자 문제, 국가 간의 신경전, 의회제, 역사가, 법전, 판례, 면세에 관한 사례, 처방전, 농사 월력, 원예술(가로수 식목), 우주론과 우주진화론, 도덕적 규범, 고난과 복종, 격언과 금언, 서사시, 영웅시대, 동물우화, 학술 보고서, 낙원설화, 대홍수 이야기, 부활, 세계 평화주의자, 사랑의 노래, 도서목록, 용의 살해, 문학적 표절, 종교적 애도가, 이상적인 왕, 마라톤 우승자, , 신성한 결혼식, 눈물짓는 여신, 자장가, 이상적인 어머니상, 만가, 곡괭이와 쟁기, 수족관 등이다.

 

1만년 전 서아시아 지역은 채취시대에서 농경시대로 접어들고 있었다. 지모신을 숭배했다. 지모신 신앙은 아이를 낳는 어머니, 만물의 어머니라는 이미지를 살리기 위해서였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신전을 중심으로 한 도시국가가 성립되자 지모신은 국가나 도시의 수호신으로 떠받들어 졌다.

 

메소포타미아 도시국가들은 BC 3000~BC 5000 사이 자신들이 숭배하는 신을 모신 지구라트(ziggurat)를 건설했다. 우르, 바빌로니아, 우르크 같은 도시들은 중앙에 거대한 지구라트를 갖추고 있었다. 수백 개의 지구라트를 만들었다. 현재 유적이 확인된 것만 해도 50곳이 넘는다. 피라미드 형태의 탑이다. 장군총처럼 방단형이다. 특징적인 건물은 지구라트 - 높은 대지위에 계단이 딸린 탑을 쌓고 그 위에 신전을 올린 피라미드형 건축물.

최고의 지구라트는 우르의 것이다. BC 1200년경 건설, 5단 높이 50m, 꼭대기의 신전은 신관만 출입. 우르는 수메르 중심지. 지금까지 알려진 최고의 법전 우르남무법전. 지구라트 중심부는 햇볓에 말린 벽돌, 표면은 불에 구운 벽돌, 여러 가지 그림과 모자이크로 장식.

 

수메르 홍수신화 - 유대인 BC 586년 바빌론에 끌려가 포로생활을 하면서 그곳에서 들은 홍수신화를 BC 400년 창세기를 최종 편집할 때 자신들의 신화로 변형, 유대의 사제가 점토판을 보고 교훈적 내용을 성서에 기록.

주인공 지우수투라, 7일간 비, 니시르산 정상, 비둘기, 제비, 까마귀

바빌로니아에서는 우트나피슈팀, 유프라테스 강 언덕 슈롯파크라는 지역에 한정.

홍수신화는 세계에 500편 이상, 86편을 조사 62편은 메소포타미아와 유대설화와 곤련이 없다. 그러므로 이것은 홍수라는 유사한 자연계의 대재앙을 겪은 인brhd통의 경험의 유산이다. 수메르 바빌론의 홍수신화 유형은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유역의 대대앙에 가까운 홍수가 주기적으로 일어났던 사건을 묘사한 것.

 

* 슈메르의 천지창조와 대홍수 신화.

태초에는 Nammu(바다)만 있었다.

여기서 Enlil(바람)이 나타나, An(하늘), Ki()으로 나누었다.

EnlilNinlil()을 따라가 Nanda(Sin)을 낳았다.

- EnlilNlnlil은 저승으로 쫓겨나 딜님 Nanda를 저승에서 낳는다.

다른 아이 셋을 낳아 Nanda 대신 저승에 두고,

Nanda를 데리고 나와 하늘에 올라가 밤을 비춘다.

Nanda는 미남신 Ningal에게서 Utu()를 낳아 낮을 비춘다.

EnlilEnki(물과 지혜의 신)를 도와 곡식이 잘 되게 하였다.

- 식량이 풍부하게 되자 신들은 일하지 않았다. 그래서 신들은 굶게 되었다.

이에 Enlil은 신들이 하는 일을 대신하여 줄 사람을 만들었다.

- EnlilNammuNinmah(출산의 신)을 시켜서 바다 위에 떠 있는 진흙을 가지고 검은 머리의 사람들을 만들고, Dummuzi(Tammuzi, 목축의 신)를 시켜 소우리, 양우리를 만들었다.

Dummuzi가 죽자 그를 사랑하는 Ishtar도 따라갔다.

- 그러나 저승의 신 Allatu에게 붙잡혀 나오지 못했다.

- 사랑의 신이 저승에 갔으니 땅 위의 모든 생물들은 사랑하고 번식하는 일을 그치고 멸종할 지 경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신들은 저승으로 사신을 보내 생명수를 뿌려 IshtarDummuzi를 소 생시켜 데리고 나왔다.

- 그러자 지상의 모든 것도 다시 번식.

- 세상에 살아있는 것은 해마다 한번씩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

Enki의 딸 InannaErech에 살았는데 Enki를 찾아뵈러 갔다. Enki는 너무나 반가워서 Inanna와 작별할 때, Me라는 운명의 글을 주었다. EnkiMe를 준 것을 후회하고 다시 Erech로 사신을 보냈다. Inanna의 대신이 Enki가 보낸 사신을 만났는데 꾀를 부려 내주지 않고 사신을 돌려 보냈다.

- 이리하여 Me를 가지게 된 인간들은 무슨 소원이든지 다 이루며 잘 살았다.

 

신들은 큰 홍수를 내려보내 사람들을 모두 없애기로 했다. EnkiSippar의 왕 Ziusudra에게 신들의 계획을 알려주고 홍수에 대비하여 큰 배를 만들라고 일렀다.

- Ziusudra는 큰 배를 만들고 홍수가 나자 가족들과 곡씩의 씨 등을 가지고 배를 탔다.

- 7일 만에 홍수가 끝나자 Ziusudra는 소와 양을 잡아서 Utu(), An(하늘), Enlil에게 제사

- 신들은 맛있는 맛있는 제물 냄새를 맡고 모여들어 먹고는 다시는 사람들을 없애는 일을 하지 않기로 작정했다.

Ziusudra는 해 뜨는 곳에 있는 밝은 땅 Dilmun에 살게 하였다.

 

야스다 요시노리[安田喜憲]은 노아의 방주 대홍수의 실제 여부를 조사하였다. 그는 시리아 북부 지역의 퇴적물을 분석했다. 습지에서만 자라는 꽃가루가 BC 3000년경을 전후하여 크게 증가하였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때 이후로 기후가 급격히 한냉화되었음을 말하는 것으로 그로 인해 상류지방에 겨울비와 적설량을 증가시켜 유프라테스 강의 대범람을 일으켰을 것으로 생각. BC 3000년경 레바논 삼나무의 꽃가루가 크게 감소되었다는 사실도 발견, 바로 이 시기 이 지역에서 도시 문명이 탄생하면서 신전과 주거용 건물, 선박 등의 건조를 위해 삼나무의 대량 벌채가 이루어졌고, 그에 따라 토기와 벽돌의 수요가 늘어나자 땔나무 또한 대량소비가 일어나 삼림이 크게 훼손, 이 역시 대홍수를 일으키는 원인의 하나로 지적. 이 대홍수를 전후한 시기, 시작된 황폐화로 비옥했던 땅이 메마른 사막으로 변했다.

 

An은 우주 최고의 신이다. Enril은 안의 아들이다. 대기, 폭풍, 홍수의 신이다. 수메르인이 가장 두려워하는 자연현상을 지배한다. 엔릴은 수메르 신들 중 가장 강력한 신이다. 전쟁의 신이라는 지위도 갖는다. Enki은 물의 신, Minhursag는 대지의 신이다.

Inanna(또는 Sin)는 사랑의 여신, 달의 여신으로 풍요와 다산을 관장한다. 머리 위에 오려진 초승달 형태의 관은 그녀의 직분을 나타낸다. 당시 우르 사람들은 이난나도 흥분하고 땀을 흘리면 비가 많이 내리고 농사도 잘 된다고 생각하여 봄철에 이난나를 숭배하는 시간 동안 모든 여성들이 모든 남성들과 자유롭게 성교했다. 신전은 난교의 장이었다. 이난나는 그후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에서는 이쉬타르 여신이 되었고, 그리스에서는 아프로디테, 로마에서는 비너스가 되었다.

 

길가메쉬 서사시- 우르의 제3왕조 동안 서사시로 쓰여 점토판에 기록.

 

후와와(훔바바) - 그리스로 전해져 고르곤이 된다. 고르곤이 동방으로 전해져 귀면와.

뿔은 메소포타미아 전승에 신들은 불리 난 모자를 쓰고있다. 뿔달린 모자는 신성의 상징이다. 따라서 어느 특정한 인물이 신이 되는 경우 그는 신처럼 뿔달린 투구를 쓰거나 두 뿔이 달린 모습으로 묘사한다. BC 23C 말 근동지역을 정복한 아카드 왕rrn의 통치자 나람신은 자신은 아카드의 신이라 공포했다. 그는 메소포타미아 북동쪽 산맥 너머에 거주하던 부족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는 전승비를 세웠다. 그 전승비에는 두 뿔 달린 투구를 쓰고 적장의 목을 한 발로 누르고 서있는 나람신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모세가 야훼와 40일 동안 재다가 내려올 때 증거의 두 판이 손에, 얼굴 살갗에 뿔이 있는것(출애급기 3429), 한글번역판에는 그의 얼굴에 광채가 난다. 고 번역. 미켈란제로의 모세상에는 뿔이 나있다. 40일 지내면서 신성이 전달되었음을 시사한다. 귀면와에도 두 뿔이 있다.

 

方相氏 - 상여 행렬의 맨 앞에 서서 죽은 이에게 귀신이 달라붙지 못하게 잡신을 몰아내는 역할을 한다. 가면에는 황금색으로 된 4개의 눈이 있다. 가면은 나라 이래로 장례의식에서 잡귀를 몰아내는 방편으로 사용되었다. 5, 6C 산라때도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4갱의 금빛 눈에 곰 가죽을 쓰고 붉은 옷에 검은 치마를 두르며 창과 방패를 들고있다. 마르둑의 4개의 눈과 4개의 귀를 연상하게 한다. 곰가죽은 칼리스토 신화소와 관계있다.

상여 주위를 돌며 칼이나 창을 휘둘러 베거나 찌르는 시늉을 하여 귀신을 쫓아내 죽은이의 저승길을 평안하게 한다. 상여가 묘지에 도착하면 방상씨는 미리 파놓은 무덤 속에 들어가 네 귀퉁이를 칼로 치며 귀신을 쫓아낸다. 무덤에 관을 넣을 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오던 길이 아닌 다른 길로 달아난다. 잡귀들이 그를 잡으려고 따라오게 함으로써 주검이 무사히 무덤에 묻히게 하는 것이다.

방상씨 노릇을 하는 사람이 잡귀들에 붙잡혀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 상주는 후한 댓가를 지불한다. 때로는 사람대신 방상씨 탈을 쓴 허수아비를 수레에 태워 끌고 가기도 한다.

마르둑이 용을 거느리고 있다. 발 아래 빌론의 용이다. BC 854~819에 바빌로니아를 통치했던 마르둑왕의 원통형 인장에 새겨진 모습이다. 라피즈라줄리로 만들었다 길이 19cm로 곁에 그려진 3개의 원형무늬는 미추왕릉 출토 보검(보물 제635)에도 나온다.

 

바빌론 신화의 혼돈의 용 티아마트 - 천전리 4발 용, 네발용의 기원은 바빌론 이쉬타르성문에 채색된 구운 흙벽돌에 부조된 용이다. 메포타미아 용은 바다용이다. 바다 용은 하늘과 땅의 신들을 괴롭히는 상대로 등장한다. 마르둑이 바다의 용 티아마트를 죽이고 그녀의 시체를 위아래로 나누어 세상을 창조하는 “Enuma Elish”신화가 바빌로니아 창조신화이다. “에누마 엘리쉬7개의 토판으로 구성된 1100행이 약간 넘는다. 바빌로니아 왕국의 신년 행사 때 대사제는 전국에서 모인 순례객 앞에서 낭독했다.

마르둑은 태양신의 송아지란 뜻이다. 육지의 신들을 괴롭히는 바다의 괴물을 물리친다. 마르둑은 태어나면서부터 전사였으며 하늘의 신이 이러한 마르둑을 보고 바람개비를 선물로 주었다. 마르둑이 이 바람개비를 돌리며 폭풍을 일으켜 바다를 괴롭힌다. 마다의 女主티야마트는 용들을 낳아 마르둑과 대적할 준비를 한다.

메소포타미아의 신화소가 인도와 인도네시아, 중국 해안 지역을 거쳐 울산까지(마름모 여자) - 바다의 용 티아마트를 무찌른다. 바빌로니아 원통형 인장

 

마르두크는 신들을 이끌고 괴물부대와 대항해 싸우고 승리한 후 괴묵부대의 우두머리 Tiamath를 죽인다. 제우스가 티탄과의 싸움을 연상한다. BC 2000년으로 편년한다. 메소포타미아에 인도 유럽인들의 영향이 나타난다.

인도 유럽인들은 땅과 가축을 빼앗고 원주민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기 위해 초기 농경민족들의 영역에 침입하였는데 이것을 양측이 숭배한 신들의 투쟁으로 묘사했다.

자기편과 남의편과의 투쟁에서 정치적 민족적 투쟁을 벌일 때 상대방을 짐승형상으로 묘사했다. 자신을 정의 및 조회, , 겅명정대 등으로 표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 바빌로니아의 천지창조와 대홍수 신화

태초의 우주에는 Apus(밀물바다)Tiamat(간물바다, )만 있었다. 이 두 신이 결합하여 LahmuLahamu를 낳았다. 이것은 바닷물과 강물이 만나서 퇴적된 실트 즉 沈泥를 살징한다. 다시 이 두 신이 결합하여 AnsharKishar를 낳았다.

AnsharKisharAnu(하늘)과 물의 신 Nudinnud 또는 Ea()을 낳았다.

EaMarduk(번개를 가진 신)을 낳았다.

MardukTiamat(혼돈의 용)을 죽였고,

Kingsu(반란을 일으킨 신)를 죽이고 그 피로 사람을 만들어 신들을 섬기게 하였다.

 

사람들 중 Utnapishtim은 신을 잘 섬겨 Ea는 그를 아껴, 신들이 큰 홍수를 내려 사람을 모두 없애려하니 배를 만들어 타고 살아 남으라고 하였다.

Adad이 천둥을 굴리고, Nergal이 빗물의 문을 열고, Anannaki가 불덩어리를 던졌다.

- 홍수는 엿새 계속되었고 칠일째 그쳤다.

- 홍수가 그치자 배는 Nisir라는 산정에 걸렸다.

Utnapishtim은 비둘기, 제비를 보냈으나 되돌아 왔다.

- 까마귀를 보내니 죽은 짐승을 먹느라고 돌아오지 않았다.

- 홍수가 멎고 땅이 나타난 것을 알았다.

배에서 내려서 신들에게 감사의 제사를 올렸다.

 

바빌로니아 신화는 앗시리아 서기관들이 기록했다. 앗시리아 왕 아슈르바니팔의 도서관에서 나왔다. 7개의 토판으로 되어있는데 니네베에서 발굴된 것이다. BC 2000년경 처음 출현한다.

 

Marduk은 최고신

Isthar은 최고 여신

TammuzIsthar의 짝이며, 오빠이며, 애인으로 셋째로 높다. - 가을에 죽고 봄에 살아난다

까마귀는 동북아 신화에 길 안내자

바빌론 창조신화는 바빌로니아인들이 국가적 행사로 대규모로 거행했던 신년축제 즉 Akitu축제에 상요된 중요한 제의의식의 소재였다. Enuma Elish라는 시 혹은 송가 형태로 만들어진 제의의식 문답집에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Ur LagashBC 3500년경. Ur 루갈작게시 왕때 지중해 연안까지 세력을 뻗친다.

우르의 지구라트(BC 2112~2004) - 달의 신 난나의 신전으로 추측. 밑변의 각 모서리는 동서남북 네 방위와 일치한다. 4층이었으나 상부가 허물어져 2단만 남았다. 2층까지 높이가 21m이다. 걸프전대 총탄 자국이 남아있다.

주변에 신관들의 방, 왕궁, 왕묘, 창고, 문서보관소 등이 있다. 1920년대 인근 왕묘에서 황금 하프, 황금 투구, 금잔, 은제 배 모형, 궁녀의 머리장식, 황금 주발, 숫양상, 우르의 시텐더드 등 1,800여 점이 출토되었다.

 

우르의 지배자인 우트헤갈이 수메르를 구티족의 지배에서 해방시킨다. 우트헤갈의 치세는 7년 만에 끝나고 우르남무가 왕이 되어 구티족을 완전히 몰아낸다. 그는 수메르와 아카드의 왕으로 대규모 지구라트를 건설하여 위엄을 보이고 법전을 편찬하여 통치의 기초로 삼았다.

우르 Nammu왕이 지구라트를 세우고 자신의 업적을 쇄기문자로 기록했다. 선사시대에서 문자시대로 이행하게 된다. 이로써 역사시대가 열린 것이다.

 

2. 그러나 BC 2003년 동쪽의 엘람인이 침입, 서쪽으로 셈족계통의 아모리 인의 침입으로 우르왕조는 멸망한다. 메소포타미아 남부는 아모리와 엘람인의 침입으로 완전히 파괴된다. 그후 유프라테스 강의 마리, 티그리스 강의 아쉬르 같은 도시들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어 메소포타미아 세력의 중심은 북쪽으로 옮아갔다. 그러자 셈족 아모리인이 바빌론에 정착하였다. 그후 수메르와 아카드 문명을 흡수하여 바빌로니아 왕국을 건설한다. 함무라비 치세 바빌론의 지배는 절정을 이룬다.

 

바빌로니아 중심부에 위치한 아모리인들은 함무라비왕 때(1792~1750 BC) 전 지역을 정복한다.

 

북쪽으로부터 인도 유럽어 계통의 새로운 침략자들이 내려온다. 힛타이트(헷족)이 카시트 족과 함께 바빌로니아를 정복한다.

 

셈족의 침략 - 그들의 문화도 흡수. 셈족의 언어는 아카디아어로 아람어의 기원이 되는 거대한 셈족어군의 주요한 한 갈래이다. 셈족의 두 번째 침략은 아무르 혹은 아모리로 알려진 사람들이다. 이로써 수메르, 아카드 지역의 패권은 함무라비가 지배하는 바빌론으로 옮겨졌다. 아모리 왕조의 최초의 왕이 BC 2200년경 등극, 이후 약 500년이 지나서 또 다른 셈족이 상 Zab와 하 자브 사이의 티그리스 강 상류 지역을 차지하고 바빌론 왕국을 정복하여 메소포타미아 최초의 아시리아제국을 세운다.

이러한 복잡다단한 역사적 백경으로 인해 메소포타미아 신화는 수메르, 바빌론, 아시리아 세 가지 형태로 전해진다.

 

히타이트 인의 종교 - 그리스 종교와 일치하는 점이 많다. 그리스와 히타이트는 인도유럽족이다. 히타이트는 BC 17C 터키와 시리아 북부 사이 지역. 수필리우스1세가 세운 후왕조시대(1390~1200 BC)

 

소아시아의 힛타이트(구약에는 헷사람)는 그 발상지가 투르키스탄이며 그리스인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된다. 그들은 인도-유럽어족에 속한다. BC 2000년경 Halys강이 시작되는 중앙고원지대 일부를 점령하면서 소아시아 반도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소아시아에는 BC 4000년 문명의 기원. 히티이트는 왕권이 강화되자 정복사업을 벌인다. BC 16C 말 바빌로니아 침략, BC 14C 미탄니 왕도 정복당한다. 슈필롤리우마슈 대왕(BC 1380~1346 재위)가 미탄니 정복한다. BC 1286년 무와 탈리슈 왕이 카데시에서 시리아 전역의 패권을 두고 람세스 2세와 격돌한다.

힛타이트는 철기와 말이 끄는 전차를 사용하였다. 이집트는 세력이 컸지만 아직 청동기시대로 무기가 열세로 이집트에 패배한다. 1600~1200 BC 사이가 절정기이다. 이때가 힛타이트의 절정기이다. 절정기의 마지막 1C(1300~1200 BC)에 이르는 동안 이집트와 장기간 전쟁을 벌여 두 제국이 몰락하는 원인이 되었다.

BC 1200년 새로운 철기민족 침입으로 사라진다. BC 1200년 이후 유프라테스 강 어귀 카르케미슈가 얼마간 중심도시가 되었다. 수도이기보다는 상업 중심지였다.

그들은 그들보다 고도의 문명인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스스로 흡수되었다.

이 카시트 왕국은 BC 12C 동쪽에서 온 엘람인에 정복되었다.

BC 717년 이후 히티이트의 나머지 영토는 모두 아시리아. 프리기아인에 정복 흡수되었다.

1870년 사리아의 Hama에서 글자가 새겨진 돌을 발견하였다. 그후 수십 점의 기념비와 점토판이 소아시아 대부분 지역에서 발굴되었다.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계곡에 이르는 근동 전역에서 발견되었다. 1907년 터키 보가즈코 마을 근처에서 고대 도시 흔적을 발견하였다. 그후 하투사슈(또는 Hittitke city)로 알려진 요새화된 거대한 수도의 폐허가 드러났는데 이 도시 성벽 안에서 2만 개 이상의 점토판이 나왔다. 이들을 해독한 결과 구바빌로니아 문명과 비슷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들은 농업에 대한 폭넓은 지식과 상당량의 은, 구리, 납 등을 채굴하여 주변국에 팔았다. 철의 사용법을 알았으며 철을 다른 문명세계로 전파했다.

메소포타미아로부터 빌어온 설형문자에 변형을 가해 음성분자 성격을 일부 지닌 상형문자 체계를 발전시켰다.

그들은 태양신과 그 외 다른 많은 신들을 숭배했다. 그들이 정복한 민족의 신들을 자기 신으로 받아들였다.

히타이트인은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계곡과 근동 서부지역 사이에 가교역할을 했다. 히타이트인을 통해 메소포타미아의 문화가 가나안과 에게해 지역 사람들에게 전달되었다.

8C 힛타이트가 멸망하자 소아시아에서 그 제국을 계승한 것은 리디아 왕국이다. 리디아인은 지금의 서부 터키 지역에서 지배권을 확립했다. 그들은 재빨리 소아시아 해안의 그리스 도시국가들과 할리스강 서쪽의 고원지대 전역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했다.

BC 547년 리디아왕 크로이소스는 할리스강 동북쪽에 있는 메디아 정복에 착수했다. 이때 메데아왕은 페르시아의 키루스 군대와 교착상태에 빠진 후 크로이소스는 전열을 가다듬기 위해 수도 사르디스로 귀환했다. 여기서 키루스는 크로이소스에게 미처 준비할 겨를도 주지 않고 기습 공격하여 그를 사로잡았다. 수도 사르디스는 함락되어 불태워졌다. 리디아는 페르시아가 가한 타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소아시아 해안의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포함한 리디아 모든 영토는 키루스의 수중에 들어갔다.

리디아인은 인도-유럽어족이다. 소아시아 원주민과 유럽에서 건너온 이주민과의 혼합민족이었을 것이다. 유리하 지리적 위치와 풍부한 자원 덕택으로 고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생활수준을 가졌다. 화려한 전차로 유명했으며 시민들은 다량의 황금과 사치품을 소유했다.

 

토인비는 문명을 문화적, 사회적 통일체로 정의하였다. 원시사회에서 시작하여 지금까지 28개 문명이 출현했다고 하였다. 이같은 문명 단위를 유산된 문명(aboritive civilization), 저지당한 문명(arrested civilization), 성숙된 문명(matured civilization)으로 분류하였다. 유산된 문명은 잉태되기는 하였으나 탄생하지 못한 문명이다. 저지당한 문명은 소아마비에 걸려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5개의 문명이라 했다.

성숙된 문명은 21개이다.

1. 원시사회에서 문명으로 비약한 先行文明이 없는 문명으로 제1대 문명이다. 수메르, 이집트, 인더스, 미노스, 안데스, 상문명, 마야문명 등이다.

2. 부자관계에 의해 선행문화의 핏줄을 이어받은 아들 문명으로 제2문명이다.

 

近東은 메소포타미아로부터 시리아, 팔레스타인, 레바논, 이라크, 요르단, 이스라엘,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 등 비옥한 초승달 지대를 말한다.

1798년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 때 나폴레옹은 고대사에 밝은 학자를 대동했다. 나일 삼각주 로제타 마을에서 로제타스톤을 발견한다. 로제타스톤은 프톨로미 5세가 BC 196년 발표한 법령과 왕의 공덕을 기리는 내용다. 같은 내용을 고대 전형적인 상형문자와 일반 대중이 쓴 민중문자와, 희랍어로 표기했다. 1882J. E. Champollion이 해독했다.

19C 초부터 고대 근동세계 발굴했다. 발굴한 사람들은 유럽 학자이다. 그들의 시각으로 는 고대문명 발상지는 비옥한 초승달 지대 곧 근동이다.

 

3. 악카드, 구티

수메르 북부에는 악카드라는 셈족이 있었다. 셈족은 근동 지방에서 같은 계통의 언어를 사용한 거대한 민족집단이었다. 오늘날의 대표적인 셈족은 아랍인과 유대인이다. 정복자 사르곤(2334~2297 BC 재위)BC 2003년 수메르의 루칼락게시 왕을 물리치고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장악한다. 악카드인들은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최초로 광범한 군사제국을 확립했다. 자신의 군대와 총독을 파견한다. 사르곤의 손자 나람신 때 전성기이다.

수메르인의 아카드인 제국에 대한 끈질긴 반항에 악카드인은 학살과 강제 이주로 대응했다. 그러는 가운데 점차 국력이 쇠퇴했다.

북동 산맥에서 온 구티족 침략에 의해 200년 만에 붕괴된다. 이후로 수메르와 아카드는 약 1백년 간 야만적인 구티의 지배를 받는다.

 

히브리

근동의 셈어족이다. 원거주지는 아라비아 사막이다. 조상들이 최초로 분명히 모습을 드러낸 것은 BC 1900년경 아브라함의 지도 하에 메소포타미아 서부지역에 정착했다.

 

1. 최초의 가나안 이주 - BC 18C 중반 우르에서 출발, 헤브론 지역 정착. 이들을 히브리인이라 부른다.

2. 유목, 반유목민 아람인, 이들의 이주를 주도한 사람은 야곱 - 후에 이스라엘 민족의 시조. 야곱이 이끌고 온 사람들이 최종적으로 정착한 곳은 세켐이다.

3. 출애급 - 가나안 땅 이들은 유목민이었으나 얼마 후 이스라엘에 편입되어 하나의 민족 공동체 형성

 

창세기에 따르면 Abram은 테라의 장남으로 동생 나홀과 하란이 있었는데, 하란은 일찍 죽었다. 노아 - - 아르박살 - 넬라 - 에벨 - 르우 - 스룩 - 나홀 - 테라 - 아부람으로 족보가 이어진다. BC 2000~1900년경 이곳에 살았다. 당시 우르 인구는 25만 명쯤 되었는데, 이들은 도시 외각에서 유목생활을 했다.

캐러반 루트를 따라 북서쪽을 올라가 Mari를 거쳐 초승달 지역의 북쪽 끝에 있는 HAran에 정착하여 한동안 살았다. 하란은 동지중해와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잇는 교통의 요지요 상업의 중심지였다. 우르와 마찬가지로 달의 신 Sin을 숭배했다. 테라는 이곳에서 205세로 죽었다.

아브람은 이곳에 5년 살다가 75세에 가나안으로 가기 위해 남하하여 가나안의 세켐에 도착한다. 이어 베델 - 네게브 - 네게브 사막에 도착한다. 마침 기근이 들어 머물지 못하고 이집트로 들어갔다. 이집트에서 나올 때 큰 부자가 되었다. 그 길로 가나안에 정착했다. 팔레스타인

 

하란

BC 20C 초부터 종교적 상어 도시이다. 동쪽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 이집트 등으로 오가는 대상로이다. 서부 메소포타미아의 중심지로 달의 신 Sin의 신전에 예배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으로 이주한 후에는 이삭이 아내를 구하려고 사람을 보냈다.(244) 야곱이 에서를 피해 외심촌에게 장가들려고 하란에 왔다.(274-281, 10)

창세기” 2012절에 사라가 아브라함의 아버지의 딸 - 아브라함의 말에 따르면 어머니가 달라 사라가 자신의 아내가 되었다고 한다. 2451-61절에 이삭과 리브카도 남매이면서부부간이다.

 

롯은 자신의 소유와 자신을 따르는 무리를 이끌고 아브라함과 헤어진 후 요르단 온 들로 불리는 지역으로 간다. “창세기” 13장에 이 지역이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너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고로……아는 사해와 요단 계곡의 남쪽 지역에 사람이 살 수 없는 척박한 황무지가 되어 버린 고로 이 땅에서 한때 번영을 누렸던 도시를 멸망시킨 야훼의 심판의 결과라고 믿었던 히브리의 기자들의 생각이 반영되어있다.”

이 도시가 멸망당한 이유는 여기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유난히 악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홍수가 악한 인류를 징벌하기 위해 내려진 야훼의 심판이었다는 전승과 유사하다.

롯은 아브라함의 중재 기도로 구원받는다. 롯을 구원하기 위해 파송된 천사는 롯에게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명한다. 이러한 금기는 신화와 저널에 등장하는 전형적인 이야기 구조이다. 오르페우스는 뒤를 돌아보았기 때문에 저승세계에서 에우리디케를 더려오지 못했다. 롯의 아내는 천사의 명령을 어기고 뒤를 돌아보았기 때문에 소금기둥이 되고 살아남은 자는 롯과 두 딸뿐이다.

여기서부터 전승은 이스라엘과 대적하는 적대적 민족으로 모압과 암몬의 조상이 태어나는 설화로 이어진다. 롯이 술에 취해 잠에 빠졌다는 이야기는 홍수로부터 살아남은 노아가 술에 골아떨어진 후 수치를 당하는 사건과 비슷하다. “창세기-1931에 롯의 딸들은 우리의 배필될 사람은 없으니라 말한다. 이것은 마치 모든 인류가 다 멸망당했음을 암시하는 듯하다.

아브라함은 천사의 방문을 환대함으로 반대로 소돔 사람들이 이들을 배척했다는 이야기는 제우스와 헤르메스를 반갑게 영접한 필레모라 바우시스는 살아남고 그들을 영접하지 않은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멸망당했다는 마치 홍수 설화의 속편처럼 보이는 그리스 신화에 그 모티브가 반영되어 나타난다.

창세기에는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이 하늘에서 쏟아진 유황 때문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예언서는 마하페카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은 지진으로 인한 파괴나 멸망을 일컫는 히브리어이다.

오늘날 사해 남단 근처 반도인 알리산의 남부 지역으로 물이 얕게 고여있는 지역이다.

죽음과 소생, 씨앗의 발견, 우주의 순환은 인류 안에서 반복된다는 희망을 잉태한다. 이것은 신석기시대의 발견을 발전시킨 것이다. 농업의 출현으로 얻어진 종교적, 정신적 결실이다. 순환이 멈춘 죽음의 땅에는 이런 변화가 없다. 우주론적 세계관도 싹트지 못한다. 어떤 프로그램에 의해 세상에 만들어졌다고 하는 창조론적 세계관이 지배한다.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n exnihilo)이다. 땅에서 땅으로의 순환구조가 아니라 하늘로부터라는 일방통행 구조가 지배한다. 초월적, 초자연적 존재를 상정한다. 창조자, 심판자, 구원자로 인격신이다.

 

에덴동산은 슈메르어로 간 에덴(들판이 있는 가꾼 밭, 간은 울타리로 보호된 정원의 뜻)’에서 온 말이다. 영어로는 ‘’The Garden of Eden'이다.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사이, 도시와 도시 사이의 들짐승들이 사는 들판이다. 낙원 pardise의 어원인 페르시아어 ‘pairi daeza’ 또한 둘러친 정원이란 뜻이다. 다른 곳과 차단된 특별보호구역이다. Qurnah를 에덴동산이 있었던 것으로 본다. 이곳에 아담 공원이 있다. 1960년대 길이 70m 너비 20m의 아담공원을 조성했다. 8년간 대이란 전쟁, 걸프전, 이라크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다. 메소포타미아 신화는 남방 해상로를 거쳐 전해졌다. 뱀과 출산은 농경문화권에서는 풍요를 상징한다. 수메르인들은 뱀을 숭상했다. 뱀은 무쉬이며 남성 성기, 나무와 발음이 같다. 성교하다를 남자 성기를 박다, 도는 나무를 박다로 표현한다. 남성 성기, 나무, 뱀은 모구 풍요와 다산을 상징한다.

 

3. 바빌론 - 바그다드에서 90km.

BC 2000년경 셈족의 또다른 부족인 아모리인들이 서쪽으로부터 진출하여 수메르와 아카드를 무너뜨리고 바빌론을 제국의 수도로 정하고 바빌로니아 왕국을 건국한다. 이들이 계곡에 정착했을 때 그들 자신의 문화라 할 만한 것은 거의 없었다. 바빌로니아는 수메르인과 긴밀한 접촉을 유지하면서 수메르인의 문화를 대부분 계승했지만 수메르인의 지배는 완전히 끝났다.

종교는 피상적인 변화만 겪었다. 수메르의 신들은 무시되었고, 대신 새로운 신들이 들어섰다. 새로운 신 마르둑이 메소포타미아 신들 중 최고의 지위를 차지한다. 그러나 마르둑과 그밖의 다른 신들은 영적인 중요성을 갖지 않았고 부활이나 영생에 대한 약속도 없었다.

길가메시 서사시는 수메르인에 의해 발전된 전설과 신화를 토대로 해서 저술한 것이다. 수세대에 걸쳐 전승되어 온 여러 이야기들을 편집한 것이다.

이쉬타르 성문은 1970년대 사담 후세인이 복원했다. 높이 12m로 본디 것은 베를린 페르가나 박물관에 있다. 풍요, 다산, 사랑의 여신 Ishtar는 광택 타일로 표면을 처리하고 거기에 용, 사자 등 성수를 줄을 맞추어 새겼다. 용은 마르툭, 황소는 바람의 신 아다드, 사자는 이쉬타르이다. 청색바탕은 유프라테스 강을 상징한다.

정초가 되면 바빌론 사람들은 평소에 사용하지 않던 성문을 열어 축제 행렬을 맞아들였다. 그때는 왕도 참가한다. 성문을 통한 행렬은 성내로 들어가 아이 이부르시무(어떤 적도 이 길을 지날 수 없다)’를 행진했다. 겨울 동안 죽어있던 Dumuzi(자연의 생산 관장)신이 그 소리를 듣고 깨어나라는 뜻이다. 겨우내 북부 산악지대에 내렸던 눈이 녹으면서 수위가 올라가 하류가 범람하기 시작하는 수분의 조절기기가 보리의 파종 시기인 춘분 전후이다. 축제는 그날부터 12일 간 계속된다. 이를 통해 왕의 권한은 1년간 더 부여받아 새로운 각오를 다지면서 국가의 번성을 기원한다.

바빌론의 역사는 제6대왕 Hammurab(BC 1792~1750 재위)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성벽을 쌓고 그 속에 정사각형 구조의 바빌론을 건설한다. 왕궁과 신전을 세우고 도성 한가운데로 운하를 파 유프라테스 강이 흐르도록 했다. 함무라비 치세 동안 북쪽으로 아시리아에 이르기까지 지배권을 확대했다. 그리고 282조의 함무라비법전을 만들었다. 함무라비가 죽자 제국은 점차 쇠퇴하여 BC 1550년경 히타이트, 엘람, 아시리아 제국 등에 짓밟혔다.

구바빌로니아 제국의 붕괴로 600여년간 퇴보의 시대가 지속되었다. 카시스트인들은 앞 시대 사람들이 이룬 문화적 성취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BC 7C 느부카드네자르의 등장으로 옛 영광을 되찾는다. 이를 신바빌로니아 제국이라 한다. 그는 도성을 손질하고 이쉬타르성문과 남궁전, 축제 도로, 공중 병원 등을 새로 짓고 바벨탑을 크게 손보았다.

성문 뒤에 느부카드네자르 박물관이 있다. 거기서 좀더 앞으로 나가면 아스팔트가 깔린 20m 너비의 대로가 있는데, 이것이 이쉬타르성문과 연결되는 성내 최대의 도로인 축제도로이다. 축제도로 왼쪽으로 왕들의 정궁인 南宮殿이다. 느부카드네자르 시절 500여 개의 방이 있었다고 한다. 알렉산드로스는 동방 원정에서 귀국하던 길에 여기서 죽었다.

남궁전에서 멀지 않은 곳에 공중정원 기단이 남아있다. 5층 건물 옥상을 푸른 수목으로 뒤덮은 테라스 형태의 정원이다. 성밖 언덕 위에 바벨탑 기단이 있다. 지금은 사가 구덩이만 남아있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성역 중앙에는 탑이 세워져 있다. 이 탑 위에 제2탑이 서있고 그 위에 제3의 탑, 이런 식으로 8층까지 이어진다. 위로 오를 수 있도록 나선형 통로가 나있다. 계단을 반쯤 오르면 층계참이 있고 거기에 휴식용 의자가 놓여있다. 정상에 오르려면 탑 바깥으로 이어진 나선형의 통로를 통해 위로 올라갈 수 있다. 정상에는 커다란 신전이 있다. 그 안에는 화려하게 장식된 침상이 있고 그 곁에는 황금탁자가 있다. 신상은 안치되어 있지 않다. 밤에는 토착인 여자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거기에 머무를 수 없다.

C W. Ceram은 전체 높이 90m, 1층이 35m, 2층이 18m, 3, 4, 5, 6층이 각각 6m라 했다. 정상부의 마르툭 신전은 15m로 벽에는 금박을 입혔고, 청색 에나멜로 장식되었다고 했다.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Etemen-an-ki(하늘과 당의 초석)이라 했다.

느부카드네자르는 BC 597년과 587년 두 차례 예루살렘과 유다를 정복한다. 왕족 지배층은 기술자들을 바빌론으로 잡아왔다. 이를 바빌론포수라 한다. 60년이 된다. (열왕기 하 24:14)

아시리아가 무너지자 이집트가 등장한다. 아시리아가 무너짐으로 자유를 얻은 유대인은 이집트와 손잡고 항거하다가 처절한 패배를 당한다.

 

다니엘은 바빌로니아 왕의 꿈풀이를 할 정도로 왕궁을 출입했다. 바빌론 당에 노예로 글려왔기 때문에 바벨탑이 저주의 대상이 되었다. 마르둑을 위해 세운 바벨탑은 우상 숭배의 표본이 되었다. Babilu(신의 문)라 부르는 것을 혼잡을 뜻하는 바벨로 불렀다. 유일신 교도가 다신교에 대한 적대감을 표현한 것이다.

 

Yazd(이란) 고원에 아라비아 인이 대거 밀려든 것은 BC 1000년경이다. 그중 상당수는 인도로 가 인도아리안이 되었다. 인도로 간 사람은 베다, 이란 고원의 아리안은 조로아스터 교를 믿었다.

1. 두 종교의 상반된 특징은 물 - 비가 많은 인도에서는 순환, 윤회를 강조하는 힌두교이다. 건조한 이란 고원에서는 불을 숭배하는 조로아스터 교

2. 힌두교는 다신교, 조로아스터교는 유일신교

 

대체로 BC 660년 전후 카스피해 서쪽 지금의 아제르바이젠에서 태어나 20세 되던 해 양친과 부인 등 가족 곁을 떠나 종교적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 길을 떠났다. 30세때 아후라마즈다로부터 예언자의 소명을 부여받고 진정한 종교의 교리와 의무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그런 체험을 한 후 설교를 시작했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해 실망에 빠졌는데, 거기다가 유혹과 시련을 받는다. 악령 앙라 마이뉴가 나타나 마즈다를 예배하는 종교를 버리라고 종용한 것이다. 니체의 소설 짜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짜라투스투라가 서른 살이 되었을 때 그는 고향의 거리와 호수를 뒤로하고 산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그는 고독과 벗하며 10년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날 아침 그는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나아가서 이렇게 말했다. 그대 위대한 천재여, 그대에게 그대의 빛을 비춰줄 상대가 없었더라면 그대의 행복은 무엇이겠는가

 

정치 행정 수도 수사 의식용 수도는 페르세폴리스

왕궁 유적지는 시내 높은 언덕 위에 있다. 이 수사 궁전에 다니엘이 한 때 총리를 지냈다. 지금은 폐허가 되었다. 페르시아가 망한 후 오랜 세월 돌보는 이 없어 흙속에 묻혀있다. 19C 프랑스 발굴단이 발굴,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함무라비 법전(BC 12C 엘람왕이 바빌론에서 전리품으로 가져갔다)과 왕국 벽면을 장식했던 채색 타일과 조각은 그때 가져갔다. 수사는 2,600km에 이르는 왕의 길의 기점이다. 수사 - 앙카라 - 고르디온 - 사르디스(소아시아)로 이어졌는데 왕의 急使는 열흘만에 주파했다고 한다.

수사에서 45km 떨어진 을래강(다니엘서 8:2) 가에는 초가잠밀이 있었다. 13C 에람인들이 축조했다. 우르의 지구라트 같은 형태이며 내부에 사당을 두고 있다. 원래 553m였다고 한다. 지금은 25m 높이에 3층만 남아있다.

키루스 대왕은 BC 539년 신바빌로니아를 정복하고 포로가 된 유대인을 해방시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게 했다. 성서에 고레스로 표기된 그는 페르시아 제국의 실질적 창업지이다. 파사르가대에 키루스 대왕의 왕궁 유적지와 묘가 있다. 바벨탑을 모방해 지었다고 하는데 집안의 장군총(장수왕릉)과 흡사하다.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지는 6개 계단 위에 4각의 석실을 올려놓았다. 무덤 주위에는 조로아스터교의 제단인 배화단 흔적이 널려있다.

그의 외조부(키루스는 메디아 왕국의 왕 아스타게스의 딸 미다네에게서 태어났다)의 태몽에 나타난 대로 장인의 나라 메디아 왕국을 무너뜨리고 아케메네스 왕조를 세웠다. 파사르가대는 그가 태어난 아카메네스 가문이 BC 7C 소왕국을 일으킨 곳이다.

그후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까지 무너뜨리고 오리엔트 전역을 손에 넣었다. 원정길인 에타바나(하마단)에서 숨을 거두고 시신은 고향인 이곳으로 왔다. BC 330년 알렉산드로스에게 멸망한다.

 

페르세폴리스 - 아케메네스의 넷째왕 다리우스1(BC 522~486 재우재위) 3년간 2만 명의 인력을 투입하여 만든 의식용 수도로 신년 제례행사 때 왕이 각국 사절을 접견하던 곳이다.

평평한 기단 위에 길이 500m 쯤 바닥은 지표면보다 15m 높다. 입구인 크세르크세스 문[諸國의 문]높이 8m나 되는 4개의 문설주가 있다. Lamass라 부르는 사람 얼굴에 독수리 날개를 단 거대한 황소상 두 쌍이 지키고 있다. 하나는 동쪽을 하나는 서쪽을 향해 있어 사방을 경계하는 뜻과 세계를 지배하겠다는 의욕을 나타낸다. 용도는 수호신상이다.

 

13. 아시리아 제국은 바빌로니아 제국이 세워지던 BC 19C경 북부 메소포타미아 땅에 들어선 왕국이다. 이들은 BC 3000년경 티그리스강 상류 약 500마일 지점에 위치한 아수르고원에 작은 왕국을 건설하여 옛 문화를 부분적으로나마 수용하였기 때문에 수메르화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들이 패권을 장악함으로써 메소포타미아문명의 세 번째 단계이다.

그들은 원주지의 자원 부족과 주변적대국의 끊임없는 공격위협으로 인해 전투적 습성과 제국주의적 야심을 키웠다. BC 1300년경부터 팽창하기 시작한다. 이후 곧 북부 계곡을 장악하였고, BC 10C에는 바빌로니아에 있던 카시스트 세력을 정복했다. BC 8~7C에 사르곤 2(722~705 BC 재위)와 시니케립(705~681BC) 치하에 전성기를 구가하여 티그리스 강가에 거대한 신도시 니네베를 건설했다. 아시리아 제국은 근동지방 거의 전부를 장악했다. 시리아, 페니키아, 이스라엘 왕국, 이집트 등을 차례로 정복해 나갔다.

그들은 영토에 대한 욕망으로 정복을 했고 정복을 하면 할수록 그들이 이미 확보한 지역을 지키기 위해서 더 많은 지역을 정복해야 했다. 아시리아는 거대한 군사조직이었다. 군사령관들은 가징 부유하고 가장 강력한 계급이었다. 그들은 전리품을 나누어 가졌을 뿐 아니라 승리에 대한 보상으로 종종 거대한 영지를 수여받았다. 군 사령관 중 하나인 사르곤 2세는 왕위를 찬탈했다. 개량된 신무기와 전투 기술은 이들을 다른 병사들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 젗제 검, 강력한 활, 긴 창, 공성 망치, 바퀴가 달린 요새, 금속제 흉갑판, 방패, 투구 등 뛰어난 무기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적을 압도하기 위해 두려움을 이용했다. 포로는 물론 비전투원까지 이루 말할 수 없이 잔혹하게 다루었다.

100년도 못되 여러 나라들이 아시리아 지배에 반기를 들었다. 이들은 끔찍한 보복을 가했다. 아시리아 전국토는 철저하게 약탈당했고 그후 역사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찾아내기 불가능할 정도로 파괴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새로운 영토들을 너무나 빨리 병합하여 제국을 관리할 수 없을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아시리아인의 정부 관리 능력은 그들의 정복 능력을 따라가지 못했다. 정복당한 나라들은 그들에게 가해진 전제주의에 반발했다. 제국에 치명타를 가한 사람들은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의 동남쪽 계곡에 자리한 셈족 계통의 갈데아인이었다. 속주 총독의 자격으로 아시리아 황제를 섬겼던 나보폴라싸르의 영도 아래 갈데아인은 반란을 조직했고 BC 612년에 니네베를 함락한다. 느부가드네자르(605~562 BC)는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수도 바빌론을 근동의 대표적인 도시로 만들었다.

그러나 갈데아제국도(신빕;F로니아) BC 539년 페르시아에 멸망한다. 페르시아인들은 아무 저항도 없이 단 한차례의 전투도 없이 타도했다이같은 손쉬운 승리는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와 있던 유대인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갈데아왕의 정책에 반감을 품었던 바빌론의 사제들이 칼데아왕에게 불복하게 위해 그 도시를 키루스에게 넘겨주고자 음모를 꾸몄기 때문에 가능했다. 다른 계급들도 역시 페르시아인을 자신들의 구원자로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수도는 아슈르 - 코르사바드 - 니네베 - 님루트 등지로 이어졌는데, 왕궁터에는 어김없이 라마스가 발견되었다. 라마스는 실재하는 동물이 아니라 상상의 동물이다. 자신들이 섬기는 수호신의 힘이 강하냐, 약하냐에 따라 공동체의 흥망성쇠가 달려있다고 생각한 그들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동물들 가운데 가장 강한 부위나 특징 등을 골라 조합시켜 새로운 가장 센 동물을 만들어 수호신으로 삼은 것이다.

 

상공업은 퇴조한 것으로 보인다. 상공업에 종사한다는 것은 군인이 되는 것보다 체통이 떨어지는 일로 경멸당했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필수적인 수공업과 상공업은 아람인-페니키아인 및 히브리인과 관련이 있는-이 담당했다. 아시리아인은 주로 농업에 정사했다.

신전은 토지 재산의 가장 큰 부분을 점유했다. 왕의 소유지 역시 방대했지만 군 장교들에 대한 지속적인 양여로 계속 줄어들었다. 이렇게 경제 및 사회질서는 건실하지 못했다. 반면 빈번한 군사원정은 아시리아의 국력과 자원을 고갈시켰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군장교들은 오만한 귀족계급이 되었고 그들은 자기네가 할 일을 부하에게 떠넘긴 채 사치스러운 향락에 빠져들었다. 노예와 외국인만 상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규제를 가했으므로 지적인 상인 계급이 사회 안정에 아무 기여도 할 수 없었다.

농노 중 일부는 주인의 토지의 일정 부분을 경작했으며 생산된 곡물의 일부를 자신들의 몫으로 가졌다. 그러나 다른 농노들은 아무것도 없이 계절제 노동에 의지하여 생계를 유지했다. 극도로 가난했고 공공사업에서의 노역과 강제적인 군복무를 해야했다.

노예는 주로 도시의 노동계급이었다. 가내노예는 집안 일을 하며 때로는 주인을 위해 기업에 종사하기도 했다. 상당한 자유가 있었고 재산까지 소유할 수 있었지만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전쟁 포로는 무거운 족쇄에 채워진 채 죽는날까지 도로, 운하, 궁전 건설을 위해 노동을 강요당했다.

아시리아 법 중 하무라비법과 다른점은 보복률, 피해자와 가해자의 지위에 따라 처벌이 달라지는 제도가 없었다. 바빌로니아 인이 반역이나 폭동에 해당하는 범죄를 엄격히 다스렸던 반면 아시리아는 낙태와 동성애에 특히 엄격했다. 출산율 저하를 막기 위한 군사적 배려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여성들은 바빌로니아보다 한층 종속적 지위에 있었다. 일부다처제였고 아내는 남편의 재산이었다. 이혼은 전적으로 남편의 권한이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자 하는 욕구로 특정 분야의 지식은 축적되었다. 그들은 원을 360도로 나누고 지구 표면상의 특정 위치를 경도 및 위도와 비슷한 방식으로 측정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들은 5개 행성을 찾아서 거기에 이름을 붙였으며 일식과 월식을 예측하는 데도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500개 이상의 식물성 및 광물성 의약의 목록이 장성되었고 사용법도 지시되었다. 다양한 질병의 증세가 기술되었고, 그 원인도 대체로 자연에 기인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그러나 귀신을 쫓아내기 위한 마늘이 일상적인 치료법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아시리아인들은 조각 특히 엷은 릴리프에 뛰어났다. 이 작품들은 전쟁과 사냔의 극적인 장면을 자연에 최대한 충실하면서 또한 지극히 실감나게 묘사했다. 위험에 직면한 사냥꾼의 침착한 용기, 궁지에 몰린 사자의 난폭함, 상처입은 짐승들의 고통 등을 즐겨 묘사했다. 그러나 이러한 예술은 거의 전쟁과 스포츠라는 두 가지 주제에 한정되었다. 그 목적은 지배 계급의 위업을 찬양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수르바니팔의 사냥도 - 대영박물관

 

아시리아가 붕괴하고 칼데아의 지배권 장악으로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최종단계에 접어들었다. 이 단계는 신바빌로니아 시대이다. 그 이유는 느부가드네자르와 그의 추종자들이 바빌론에 수도를 복구하고 함무라비 시대의 문화를 재생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시도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아시리아는 바빌로니아 문화를 원상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심각하게 변형시켜 놓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기껏 고대의 법률과 문학, 구바빌로니아 정부 형태의 본질적 요소, 상공업이 압도한 초기의 경제 체제를 회복시킨 정도였다.

마르둑은 최고신으로 전통적인 지위를 회복했다. 점성술이 발전한다. 신들은 인간적 성질을 상실하고 초월적 전능한 존재로 숭앙된다. 그들은 별들과 동일시되었다. 신들은 이제 마술에 의해 속임을 당하고 위협받고 강요될 수 있는 존자가 아니다. 그들은 우주를 거의 기계적으로 지배한다. 신들의 의도는 불가해한 것이다.

이러한 관념에서 숙명론이 나온다. 신들의 방식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것이었으므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운명에 맡기는 것이다. 인간은 결과가 좋아지려면 막연한 희망을 품고 신들에게 절대적 복종을 바치며 묵묵히 그들을 믿고 따르는 것이다. 그 결과 역사상 처음으로 복정으로서의 신앙 개념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것도 내세적인 것은 아니다. 그들의 복종은 특정한 목적에 이르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다. 오히려 불가사의에 직면한 좌절과 굴종의 표현이었다. 영적 의식이 성장한다. 신들은 인간의 정의와 올바른 행위에 관심을 갖는 숭고한 존재로 인식한다. 칼데아시의 이름을 Wahweh로 바꾸기만 하면 된다. 아무 수정없이 히브리인에 의해 사용될 숭 lT을 것이다. 이렇게 신들이 지극히 숭고한 지위를 점하게 되자 인간은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인간은 죄악과 야비함에 물든 초라한 피조물이다. 죄의식은 바빌로니아, 아시리아 종교에도 나타나지만 칼데아에 와서는 극단적 수준에 도달한다.

천문학은 7일을 일주일로 하루를120분 죈 12개의 시간으로 나누었다. 일식과 월식, 천체의 현상에 관한 기록을 남겼다. 천체의 자료를 수집한 주요 목적은 신이 인간을 위해 예비한 미래를 발견하기 위한 것이었다. 별은 제각기 신이었으므로 미래를 전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천문학은 근본적으로 점성술이다.

 

페르시아

BC 6C 이전 페르시아인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그때까지 페르시아만의 동부 해안에서 평화롭게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셈족이 아닌 인도 유럽어족에 속하는 종족이다.

초기의 페르시아는 독립국이 아니라 티그리스강 북부와 동부지역을 지배했던 메디아의 속국이었다.

BC 559Cyrus(559~530 BC)가 남부 페르시아의 한 부족의 왕이 되었다. 5년쯤 뒤 페르시아 전체 지배자로 나서더니 메디아의 지배를 뒤엎고 이어 주변 지역을 정복했다. 키루스 대왕이라 불리면서 최초로 리디아 왕국을 정복한다. 리디아는 소아시아 서남부를 차지했으며, 메디아와는 오늘날 터키 북부에 있는 할리스강을 경계로 갈라져 있었다.

리디아왕 크로이소스는 페르시아가 침공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 전쟁을 결심한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크로이소스는 공격에 대한 조언을 얻기 위해 Delphi의 신전에서 신탁을 구했다. 결과 그가 할리스강을 건너 선제공격을 감행하면 큰 나라를 파괴할 수 있을 것이라는 대답을 얻었다. 그는 신탁을 따랐지만 파멸된 것은 자신의 나라였다. 그의 군대는 완전히 제압되었고 리디아는 페르시아의 속주가 되었다.

BC 539년 키루스는 칼데아 제국 내의 불안한 정세를 틈타 바빌론시를 함락한다. 바빌론시의 유대인들과 자신들의 왕의 정책에 불만을 품은 칼데아 사제들의 도움을 받아 쉽게 승리하였다. 이리하여 키루스는 칼데아 제국 전체의 지배권을 장악하였다. 이렇게 오리엔트는 BC 6C 아케메네스 왕조에 의해 통일된다.

키루스는 전쟁에서 입은 부상으로 BC 529년 사망했다. 아들 캄비세스가 계승하였다. BC 525년 이집트를 정복했다. 캄비세스가 이집트 정복을 위해 자리를 비운 사이 그의 지배하에 있던 아시아 전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칼데아인과 Media인이 독립을 되찾으려 했다. 이 소식에 접한 캄비세스는 서둘러 돌아오다가 도중에 살해되었다.

수차례에 걸친 반란은 다리우스 1(522~ 486 BC)에 의하여 진압되었다. 다리우스는 귀족 출신으로 왕위 요구자를 살해하고 직접 왕이 되었다. 그는 초기 피정복민의 반란을 진압하고 국가 행정조직을 정비했다. 키루스 대왕의 선례를 따라 피정복민의 제도를 승인 보호했다. 고대 신전을 복구하고 지방의 종교를 육성했다. 이집트 총독으로 하여금 이집트 사제들의 자문을 받아 이집트 법전을 편찬하게 하였다.

흑해의 유럽쪽 해안에 살고있던 스키타이인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해 헬레폰토스 해협을 건너 트라키아 해안 대부분을 정복했다. 리디아의 정복과 더불어 페르시아의 지배하에 들어온 소아시아 연안의 그리스인에 대한 압박을 강화했다. 무거운 공물을 징수하고 자신의 군대에 복무할 것을 강요했다.

 

* 페르시아 전쟁

이어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아테네의 원조를 받아 반란을 일으키자

그리스 본토의 두 중심 세력인 스파르타와 아테네는 서로 의심하였다. 스파르타는 508~7 BC는 클레이스테네스와 권력다툼을 벌이던 아사고라스(참주제 지지자)를 돕기 위해 클에오메네스 왕과 군사를 아테네에 보내 군사적으로 개입한다. 아테네 시민들에 의해 패퇴당한다. 이때부터 서로 적대적인 관계가 되었다.

아타네 사람들은 클레에스테네스의 민주적 개혁에 반대하는 과두제 지지자들이 스파르타의 개입을 불러올 것을 두려워하여 BC 507년 다리우스 1세에게 사절을 보내 보호동맹을 요청했다.

페르시아 왕국은 서쪽으로 계속 뻗어나가 아나톨리아를 점령하여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복속시켰다. 따라서 그리스 본토 사람들은 페르시아 침공을 걱정하게 되었다. BC 499년 이오니아 그리스인들 사이의 지역적인 불평은 대대적인 반란으로 발전했다. 페르시아 왕이 이들 지역을 정복한 다음 현지의 독재자들에 의존하여 정복된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치안을 유지하는 정책을 취했기 때문이었다. 이오나아 반란 세력은 그리스 본토로 대표단을 보내 페르시아의 지배를 분쇄하려는 그들의 노력을 지원해 달라고 요청했다. 스파르타왕 클레오메네스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테네 민화 사람들은 에보이아섬의 에레토리아 도시국가와 함께 군사지원을 보내기로 결정한다. 지원군은 크로이소스의 옛 수도이며 현재 페르시아 사령부인 사르디스까지 가서 유명한 성소를 포함하여 사르디스를 불태우고 귀국했다.

BC 494년 페르시아 왕의 군대는 이오니아 반란군을 완전히 진압한다. 다리우스왕은 부하 장군 마르도니우스를 보내 이오니아를 재조직하게 했다. 참주제 대신 민주적인 체제가 수립되었다. 그러자 다리우스는 아테네 인들이 이오니아 반란 세력을 도왔다는 사실을 알고 분노했다.

BC 490년 대규모 선단을 파견하여 에레트리아를 불태우고 아타카의 동북쪽 해안 마을 마라톤에 상륙하여 마라톤(아테네 북쪽 42km)에 상륙 마라톤 전투를 벌인다. 아테네는 만명의 보병을 파견한다. 스파르타는 종교행사를 핑계로 군대를 보내지 않았다. 페르시아의 병력은 9만명이었지만 그리스의 기습공격으로 물러난다.

2차 침공은 다리우스가 죽고, BC 480 아들 크세르크세스 1(486~465 BC)30만 대군을 이끌고 헬레폰토스에 부교를 띄워서 임시 다리를 만들었다. 트라키아, 미케도니아, 테살리아를 거쳐 그리스로 진격했다. 테르모플라이로 불리는 델포이 북쪽 근교 산에서 이들의 진격을 잠시 멈추게 한다. 그러자 스파르타가 싸웠지만 페르시아가 승리한다. 이때 테베는 페르시아를 도왔다. 테베와 아테네는 BC 519년 플라이타이아가 테베의 지배를 벗어나 아테네의 보호국이 되어버린 것을 계기로 서로 적대적인 상태가 되었다. BC 480년 가을 이크로폴리스에 도착, 신전을 마음대로 유린한다. 그러나 페르시아군은 살라미스에서 패배하여 내륙으로 들어와 싸웠으나 플라이타이에서 다시 패한다. 이렇게 페르시아는 후퇴한다.

남부 그리스의 31개 도시국가들은 군사동맹을 맺었다. 그리스에서 가장 강력한 중장 보병군대를 갖고있던 스파르타를 지원국으로 선정했다. 아테네의 지휘관은 테미토클레스(528~462BC)였다. BC 449년 혹은 BC448년에 페르시아조약을 맺어 평화시대가 온다.

다리우스는 도시국가 연합과의 전쟁을 벌여 전쟁이 끝나기 전에 사망한다. 후계자 크셀크세스 1세가 계승한다. 결국 BC 429년 페르시아인은 그리스 전역에서 쫓겨난다.

제국 역사의 마지막 150년가량은 빈번한 암살, 속주 총독들의 반란, 이방의 침입으로 이어졌다. 결국 BC 330년 알렉산드로스의 동정으로 멸망한다.

페르시아인은 과거 한때 메소포타미아 제국들이 장악했던 모든 영토를 통합했다. 그밖에 많은 지역들도 정복했다. 페르시아는 전혀 다른 새로운 문화를 전달해 주는 매개자가 되었다. 그러므로 칼데아의 붕괴는 메소포타미아 정치사의 종말을 고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페르시아 제국의 중요 업적은 페르시아 자체를 포함해서 메소포타미아, 소아시아, 시리아-팔레스타인 해안, 이집트 등을 망라하는 근동문화를 종합했다.

Royal RoadSusa에서 Sardis까지 1600마일(2,600km)

 

본디 설형문자였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아람인-그들은 페르시아 국경 안에서 교역을 하고 있었다 -의 알파벳에 입각해서 39개의 알파벳 자모를 고안했다.

리디아의 회폐주조법은 서아시아 각지에 확산되었다.

바빌로니아와 아시리아에서 일반화된 높은 대지와 계단식 건물 양식을 모방하여 날개달린 황소, 밝게 채식되고 유약 처리된 벽돌, 메소포타미아 건축의 전형적인 소재를 모방하였다. 그러나 페르시아인들은 메소포타미아 건축의 두가지 특징적 양상 즉 아치와 볼트를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이집트로부터 기둥과 柱廊을 채택했다. 그리고 기둥 밑바닥에 사용된 종려와 연꽃문양 역시 이집트의 영향이다. 반면 기둥에 새겨진 세로줄과 기둥머리 Capital 아래 새겨진 소용돌이 문양은 그리스-본토가 아닌 소아시아 이오니아 도시국가-로부터 온 것이다.

페르시아의 거대한 건축물은 시전이 아니라 궁전이다. 왕중왕의 영광을 기리기 우해 세웠다. 페르세폴리스의 다리우스와 크세르크세스 궁전. 크세르크세스 궁전은 카르카크 신전을 모방했다.

 

조로아스터교

뿌리는 BC 15C까지 소급된다. 실질적 창시자는 BC 600년경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자기 민족의 전통적 관습을 정화, 곧 다신교, 동물의 희생, 주술 등을 없애고 좀더 영적이고 윤리적인 종교를 확립하려 한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조로아스터는 역사상 최초의 진정한 신학지이며 발전된 종교적 신앙 체계를 고안한 최초의 인물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개혁 노력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많은 미신이 살아남아 새로운 이상과 뒤섞이게 되었다.

이원론 - 수메르인과 바빌로니아인의 종교처럼 동일한 신이 선과 악의 양면성을 모두 갖는 일원론적 종교가 아니다.

조로아스터에 의하면 우주는 두개의 영적 원리가 지배한다. 빛과 진리와 의의 원리를 구현하는 지고의 선한 존재 Ahura-Mazda, 다른 하나는 어둠과 악의 세력을 주관하는 반역적이고 악에 찬 존재 Ahuriman이다. 이 둘은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필사적인 싸움을 벌였다. 거의 대등한 힘을 갖고 대결했지만 궁극적 승리는 빛의 신이 차지하게 된다. 최후의 날 아후라 마즈다는 아리만을 물리쳐 그를 심연 속으로 던져버릴 것이다. 그때 죽은자들은 무덤에서 일어나 그들의 공과에 따라 심판을 받게될 것이다. 의로운 자는 즉각 천국으로 들어갈 것이며 사악한 자는 지옥의 불길로 떨어질 것이다. 그르나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은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페르시아인의 지옥은 기독교의 지옥과 달리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갖고 있고 죄를 짓거나 짓지 않을 자유를 갖고 있으며 현세에서 행한 바에 따라 내세에서 보상이나 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가정에 근거하고 있었다. 아후라 마즈다는 진실할 것, 서로서로 최선을 다해 사랑으로 도울 것, 가난한 자의 친구가 되어 환대를 베풀 것을 명령하였다. 오만, 폭음, 나태, 탐욕, 분노, 색욕, 간음, 낙태, 중상모략 등이 전형적인 죄악이었다. 신앙을 같이하는 다른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것이 가장 나쁜 죄로 언급되었다. 부의 축적은 비난받았다. 신자들이 실천해야 될 규제 사항들 가운데는 네 자신에게 좋지 못한 일은 무엇이든 다른 사람에게 행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황금률도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윤리적 종교이다.

원시적 주술, 사제들의 술책이 지속됨으로써 오염된다. 시일이 지남에 따라 이방인 특히 칼데아인의 종교의 영향을 받아 또다시 변형된다. 그 결과 페르시아의 이원론과 칼데아인의 비관주의, 숙명론이 결합된 혼합종교가 선장한다.

조로아스터교에서 여러 종파가 파생된다.

미트라교 - 악의 세력에 맞서 싸운 투쟁에서 아후라 마즈다의 대리자로 나선 미트라에서 유래한다. 미트라tm는 처음 조로아스터교에서 그다지 비중있는 신이 아니었으나 상당수의 페르시아인들이 마침내 가장 경배하야 할 신으로 인정했다. 미트라스는 커다란 고통과 희생을 겪으면서 현세에서의 삶을 살았던 것으로 믿었다. 그는 인간에게 빵과 포도주를 제공하는 기적을 행했으며 가뭄과 홍수를 끝내는 기적을 베풀었기 때문이다. 끝으로 그는 조로아스터교의 많은 예식을 창조했다. 일요일은 일주일 중 가장 성스러운 날로, 1225일은 일년 중 가장 성스러운 날로 선포했다. 태양은 빛의 제공지이고 미트라스의 가장 충실한 동맹자이기 때문에 그의 날인 일요일은 가장 성스러운 날이다. 1225일은 대략 동지에 해당하는 날로 태양이 적도 남쪽의 긴 여행에서 돌아오는 날로 태양의 생일이다.

미트라고가 하나의 독립된 종교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늦어도 BC 4C에는 하나의 독자적 종교로 등장했다. 그후 급속히 확산하여 BC 1C경 로마로 전파되었다. 이탈리아 본토에서 주목받은 것은 서기 100년 이후이다. 주로 하층계급, 병사, 노예들이 개종했다. 궁극적으로 미트라교는 로마의 가장 대중적 종교의 하나로 기독교와 로마의 옛 종교와 경쟁하게 되었다. 그러나 275년 이후 급속히 약화된다. 외관상 기독교와 유사하다. 더 늦게 출현한 기독교가 기독교 고유의 철학을 유지하면서 미트라교의 몇몇 형식을 빌어왔다.

마니교 - 미트라교를 계승한 종교로 페르시아 유산을 전달해준다. 마니교는 엑바타나의 귀족 출신 성직자 마니가 250년경 창시했다. 마니는 기존 종교의 개혁에 헌신했으나 조국에서는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하고 인도와 중국 서부에서 선교했다. 276년경 페르시아인 반대파에 처형되었다. 마니가 죽은 뒤 그의 제자들에 의해 서아시아 지역에 확산되었다. 330년에는 이탈리아에 전파되었다.

마니는 조로아스터보다 좀더 광범위한 해석을 했다. 그는 주 신이 끊임없이 주도권 다툼을 할 뿐만 아니라 전우주가 상반되는 두개의 왕국으로 나뉘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그 첫 번째 왕국은 영원한 선으로서의 신이 지배하는 영혼의 왕국이었고, 두 번째 왕국은 사탄이 지배하는 물질의 왕국이었다. , 광명, 인간의 영혼 같은 영적인 존재는 신이 창조한 것이었고 어둠, 죄악, 욕망, 육체적 · 물질적 모든 것은 사탄에에게서 유래한 것이었다.

감각이나 욕망에 관련된 모든 것은 사탄의 소행이기 때문에 인간은 물질적 욕망의 노예상태로부터 가능한 완전히 벗어나고자 노력해야 했다. 인간은 모든 형태의 감각적 즐거움, 즉 육류의 섭취나 음주, 성적 욕구의 충족 등은 삼가야했다. 심지어 결혼도 금지했다. 결혼으로 인해 더많은 육체를 낳음으로써 사탄의 왕국에 사람들을 충원하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었다. 또한 인간은 장시간의 고행으로 육체를 복종시켜야 했다. 이러한 엄격한 훈련이 보통 사람들에게는 너무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고 인류를 완전인과 제자로 나누었다. 완전인만 모든 훈련을 감당할 의무를 갖는다.

인간이 어둠의 세력과 투쟁하는 것을 돕기 위해 신은 때때로 위안과 영감을 주는 예언자와 구원자를 보내주었다. 노아, 아브라함, 조로아스터, 예수, 바울 등이 바로 신의 사자들이었다. 그러나 그중 최후의 가장 위대한 예언자는 마니였다. 마니는 스스로 예수그리스도의 사도라 불렀기 때문에 청년기의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포함하여 서유럽의 많은 마니교도들은 자신들을 급진적인 기독교인으로 생각했다.

400년경 많은 추종자들을 갖고 있었으나 그후 박해로 소멸되었다.

 

영지주의(Gnosticism) - 페르시아와 그리스 종교사상에서 발전하여 1C경 원숙기를 거쳐 2C 후반에 교세가 절정에 달한다. 이틸리아에서는 추종자가 많지 않았지만 근종지방에서 크게 번성한다. 종교의 진리를 이성으로 발견할 수 없고 이해할 수도 없다. 그들은 자신들만이 신으로부터 직접 계시받은 비밀스러운 영적지식을 소유하였다고 생각했다.

이들 종교는 대부분 BC 300년경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붕괴로 국가간의 장벽이 무너졌다. 광범위한 이민족과 민족 혼합이 이루어졌다. 기존 사회 질서의 붕괴는 현세의 삶에 대한 환멸을 가져다주었고 개인적 구원에 대한 갈망을 일으켰다. 이로써 사람들의 관심은 내세에서의 보상으로 쏠렸는데, 이것은 종래 없던 일이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앞서 언급한 종교들이 번창한 것이다. 내세적이고 신비적인 이들 종교는 갈망과 세계로부터 도피하기를 갈망했던 많은 사람들에게 탈출구를 마련해주었다.

 

페르시아의 정부 형태인 신권적 전제주의는 로마 후기의 군주들이 채택하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와 콘스탄티누스 1세 같은 황제들은 절대주의를 펴기 위해 신적인 권위에 호소하고 신민들로 하여금 그들 앞에 부복하게 한 것은 페르시아의 선례를 따른 것이었다. 또 로마인은 페르시아인의 세계제국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다리우스와 그의 후계자들은 문명세계 전체의 지배자로 자임했으며 또한 세계를 하나로 통합하고 아후라 마즈다 아래서 세계를 정의롭게 통치해야 할 사명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한 이유로 그들은 대체로 야만성을 최대한 억제하는 가운데 전쟁을 치렀으며 피정복민을 관대하게 다루었다. 페르시아인은 헬레니즘 철학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종교적인 것이며 영적 신비주의에 국한된 것이다.

 

14. 페르시아 인들은 바빌로니아 인들의 이쉬타르 성문 앞과 축제 도로에서 벌였던 신년 행사를 본떠서 노루즈(NoRuz)라는 축제(신년이라는 뜻)를 벌였는데 곡물의 씨앗을 뿌리는 춘분을 전후하여 열흘간 열렸다.

왕은 신년 축하 사절을 페르세폴리스에서 맞는다. 왕은 이들 조공 사절을 왕궁 입구 아파다나라 부르는 대 알현실에서 맞았다. 아파다나는 한 변의 길이 60m 돌기둥 높이 17m로 뒤로 다리우스의 옥좌에는 타차라가 있다. 문틀 하나에 대왕과 사자가 힘을 겨누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사자는 앞발을 들어 대왕과 맞섰지만 대왕의 칼날이 그의 배를 찌르고 있다. 타차라를 지나면 이르타크세르크세스 궁전과 100개의 기둥으로 이어진 百柱의 방이다. 다리우스의 보물, 중앙궁전, 하렘 등이 차례로 나타난다. 중앙궁전 한 벽면에는 다리우스 대왕과 왕세자 크세르크세스가 함께 등장하는 부조가 있다. 그들의 발밑에는 병사들이 5단으로 나뉘어 각기 10명씩 50명이 도열하고 있다. 머리 위로는 아후라마즈다가 큰 날개를 활짝 펼쳐 이들을 감싸고 있다.

아후라마즈다는 반인반조이다 님루트의 왕궁에도 있다. 아시리아의 것을 차용한 것이다. 바벨탑을 본떠 키루스 대왕의 묘는 수메르의 지구라트를 모방해 초가잠빌 아슈르바니팔 사냥도는 타차라의 벽면에 새긴 사자와 힘겨루기 부조는 크노소스 궁전, 옥좌에 새겨진 그리핀(griffin, 독수리 부리, 날개, 발톱과 사자의 몸통을 가진 동물)을 모방해 크세르크세스 문앞의 그리핀홀을 장식했다.

궁전의 현관인 제국의 문에 새겨진 라마스는 아시리아에서 따온 것이다.

 

야즈드 - 아테세카데 성전에 영원한 불을 모셨다. 불은 신의 창조물 가운데 가장 깨끗한 것이어서 위로 상승하는 성질이 있어 최고신으로 모시는 아후라마즈다를 가장 잘 상징해 주기 때문이다.

키루스는 독실한 조로아스터 교도이다. 바빌로니아의 압제 하에서 해방시켜 준 키루스를 유대인들은 해방자로 흠모한다.

유대인은 조로아스터 교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구약은 유대인들이 바빌론에서 돌아오자마자 기록하기 시작했다. 구약의 빛과 어두움의 이원성과 같은 조로아스토교의 요소이다.

모세의 불붙는 떨기나무(출애급기 3)이 그 증거이다.

 

손자인 야곱의 지도 하에 서쪽으로 이주하면서 팔레스타인을 점령하기 시작하여 이스라엘리라 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야곱이 나중에 이스리엘이라고 이름을 바꾼데 기인한다.

BC 1600년이 되기 전 어느 시기 이스라엘의 한 부족이 다른 히브리인과 기근을 피하고자 이집트에 이주하였다. 성경에 따르면 그들은 점차 이집트 정부에 의해 노예가 되었다. 그러나 이집트 사료에는 이 일에 대한 기록이 없다.

BC 1300~1250년경 후손 가운데 모세라는 지도자가 나타나 시나이 반도로 인도하여 Yahweh를 숭배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때까지 야훼는 시나이 지역 히브리 유목민의 신이었다. 야훼 종교를 중심으로 하는 모세는 그를 추종하는 여러 부족을 결속하여 팔레스타인 도는 가나안 땅이라는 지역을 점령했다.

팔레스타인 땅은 강우량이 부족한 바위투성이 땅이다. 그러나 아라비아 황무지와 비교한다면 낙원으로 비쳐졌을 것이다. 히브리 지도자들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묘사했다.

그러나 이 지역에는 또다른 셈족 가나안 사람들이 정착하고 있었다. 그들은 바빌로니아인, 히티이트인, 이집트인과 접촉을 통해서 원시적 단계를 넘어선 문화를 건설해 놓은 상태였다. 그들은 농사를 지으면서 상업, 문자 사용, 함무라비 법전의 법률을 채택해 그들의 생활에 맞추어 사용하였다.

 

이스라엘 역사의 출발점은 가나안에로의 이주와 정착이다. 최초는 아브라함이 우르 출발, 헤브론 정착, 두 번째는 유목 혹은 반유목 아람인 주요한 사람은 야곱, 최종 정착지는 세켐이다. 세 번째는 출애급 유목민이었으나 얼마 후 이스라엘에 편입되어 민족공동체 형성.

 

구약의 가낭나은 오늘날 시리아, 레바논, 이스라엘, 요르단 등지를 포하한다. 시리아, 팔레스타인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를 지역을 연결하는 교량이다. 따라서 주변 강대국들이 일찍부터 탐낸다.

 

가나안-힛타이트(성서에 헷족) - 아브라함이 힛타이트 인에게 은 400세겔을 주고 헤브론 근처 막벨라 동굴을 샀다. (창세기 2316~). 이스라엘 오믈리 왕조때 힛타이트가 쳐들어오자 시리아인들이 사마리아 포위. 힛타이트인들은 BC 3000년경 소아시아에 정착하기 시작, BC 1225년까지 왕조를 이어갔다. 정치적 군사적으로 당시 고대 근동 사회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지중해 북부 지역에서 최초로 알파벳을 사용한 페니키아 문명이 존재했다. 페니키아는 Tyre, Sidon, Byblos 등 도시들을 중심으로 하는 해양무역국가였다. 카르타고를 중심으로 지중oehdqn 전역에 여러 식민지를 거느렸다. 시리나 북서쪽 오늘날 Tell Mardikh에는 BC 3년대에서 2년대에 이르기까지 의 시리아의 역사를 밝혀주는 Ebla 왕국이 존재했다. 에블라 외에도 에돔, 모압, 암몬, 아람(시리아) 등이 있다.

시리아-팔레스타인 전역을 포함하는 가나안 지역의 문화와 종교는 1929년 이후로 프랑스 고고학자 C.F.A. Schaeffer가 발굴한 Ugarit(지금의 Ras shamra)왕국의 자료들에 의해 밝혀졌다. BC 14~13C 시리아 해안에 존속했던 우가릿 왕국의 역사적 배경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지역에 정착해 들어간 시기와 맞물린다.

가나안 사람들은 서부 셈족이다. 가나안 땅은 사막과 바다 사이에 있어 비가 충분하지 않고 큰 강을 끼고있는 것도 아니어서 비와 관련된 풍요와 다산에 관심이 컸다. 종교와 신앙의 중심이었다.

가나안 만신전의 우두머리 신은 El이다. 우주 만물을 창조한 신이다. 그의 배우자는 Atharat(Asherah)이다. 엘과 이티랏 사이에 70여 신들이 탄생한다. 이티랏은 신들의 어머니, 젖을 물리는 양육자이다.

AstateAnat는 우가릿 문헌에 바알의 배우자라 하였다. 슈메르의 이난나와 바빌론의 이슈타르테에 해당한다. Dagan은 곡물의 신으로 바알의 아버지이다.

바알신화는 자연계의 순환에 대한 신화적 해석이다. 바알과 얌의 투쟁은 지중해가 거칠어지고 육지의 강물이 불어나는 늦가을 우기, 모트와의 투쟁은 태양열로 인한 가뭄이 식물들을 말려 죽이는 열므을 배경으로 다시 살아난 바알이 모트를 정복한느 것은 여름 가뭄이 끝나고 풍요가 회복됨을 의미한다.

 

우가리트 - 동페니키아인으로 알려져 있다. BC 3000년경 우가리트 주변에 살았다. 지고의 시 엘 - 두 개의 뿔이 달린 관을 쓰고 수염이 덥수룩한 노인으로 묘사된다. 식물과 비의 젊은 신 바알에 패해 몰락한다. 유대교의 기원이다.

 

팔레스타인

하란

BC 20C 초부터 종교적 상업 도시이다. 동쪽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 이집트 등으로 오가는 대상로이다. 서부 메소포타미아의 중심지로 달의 신 Sin의 신전에 예배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으로 이주한 후에는 이삭이 아내를 구하려고 사람을 보냈다.(244) 야곱이 에서를 피해 외심촌에게 장가들려고 하란에 왔다.(274-281, 10). 에서는 에돔인의 조상이 된다. 팔레스타인 지역에 또 하나의 민족이 탄생한 것이다.

창세기” 2012절에 사라가 아브라함의 아버지의 딸 - 아브라함의 말에 따르면 어머니가 달라 사라가 자신의 아내가 되었다고 한다. 2451-61절에 이삭과 리브카도 남매이면서 부부간이다.

 

 

롯은 요르단 계곡으로 이주하여 사해 부근 도시 소돔에 정착한다. 소돔과 인근 도시 고모라 주민들은 사악하고 배은망덕했다. 그후 롯은 동쪽 사막지역으로 옮겨 요르단 지역 민족들인 모압족과 암몬족의 시조가 되었다.

 

롯은 자신의 소유와 자신을 따르는 무리를 이끌고 아브라함과 헤어진 후 요르단 온 들로 불리는 지역으로 간다. “창세기” 13장에 이 지역이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너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고로……아는 사해와 요단 계곡의 남쪽 지역에 사람이 살 수 없는 척박한 황무지가 되어 버린 고로 이 땅에서 한때 번영을 누렸던 도시를 멸망시킨 야훼의 심판의 결과라고 믿었던 히브리의 기자들의 생각이 반영되어있다.”

이 도시가 멸망당한 이유는 여기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유난히 악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홍수가 악한 인류를 징벌하기 위해 내려진 야훼의 심판이었다는 전승과 유사하다.

롯은 아브라함의 중재 기도로 구원받는다. 롯을 구원하기 위해 파송된 천사는 롯에게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명한다. 이러한 금기는 신화와 저널에 등장하는 전형적인 이야기 구조이다. 오르페우스는 뒤를 돌아보았기 때문에 저승세계에서 에우리디케를 더려오지 못했다. 롯의 아내는 천사의 명령을 어기고 뒤를 돌아보았기 때문에 소금기둥이 되고 살아남은 자는 롯과 두 딸뿐이다.

여기서부터 전승은 이스라엘과 대적하는 적대적 민족으로 모압과 암몬의 조상이 태어나는 설화로 이어진다. 롯이 술에 취해 잠에 빠졌다는 이야기는 홍수로부터 살아남은 노아가 술에 골아떨어진 후 수치를 당하는 사건과 비슷하다. “창세기-1931에 롯의 딸들은 우리의 배필될 사람은 없으니라 말한다. 이것은 마치 모든 인류가 다 멸망당했음을 암시하는 듯하다.

아브라함은 천사의 방문을 환대함으로 반대로 소돔 사람들이 이들을 배척했다는 이야기는 제우스와 헤르메스를 반갑게 영접한 필레모라 바우시스는 살아남고 그들을 영접하지 않은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멸망당했다는 마치 홍수 설화의 속편처럼 보이는 그리스 신화에 그 모티브가 반영되어 나타난다.

창세기에는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이 하늘에서 쏟아진 유황 때문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예언서는 마하페카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은 지진으로 인한 파괴나 멸망을 일컫는 히브리어이다.

오늘날 사해 남단 근처 반도인 알리산의 남부 지역으로 물이 얕게 고여있는 지역이다.

 

제의의 기본 구성요소

1. 聖幕 - 이동성소. 야훼의 현현 장소이다. 야훼와 이스라엘의 만나을 가능하게 하는 곳, 곧 만남의 장막이다. 가나안 정착 이후 여러 지역에 산재되어 있던 山堂으로 바뀌고 솔로몬 신대국가 성소로 중앙 성소인 예루살렘 성전으로 대체된다.

희생제는 동물(번제, 화목제, 속죄제). 레위기 18:21, 20:2~5에서 인신제사는 절대로 용납될 수 없다. 그러나 왕들이나 백성들이 때때로 인신제사 풍습에 빠졌다. 열왕기 하 16:3, 17:17, 21:6, 예베미아 7:31, 에스겔 16:20~21, 30, 20:26, 31, 23:37.

 

동방정교회에는 이집트 콥트교회, 시리아 교회, 아르메니아 교회, 에티오피아 교회가 포함된다.

 

이집트 정교회 - 콥트교회, Copt란 이집트 기독교를 일컫는 말로 그리스 사람들이 이집트인을 부르는 아이킵토스가 아랍어로 전화된 Qupt가 영어로 표기되면서 Copt가 되었다.

42년무렵 마가에 의해 수립되었다. 전성기는 칼케돈 공의회 이전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295~373)와 키릴로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키릴로스는 431년 에페수스 공의회에서 교황으로 추대된다. 오늘낭 1100만으로 서남아시아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교회이다.

아르메니아 - 2C부터 그리스도교가 존재한다. 그러나 다른 기독교 세계로부터 오랫동안 고립된 결과 칼케돈 공의회에서 분열되었다. 1439년 플로렌스 공의회에서 로마교황청과 화합하려는 노력을 하였지만 아르메니아 정교회와 카톨릭 교회의 분열은 화합하지 못했다.

1054년 서로 상대방 파문,

180년 무렵 아티오크의 테오필루스가 삼위일체 교리

 

출애급

60(당시 인구조사에서 여자와 아이들은 제외되었다는 점을 감안하여 250만 정도로 추정하는 학자도 있다.)

1. 모세가 구출된 곳은 유대인들은 아부카이로라 믿었고 오래 전에 그곳에 그들의 회당인 Ben Ezra 시나고그를 지었다. 입구에 모세의 석관이 있고 제단 벽면에는 기하학적 무늬가 박힌 장식판이 걸려있다. 1896년 이곳 한 서고에서 양피지에 쓰인 두루마리 성경이 발견되면서 고고학적 발굴조사가 있었다. 시나고그는 1천년 전에 지어진 것으로 밝혀졌다. 시나고그 뒷벽에 붙어있는 작은 건물 속에 작은 못이 있다.

주위에 천년이 되었음직한 고목 한 그루가 있다. 나일강은 여기서 300m쯤 떨어져 있었으나 오래 전에 이곳에 강이 흘렀다. 콥트박물관 서관 지하에 옛 수로로 강물이 흐른다. 구시가 중심 카이로 남부 기르기즈 역 근처이다.

2. 모세 시대 이집트 왕국의 수도는 카이로가 아니고 여기서 22km 서남쪽 멤피스였다. 멤피스는 이집트 땅에 처음으로 통일 왕국을 연 서메르 왕국의 도읍지로 삼은 이래 1천 년간 번성한다. 거기서 3km 떨어진 사카리란 곳에 초기 파라오들의 계단식 피라미드가 있다.

멤피스 박물관에 니메르 왕으로부터 1700여 년이 지난 뒤 이집트 왕국을 통치했던 람세스 2세 석상이 있다. 그는 67년 동안 파라오로 재위했다. 북쪽으로 아시아계 히티이트족의 침략을 물리치고 남으로 누비아족의 준동을 막아 왕국을 굳건히 했다.

모세는 람세스 2세의 친구로 람세스 2세 치세에 출애급 사건이 일어난다. 출애급의 출발지가 이스라엘 사람들이 공사에 참여하고 있던 람암셋인데 라암셋은 람세스 2세 치세 중에 지어졌기 때문인데 이 설에 따르면 출애급은 BC 1290년경이다. 투스모스 2세때라는 주장도 있다. “열왕기 상” 61절의 기록에 따라 솔로몬이 이스라엘 왕이 된지 4년 되는 해로부터 180년 전에 일어났다고 보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연대는 BC 1446년경이 된다. “민수기” 333절에 따르면 출발 날짜는 유대력으로 115일이다. 이 근처 개울이 파라오의 딸이 모세를 발견한 곳이라 한다.

 

모세는 람세스 1세때 탄생한다. 아버지는 아므람, 어머니는 요거벳, 람세스1세의 누이 과부 바티아의 양자가 된다.

 

3. 카이로 민속촌 파라오 빌리지에서 모세를 건져 올렸다고 한다. 관람객을 태우고 배가 지나가는 길목에 정자를 지어놓고 배가 그 앞을 지날 즈음 화려한 복장을 한 공주가 시녀의 도움을 받아 연꽃 사이로 떠내려오는 작은 상자 속에서 어린아이(인형)를 들어올린다.

모세는 히브리어로 모셰, 아랍어로 무사(Musa)로 건져올린다는 뜻이다. 모세의 성장과정에 대해서는 성경에 언급이 없다. “탈무드에 어린 모세는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파라오의 머리에 있는 왕관을 집어내려 자기의 머리에 올려보았다. 그러자 파라오는 왕관이 무엇인지 알고 그런 짓을 했는지 궁금하여 한 가지 실험을 했다. 모세 앞에다 두 개의 접시를 놓고 한곳에는 황금을 다른 한 곳에는 타고 있는 숯덩이를 올려놓았다. 만약 그가 황금에 손을 댄다면 그가 왕관을 탐낸 것이라 하여 주일 참이었다. 모세는 주저하지 않고 숯덩이를 집어서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하여 생명을 건졌다. 대신 혀를 데어 그후부터 말을 제대로 못하게 되었다고 했다. 훗날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나타난 야훼에게 파라오에게 가 담판하라는 소명을 받았을 때 모세는 입이 둔하고 혀가 굳어(출애급기 410) 그 소명을 감당하기 어렵습니다라는 말과 관련이 있다. 그때 야훼는 그의 형 아론을 동행하게 하여 모세의 대변인 역을 맡도록 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40세가 되던 해 이집트의 한 공사 감독관이 자신의 동족인 히브리인을 때리는 것을 본 순간 분노를 이기지 못해 이집트인을 살해한다.

그는 살인자가 되어 숨어 살게 되었다. 숨은 곳은 아카바만 북동쪽에 있는 소국 미디안 땅이었다. 거기서 이드로의 가족을 만났고 딸 십보라와 결혼하여 두 아이를 낳았다. 그렇게 40년을 산다.

 

불타는 떨기나무 가운데서 파라오의 압제하에서 노예생활을 하는 동족을 구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열 번째 재앙(모든 장자와 가축의 초태성 죽임)이 있은 다음날 서둘러 떠나지 않으면 안되어 무교 을 먹어야 했다. 빵을 부풀릴 시간도 기다릴 수 없어 누룩을 넣지 않고 빵을 구웠던 것이다. 카이로의 아비미야 터미널에서 시나이산 기슭 성 카타리나 수도원까지 450km, 7시간 걸리고, 두 시간 더 달리면 수에즈 운하이다. 시나이라는 말은 메소포타미아 국가 우르 왕국의 수호신이었던 달의 신 Sin애서 유래한다.

 

출애급은 BC 1290, 야곱이 이집트로 이주한지 430년이 흘렀다.

 

바다가 갈라지는 곳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히브리어 성서에 Yam Suph를 갈대바다(Reed Sea, 이집트오로는 파츄피)로 보아 동지중해 연안의 Bardawil섬 근방이라는 것

2. 바다가 아니라 수에즈와 이스마엘리아 사이의 Bitter Lakes

라암셋을 떠난 두 달 뒤 시나이산 정상이 보이는 기슭에 장막을 쳤다. 카타리나 사원은 해발 1500m에 위치하는 그리스 정교 사원이다.

정상에서 십계명을 받는다. 심계명은 열 말(daka logi)라는 그리스어에서 The Decalogue라 부른다. 이는 예언자들의 가루침의 요약으로 보며 대장 아모스와 호세아가 시대 곧 BC 750년경 이후에 성립한 것으로 본다. 내용은 고대 근동지방에 흔하게 널려있는 그들의 도덕관념의 표현한 것으로 본다. 13C 이전까지는 기독교인들에게 아무 의미가 없었다. 13C부터 카톨릭 교회가 고해성사 매뉴얼 속에 십계명을 집어넣음으로써 기독교와 관련을 맺는다. 이곳에 모세 기념교회가 있다.

십계는 야훼와 인간의 계약이다. 야훼는 이 계약을 통해 인간에게 복을 주기도 하고 벌을 주기도 하며 구원하기도 한다. 이런 계약문화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그곳은 일찍부터 상업이 발달했고 또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재산법 중심의 법전이 편찬되어 계약서에 원통형 인장을 찍어 서명했다. 가나안 지방도 마찬가지이다. 동맹관계를 맺어야 살아남을 수 있었기에 외교활동이 빈번하게 일어났는데, 이 또한 계약문화에 이바지하였다. 성서는 야훼와 인간 상호간의 관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은 시나이산에서 율법을 받았고 야훼와 언약을 맺었다. 그들은 언약을 지키는 대신 선택받은 야훼의 아들이라는 믿음을 갖게 된 것이다.

 

라암셋 - 시나이반도 남부 - 시나이산 - 카데스바네아 - 룸 광야에 오래 머무르고 - 북상하여 페트라 아르노강을 거쳐 느보산에 이른다. 거기서 여호수아에게 인도자의 자리를 물려주고 운명한다. 여호스아는 백성들을 이끌고 요르단강을 건너 가나안 당으로 들어간다.

 

성카타리나 수도원은 3C 말 알렉산드리아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카타리나는 시리아인 수도사를 만나 기독교로 개종한다. 당시 이 지역을 지배하던 로마재국은 기독교를 박해했다. 그녀는 로마황제에게 우상숭배를 강요하지 말아 달라고 했다. 황제는 그녀의 말을 무시했고 그녀 도한 자신의 신앙을 굽히지 않았기에 처형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국문 과정에서 꿋꿋한 자세를 보여주어 황제의 가족과 귀족들을 개종시킨다.

로마에서 순교한 그녀의 시신은 천사들에 의해 수도원 맞은편 산 정상에 옮겨졌다. 그로부터 300년 뒤 어느날 꿈속에서 그녀의 시신이 산꼭대기에 그대로 있는 것을 본 한 수도사가 다음날 교회로 옮겨오면서 이름도 지금과 같이 바뀌었다고 한다.

이곳이 떨기나무 사건의 현장이라고 알려진 것은 3C이다. 그 후부터 수도사들이 면 예날 모세가 들었던 신의 음성을 직접 듣고자 하는 마음에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변변한 시설이 없었다.

대제의 어머니 헬레나는 예수가 삽자가에 못박히고 부활했다는 골고다 언덕을 찾았다가 시나이산이 수도사들이 매우 어렵게 지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작은 교회를 세우게 했는데, 그것이 불타는 떨기나무의 시원이었따.

수도원에는 모세가 이드로의 달들을 만났다는 모세의 샘이 있다. 본당 교회 제단 뒤에 불타는 떨기나무 예배당이 있다.

헤겔은 빛은 어둠과 맞서는 것이며 거기에 활동과 생명의 원리가 나타난다.”고 했다. 가스통 바슐라르는 불꽃은 생명이 깃들어 수직이다”, “불꽃은 직립라는 생명의 동적 요소이다고 했다. 빛은 생명의 원리이다. 불교의 화염문양은 기독교 성화의 두광이 그 예이다. 이스라엘의 신 또한 여러 차례 불 또는 빛의 형태로 백성들 앞에 나타났다. 조로아스터교, 유대교 모두 불을 신성시한다. 유대인들은 불을 환희와 행복의 상징으로 여겨 7개의 촛대를 준비하여 늘 꺼지지 않게 한다. 그게 바로 메노라(등잔대)이다. 민수기 8

떨기나무는 불에 타고 있었지만 사그라들지 않아 꺼지지 않는 영원한 불이다.

시나이산을 떠난 모세는 바란 광야를 통과하여 카데스 바네아로 이동한다. 그들은 거기서 가나안으로 보낸 정탐꾼 12명으로부터 그곳에는 키가 큰 거인이 살며 성도 견고하여 그곳에 들어갔다가는 모두 죽게 생겼다라는 보고를 받는다. 이스라엘 민족은 야훼를 원망하며 새 지도자를 세워 이집트로 돌아가겠다고 일어났다. 야훼는 악평을 한 정탐꾼에게 재앙을 내려 죽이고 이집트로 돌아가겠다고 들고 일어난 무리들에게 하루를 1년으로 계산하여 40일의 정탐 일수를 40년으로 늘려 광야에 살게 하였다. 이것이 카데스바데아 사건이다.

이 사건 이후 이 일대에서 그것도 한 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광야 생활을 한다. 그들의 숙영지가 민수기 33장에 기록되어 있으나 카데스바네아 외에는 어딘지 밝혀지지 않았다. 카데스바네아는 이스라엘과 이집트 국경인 네게브 사막 한가운데의 폐 구릉인 텔엘 쿠데이라트로 알려져 있다.

이곳을 떠나 호르산으로 향한다. 사해와 아카바만 사이의 180km에 이르는 아라바 저지대를 통과해야 한다. 실제로 그들이 어떤 길을 거쳤는지 분명하지 않다. 지금 이 일대는 이스라엘과 요르단의 국경지대이다.

아라비아 동쪽 룸광야는 확실한 근거는 없지만 출애급 팀이 호르산으로 가는 길에 그곳을 지났을 것이다. 이곳에서 38년 머문다. 이곳은 아리비아의 로렌스로케 현장이다. 베두인족의 텐트, 바위그림이 새겨진 바위가 있다.

페트라

이 일대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가 하룬(아론의 산, 1593m)이다. 정상에 백색 돔의 모스크가 있다. 그 속에 출애급 시절 촏 o대제사장 아론의 묘가 있다고 한다. 이곳이 성서의 호르산일 것이다. (모세)는 아론과 그의 아들 엘르아살을 데리고 호르산에 올라 아론의 옷을 벗겨 엘르아살에게 입혀라. 아론은 거기서 죽어 列朝에 돌아가리라“(민수기 2025~6) 이렇게 아론은 죽어 그 자리에 묻혔다.

와디무사(모세의 乾川이라는 뜻)모세가 손을 들어 지팡이로 바위를 두 번 치니 물이 콸콸 터져 나왔다. 회중과 가축이 그 물을 마셨다는 곳으로 페트라의 중심 마을이다. 마을에서 4km 떨어진 곳에 아인무사(모세의 샘)이 있다. 돔 모양의 지붕인 작은 모스크 안에 있다.

옛 시가지로 들어가면 나바트인의 사각 무덤과 오벨레스크를 닮은 탑 모양의 무덤들이 길 양쪽에 있다. 나바트인은 사막에서 대상을 하던 유목민 부족으로 향료, 후추 등을 아라비아 남부에서 북부로 무역했다. 예멘에서 펱트라까지 70일 정도 걸린다고 한다. 도 대상들에게 통행세 25%를 받았다. BC 4C경 이곳에 도시를 건설하여 아라비아, 이집트, 팔레스타인, 시리아 등지와 캐러반 무역을 하여 번성하였다. 2C초 로마에 멸망하였다. 로마는 바닷길로 무역하였으므로 페트라는쇠퇴하였다.. 거기다가 363년 지진으로 도시 대부분 폐허가 되었고 전려병이 만연하여 사람들은 떠나고 1812년까지 방치되었다.

시크(도시 입구)라 부르는 바위틈에 자연스레 난 좁고 긴길로 너비 5m의 길을 2km 40여 분 들어가며 시크가 끝나고 정면에 알카즈네가 나타난다. 높이 43m 30m2층 파사드(건물의 정면)로 되어있다. 6개의 코린트식 기둥이 있고 정면에는 이시스상 등 5개의 인물상과 동물상 조각이 있다. 카즈네는 베두인 말로 보물이란 뜻이다. 이는 2층 중앙에 단지처럼 보이는 곳에 귀한 보물이 숨겨져 있을 것이란 생각에 그들이 이름붙인 것이다. 베두인들이 보물이 들어있다고 파괴하고 이방인들의 발길이 차단되었다. 안에는 3개의 방이 있다. 왕족들의 연회, 종교행사, 장례, 희생양 등 행사를 했을 것이다. 이것은 나바트 왕의 무덤이다. 2003년 지하에 무덤과 유골을 발굴했다. 햇빛을 직접 받는 오전에는 붉은 파사드가 내뿜는 색깔이 신비의 공간으로 만든다.

바위를 평평하게 깎아 설계도에 따라 위에서부터 아래로 파내려 간다. 시크를 따라 수로가 도시 곳곳으로 연결돼 있다. 도심에 대규모 물 저장고가 있다. 도시 곳곳으로 각 가정의 부엌으로. 강수량은 150mm.

 

1.5km에 와디무사 - 모세의 샘이 있다.

1812년 스위스 탐험가 부르크 하르트(1784~)에 의해 서구 사회에 알려진다. 1812년까지 방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인디아나 존스 3” 촬영장이다.

협곡을 더 들어가면 바위를 갂아 만든 통로가 있다. 원형극장 너비 40m 바위를 통째로 깎아 만들었다. 3000명을 수용할 수 있다.

대규모 도시가 나타난다. 8000개 건물에 20,000만 명이 거주했다.

 

요르단 인구 500, 90%가 사막. 인구 절반이 암만에 산다. 왕의 대로 따라 250km.

 

1812년 스위스 탐험가 부르크 하르트(1784~)에 의해 서구 사회에 알려진다. 1812년까지 방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인디아나 존스 3” 촬영장이다.

협곡을 더 들어가면 바위를 갂아 만든 통로가 있다. 원형극장 너비 40m 바위를 통째로 깎아 만들었다. 3000명을 수용할 수 있다.

대규모 도시가 나타난다. 8000개건물에 20,000만 명이 거주했다.

 

엘데이르(수도원)이 있고, 그 앞에 있는 큰 바위를 오르면 아래로 이스라엘 땅과 사해가 보인다.

페트라에서 쇼박을 거쳐 케락으로 북상한다. “신명기” 32장에는 페트라를 모세의 계곡이라 했다. 여기서 느보산으로 간다고 했다. 해발 950m 케락에는 십자군 시대 쌓았다는 케락성이 있다. 거기서 사해로 가는 길이 있다. 사해변에 사피가 있다. 이곳에 롯의 동굴이 있다. 롯은 아브라함의 형제 하란의 아들로 조카이다. 그는 아브람과 함께 우르를 떠나 하란을 거쳐 가나안 땅으로 이주한 뒤 사해 남쪽에 있는 기름진 땅 소돔 평원에 살았다. 소돔은 남색을 듯하는 영어의 sodomy라는 말이 유래되었을 정도로 문란한 곳이었다.

롯은 두 딸을 데리고 사해 근방의 동굴 속으로 피신하였으니 그곳lqk로 롯의 동굴이다.

큰 아들 모압, 닥은 아들은 벤암미(벤아민)이다. 이들은 후일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급 진군을 끝까지 방해한 모압과 암몬족의 조상이다. 현지인은 롯의 동굴을 마하 크라트롯이라 한다. 동굴 입구에는 최근 세운 소금기둥이 있다. 안쪽에 비잔틴 교회 흔적이 남아있다.

 

케락성을 지나면 평지이다. 출애급 시절 이스라엘백성들이 제2차 인구조사를 했던 모얍평지이다.

아르논 강이 나타난다. 강을 남북 양쪽으로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산이 평행선을 그리고 있어 협곡을 이루고 있다. 폭이 넓고 험하여 아르논 강은 모압 평지를 남북으로 갈

강을 건너면 디반이다. 구약시대 디본이라 불렀던 이곳은 모압 왕국의 수도였다. 라 놓고 있다.

왕의 대로를 따라 마다바(성서의 메드바)로 가면 길 서쪽으로 무키이트(성서의 카케루스)로 가는 길이 있다. 헤롯왕이 세례요한을 참수했던 마케루스 별궁이 있던 고이다. (마테복음 143~12)마다바에는 성죠지 그리스정교회가 있다. 이곳에는 비잔틴 시대 제작된 모자이크, 6C 후반에 그려진 팔레스타인 지도 가 있다. 200만 개의 색깔 있는 돌 조각을 박아서 만든 길이 25m 너비 5m의 모자이크 지도로 언덕과 계곡마을과 도시들, 예루살렘성을 묘사했다.

느보산은 마다바에서 10km, 이곳에서 모세는 최후를 맞는다. 모세는 느보산에 오르기 전에 자신의 생애가 끝나가고 있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백성들에게 내가 오늘날 일백 이십 세라 내가 더는 출입하기 능치 못하고 야훼께서도 내게 이르시기를 너는 이 요르단을 건너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고 말하면서 여호수아가 너를 거느리고 건널 것이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네 앞서 건너가사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니 너는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고 당부한다. 그리고 그는 비스가산(지금의 느보산)으로 올랐다. 해발 838m의 느보산 정상에는 작은 교회가 있다. 여기서 가나안 땅이 보인다. 모세도 야훼의 계시를 보았다. 393년 이곳에 교회가 들어섰다. 6C 들어 비잔틴 양식의 커다란 교회로 바뀌었다. 그후 이슬람 땅이 되어 쭉방치되었다가 20C 초 옛 교회터에 지금의 작은 교회가 들어섰다. 교회 안에는 비잔틴 시대 모자이크 작품들이 보존되어 있다. 제단 옆에는 모세가 최후를 맞은 자리임을 알리는 작은 십자가가 세워져 있다.

모세가 죽자 백성들은 30일간 애도하였다 한다. 이곳 어딘가에 장사지냈지만 그 묘를 아는 사람은 없다고 신명기” 346절에 기록되어 있다. 1994430일자 조선일보에 시나이 반도에서 고적발굴 작업을 하던 영국 고고학자들이 모세가 신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았다고 하는 시나이산의 해발 2250m 지점지하무덤에서 미라를 발견했다는 기사를 실었다. 이 기사는 미국의 선 .의 보도를 인용한 것이다. 발굴 당시 미라는 머리카락과 수염, 옷 등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완벽한 상태였다고 했다. ‘모세, 사악한 파라오를 멸망시키고 동포들을 노예생활로부터 벗어나도록 이끌었던 용감한 지도지이며 신의 메신저라고 히브리어로 씌어진 돌판에 누워있었다고 한다. rygjl 앞 벼랑 위에는 1984년 이탈리아 조각가가 청동철사와 파이프 등을 연결하여 만든 조각이 있다.

가나안 땅으로 가던 출애급 팀은 에돔왕이 길을 내주지 않아 멀리 국경을 돌아가게 되자 불평을 늘어놓는 백성을 보다 못한 야훼는 뱀을 보내 그들을 벌주었다. 곧 그들이 회개하자 모세에게 일러 놋으로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게 했다. 뱀에 물린 자가 그 놋뱀을 쳐다보면 낫게 하기 위해서였다. 놋뱀 장대는 그때 일을 일개우기 위해 형상해 놓은 것으로 믿음의 증표이기도 하다. 이 놋뱀 장대는 어떻게 보면 시비가에 못박힌 예수를 닮은 듯하다.

암만은 BC 13C에는 라바트 암몬이다. 롯의 둘째 딸이 낳은 아들로 암몬 왕국의 수도였다. 로마가 지배하던 시기의 성채와 반원형 노천극장이 있다.

출애급의 마지막 숙영지는 아벨싯딤이다. 사해를 감사고 있는 삼라산이 아벨싯딤의 터라고 하고 숙영지가 어디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아벨싯딤을 떠난 팀은 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팀은 가나안 땅에 들어기기 전에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언약궤를 앞세워 건너려 했다. 당시에는 함부로 건널 수 없는 깊은 강이었다. 성서에는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이 그대로 강 중간에 이르자 갑자기 물의 흐름이 끊기면서 마른 길이 나타났고 백성들 모두 그 길을 따라 건넜다고 기록되어 있다. 홍해에서의 기적이 이곳에서 재현된 것이다.

요르단 강은 갈릴리 바다에서 사행에 이르는 100km쯤 되는 수로이다. 이스라엘과 요르단의 국경을 이루며 가장 북쪽에는 야무강이 있어 시리아와 국경을 이룬다. 지금 요르단 강은 작은 개천이다. 그러나 이 매마른 땅에서는 귀중한 젖줄이다. 이스라엘, 요르단, 시리아의 분쟁은 표면상 땅을 두고 벌어지고 있고 명분상 안보이지만 밑바탕에는 물이 원인이다. 현재는 국경지대여서 접근할 수 없다.

여리고는 넓은 평지로 비옥한 녹색 땅이다. 종려나무와 오렌지, 바나나가 자라는 이곳은 수면보다 250m정도 낮은 곳이다. 1만 년 전 대규모 주거지가 발견되어 인류 최초의 도시로 불린다.

베트산은 예수가 마귀의 시험을 받았던 곳(마가복은 113)이라 하여 시험산이라고도 하는데 깎아지른 벼랑 중간 예수가 단식했다는 긎 kfl에 중세에 세워진 게오르그 수도원이 있다.

 

필리스테-성경에는 불레셋 그리스식 호칭은 팔레스티나

가나안

페니키아인 - 알파벳, 백향복 파피루스 무역, 우가리트인 - 우가리트 알파벳, 여부스족 - 농사와 유목

페니키아인은 상업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했다. 정치제제는 도시국가들의 느슨한 연합체였다. 이 연합체는 외국 세력에게 조공을 바치고 그 댓가로 안전을 얻었다.

그들이 차지한 영토는 레바논 산맥과 지중해 사이에 놓인 북부 팔레스타인의 좁고 긴 지역과 해안의 섬들이다. 천혜의 항구와 중앙에 위치한 입지조건으로 상업에 좋은 여건을 갖고있었다. 상업의 중심지는 타이르와 시돈이었다. 타이르의 주도권 아래 BC 10~BC 8 동안 정정에 이르렀다. BC 6C 갈데아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다시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게 된다. 타이르는 BC 332년 알렉산드로스의 7개월 동안 포위 공격을 받은 끝에 함락된다.

가나안의 종교처럼 Moloch신에 대한 인신희생과 다신의식이 있었다.

전문화된 수공업, 지리학과 항해술이 탁월했다. 카르타고, 시칠리아섬의 팔레르모 부근, 발레아레스 제도, 에스파냐의 카디스와 말라가에 식민지를 건설했다. 유리 및 금속 산업으로 연체동물에서 얻어지는 자주빛 염료로 고대 세계에서 널리 알려졌다. 또 밤에 별을 이용하여 항해할 수있을 정도로 항해술이 발전되었다.

사람의 음성을 나타내는 기호체계를 채택하였다. 그림문자와 음절문자를 제거했다. 그리스인은 이 알파벳을 채택하여 자신들의 언어에 적용했다. 근대 라킨 알파벳은 그리스 알파벳에서 나왔는데 이 라틴어 알파벳은 오늘날 서유럽 전역에서 사용되고 있다.

 

가나안이란 이름은 노아의 아들 함에서 유래한다. 노아가 어느날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벗을 채 천막 안에 주워있는 것을 본 가나안의 조상 함은 밖으로 나가 형과 마주하여 이야기하자 셈과 야벳은 겉옷을 접어 어깨에 걸치고 뒷걸음으로 들어가 아버지의 덮은 몸을 덮어주었다. 그들은 얼굴을 돌린 채 아버지의 벗은 몸을 보지 않았다. 술이 깬 노아는 작은 아들이 한 일을 알고는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형제들에게 천대받는 종이 되어라. 가나안의 셈의 종이 되어라(창세기 1021~27)”라 외쳤다.

성서에는 가나안의 위치를 시돈에서 시작하여 그 남쪽으로 내려갔다가 가자에 이르고 거기서 소돔과 고모라와 이드망와 스보임 쪽으로 라싸에 이르렀다.(창세기)”라 기록하고 있다. 가나안은 성서나 고고학에서 사용하는 명칭이고 일반적으로 팔레스타인이라 한다. 이는 그리스어 Palaistina, 히브리어 블렛셋에서 유래되었다. 지리적으로는 요르단 강 서안(West Bank)과 가자지구(Gaza Strip), 동지중해 일대와 이집트 동북부 해안 지대를 포함한다. “거기에는 너희가 세우지 않은 크고 아름다운 성읍이 있고 너희가 채우지 않은 온갖 좋은 것으로 가득찬 집들이 있고, 너희가 파지 않은 우물이 있고 너희가 바꾸지 않은 포도원과 올리브 밭이 있다. 너희는 그것을 마음껏 마시게 되리라.(신명기 610~11)”라 성서는 기록하고 있다.

이곳의 임자인 선주자 가나안 인이 살아있는데, 야훼의 이름을 대면서 내놓으라 한 것이다. 여호수아의 인도로 가나안 땅에 입선하면서 본격적인 싸움이 벌어진다. 여호수아는 7년을 사워 그곳을 차지했다. 12지파가 그땅을 나누어 가짐으로써 그들은 가나안에 정착할 수 있었다.

 

가나안의 최고신은 El이다. 그는 황소 엥(Bull )fh 불려지기도 했다. 모든 신들의 아버지로 강의 근원이 되며 엘 평원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바알은 엘의 아들이다. 그는 다산의 신이며 구름을 타고 달리는 자로 묘사된다. 대로는 천둥과 번개의 신 Hadad로 불려지기도 한다.

(Yam-Nahar)는 얌은 바다, 나하르는 강이다. 얌 나하르는 '바다와 강의 용'이란 뜻이다. 그는 바알과는 사이가 나빴고 엘의 총애를 받았다. 바알의 아버지 엘을 향해 반란을 일으킨다. 신들의 기술의 대장 Kothar-u-Khasis, 태양의 여신 Shapashi(아카드 신화의 샤마시와 비슷하다)는 신들의 횃불, 엘의 아내이며 모든 신들의 어머니인 Ashtoreth와 바다의 여신 Ashera 등이 등장한다. 아쉐라는 자신의 아들 Ashtar를 신들의 최고 주권자로 세우기 위해 바알의 왕관을 엿보고 있다. 그리고 바알의 누이인 Anath는 바알이 등장하는 여러 신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여신이다.

얌 나하르는 모든 신들이 모여있는 신전회의에 자신의 전령을 보내 바알을 자기 앞에 끌고 오라며 위협했다. 얌의 전령이 얌의 말을 선포하자 얌의 위협 앞에 신들이 모두 두려움에 떨며 머리를 조아렸고 엘은 얌의 말대로 하겠노라고 말했다. 그러나 바알은 겁pwlffudlT는 신들을 비웃으며 오히려 얌의 전령을 위협했다. 이때 아나즈와 아쉬토레트는 바알이 성급하게 얌에게 달려들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그리고나서 코타르--카시스로 하여금 두개의 마법의 지팡이를 만들어 바알에게 얌을 물리칠 수 있는 무기를 삼도록 했다. 그 무기의 이름은 Yagrush(우가리트어로 격추자란 뜻) Aymur(우가리트어로 타격자란 뜻)이다. 바알은 dia 나하르를 야그루쉬로 공격, 그리고 그의 가슴을 쳤다. 그러나 얌은 굴복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바알은 아이무르로 그의 이마를 쳐서 땅에 쳐박아버렸다. 얌이 항복하자 바알은 승리의 기쁨에 도취되어 잠시 얌을 공격하는 일을 잊어버렸다. 이때 아쉬토레트는 바알에게 신들이 얌-나하르에게 어떤 수모와 고통을 겪었는지를 소리높이 외쳤다. 바알은 자신이 한대 승리에 도취되어 본분을 잊은 사실을 부끄럽게 여기고 얌-나하르를 없애버렸다.

-나하르의 오만한 모습은 바다나 강이 보여주는 위협적인속성을 표현한 것이다. 바다와 강은 범람하여 대지를 황폐하게 만든다. 이에 반해서 바알은 절기에 맞추어 대지를 적시는 비처럼 자비로운 물의 속성을 상징한다. 바알은 구름을 타고 다니며 천둥과 번개로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도 한다. 때맞추어 비를 뿌려 대지를 비옥하게 한다.

 

바알의 누이 Anath는 양-나하르를 물리친 바알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성대한 연회를 준비한다. 연회는 Zaphon 산의 바알신 성소에서 거행한다. 자폰산은 북쪽이란 뜻으로 신들은 이 산에서 모임을 가졌다고 한다. 이 지명은 히브리 성서에 나와있는 시온산과 비교된다. 시온산도 야훼가 거주하는 북방의 산으로 자주 언급된다.(시편 482) 아나트는 연지를 바르고 henna(향기로운 희 꽃이 피는 이집트 식물로 머리카락, 수염 등에 물을 들이는 염료로 사용) 염료로 머리를 불들이고 한껏 치장을 하여 연회준비를 끝낸다. 잔치가 한창 무르익자 그녀는 갑자기 신전의 문을 잠그고 바알의 모든 적대자들을 죽였다. 그녀는 자신이 죽인 자들의 머리와 손을 베어 허리에 매고 무릎 아래로 죽은 시체의 피를 흘리며 걸어나갔다.

 

이 신화는 이집트의 하토르신이 인간을 멸망시키는 신화와 비슷하다. 특히 마지막 장면은 레의 대적자들을 죽이는 하토르의 모습과 비슷하다.

 

바알은 얌-나하르에게 승리를 거둔 후 자신의 신전을 갖기를 바란다. 바알과 그의 누이 아나트는 바다의 여신 아쉐라를 찾아가 엘에게 간청하여 바알의 신전 건축을 허락하는 엘의 승인을 받도록 해 달라며 부탁했다. 부탁을 받은 아쉐라는 나귀를 타고 엘의 장막이 있는 북방의 자폰산으로 향했다. 아쉐라는 엘에게 바알의 신전을 세워야 한다고 엘을 설득했고 결국 엘도 이를 승낙한다. - 여기서부터는 본문 내용이 정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 삼나무와 벽돌로 신전을 지었지만 다른 신들보다 자신이 높은 지위에 있음을 보여줄 만큼의 위용을 갖추지 못했던 것 같다. 이 신화의 후반부에 바알 시전의 초라함에 실만한 나머지 아트나가 앨을 찾아가서 바알의 신전은 금과 은, 청금석으로 치장하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하였고, 엘의 허락이 떨어지자 바알에게 그 사실을 알리는 장면이 표시되어 있다. 바알의 전령이 신들의 장인 코타르를 찾아가 바알이 찾고 있다는 말을 전했다. 코타르는 바알에게 달려왔다. 그리고 바알과 코타르는 신전을 짓는 문제를 상의했다. 이들은 신전에 창문을 만드는 문제로 서로 설전을 벌였다. 바알은 신전에 창문을 만들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신전에 창문을 내며 땅에서 얌의 세력이 기어올라와 창문을 통해 자신의 첩들을 잡아갈 것이라며 코타르에게 절대 창문을 만들지 말라고 했다.

후에 바알은 땅 속에 숨어있는 용들을 모두 죽인 후에야 코타르에게 창문을 만들게 했다. 코타르는 바알 신전의 창문을 번개와 천둥과 비를 보낼 수 있도록 설계했다고 한다. 신전 건축이 끝나자 바알은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 자축했다. 바알은 자신의 친족과 70명에 이르는 아쉐라의 자식들을 초대했다. 연회장에서 바알은 자신이 최고 지배권을 선포하고 얌이 죽은 후 엘의 총애를 받고 있었던 가뭄과 지하세계의 신 Mot에게 더 이상 공물을 바치지 않을 것이라고 선포했다.

이제 바알과 모트의 투쟁으로 전개된다. 얌으로 인격화된 거센 홍수를 일으키는 물의 용을 물리친 바알은 대지의 생명력을 위협하는 황폐하게 하는 가뭄의 힘을 상징하는 모트신과 맞서 싸워야 했다. 모트신은 히브리에서 죽음을 뜻하는 모트(죽이다, 생명을 잃다)라는 말과 관계있다. 바알과 모트가 싸우는 이야기를 기록한 토판은 훼손이; 심하여 전문 파악이 어렵다. 하자들의 이견이 없는 부분을 소개하면 이렇다.

바알은 Gapon(포도원의 정령)Ugar(목초지의 정령)를 전령으로 보내 더 이상 모트에게 공물을 바치지 않을 것이라 선언한다. 바알의 선언을 전해들은 모트는 지지 않고 바알을 위협했다. 당황한 바알은 다시 전령을 보내 모트를 달래려 했다. 바알은 오 자비로우신 주 모트시여, 나는 당신의 종입니다. 나는 영원한 당신의 노예입니다는 말을 전한다. 그러나 모트는 분노는 가라앉지 않고 바알은 모트의 힘에 눌려 죽게 된다.

바알이 어떻게 죽었는지에 관한 이야기는 없다. 탐무즈 신화를 통해 짐작해 보면 바알도 저승세계로 내려가서 결국 무트의 포로가 되었을 것이다. 바알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엘은 왕좌에서 내려와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는 머리에 먼지를 뒤집어 쓰고 삼제옷을 걸치고 돌로 그의 뺨에 상처를 냈다. 그는 바알을 위해 애곡하기 시작했다. 아나트는 오빠의 시체를 찾아 헤메다녔다. 나중에 샤파시의 도움으로 바알의 시체를 찾은 암나트는 자폰산으로 시체를가져와 묻고 성대한 장례식을 치렀다. 바알이 이승에서 사라진 7년 동안 대지는 가뭄과 기근으로 메말라 버렸다. 아나트는 모트에게 복수를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기회를 노리던 아나트는 모트가 한가로이 총원을 배회하고 있을 때 순식간에 그를 잡아 칼로 갈가리 찢고 바람에 날려 사방으로 흩어지게 하고, 불에 태우고 멧돌로 갈아 대지에 뿌렸다.

아나트의 이러한 행동은 농작물을 키우고 추수하는 과정을 표현한 것이다. 바알이 사라지자 대지는 황폐해졌다. 신들의 횃불 사파시가 바알을 찾아나선다. 결국 바알은 다시 자폰산으로 돌아왔고 왕좌에 복귀한다. 그가 왕조를 되찾자마자 죽임을 당하여 대지에 뿌려졌던 모트도 힘을 얻고 다시 그의 몸이 결합하여 생명을 되찾는다. 모트는 바알에게 복수를 결심하고 전쟁을 준비한다. 두 신은 치열한 싸움을 벌인다. 이에 샤파시가 기어들어 중재를 시도한다. 샤파시는 모트의 잘못을 지적하고 비난한다. 결국바알은 왕좌를 완전히 회복하고 자신을 도와준 신들에게 후하게 답례했다.

 

이 토판이 기록될 당시 우가리트를 지배하던 니코마트 왕에 대한 언급이 있는 것으로 보아 BC 14C 중반 아마르나가 최고 전성기인 시대에 기록된 것이다. 대부분 기록될 당시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구전되었을 것이다.

우가리트는 아시리아와 이집트, 아카드 문명의 영황권에 있었다. 비일 신회는 7개의 토판을 구성되어 있다. 정확히 어떤 순서로 배열되었는지는 알기 어렵다. 본문은 모음이 없이 자음만으로 구성된 알파벳 표음문자로 기되어어 해독이 어렵다. 문제체계는 셈어족에 속한다.

 

가나안 원주민은 농경민이었다. 고도의 성숙된 문화를 가지고 있었고, 문화의 성숙 단계로 본다면 이스라엘 유목민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았다. 이들은 BC 3000년경부터 고도의 철기문명을 가졌으며 알파벳을 가장 먼저 쓴 민족이다. 이 문자는 페니키아 문자의 조형이다. 가나안어는 히브리어의 고형이다.

이들의 신앙은 Baal신앙이다. 시리아 북방 우가리트(지금의 Ras Shamra)에서 발굴된 많은 타블렛에 기록되어 있다. 타블렡에 의하면 생산성은 7년 주기로 묘사되어 있다. 바알은 죽음의 신 모트와 생명을 건 투쟁을 한다. 바알이 승리하면 풍요로운 생산이 7년간 계속된다. 모트가 승리하면 7년 동안 가뭄과 기근이 든다.

신격은 광범하다. 어떤 때는 오직 하나의 대신으로 나타났다가 또 국부적 예배의 대상인 작은 신들을 형용하는 복수형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BC 14C부터는 이집트에서도 바알 숭배가 유행했으며 또 그리스에 들어가서 Zeus와 동일시되기도 하였다. 바알의 어원은 소유주(owner)라는 뜻이며 개념의 범위가 다양하지만 가장 명확한 특징을 농경의 생산과 관계되는 것이다. 그는 대지의 한이며 비와 이슬의 주이다. 비와 이슬은 가나안의 농경이 있어 가장 중요한 두 종류의 습기이다. 폭풍의 신이며 구름을 타고 다니는 신으로 그의 신주에 씌어져 있다. 세켐이란 도시는 바알 숭배지로 유명해졌고 세켐시의 수호신인 바알은 바알베리트(Lord of Covenant) 혹은 엘베리트(God of the Covenant)라 불리었다. 1960년대 초반 세켐을발굴하여 이 바알베리트의 신전이 부분적으로 재건되었는데, 그 신전의 기둥들이 댁 o성기의 모습을 하고 있고, 신전 입구에는 바알과 성교하는 여신 아쉐라가 서 있었다. 바알은 땅의 신이지만 그 자신은 남신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때때로 諸神들의 왕으로도 나타난다.

구약에는 보통 복수로 나타나며 남성으로는 바알림, 여성신들은 바알롵 혹은 단수로 Asherah라고도 부른다. 복수형으로는 Ashtoret로도 알려져 있다. 바알림과 바알롵은 대지의 남신들이며 대지의 여신들이다. 이들은 농경이 의존하고 있는 자연의 힘을 되살려 낼 수 있는 생명의 원천들이다. 이러한 자연의 glad의 회귀는 농경문화에 특유한 생산과정으로 아타나는데, 이것은 바알림과 바알롵의 신성한 결혼(hierogamos)으로 상징된다. 이것은 신들의 단순한 상징적 행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상에서의 인간들이 일상적 도덕적 규범으로부터의 해방 즉 술과 성교의 난음의 축제로 표현된다. 바알림과 바알롵의 신성결혼은 바알림을 상징하는 농경부락의 남자들이 바알롵을 상징하는 사원의 성녀들과 어울린다. 이것은 난장이요 개판이다. ‘라는 것은 인간에 있어서의 어지러운 것, 질서있는 것에서 이탈한 것을 의미한다. 인간이 하고싶으면서도 하지못하는 것, 그렇기 때문에 거부해야 하는 모든 것의 심리적 투사가 곧 개이다.

야훼를 대변하는 士師(드보라, 기드온, 이다, 삼손 등)들이 저주하고 증오했던 것이다. “사사기는 유목문화와 농경문화의 대립, 갈등이라는 인류사의 보편적 패턴을 제시하고 있다. 여호수아 같은 이들에게는 그들이 유목, 유랑하면서 생사고락을 같이했던 시절의 참신함에 대한 동경, 인간과 민족의 구원에 대한 갈망이 가득차 있던 그 시대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이것이 출애급을 가능하게 했다. 야훼에 대한 믿음이 있고 그 야훼에게 선택된 자로서의 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이들은 가나안의 고도의 문명과 접촉하면서 또 토착적 농경생활을 하게 됨에 따라 여자숭배문화와 종교적으로 접촉하게 되었다.

모세나 여호수아에게는 농경생활의 안락함이나 그에 뿌리박고 있는 고도의 문명 그 자체가 저주스러웠다. 문화접변에서 오는 초기 현상적 문화충격이 반문화 형태로 표출된 것이다. 사사들의 임무는 이러한 이스라엘 민족의 갈등 곧 고도로 성숙한 가나안 문화의 유혹과 문명에 대한 저중와 방황하는 자유로 얼룩진 유목생활에 대한 참신한 동경 사이에서 일어나는 민족적 갈등으로부터 구출하고 야훼의 새로운 인식을 불러일으키는 일이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rmemfd ltofhqrp 접한 바알신앙문화는 또 참신한 유혹이었으며 특히 농경의 생산예찬과 그로 인한 성적 해방은 그들에게 거부할 수 없는 본능적 유혹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종교적 지도자들에게는 그러한 유혹은 하나의 타락, 야훼에 대한 배반이며 계약위반이었다.

 

박카스 축제, 동맹, 영고

 

가나안 인은 페니키아 인이다. 영국이 자주색 사람이라 명명

페니키아는 우가리트 청동기 문화의 소멸과 함께 사라지고 튀르가 비블로스를 대신해서 무역항으로 성장한다. BC 11C에 이르기까지 페니키아 함선들은 지중해 도처를 항해하면서 해안을 따라 몇몇 무역항들을 세웠다. 이들을 통해 오리엔트 문명이 지중해 영역 내에 전파되었다. 특히 히람 1(BC 969~936 재위) 치세 하에 튀르는 최고의 번영을 누렸는데, 솔로몬과도 동맹관계를 맺었다. 그리고 카르타고에 식민지를 세우기도 했다. ddlemmf은 알파벳을 창안했다. 상업국인 페니키아에서는 실용성에서 볼 때 설형문자는 불편하고 사형문자는 너무 번거로웠다. 따라서 상업활동을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서 쓰기 편리한 표음문자를 고안했다. 그리스 문자로, 오늘날 알파벳의 기원이다.

BC 12C 시리아 지방은 지배한 민족은 아람인, 시리아 북부에는 히타이트 계통 왕국들이 여전히 남아 BC 8C 앗시리아의 정복이 있을 때까지 번영했다.

아람인은 내륙지방의 상인으로 성장, 사막을 가로지르는 대상로의 끝에 위치해 있던 그들의 수도 다마스커승에는 이 지역의 가장 중요한 도시가 되었다. (다마스커스에는 사도바울 회심교회, 아나닝아 교회, 바울 광주리 피신교회, 세례요한 무덤교회. 칼라몬산에 유세프 동굴이 있다. 태양신 제단이다. 비문이 있다. 마아눌라 마을에 시리티스 수도원, 성 세르지오 교회, 셍 테클라 수도원-1C 창건, 세드니야 수도원은 6C 중엽 성누가 화상이 있다. 시아파 자이납 모스크가 있다.)

필리스틴 인들은 람세스 3세에 쫓겨 가자나 아스칼론 등과 같은 팔레스타인 해안지대로 정착한 해적들이었다. 그들의 기원은 모호하며 그 문명은 미노아, 에게해, 소아시아적 요소들을 다양하게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내륙지방에 이미 정착해 있던 헤브라이 인들과 여러 차례 충돌을 일으킨다.

헤브라이인들과 그들의 시조 아브라함이 등장한 때를 아모리인들이 메소포타미아로 들어갔던 BC 2000년대로 보고있다. 그때부터 팔레스타인 지방으로 이주했던 것으로 되어있다. 약속한 땅에 들어왔을 때는 그곳에는 가나안인들이 정착해 있었다. 이에 헤브라이 인들이 무력으로 가나안의 도시들을 공격했다. 당시 이집트가 해적 집단인 필리스틴 인들의 침입으로 인해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크게 발휘하지 못하던 때라 헤브라이 인의 정복 사업은 비교적 용이한 편이었다. 여호수아 때에 이르러 팔레스타인 전부를 장악하고 그들 12개 부족이 정착하게 된다. 여호수아의 죽음으로 중앙집권은 끝나고 12지파가 봉토를 근거로 한 봉건왕이 다스린다.

헤브라이인은 처음에는 정치적 통합은 이루지 못했다. 그러다가 BC 1025년경 히브리 왕국을 건설한다. 당시까지는 士師들이 통치했다. 사사들은 12개의 독립적인 히브리 부족들에 대해 종교적 지도자로서의 권위를 지녔다. 그러다가 그들을 통치하고 전쟁을 지휘할 왕을 요구하게 되었다. 각 민족마다 군사적, 종교적 지도자인 사사 사무엘에 의해 헤브라이 왕국 최초의 사울이 선출되어 정치적 통합이 이루어졌다. 최초의 왕은 벤야민지차의 사울이었다.

 

당시 헤브라이 인들이 차지하고 있던 지역은 약속된 땅의 구릉지대에 머물러 있었다. 팔레스타인 해안 지역은 아직 셈족 계통의 해적 집단인 필리스틴들이 차지하고 있었으며 사울은 전투에서 상당한 무훈을 세우긴 했으나 도량이 좁고 질투심이 강한 사람이다. 가끔씩 노이로제 증세까지 보였기 때문에 한 민족 지도자로는 미흡했다. 최후의 위대한 사사로 왕의 배후에서 권력을 장악하고자 했던 사무엘의 불만을 샀다. 결국 백성들의 미움을 받다가 길보아산 전투에서 참패당하고 난 뒤 자결했다. 왕국은 국토의 대부분을 팔레스타인들에게 빼앗겼다.

다윗이 등장한다. 그는 사무엘의 지지를 받아 노련한 책략으로 대중의 인기를 왕에서 자기에게로 끌어모았다. 다윗은 원정에서 연거푸 승리하였다. 사울의 군대는 계속 패배해 마침내 치명상을 입게 되자 스스로 칼을 뽑아 세워놓고 그 위에 엎어져 죽었다. 다윗은 왕이 되어 40년간 통치하였따. 히브리 역사상 가장 영광스러운 시기를 형성. 남부 북부의 모든 부족들을 규합하여 필리스틴인과 전투를 벌여 국토의 대부분을 회복했다. 그는 12개 부족을 정대군주 아래 통합시키고 하나의 국가로 만들고 그는 왕국을 예루살렘으로 정하고 각 부족들의 군사력을 한데 모아 요르단강 동쪽 지역과 다마스커스를 포함하고 시리아 일부 징역까지 세력을 확대했다. 이후 예루살렘은 히브리인의 유일신 야훼 숭배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나 영광 뒤에는 고율의 세금과 강제 진집으로 or성의 불만이 높앚졌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BC 961~922) 치세에 크게 번영했다. 페니키아 항구 도시 튀르와 동맹을 맺음으로써 번영이 시작된다. 당시 페니키아 왕 히랍은 헤브라이의 구릉지대를 통하여 홍해와 연결되는 동맹을 맺고 예루살렘의 성곽, 사원, 궁전 등의 건립을 후원했다. 대신 히랍은 예루살렘을 통하여 홍해로 진출할 수 있었다. 그로인해 예루살렘은 교역의 중심지로 번영했다. 홍해 근처의 구리광산을 공동으로 개발 왕실의 재정은 풍부해졌다.

솔로몬 시대에도 헤브라이 인들의 부족주의가 문제였다. 솔로몬은 통일왕국의 기반을 공고히 하기 위해 전통적 부족제도를 해체하여 중앙집권적 관료체제를 개편하려 했다. 이에 대한 각 부족들의 반발이 강했다. 그런데도 솔로몬은 대토목공사를 일으켜 많은 백성들을 노역에 동원 무리한 세금을 징수했다.

 

히브리 민간전승에서 유사 이래 가장 현명하고 개명한 군주 중의 하나로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후대 민족주의 열망으로 인한 것이다. 그는 외교관이자 무역의 적극적 후원자였다는 사실 외에는 믿을 만한 것이 없다. 대부분 억압적 정책, 동방의 전제 군주의 화려함과 웅대함을 모방했다. 700명의 부인과 300명의 첩들을 수용할 수 있는 하렘을 지었다. 호화로운 궁전들과 4000마리의 말을 수용할 수 있는 마굿간을 지었으며 엄청난 비용을 들여 예루살렘에 t니전을 건축했다. 팔레스타인 지방은 자원이 빈약했기 때문에 건축 자재를 대부분 수입했다. 황금, , 구리, 삼목 등이 대량으로 수입되었으므로 조세 수입과 무역에 부과되는 통관세만으로는 도저히 그 비용을 감당할 수 없었다.(열왕기 상 910~11) 결손을 메꾸기 위해솔로몬은 20개 성읍을 양도했다. 강제노역도 시행했다. 석달마다 30,000만 명의 히브리인이 장집되어 페니키아로 파송되었다. 그들은 Tyre의 히람왕(성경에는 두로)의 산림과 광산에서 일하게 했다. 솔로몬의 압제는 백성들의 크나큰 원성을 샀고 BC 922년 그가 죽자 반란이 일어났다.

솔로몬이 죽고 아들 르호보암이 왕으로 즉위하자 압정에 허덕이던 북부의 부족들이 강제 노역과 세금을 줄여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르호보암은 그 요구를 거절하고 오히려 더 압박을 가했다. 그러자 북부 10개 부족은 사마리아를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켜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새로운 국가를 세웠다. 북부의 히브리인들은 세련된 도시 생활에 익숙했다. 근동의 무역의 교차점에 위치한 까닭에 상당한 경제적 이득을 얻었다. 그러나 남부의 두 부족은 예루살렘의 왕에 대한 충성을 계속했는데, 이 국가를 유대왕국이라 불렀다. 남쪽 두 지파는 목축과 농업을 주로 했다. 이들은 조상의 충실하고 외래 풍조를 혐오했다.

두 왕국은 싸움을 거듭했으나 이스라엘 왕 아합과 유대왕 요사피테가 동족 간의 분쟁이 무익함을 깨닫고 동맹을 맺은 뒤로 유호관계를 유지해 나갔다. BC 9C까지는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등 여러 강대국 간의 세력 균형으로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

BC 722년 아시리아는 이스라엘 왕국 정복하여 사마리아를 파괴한다. 이스라엘 지도자들을 포로로 잡아갔다. 거대한 아시리아 전역에 뿔뿔이 흩어져 다른 민족에 흡수되었다. 남부 유대 왕국은 아시리아 속국으로 전락했지만 공식으로는 독립을 유지했다. 후에 유대 왕국은 요시아(BC 640~660) 치세 때 아시리아 제국의 불안을 이용하여 강력한 저항운동을 벌였다.

아시리아가 신바빌로니아(갈데아) 왕국의 느브가드네자르 왕에 의해 정복되자 유대 왕국은 신바빌로니아에 대해 처절한 저항을 벌였다. BC 568년 예루살렘은 약탈당하고 방화, 지도층은 주민들은 바빌론에 끌려가 억류생활을 해야했다. 이로써 헤브라이 민족 왕국 역사는 종말을 고한다. (북 이스라엘은 772년경 아수르에, 남쪽유다는 587년 바빌론에 망)

페르시아 왕 키루스가 신바빌로니아를 정복한 후인 BC 539년 고국에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돌아기기 원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헤브라이 인들은 바빌론에 있으면서도 자신들의 전통을 간직했다.

 

바빌론 유수에서 귀환한 유대인들은 조로아스터 신앙의 여러 요소를 받아들였다. 다리우스1세는 조로아스터교에 국가적 지지와 후원을 하였다. 구세주가 다시 와서 죽음의 운명을 지고 악과 투쟁하는 인간들을 도와준다거나 인간의 영혼은 사후에도 살아남아 부활하고 심판을 받은 뒤 각각 천국이나 지옥으로 떨어지게 되리라는 내용. 시간이 끝나는 순간에는 절대의 창조주 신과 악의 세력 간에 어마어마한 투쟁이 벌어질 것이며, 최종적으로는 지상에 신의 왕국이 세워지고 의인들이 낙원에 들어가리라

다니엘서는 BC 2C 중반에 작성되었다. 바리세파의 사고에 영향을 미쳤다. 바리새인 Pharisee인이라는 말은 페르시아인을 가리킬 것이다. 유대인 가운데 페르시아의 영향을 가장 개방적으로 받아들인 분파이다.

 

포로 생활을 마치고 팔레스타인에 돌아온 후로는 부족주의를 점차 버리고 대표 부족인 유대족을 중심으로 단결했다. 이후로 그들은 유대인으로 불리게 된다. BC 539~322년까지 팔레스타인은 페르시아의 속국이었다. BC 332년 알렉산드로스에게 정복당했고, 그후 이집트의 지배를 받았다. BC 63년 로마의 보호령이 되었다.

유대인의 국가사는 70년에 끝났다. 로마에 필사적으로 반란, 로마는 예루살렘을 파괴하고 유대국을 속주로 병합함으로써 이를 응징했다. 그후 로마제국의 다른 지역으로 뿔뿔이 흩어진다.

사해 서안 위로 높이 서있는 이고산 요새 마사다는 로마에 맞서 싸운 유대인의 최후의 보루였다. 이 요새에는 100명의 남녀와 어린이가 거주했다. 이 요새는 2년동안 로마군에 포위 공격당했다. 73년 함락, 저항자들은 로마에 잡혀 노예가 되기를 거부하고 자살한다.

Diaspora-팔레스타인으로부터 이산. 그리스-로마세계 가 지역을 hehvl, 그들은 외래 영향을 급속히 받아들인다. 그리스와 오리엔트 사상의 융합을 촉진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기독교를 그리스 철학과 조화시켜 재창조에 기여했다. 특히 사도 바울.

 

* 히브리인의 종교

1. 모세 이전 - 히브리인의 역사 출발기로부터 BC 1250년까지, 이 시기 초 애니미즘. , 나무, 신성한 우물과 샘, 특이한 모양을 한 돌 등에 깃든 정령을 숭배했다. 강신술, 모방주술, 속죄염소 희생 등을 시행했다. 애니미즘은 점차 의인화된 신들에 대한 믿음으로 바뀐다.이것은 히브리가 가부장적 사회이기 때문일 것이다. 신들은 씨족이나 부족에서 족장과 비슷한 위치를 점하는 것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새로운 신들은 El이라는 이름으로 불렀고, 특정 장소의 수호신이었으며 아마도 개개 부족의 수호신이었을 것이다.

2. 민족적 단일신 - BC 13C~BC 9C

모세의 영향으로 YHWH라 부르는 신을 민족신으로 택했다. 구약시대 히브리어에는 모음이 없었다. 모음은 초기 기독교시대 나타나는데 그때 히브리어는 사어가 되어 있었다. 히브리인들은 거룩한 야훼의 이름을 입밖에 내기를 꺼려하여 BC 500년 이후에도 야훼 대신 Adonai(주님)를 사용했다. Jehovah라는 말은 13C 말 한 기독교인이 자음 YHWHAdona의 모음을 잘못 결합하여 만든 것이다. 그리스 문헌을 바탕으로 판단할 때 원음은 야웨로 믿어진다.

모세가 야훼에게 자기를 보낸 신이 누구냐고 사람들이 물으면 어떻게 말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그때 야훼는 나는 스스로 있는 나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스스로 계신분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하라(출애급기 313~14)”

모세 시대 이후 200~300년 동안 야훼는 거의 전적으로 의인화된 관점에서 인식되었다. 그 신은 인간의 육체와 감정을 모두 지닌 존재였다. 때로 변덕스럽기도 하고 성미도 급했다. 선한 면이 있는가 하면 악하고 분노에 찬 심판을 내릴 수도 있었다. 그의 명령은 종종 맹 n자의적이었다. 그리고 실수로 잘못을 범한 자에 대해서도 고의로 죄를 범한 자와 마찬가지로 벌을 내리기도 했다. 웃샤가 언약궤가 떨어지려 하자 손으로 붙들었기 때문에 웃샤를 때려 죽인 것이 그 예이다.(역대상 139~10)

야훼는 히브리인의 영토에서만 권능이 국한되었기 때문에 전능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후 히브리 종교가 서양 역사에 공헌하게 된 가장 중요한 요소들이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 히브리인들이 신을 자연의 일부가 아니라 전적으로 자연 밖에 있다고 믿게 된 것은 이 시기였다. 또 인간이 자연의 일부이면서도 동시에 신의 섭리에 의해 자연의 지배자가 되었음을 믿게 된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이러한 초월적 신학은 신이 점차 순전히 지적, 추상적 견지에서 이해될 수 있었음을, 그리고 인간을 임의로 자연을 변화시킬 능력을 가진 존재로 간주할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 단계의 히브리 종교는 윤리적이지도 영적이지도 않았다. 야훼는 최고 율법의 제공자이며 우주의 도덕적 질서를 유지하는 존재로 존중되었다. 야훼는 시나이 산상에서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구약학자들은 대체로 이러한 전승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모세 시대 원시적 형태의 율법이 존재했으리라는 점은 인정하지만 출애급기에 나타난 형태의 십계명이 BC 7C 이전에 존재했다고는 보지 않는다.

모세의 신은 선한 행동이나 마음의 정결함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희생 제물과 의식의 준수에도 관심을 갖고 있었다. 영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다.

결국 단일신에 대한 신앙은 과거 원시시대부터 올 지속되어 온 또는 이웃 민족들로부터 조금씩 습득한 물신주의 및 마술, 조잡한 미신 등에 의해 더럽혀지게 되었다. 이러한 타락은 뱀 숭배에서 피의 희생제, 난잡한 풍요의식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3. 예언 혁명의 단계 -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미가에 의해 종교개혁. BC 8~7C

초보적 형태의 유일신교 - 야훼는 우주의 지배자이며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다른 민족을 이용하기도 한다. 다른 민족의 신들은 거짓 신들이기에 어떠한 이유로도 숭배해서는 안된다.

야훼는 정의로운 신이다. 정의와 선을 벗어나서 자신의 권능을 행사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사실상 전능하지 않다. 세상의 죄악은 인긴에게서 오는 것이지 신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다.

종교의 목적은 윤리적인데 있다. 야훼는 의식과 희생에 관심을 두지 않으며 그를 다르는 자는 정의를 촉구하고 억압받는 사람을 돕고 고아의 송사를 변호하여 주고 과부의 송사를 변론(이사야 17)한다혹은 마가의 말처럼 무엇이 착한 일인지를 주께서 이미 말씀하셨으므로 사람은 오히려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여 겸손히 네 하나님을 함께 행해야 한다.(마가복음 68)”

 

이것은 종교혁명이다. 또 정차 사회적 측면을 지닌다.

당시 부는 소수에 편중되어 있었다. 수많은 소농들은 부유한 지주의 노예로 전락했다. “아모스서” 26절에 따르면 당시 법정에서 뇌물 수수가 만연해 채무 소송에서 원고는 재판관에게 신발 한 켤레 값에 상응하는 돈만 갖다주면 피고인을 노예로 삼을 수 있었다. 이런 상황 뒤에는 아시리아 지배의 위협이라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예언자들은 그러한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사회 악습을 일소해야 하며, 외래적 부패가 제거된 청신한 종교 안에서 모든 히브리인이 결속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 종교혁명으로 인해 극악한 압제가 일부 사라지고 이방 종교로부터 히브리 종교에 스며든 야만성은 근절되었다. 그러나 히브리 종교는 아직도 오늘날 유대교와 비슷한 모습을 갖추지는 못했다. 히브리 종교는 내세 지향적인 것이 아니라 현세지향적이었다. 정의롭고 조화로운 사회를 창출하고 인간에 대한 잔인성을 억제하깊 위한 사회 · 윤리적 목적을 추구하였을 뿐 사후세계에의 개인적 구원을 목표로 삼지 않았다. 따라서 천국과 지옥에 대한 믿음도 없었다. 죽은 자의 영혼은 저승 Sheol으로 내려가 그곳에서 티글과 어둠 속에서 잠시 모문 뒤 사라져 버리는 존재였다.

바빌론 포수 이후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은 시기, BC 539~BC 300

바빌론 포수 이후 이원론적이고 메시아적 종교인 조로아스터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반역자이자 악의 근원으로서의 사탄의 존재에 대한 믿음도 받아들였다. 종말론을 발전시켰고, 여기에 장차 도래할 영적 구세주 및 죽은 자의 부활, 최후의 심판 같은 개념들이 포함되었다. 그리하여 현세의 즐거움보다 더욱 중요한 사후 세계에서의 구원으로 관심을 돌렸다. 또 계시종교의 개념을 받아들여 성경을 신의 직접적인 영감에 의해 기록된 책으로 간주했다.

 

구약 39권은 AD 90년 팔레스타인의 Jamnia에서 열린 유대교 총회에서 유대교 정경으로 확정했다. 당시는 전부 24권이었는데 실제로는 39권이었다.

1. 율법서 - 창세기~신명기까지 5BC 400년경 정경으로 최종 완성되었을 것으로 추정

2.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상하까지 전기 예언서 4권과, 이사야, 예레미아, 에스겔, 12소 예언서(호세아~말라기)까지 후기 예언서 4권으로 구성된 예언서가 바빌론 포로기 때 그전 시대의 각종 자료들을 토대로 지금과 같은 형태로 완성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며 후기 예언서는 책들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BC 4C를 전후한 시기에 전기 예언서와 함께 지금의 형태로 완성되었을 것이다.

3. 시편부터 욥기, 잠언, 룻기, 아가, 전도서, 예레미아 哀歌, 에스터, 다니엘, 에스라, 느헤미야, 역대 상하 등 11권으로 된 聖文書는 율법서나 예언서와는 달리 시편, 지혜문학, 역사서, 묵시문학 다양한 장르에 속한 작품들을 포함하고 있어 복잡한 정경화 과정을 거친다. BC 2C 이후 어느 정도 수집 작업이 완료되어 정상적인 正經(Canon)화 길을 걸었을 것이다.

BC 1200년경에 시작되어 800년 이상의 세월이 걸려 기록된 것이다.

두 왕국으로 분열된 후 북부 이스라엘 왕국의 백성들은 이교도에 동화된다. 바빌로니아에서 돌아와 예언자 에즈라는 모세오경에 기초를 둔 율법을 성문화시켜 발전한다. 으며

구약은 일련의 수집과 개정 작업을 거쳐 편찬했다. 이 과정에서 오래된 부분과 새로운 부분이 합쳐지고 대개 그 책들의 저작을 고대의 저자(모세)의 이름으로 돌렸다. 이러한 수정 작업이 가장 일찍 이루어진 BC 850년 이전에는 이루어지지 앟았다. 구약의 대부분은 몇몇 연대기를 제외하고는 그보다 한 층 늦은 시기에 편집되었다.

시편의 많은 부분은 다윗왕이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중 많은 부분은 바빌론 포수 사건들이 언급되고 있으며 따라서 시편은 수백 년에 걸쳐 수집된 것이다.

외경은 히브리 문명이 거의 소멸되었을 때 등장한다. 솔로몬의 지혜서, 에녹서 같은 책들은 그리스-오리엔트 철학의 영향을 받아 작성되었다.

아가는 히브리인의 사랑의 서정시 중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그 주체는 가나안 사람들의 봄의 송가-Shulamith, 또는 풍요의 여신이 그녀의 연인에게 바친 사랑을 찬양한 송가에서 글어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오래 전에 그 본래의 의미를 상실했다.

 

욥기 - 히브리 문학의 최고 걸작이다. BC 500~BC 300년 사이에 씌어졌다. 인간과 운명 사의의 비극적 투쟁을 그린 희곡으로서 주제는 악의 문제이다, 악한 사람이 번영을 누리는데 의로운 사람이 어떻게 고통을 당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구 바빌로니아에 이와 비슷한 저작이 있어 거기에서 취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 히브리인들은 그 이야기에 심오한 철학적 내용을 담았다.

주인공 욥은 나무랄 데 없는 덕성의 소유자로 어느날 갑자기 잇따른 재앙을 만난다. 그는 재산을 모조리 빼앗기고 자식들은 죽임을 당했으며 육신은 고통스러운 질병에 시달리게 된다.

이에 대한 그의 최초의 태도는 금욕적 은둔이다. 악은 선으로 갚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통이 심해지자 절망에 빠져들어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하면서 악한 사람들도 더 이상 소란을 피우지 못하고 삶에 지친 사람들도 쉴 수 있는 곳인죽음을 찬양하기에 이른다.(욥기 317)

그 다음 욥과 그의 친구들 사이에 죽음의 의미에 대한 긴 논쟁이 이어진다. 그의 친구들은 히브리인의 전통적 관점에 따라 모든 고통이란 죄에 대한 형벌이며 회개하는 자는 용서받고 품성이 더 강해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욥은 그들의 어떤 주장에도 만족하제 못한다.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갈기갈기 찢긴 그는 모든 각도에서 문제를 재검토하기 시작한다. 그는 죽음이 끝이 아닐지도 무른다고 생각하면서 내세에서 얼마간 균형이 조정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다시 절망감이 엄습해오자 그는 신을 진노가 미치는 대로 무자비하게 파멸시키고 마는 전능한 악마라고 단정짓고 만다. 마침내 괴로음 가운데 전능자에게 스스로 계시해 보여줄 것과 신의 길을 자신에게 알려줄 것을 호소한다.

신은 장엄한 자연 활동을 무시무시하게 드러내면서 회오리바람 가운데에 그에게 응답한다. 욥은 자신의 미천함과 신의 형언할 수 없는 위엄을 확인하고는 스스로를 경멸하며 먼지와 재 속에서 회개한다.

결국 개인의 고난의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해답도 주어지지 않는다. 또한 신은 내세의 삶에서의 보상에 대한 아무런 약속도 제시하지 않는다. 욥의 절망적 비관주의를 반박하기 위하여 아무런 노력도 기울이지 않는다. 인간은 철학적 성찰-우주는 인간에 비해 광대무변하며 신의 자신의 숭고한 목적을 추구하는데, 공평이니 선이니 하는 인간적 기준에 의해 제한받을 수 없다는 - 에서 위로를 얻어야 한다.

 

전도서 - 집필된 연대는 BC 3C 이전으로 올라가지 않는다.

기계론 - 우주는 어떠한 목적도 없이 영원히 떠도는 하나의 기계이다. 일출과 일몰, 탄생과 죽음은 단지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순환일 뿐이다. “태양 아래 새것은 넚다”(19)

운명론 - 인간은 변덕스러운 운명의 희생자이다. 노력과 성공 사이에는 어떠한 필연적 관계도 없다. “빠르다고 해서 달리기에 이기는 것은 아니며 용사라고 해서 전쟁에 이기는 것도 아니다. 지혜가 있다고 해서 먹을 것이 생기는 것도 아니며 총명하다고 해서 재물을 모으는 것도 아니며 배웠다고 해서 늘 잘 되는 것도 아니더라”(911) 불행할 때와 재난은 누구에게나 닥친다.

비관주의 - “세상에서 벌어지는 온갖 일을 보니 모두가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114)” 명예, , 지나친 쾌락은 결국 덫이요 미망이다. 비록 지혜가 어리석음보다 낫다고 하나 지혜조차 행복에 이르는 확실한 길은 아니다. 지식의 증가는 고통을 더욱 예민하게 느끼게 만들기 때문이다.

중용 - 극단적인 금욕이나 방종은 피해야 한다. “헛된 세월을 사는 동안에 나는 두 가지를 알았다. 의롭게 살다가 망하는 의인이 있는가 하면 악한 채로 오래 사는 악인도 있더라. 그러니 너무 의롭게 살지도 말고 너무 슬기롭게 살지도 말아라, 왜 스스로 망치려 하는가? 노무 악하게 살지도 말고 너무 어리석게 살지도 말아라. 왜 계명도 다 못 채우고 죽으려 하는가?”(715~17)

 

기독교 등장 전 유대민족은 열 두 종파로 나뉘어 있었다. 다수파는 바리새파였고, 소수파는 사두개파와 에세네파였다.

바리새파는 중간 계급과 교육을 받은 일부 평민층을 대표했다. 그들은 부활, 사후의 보장과 징벌, 정치적 메시아의 도래를 믿었다. 육체의 부활은 원래 유대교에는 없던 것으로 이란 종교에서 도입한 것이다. 열렬한 민족주의자로 정치 참여를 주장했고, 고대로부터 전승된 의식의 충실한 준수를 옹호했다. 그들은 의식에 관련된 것이건 사회 윤리적 의문에 관한 것이건 율법의 모든 부분들을 똑같이 중요하게 취급했다. 그들은 안식일에 낳은 계란을 먹을 수 있느냐 없느냐는 문제를 두고 논란을 벌일 정도로 율법에 대한 관심이 컸다. 도덕적 청렴함, 친절한 태도 등으로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다.

사두개파는 성직자, 부유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부활, 사후의 보장과 처벌을 믿지 않았다. 로마의 지배를 일시적으로 수용하는 입장을 취했지만 율법에 대한 태도는 바리새파보다 완고했다. 유대교의 내면적 성격보다 현식적인 면을 중시한다. 철학적 논쟁을 좋아했고, 이교적 신앙도 거부하지 않았다. 다윗 시대 사제 사독에 애착을 느끼는 가장 보수적인 사람. 대사제의 대부분은 사두가이 파이다.

에세네파 - 통합된 종파가 아니라 여러 개의 유사하면서도 개벽적인 공동체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들은 하층계급의 지지를 받았다. 금욕주의를 실천했으며 사제와 지배자들의 부와 권력에 대한 저항을 수단으로 내세적 신앙을 가르쳤다. 생존에 필요한 만큼 먹고 마셨으며 모든 물건을 공동으로 소유했다. 결혼은 필요악을 보았다. 정부를 무관심하게 바라보았으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맹세하기를 거부했다. 종교의 의식적 측면보다 영적인 측면을 중시했으며 영혼의 불멸성과 종교적 메시아의 도래, 임박한 제상의 종말을 강조했다. 일체의 변화를 거부하고 금욕적인 독신자들이 중심이 된 소규모 공동체를 이루어 청빈한 삶을 영위하였다.

1947년 한 양치기 아랍인이 사해 해안에서 잃어버린 양을 찾아 헤매다가 바위 틈에 난 구멍을 발견한고는 돌을 던져 보았는데, 그 구멍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자 놀라서 달아났다. 얼마 후 그는 한 친구와 함께 다시 그곳으로 와 살펴보았다. 그곳에서 한 동굴을 발견했는데, 문자가 기록된 파피루스 두루마리들이 가득 들어 있는 50개 가량의 원통형 진흙 항아리가 쌓여있었다. 쿰란의 사해분서는 에세네파의 것이다.

이 두루마리들은 BC 130~AD 67년 사이에 번성했던 수도원 공동체의 존재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모든 물건들을 공동으로 소유했고, 기도와 성사, 성경 본문 연구와 사본 작성에 헌신적이었다.

사두개파를 제외한 유대교의 모든 종파는 기독교 발전에 강력한 영향을 주었다. 기독교는 유대교로부터 우주발생론과 십계명을 이어받았다. 신약의 상당 부분 - 자연과 인간의 외부에 존재하는 초월적인 신의 관념 -을 받아들였다.

예수는 바리새파의 율법주의와 위선을 비난했지만 유대교의 모든 교의를 거부하지는 않았다. 예수는 대중의 기대와는 달리 고래의 율법을 폐지하는 대신 완성시킬 것을 요구했다. 단지 율법이 종교의 핵심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초대 교회는 에세네파처럼 금욕주의를 실천했고 정치에 대해 무관심했으며 로마제국에 대해 적대감을 가지는 가운데 물건을 공동으로 소유했고, 임박한 세사의 종말을 믿었다. 에세네파와 이러한 유사점이 있지만 많은 욕망적 요소들을 가지고 있었다.

열심당(젤로스당) - 로마 점령군에 대항하여 무장투쟁을 벌였으나 그로 인해 소멸되었다.

 

진보유대교 - 독일에서 형성되었다. 국가의 법에 순응하고 그 사회에 완전히 동화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또 오래된 종교 의례에 묶일 필요는 없다고 주장한다.

정통유대교 - 독일에서 형성되었다. 진보에 대한 반작용으로 형성되었다. 모세 율법의 불변성을 고수하고, 일상생활에서도 엄격히 준수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신보수 유대교 - 독일에서 형성되어 미국에서 발전된다. 율법의 준수는 시대적 상황과 분리시킬 수 없으며 실천의 문제라 생각한다.

135년 성전 대파 이후 뿔뿔이 흩어진다.

 

히브리인의 도덕 개념은 서유럽에서 그랬듯이 오랫동안 압도적이었던 윤리에 대한 소극적 접근 방법을 발전시키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초기의 히브리인에게 란 금지 사항을 지키는 것과 동일시되었다. 무엇무엇을 하지 말라는 구약의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예언자의 시대에는 자선과 정의시회 같은 적극적 도덕관 등 급속히 진보하여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히브리인의 율법지상주의 그리고 재인의 존엄과 가칭에 대한 존중 등은 근대 민주주의 성장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유대교 전통이 기독교 및 스토아 철학과 대등하게 인간의 권리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자유로운 사회로의 발전을 촉진하는데 이바지하였다.

 

 

헤브론에는 마므레의 상수리나무, 사라의 무덤이라는 막벨라의 무덤과 아브라함의 무덤이 있다.

아브라함과 하갈 사이에 형 이스마엘은 아람족.

야곱의 형 에서는 에돔족

 

히브리인 이집트 노예 - 아바리스의 세트사원, 람세스 2세 새 수도 건설. BC 1258년 람세스2세가 오른테스 강 가의 카데슈에서 히타이트를 물리치고 건축 사업을 벌였다. 그보다 2C 앞서 투투모시스3세로 보기도 한다.

람세스2세때는 자연재해가 많았다. 나일강이 피로 물든 것은 강물이 휩쓸어간 붉은 진흙 입자.

솔로몬(968~928 BC)

BC 539년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바빌로니아 점령. 유대인 포로 돌려보낸다. 예루살렘 성전 재건 허락한다. BC 515(다리우스 6) 봄 준공한다.

BC 701년 아시리아 왕 산헤립이 예루살렘 포위.

 

이두매인 안티파더는 히르카누스의 고문이었다. 그의 아들이 헤로데이다. BC 47년 산적 의무를 띠고 갈릴리 장군이 된다. 성질이 교만해 산헤드린(대의회)에 고소당해 시리아로 망명한다. 그의 아버지가 암살당한 뒤 맏형 파라엘과 오리엔트의 새로운 군주 마르크스 안토니우스의 호감을 사 BC 42년 유대 총독이 된다. BC 40년 말 로마에 가 집정관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도움으로 원로원에 출두하여 여기서 유다의 왕위를 부여받는다.

히르카누스2세의 손녀 미리암네와 결혼한다. 미래의 경쟁자를 제거하기 위해 귀족을 무수히 죽였다. 에리코에 있는 궁전의 수영장에서 부인의 동생이며 대사제 아리스토불을 익사시켜 죽였다. 그의 인기가 불안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통치기간(BC 37~AD4) 동안 로마의 보호자들과 최상의 관계를 유지했다. 호화로운 대접으로 그들의 환심을 샀다. 로마는 헤로데 왕국의 안정성 덕분에 한 푼도 들이지 않고 시리아와 이집트 국경을 유지할 수 있었다.

사마리아를 복구하여 아우구스투스를 기념하는 세바스테(그리스어로는 세바스토스)라는 신전을 지어 황제에게 바쳤다. 예리고와 예루살렘에 극장과 경기장을 세웠다. 베들레헴 남부에 헤로디온 요새, 예리코 근처에 키프로스 요새(어머니 이름), 사해 양쪽에 하스몬 양가의 요새, 마쉐론테와 마사다를 재건하였다. 클레오파트라의 공격과 신하들의 반역을 근심하여 세웠다.

예루살렘 성전 서북쪽 보호하는 바리스 요새는 안토니우스를 기념하여 안토니아 요새라는 이름으로 재건하였다. 도시 안에 3개의 탑이 호위하는 요새화된 궁전을 세웠다. 성전을 건축했고,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광장(트라야누스가 로마에 세운 광장보다 두배가 넓은)을 조성했다.

헤로데가 죽자 아우구스투스는 친구 헤로데의 유언에 따라 그의 왕국을 헤로데의 세 아들과 여동생에게 나누어 주고 태수라는 칭호를 주었다. 유다의 태수인 아켈라오스는 국민의 분노를 사서 6년 아우구스투스는 그를 폐위하고 갈리아 지방으로 유배보내고 로마가 직접 통치했다.

헤로데의 부인

1. 이두메 출신 도리스(안티파더의 어머니)

2. 하스모 왕가의 공주 미리암네(알렉산더와 아리스토불의 어머니)

3. 사마리아인 말타케(헤로데 안티파스와 아켈라오스의 어머니)

4. 예루살렘의 클레오파트라(필리푸스와 헤오데의 어머니)

헤로데는 여동생의 꾐에 넘어가 미리암네를 처형한다. 안티파더의 음모에 넘어가 그녀의 두 아들을 죽인다.(BC 7)

필리푸스와 헤로데 안티파스가 통치하던 태수령 두 곳은 존속한다. 아켈라오스 영토는 6년 이후 로막 kwlrwjq 통치한다.

 

헤로데와 미리암네의 손자이며 아리스토불의 아들인 헤로데 아그리파는 어릴 때부터 로마의 안토니아(안토니우스의 딸이자 게르마니쿠스와 클라우디스의 어머니에며 칼리귤라의 할머니) 곁에서 자랐다. 아그리파는 왕의 총애를 잃자 선물 공세로 칼리귤라의 마음을 산다. 37년 칼리귤라는 즉위하자마자 아그리파를 자식이 없는 아그리파의 숙부 필리푸스가 다스렸던 영토의 왕으로 앉혔다. 과거 헤로데가 다스렸던 영토의 대부분을 되찾았다. 아그리파1세는 44년에 죽는다.

 

티베리우스 치하 폰즈 빌라도(26~36)가 총독이다. BC 28Augustus가 호구조사를 한다.

 

70년 두 번째로 성전이 파괴된다. 사두가이파는 성전과 함께 사라진다. 에세네파는 많은 수가 전투에 참가했으며 쿰란의 에세네파는 68년 베스파시아누스의 군대가 진격해오자 귀중한 책들을 동굴에 감추고 도주했을 것이다. 바리사이파와 그 지지자만 남았다. 그들은 반란 중 중도를 지켰다.

132년 유다에서 시몬 바르 코시바(별명은 바르 코크바)가 이끄는 2차반란이 있었다.

하드리아누스가 예루살렘의 폐허를 복구하여 엘리아 카피톨리나(자신의 가족 엘리아 일가의 이름을 따서)라는 로마식 도시를 건설하여 성소가 있던 저리에 쥬피터와 쥬노와 미네르바에게 바치는 신전을 지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유대인에 대한 복수로 엘리나 카피톨리나(예류살렘)에 거주하는 것을 금지했다. 유다라는 이름 자체를 말살하고 그곳을 로마의 새로운 한 지방으로 편입라고 팔레스타인이라 명명했다. 불레셋이란 그리스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개종 이후 그의 어머니 헬레나는 예루살렘을 기독교 도시로 만들려고 했다. 골고다가 있던 곳에서는 비너스신전이 후일 설 성모교회가 되는 아나스타시스(부활) 원형교회로 바뀌었다. 성전 뜰에 세워졌던 이방인들의 건축을 헐어버리고 그곳을 유대인이 겪은 굴욕의 표시로 삼기 위해 폐허로 남겨 놓았다. 유대인들이 성도에 체류하는 것을 금지했다. 1년에 한 번 압달 9일에 서쪽 벽에 가서 울 수있는 권리만 지니게 되었다. 그래서 통곡의 벽이라 불리게 되었다.

 

예수의 족보

1. 아담과 이브의 아들 셋의 자손으로 노아

2. 노아(BC 4000)의 아들은 셈, , 야벳이 있다. 셈의 자손은 메소포타미아 중앙지대에서 번창한다. 데라, 데라의 아버지는 나홀, 나홀의 아버지는 스룩.

함은 술취해 알몸으로 자고 있는 아버지에게 동성애 - 그 자손은 남쪽으로 옮겨갔다. 함의 아들 가나안. 가나안 일족은 지금 지금의 가자에서 사해변의 소돔과 고모라에 이르는 강력한 영토를 확보했다. 가난인은 페니키아인이다. 자주색 피부의 사람들이란 뜻이다. 가난의 아모리족, 블레셋(페르시아), 아모리족은 가난 주변에서 유목생활, BC 3000년 초부터 유프라테스강 주변에 정착

야벳의 자손은 북쪽 산간 지역과 바다에 흩어져 있는 섬으로 퍼졌다. 그리스인 로도스인의 조상이 된다.

3. 테라는 아들 나홀, 아브람, 하란이 있었다. 나홀은 이동 중 하란에서 아버지 데라가 죽자 하란에 정착한다. 하란은 일찍 죽고 그 아들이 아브람의 조카 롯이다. 아브람의 아내 사라는 하란의 달이라 한다.

4. 야곱과 레아의 아들 유다는 수아와 결혼하여 엘, 오난, 셀라 3아들을 두었다. 창녀로 변장한 며느리 다말과의 사이에서 베레스를 낳는다.

5. 7대를 내려가서 엘리멜릭과 나오미의 아들 말론과 며느리 오르바, 기룐과 룻이 있었다. 과부 룻은 엘리멜릭의 친족인 보아스와 재혼해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는다.

6. 다윗의 28대손이 예수이다.

 

예수 탄생 당시 팔레스타인은 로마의 위성왕국이었다. 헤로드 통치 기간은 BC 37~BC 4. 남부 유대 토호 출신 헤로드는 안토니우스와 아우구스투스 같은 로마의 유력자들에게 자리 보전. 영역을 넓히고 각지에 신전, 투기장, 극장 등을 지어 로마 문화를 보급한다. 왕실의 양식은 그리스 로마식으로 변하고 상류층 유대인은 역시 그리스 로마 문화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AD 6년 로마의 첫 황제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AD 26년부터 폰티우스 필라투스를 총독으로 직접 통치한다. 11년간 통치한다.

로마의 팔레스타인 통치는 가혹했다.

44년부터 유대인의 로마에 대한 저항이 본격화된다. 유대인은 66년에 항복한 로마 수비군 살해한다. 당시 베이트 호른에서 로마군 600명이 죽는다. 로마가 보복한다. 한 도시, 한 도시를 차례로 파괴하면서 팔레스타인을 점령한다. 64년 로마시 대부분이 불탄다. 기독교 박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70년 예루살렘을 점령한다. 솔로몬 사원을 파괴한다. 통곡의 벽이라 불리는 서쪽 벽만 남았다.

로마군에 쫓기던 반란군과 그 가족 976명은 66년 사해 남쪽 언덕 마사다로 피신한다. 로마는 15000명의 병력으로 포위 공격했다. 별다른 전과를 거두지 못하자 마사다 보다 높은 인조산을 만든다. 73년 인조산이 완성되어 공격한다. 농성하던 유대인은 살아남기 원한 여인과 어린아이를 재외하고 모두 자결한다. 한 여인이 전한 바에 따르면 지도자 벤 야이르가 죽을 것을 촉구하는 연설을 한 뒤 제비뽑기로 10명의 남자를 뽑아 모든 사람을 찔러죽이고 자신들도 자살한다.

마사다는 오늘날 마지막 신병 훈련 장소이다.

1322차 반란이 있었다. 117년 즉위한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토라연구, 할례, 기타 유대인의 관행을 금지하자 무장 투쟁을 한다. 로마는 수백 개의 도시를 잿더미를 만든다. 135년 유대인 저항은 완전히 분쇄된다. 로마는 예루살렘을 재건했는데 솔로몬사원이 있던 것에 하드리아누스 조각상을 세웠다.

 

기독교는 예수와 바울에 의해 형성되었다. 그후 서서히 개종자를 늘려 나갔다. 3C 혼란 속에서 널리 확산되었다. 로마가 도덕적으로 타락했던 4C에 승리할 수 있었다.

예수는 AD 6년에 태어났다. AD 1년 탄생설은 6C의 한 수도사가 연대를 잘못 계산했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예수가 성장하는 동안 유대는 로마의 지배하에 있었다. 당시 유대는 종교적 열망과 정치적 불만의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다. 바리새인들은 유대교의 율법 보존에 전념하면서 조국을 로마의 지배에서 구출해 줄 정치적 메시아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중 정치적 갈망이 가장 컸던 부류는 열심당 Zealots였다. 그들은 무력으로 로마를 물리치고자 했다.

신약에 따르면 예수는 전도와 가르침, 귀신을 쫓아내고, 장님이 눈을 뜨게하고 죽은자를 살리는 등 병자를 고치는 일로 일관했다. 타락, 탐욕, 방탕을 비난하고 스스로 겸손과 자기부정의 모범을 보였다. 그는 자신이 인류를 죄악으로부터 구원할 사명을 지니고 있다고 믿었다.

예수의 이런 활동은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의 분노를 샀다. 그들은 바리새인의 율법주의에 대한 예수의 비판, 형식과 의식에 대한 경멸, 사치와 허세에 대한 비난을 싫어했다. 또 예수의 탁월한 지도력이 로마와 마찰을 일으킬까 두려워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를 예루살렘 최고 재판소에 회부하여 신성모독과 유대인의 왕을 참칭한 혐의로 정죄하고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 십자가형을 받게했다.

제자들은 예수의 죽음과 더불어 자신들의 희망도 끝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주께서 살아났으며 일부 신실한 제자들은 그를 목격했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제자들은 이에 예수가 부활했으며 그가 참된 신이라고 믿게 되었다.

예수의 가르침은 4복음서에 나타나 있다. 가장 초기의 것은 예수가 죽은 지 한 세대가 지난 후에 쓰여진 것이다. 예수의 제자들은 믿은 바에 따르면 예수는 자신이 그리스도 즉 신의 거룩한 아들로 계시했고 이 세상에 보냄을 받아 인류의 죄를 위해 고난과 죽임을 당했다. 무덤에서 3일 간 있은 후에 죽음에서 부활하여 하늘로 올라갔으며 그는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다시 한번 세상에 올 것이다.

복음서에는 그의 가르침에 대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아버지로서의 신과 형제로서의 인류

황금률 - 너희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태복음 712)

원수에 대한 용서와 사랑

악을 선으로 갚을 것

자기부정

위선과 탐욕에 대한 정죄

의식은 종교의 본질은 아니다

임박한 종말의 날

죽은 자들의 부활과 하늘나라의 수립

특히 , 를 전도의 핵심으로 강조했다.

 

사울(10?~67?)

소아시아 동남부 타르수스 출신 유대인이다. 기독교를 박해하다가 나중에 기독교로 개종하고 근동 전역에 기독교를 전파했다. 바울은 예수가 유대인만을 구원하기 위해 보냄을 받았다는 주장을 거부하고 기독교를 인류의 보편 종교로 선포하였다.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하는 즉 기름부음을 받은 신적 인간이라고 하는, 그리고 십자가 죽음은 인류의 죄를 씻어 주었다고 하는 사상을 강조했다. 그는 율법적인 노력은 구원을 확보하는데 전혀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원죄를 지닌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을 통해 오직 믿음과 신의 은혜에 의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장차 다가올 삶에서 인간이 맞이하게 될 운명은 전적으로 신의 의지에 달려있는 것이다.

예수는 신의 나라가 임박했음을 선포했고, 바울은 그리스도와 교화의 직무를 통란 개인적 구원의 토대를 놓았다.

바울 이후 기독교 신자들은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나아가도록 하고자 의식과 성사를 발전시켰는데, 그와 같은 성사를 집전할 사제 조직을 발전시켰다. 사제들은 초자연적인 권능을 부여받았다는 관념이 등장하면서 기독교는 성직자들과 평신도 사이에 차별성이 강조하게 되었다. 이것은 그후 유럽역사에 나타난 교회와 국가 사이의 다툼의 근본 원인이 되었다.

기독교는 세속 사제 조직에 의해 주관되는 내세 구원을 강조함으로써 교세가 크게 신장한다.

기독교는 그리스도 이후 200년 동안 착실히 성장을 거듭했다. 3C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교세가 확장된다. 3C 로마는 고뇌의 시대였다. 극도의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궁핍으로 인해 사람들은 현세의 삶을 허망한 꿈으로 여기게 되었고, 희망을 내세에 걸게 되었다. 인간의 육체와 물질세계는 점점 더 사악한,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하여 신플라톤 철학자 플로티노스가 철학 체계를 창안하였으나 너무나 난해해서 대중에게는 별 의미가 없었다. 대신 현세에서의 영적인 힘의 지배와 내세 구원의 절대적 우월성을 강조하는 여러 종교들이 많은 신자들을 끌어모아 기반을 마련하기 지작했다.

180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61~180)가 사망함으로 5현제 시대는 끝난다. 5현제가 정치적으로 성공한 이유는 아들이나 친인척이 아닌 유능한 젊은이를 골라 제위를 계승시켰기 때문이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선임황제들의 관행을 깨뜨리고 아들 코모두스에게 제위를 계승했다. 그는 무능한 패륜아이며 잔인하고 사악한 취미에 탐닉하였다. 원로원을 공공연히 경멸하였다. 결국 192년 한 궁정 파벌에 의해 교살당했다.

그후 사태는 악화되어 코모두스의 분명한 후계자가 없었기에 여러 속주의 군대가 제각기 황제 후보자를 옹립하여 그 결과 내란이 일어난다. 한 속주의 사령관으로 세베루스(193~211)가 승자로 떠올랐지만 이제 속주의 군대가 임의로 제국의 정치에 개입할 수 있게 되었다. 세베루스와 그의 계승자들은 원로원의 권리도 묵살하고 노골적으로 군사 독재를 자행하여 사태를 더울 악화시켰다. 무력의 잔인함이 드러나자 정치적 야심을 품은 모든 장군들이 권력 장악의 요행수를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부터 내란이 퍼져 235~284년 사이 26명의 군인황제가 등장한다. 그중 한 사람을 재외하고는 모두 폭력에 의해 죽었다.

내란은 경제적 파멸을 초래했다. 전쟁이 계속되면서 농업과 상업이 방해받았다. 무절제한 화폐 발행으로 화폐 가치는 하락되었고 주민들에게 거의 몰수에 가까우리만큼 무거운 세금을 부과함으로써 필요한 경비를 조달했다.

전쟁과 기근에 뒤이어 전렴병이 창궐하였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에도 가공할 전렴병이 휩쓸어 로마의 군대와 인구를 크게 감소시킨 적이 있었다. 3C 중반에 접어들어 다시 창궐한 페스트는 15년에 걸쳐 엄청난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이런 가운데 서쪽 게르만족과 동쪽 페르시아 인들이 옛 로마의 방어선을 돌파하였다. 251년 고트족은 황제 데키우스(249~251)를 전투에서 살해하고 도나우강을 건너 발칸반도를 약탈했다. 황제 발레리아누스(253~260)260년에 벌어진 전투에서 페르시아 군에 사로잡혀 무릎을 굻고 페르시아 지배자의 발판 노릇을 했다. 황제가 사망하자 그의 시신은 박제가 된 채 전시되었다.

이런 시대정신에 부응하여 신플라톤주의가 전면에 등장한다. 플라톤 사상의 종교적 측면을 극단적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流出 - 모든 존재는 연속적인 유출의 흐름 속에서 신으로부터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 과정의 첫 단계는 세계영혼의 유출이다. 이 세계영혼에서 개체의 영혼이 나온다. 유출의 마지막 단계는 물질이다. 물질은 그 자체가 형태나 속성을 갖고 있지 않다. 그것은 단지 정신의 결여, 곧 신으로부터 나온 정신적 빛이 다 타버리고 난 후에 남은 찌꺼기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물질은 악과 어둠의 상징으로 경멸받아 마땅하다.

신비주의 - 인간의 영혼은 본래 신의 일부분이었지만 물질과 결합하면서 그 신적인 근원으로부터 분리되었다. 인생의 최고 목표는 신과 신비한 결합이며 그 합일은 명상을 통해 그리고 영혼을 육체의 멍에로부터 해방시킴으로써 달성할 수있다.

금욕주의 - 인간은 육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부끄럽게 여겨야 하며, 가능한 모든 방법을 옽해 육체를복종시켱야 한다.

 

창시자 플로티노스는 204년경 이집트에서 출생했다. 만년에 로망에 가서 가르쳤다. 270년 사망 때까지 주로 상류계급에서 많은 추종자를 끌어모았다.

그의 계승자들은 그의 철학에 기이한 미신을 혼합, 비합리적 관점과 국가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3~~4C 로마에서 폭발적으로 늘어나 스토아 철학을 완전히 대치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로마가 현세로부터 등을 돌렸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처음 기독교는 미트라 숭배, 영지주의, 이시스, 세라피스 숭배와 같은 여러 종교 중 하나였다.

기독교는 유대교의 영지주의 등 다른 고대 종교들로부터 여러 요소를 채택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신흥종교였다. 수백 년 동안 존속해온 다른 구원 종교들에 결여된 역동성이 있었다. 이것은 배타성에 힘입어 강화되었다. 기독교 출현 이전까지 사람들은 여러 종교에 적을 두어 안전을 확보하고자 했다. 기독교는 그와같은 태도를 금지하고 기독교에서 내세우는 유일신만 섬길 것을 강조하였다. 절대를 갈구하던 당시 사람들에게 압도적 호소력을 가질 수 있었다. 당시 여러 종교들 가운데 기독교만이 현세의 악을 악마의 지배를 받는 마귀들의 짓으로 설명하는 등 포괄적 이론을 갖추었다. 전도자들은 기적에 의해 마귀들을 물리침으로써 새로운 종교의 권능을 강조하는 데 성공했다.

260~400년 사이에는 마니교와 기독교는 경쟁 종교가 된다. 로마 말기의 인민들은 내세의 구원에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종교들도 역시 내세를 약속했다. 그러나 기독교의 전도자들은 불신자는 영원히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태워질 것이며 믿는 자는 영원한 복락을 누릴 것이라고 경고함으로써 두려움에 떨던 이 시대에 많은 개종자를 획득했다.

기독교는 초창기부터 비천한 자들-목수 ,어부, 천막 제조공-의 종교로 낮은 자가 높이 들어올려질 것을 약속했다. 교세가 성장하면서 일부 부유한 후원자들을 포함하기도 했지만 가장 큰 힘의 원천은 로마제국의 절대 다수를 점한 하층 및 중간 계급이었다. 또 여성이 예배에 참여하여 남성과 동등하게 구원의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이에 비해 당시 미트라 숭배는 여성을 종교 의식으로부터 철저히 배제했다.

3C 말 신앙생활을 지도할 사제 조직을발전시켰다. 기독교인 집회는 긴밀한 유대관계를 가진 공동체로서 구성원들은 각종 봉사 - 병자 간호, 노약자 보호, 장례 - 등을 제공했다. 이들은 인간적인 따뜻한 유대감과 강한 사명감을 찾을 있었다.

로마인들은 대체로 기독교에 무관심했다. 기독교인은 별다른 제약을 받지 않았다. 때때로 가혹한 탄압이 있었지만 간헐적이어서 치명적 손상을 입을 정도는 아니었다. 이런 박해는 오히려 기독교를 널리 알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디오클레티아누스(248~305 재위) 치세 말기에 마지막 한 차례 대박해가 있었고, 그의 계승자 가운데 한 사람인 갈릴레우스에 의해 계속되었다. 이 시기에 기독교 세력이 지극히 강해져서 박해로서만은 도저히 뿌리를 뽑을 수없었다. 갈릴레우스는 사태를 파악하고 죽기 직전인 311년 관용령을 선포하였다. 그후 로마의 지원을 받으며 성당해 갔다.

180년 이후 로마는 쇠퇴하였다. 284년 군인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제국을 재정비한다. 그후 4C 전기간을 통해 지중해를 장악해 나갔다. 5C에는 제국의 서반부가 게르만 족의 침입으로 멸망하고, 6C 동로마 제국에 서부 지중해 지역 상당 부분을 재정복했고, 7C 서반부를 포기하고 동반부에 세력을 결집해야만 로마제국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그리고 고대는 종말을 고한다.

 

기독교가 확산되어 가는 동안 로마제국은 쇠퇴해 가고 있었다. 쇠퇴의 과정에 제국의 존립 기반인 도시가 위축된 것이다. 유럽 서북부는 도시 문명의 뿌리가 얕았고 지중해에 뻗어있는 제국의 주요 교통 · 통신망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지중해에 인접한 서로마 여러 지역에서도 도시가 위축되어 갔다. 서로마 도시들은 사치품 교역과 공업에 의존하고 있던 동로마 도시들과는 달리 당시 쇠퇴를 거듭하고 있다. 농업생산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이 시기 문명의 중심과 제국의 지배권은 서로마에서 동로마로 이동하였다.

3C 로마를 파멸로 가게 할 뻔했던 50년의 혼돈은 284~305년 디오클레티아누스에 의해 종식된다. 그는 당시 국가 생활에서 군대의 비중이 지나치게 크다고 생각하고 군대의 명령체계를 민간 행전조직과 분리시켰다. 대내외적인 압력으로 로마제국 전체를 통치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그는 제국을 반으로 나누고 서반부를 자신의 동료 막시미아누스에게 양도했고, 막시미아누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를 상위 지배자로 받들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각기 caesar라 이름의 부황제를 한 명씩 선정해서 영토의 상당 부분을 통치하게 했다. 이러한 제도는 질서정연한 제위 계승을 확보해 주었다. 두 명의 부황제는 각기 황제의 지위를 계승받게 되어 있었고, 부황제가 즉위하면 바로 부황제를 새로 임명하게 되어 있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제국의 행정 중심을 동로마로 옮겼다. 그는 재위 기간 터키의 니코메디아라는 도시에서 황제의 업무를 관장했다. 그는 동방군주의 칭호와 의식을 채택했다. 독재자로 나선 것이다. 철 번째 시민이라는 뜻의 princeps라는 칭호를 취하지 않고 주인이란 뜻의 dominus라는 칭호를 택했다. 왕관을 쓰고 금으로 수놓은 자색 비단 가운을 입었다. 그를 알현하는 사람은 그 앞에 부복해야 했고, 일부 특권층에게는 그의 옷자락에 입을 맞추는 것이 허용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305년 퇴위한다. 동료 막시미아누스에게도 은퇴할 것을 종용했다. 두 명의 부황제가 평화적으로 계승했다. 그러나 곧 디오클레티아누스 계승자들 사이에 내란이 일어나 최초의 부황제 중 두명 중 한 사람의 아들인 콘스탄티누스라 승리한다.

콘스탄티누스는 312~342년까지 서로마에서만 통치했다. 324~337년 권력 공유를 중단하고 제국을 재통합하여 제국 전체를 지배했다.

그는 디오클레티아누스와 거의 같은 노선을 따라 통치했다. 자신이 신이 된 듯 행동했다. 그러자 사회는 카스트제도로 경직되어 갔다.

330년 새로운 수도를 건설, 콘스탄티노플이라 했다. 왕위 계승을 세습하여, 800년 전 폐기된 왕정의 원리를 도입했다. 제국을 사유재산처럼 취급했다.

그는 영토를 셋으로 나누어 세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부친이 죽은 후 세 아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진다.

테오도시우스 1(379~395)가 제국을 통합시킨다. 그는 자신의 관리 한 명을 죽였다는 이유로 데살로니카 시민을 학살한 인물이다. 그러나 게르만 족의 침입을 막아내 제국을 지켰기 때문에 대제라는 칭호로 불린다.

콘스탄티누스~테오도시우스 가간에 콘스탄티노플은 제국의 중심지로 동로마가 교여과 행정의 중심이 되었다. 지방색이 나타난다. 라틴어를 사용한 서로마와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동로마가 동질성을 잃어갔고, 빈부의 격차도 커졌다.

기독교 수용은 콘스탄티누스에 시작되어 테오도시우스에 의해 완성된다.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의 정치적 출세가 기독교의 개종(312년경)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고 기독교가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종교적으로 분열된 로마제국에 정신적 통일을 가져다 줄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기독교적 교육을 받고 자란 몇몇 그의 계승자들은 과거의 황제들이 기독교를 박해했던 것보다 더욱 혹독하게 이교 박해를 명령하여 이러한 목적을 추구했다.

출세를 노리는 관리는 지배자의 종교를 신속히 받아들였다. 기독교가 국가로부터 후원을 받게되자 일반 대중도 쉽게 개종했다. 콘스탄티누스 개종 당시 로마제국의 1/5에 불과하다가 국가의 지원에 힘입어 압도적 다수가 되었다. 테시도시우스가 380년 칙령으로 기독교 이외의 모든 종교를 금하자 이미 소멸 중이던 이교들은 로마의 일부 면경 지대에 조금 남고 나머지 지역에서는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기독교가 승리하자 교리 논쟁이 일어난다. 소수의 종교였을 때는 외부 적대 세력에 맞서 공동전선을 펴야 했으므로 내부 분열이 통제될 수 있었다.

이러한 분열은 기독교에 내재하고 있었다. 주지적 경향과 감정적 경향의 긴장이 드러난 것이다. 또 제국 내의 여러 지역들이 제각기 다른 신학적 신조를 선호함으로써 자신들의 독자성을 유지하려 한 데 있다.

 

아리우스(250~336)는 알렉산드리아 시제였다. 예수는 절대자인 야훼의 피조물이지 신은 아니다. 예수은 야훼의 지상 대리자였을 뿐이다.

아타나시우스(293?~373)는 알렉산더 주교였다. 예수는 야훼의 아들이자 야훼 자신이다. 성부 정자 성신의 동일성 곧 삼위일체를 주장했다.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는 콘스탄티누스가 개최했다. 성부 성자는 동일한 본질임을 선언하고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규정한다.

비잔틴 황제 레오3세가 개최한 제2차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카톨릭 교회를 유일의 사도교회로 규정하고 이때부터 카톨릭이 공식적으로 사용된다.

 

비잔틴 대주교 네스토리우스는 예수를 인간으로만 파악했다. 키릴루스와 디오스코루스는 단성론자로 예수를 인성 중심으로 인식하되 예수의 신성과 보통 사람들의 인성은 본질적으로 동일하지 않다고 했다. 시리아나 이집트 기독교도들은 예수의 신성만 인정하려 했다.

413년 에페수스 종교회의에서 네스토리우스파를 이단으로 규정함으로써 단성론 문제는 결말이 났다.

451년 교황 레오1세의 조도로 콘스탄티노플 부근의 칼케돈 공의회에서 예수그리스도는 신성과 인성을 가진 진정한 하나님으로 다시 규정했다.

기독교가 공인받고(313) 국교로 발전할 무렵(392) 지중해 세계에는 5대 주교구가 있었다.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콘스탄티노플, 로마시 주교구 들이다.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주교구는 7C 중엽 이후 이슬람 땅으로 변해 탈락됐다.

교황으로 인정받은 첫 교황은 실베스터1(314~335)이다.

 

서로마 멸망은 476년이다. 제국을 대신할 국가가 한동안 없었으므로 로마교회는 세속적으로도 로마인들의 구심점이 되는 등 국가 역할도 했다.또 로마교회로 하여금 국가 권력의 통제에서 벗어났다. 비잔틴제국의 황제 황제에 예속되어 있던 비잔틴 교회보다 우월하게 된다.

 

최초의 논쟁은 아리우스파와 아타나시우스파의 삼위일체의 본질을 둘러싼 것이다.

아리우스파는 주지적 경향을 취했다.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받아 그리스도가 신과 동등하다는 사상을 거부했다. 성자는 성부에 의해 창조되었으며 따라서 성자는 성부와 같이 영존할 수도 없고 성부와 동일한 본질도 갖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아타나시우스파는 그리스도가 성자임은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신이라 주장했다. 성부, 성자, 성신은 모두가 동등하며 동일한 본질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오랜 싸움 끝에 아타나시우스파가 승리하여 이들의 교리가 기독교 삼위일체 교리로 정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논쟁이 벌어지자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를 소집한다. 콘스탄티누스가 개입하여 투표 감독관이 된다.

이제 성직자 집단 내부에서 계서조직이 발달하게 된다. 이전의 성직자 조직은 도시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주로 도시마다 한명씩 잇는 주교(bishop)는 도시 인근의 모든 사제들에 대해 권위를 가지게 되었다. 기독교 교세가 미약한 시기에는 이러한 조직으로도 충분했다.

그러나 집회의 수가 늘어나고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정해짐이 따라 교회의 영향력이 커지자 주교 계층 내부에서도 다시 계급을 구분할 필요성이 생겼다. 결과 대도시에 근거를 둔 주교들은 대주교(archbishop)로 불리게 되었고 대주교 관구 내의 모든 성직자들에 대해 권위를 갖게 되었다. 4C 초 큰 규모의 기독교 공동체들이 로마, 예루살렘, 콘스튼티노플, 안티오크, 알렉산드리아 등 도시들과 그 인근 지역들을 지배하는 주교들이 그보다 높은 총대주교(patriarch)라는 지위를 갖게 되었다. 그 결과 400년에 이르러 종대주교 · 주교 · 사제 등으로 이루어진 계서제를 갖추게 되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교황권이 등장하게 된다. 로마 주교의 수위권이 성장한다. 로마 주교는 다른 주교 또는 총대주교들에 비해 월등히 높은 지위를 누렸다. 로마시는 베드로와 바울의 선교 활동의 무대로 신도들로부터 각별히 존중받고 있었다. 베드로는 로마 주교 관구를 설립했고, 그의 모든 후계자들은 베드로의 권위와 위신을 이어받았다는 전승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로부터 지상에서의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임명되었으며 죄인들을 벌주고 그들을 죄에서 풀 수 있는 권능과 더불어 호국의 열쇠를 부여받았다는 이론이 덧붙여졌다.(마태복음 1618~19) 이 베드로 계승설은 그후 교회에 대한 교황들의 지배권을 주장하는 근거로 이용되었다. 또 로마의 주교들은 젝구의 수도가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진 후 서로마에 대한 실질적 주권을 행사할 만한 황제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또다른 이점이 있었다.

445년 발레티아누스 3세는 모든 서로마 주교들로 하여금 교황의 재판권에 복종할 것을 명하는 칙령을 공포했다. 동로마의 총대주교들은 교황의 주장을 뻔뻔스러운 요구로 간주했고 서로마에서도 많은 주교들이 교황을 무시하고 있었다. 교회의 행정조직은 서유럽에서 영향력이 컸다. 모든 도시에는 행정 업무에 숙달된 주교들이 있었다. 그러므로 정부의 많은 기능을 담당하였으며 혼돈 속에 질서를 유지하는데 기여했다. 그러나 행정기능을 강조하게 되자 불가피하게 세속화되었고 영적인 면에서도 사도들의 소박한 신앙으로부터 동떨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세속화 경향에 대한 대응으로 수도생활이 등장하게 된다. 최초의 수도사들은 사제가 아닌 평신도였다. 그들은 대부분 고독한 생활을 했으며 정돈된 영적 생활보다는 극단적인 고행을 추구했다. 3C에 등장하여 4C에 이르면 기독교의 한 지배적 움직임이 되었다.

극단적 은둔적 금욕주의는 순교를 대신하여 행해진 것이다. 기독교 박해가 중단되자 신앙을 위한 순교라는 죽음을 통해 천국의 영광을 차지할 기회는 없어졌다. 그러나 자기부정과 고난을 통해 자신의 종교적 열정을 이증하고자 하는 욕구는 여전했다.

4C를 거치는 동안 사제들은 세속적 관심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세속적 유혹을 피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사제나 주교들 사이에서 잊혀지고 있다. 금용주의를 실천하고자 사막과 숲으로 들어가게 되었다.(수도사들이 사제의 신분을 갖게 된 것은 중세때이다)

 

수도생활은 동로마에서 처음 등장한다. 콘스탄티누스의 개종 이후 약 100년 동안 유행했다. 시일이 지남에 따라 광적인 금욕주의는 점차 소멸되어 갔다. 성 바실리우스(330?~379)는 처음 극단적 금욕주의로 시작했지만 그후 온전한 생활방식을 택했다. 그는 수도사들이 고행보다 유익한 노동을 실천하면서 스스로를 단련할 것을 권했다. 청빈과 겸손의 의무를 이행할 것과 침묵 속에서 종교적 명상을 하는데 시간을 많이 바칠 것을 요구했다. 이리하여 동방의 수도생활은 더욱 조직화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가능한 세상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살려는 경향이 있었다. 따라서 외부 사회를 교화시키는 데는 서유럽의 수도사들 큼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성 베네딕트(480?~547?)가 라틴 수도 계율을 작성함으로써 서유럽의 모든 수도사들의 지침이 되었다. 청빈, 복종, 노동, 종교적 헌신 강조, 검소한 식사와 의복을 충분히 공급받았으며 잠도 충분히 잘 수 있었다. 이들은 일찍부터 선교사업을 했다. 잉글랜드와 독일을 개종시켰다. 신앙을 보급하여 서유럽 문화에 동질감 창출에 공헌했다. 항상 바쁘게 일할 것을 원했다. 고대 철학자들과 귀족들의 최고 이상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명상에만 잠길 수 있는 충분한 여가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스스로 열심히 일했을 뿐만 아니라 노동의 존귀성에 관한 이념을 확산시켜 나갔다. 이리하여 자신들의 수도원에 번영을 가져왔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 농업, 후기에는 영지 경영에 성공을 거두어 서유럽 경제 수준을 높이는데 기여했고, 서유럽 여러 나라의 등장에 재정적으로 기여했다.

베네딕트 수도사들은 고전문화를 보전하는데도 기여했다. 카시오도루스(447?~570?)는 성경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기본 고전 교육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이로인해 수도사들의 고전 연구가 정당화되었다. 또 고전을 필사한다는 것 자체가 육체노동이며 그것이 수도사들이 들판에서 하는 일보다 더욱 적합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수백 년에 걸쳐 고전 교육 및 필사의 유일한 중심지가 되었다.

3~4C 금욕운동이 성장하면서 여성을 위험한 존재로 격하시키는 경향이 심화되었다. 성적 금욕은 금욕의 핵심이었으므로 완전한 남성은 여성을 멀리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들이 사막과 숲으로 도피한 가장 중요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수도사들이 이같은 비타협적 태도를 보이면서 금욕주의는 사제들에게 확대되어 나갔다. 사제들은 원래 결혼할 수 있었다.“고린도전서” 95정에 따르면 어떤 이는 아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4C를 거치는 동안 사제는 일단 서품을 받은 후에는 결혼할 수 없으며 이미 결혼한 경우라면 서품을 받은 후에는 바로 아내와 헤어져야 한다는 교리가 퍼졌다.

서유럽에서 로마가 쇠퇴, 멸망하던 시기 소수의 기독교 사상가들이 등장하여 향후 800년 동안 서유럽의 사상적 길잡이 역할을 하게 될 신관과 세계관을 형성한다. 제국이 몰락하고 야만족 왕국이 대신 들어서면서 기독교 사상가들은 고전 유산을 재검토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신이 이 세상을 일시적인 시험을 위한 장소 이상으로 여기지 않고 있다는 점을 전에 없이 분명히 인식하게 되었다. 380~525년 사이 서유럽의 여러 기독교 사상가들은 이 의문에 대한 대답을 했다.

성 제롬(340?~420)은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로 된 성서를 라틴어로 번역했디. Vulgata성서 (또는 common )로 알려진 이 번역은 중세 전기간에 걸쳐 표준 라틴어로 사용되었고, 그 후로도 로마 카톨릭 교회에 의해 약간의 수정이 가해져 오fot 동안 사용되었다. 그는 성서는 문자적으로가 아니라 우의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과 고전 학문은 기독교적 목적에 부합하는 경우에만 타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 가징 완벽한 기독교인은 엄격한 금욕주의자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밀라노 대주교 암브로시우스는 서유럽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관료로 교황보다 영향력이 컸다. 그는 세속 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다.

무고한 양민을 학살한 테오도시우스가 신의 계율을 범했으므로 교회의 규제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암브로시우스는 황제로 하여금 자신의 죄를 회개하게 하는데 성공했다. 역사상 처음으로 성직자가 로마의 세속 권력자를 도덕적 문제로 굴복시킨 것이다. 이 일은 교회의 자율성과 도덕적 우월성의 발전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결과 서유럽 교회는 동방 교회보다 더 독자적이고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암브로시우스의 제자 아우구스티누스는 태어날 때부터 기독교인이었다. 387년 기독교 신앙을 진심으로 받아들인다. 여러 사상 체계를 섭렵했지만 어느 것에서도 지적 만족을 얻지 못했다. 그후 교회에서 급속히 지위가 상승하여 395년에는 북아프리카의 도시 히포의 주교가 되었다. 신의 전능성과 인간의 죄악성이라는 두 개의 축을 기조로 삼았다. 아담과 이브가 에덴 동산에서 신에게 등을 돌린 이래로 인간은 근본적으로 죄악에 물들어 있었다.

신은 모든 인간을 저주하여 지옥에 넣는다 하더라도 신은 정당하다. 그러나 신은 또한 자비로운 분이어서 그중 몇 명을 선택해서 구원을 베푼다. 궁극적으로 인간의 의지는 이 선택과 아무 상관이 없다. 설혹 인간이 선과 악을 선택할 힘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는 자신이 구원될 것인지를 결정할 힘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오직 신만이 영원 이전부터 인류 중 일부를 구원하고 나머지를 저주하도록 예정했다. 신은 이미 천국에 가서 살 사람들의 숫자를 정해놓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교리는 운명론만을 초래하지 않았다. 누가 선택되고 누가 선택되지 않았는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자신이 선택된 자들 가운데 속해 있기를 희망하면서 선을 행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선행의 지침으로 제시한 중심 교리는 사랑이었다. 신에 대한 사랑에 헌신하는 삶, 그리고 신을 섬기는 마음에서 우러난 이웃 사랑에 헌신하는 삶을 뜻한다. 탐욕을 피해야 하며 세상에 석한 것들을 사랑하지 않도록 해야한다. 인간은 늘 하늘나라의 본향만을 사모하면서 모든 물질적 집착을 버리고 마치 여행자나 순례자처럼 세상을 살아야 한다.

신국론에는 창세 이래 최후 심판일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류는 두 개의 대립되는 집단으로 나뉜다고 했다. “인간을 따라서 사는곧 스스로 사랑하는 자들과, “신을 따라 사는 자들을 말한다. 전자는 지상국(City of EArth)에 속하며 저주를 받게 되지만 신국(City of God)에 속하는 축복받은 소수는 심판의 날에 영생을 얻게된다.

 

팔레스타인 시리아

동쪽은 유프라테스 강과 아라비아 사막에 의해 남쪽은 시나이 사막에 의해 서쪽은 지중해에 의해 북쪽은 레바논 산맥에 둘러싸여 있다. 오리엔트 초기 문명의 중심지였다.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과 나일강 사이라는 지리적 위치는 문명발전에 유리 교역의 중심지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지역에 오터롱터스 강을 중심으로 내륙지방의 해상 교역은 해안의 굴곡이 커서 좋은 항구가 생겨났다. 그러나 교통의 요지라는 점에서 외적의 침입을 받을 여지가 많다. 여리고와 내륙의 초기 정착자들이 이 지역의 막을 올렸다. 유푸라테스 강변의 마리는 아모리인들을 포함한 셈족 계통의 민족들의 지배를 받다가 BC 1550년경 이후에는 후리인의 지배를 받는다. 뒤이어 일어난 미틴니 왕국은 히티이트와 이집트 사이의 완충지대를 형성하여 발전해갔다. 유프라테스 강 상류에는 카르케미쉬라는 도시가 있었는데, 그 서쪽으로 페니키아의 도시들이 번영했다. 특히 BC 1200년경에 절정에 이른다. 그중 우가리트는 국제적 상업 중심지이자 에게해의 그리스인들을 위한 동방으로의 출구, 특히 비블로스는 이집트 수공예품들과 자색 염료목재 등 그 지방 특유의 산물들을 교역하는 중심지였다. BC 1200년경 외부의 침입자들이 우가리트를 파괴하고 그 지역 대부분 지역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다음 세기 철을 사용하는 새로운 문화가 발달한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으로 수천 년 살아오던 땅에서 쫓겨난 뒤 겨우 가지지구와 요르단 서인이 남아있었다. 그들은 이땅에 독립국을 세우려 하였다. 현재 서안에 200만 명, 가자에 140만 명이 산다. 파타는 1993년 오슬로 협정에서 이스라엘과 공전을 선언하고 1994년 자치정부를 세웠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통행을 가로막는 분리장벽이 건설되고 이스라엘 정착촌은 계속 확장되어갔다. 1987년 이슬람주의 단체 하마스가 빈곤에 허덕이는 가자에서 결성되어 대안으로 성장했고, 2006년 총선에서는 압승을 거두었다.

팔레스타인 양대 정파 하마스와 파타가 유혈분쟁을 일으키는 상태가 되었다. 파타지도자인 마무드 아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은 2007614일 두 정파의 공동내각을 해산하고 비상사태를 선언했다. 그러나 하마스의 이스마일 하니야 총리는 아바스 수반의 조처를 일축했다. 하마스는 가지지구를 장악했다고 선언했다. 양쪽은 보안조직 주도권을 두고 충돌했고 미국과 이스라엘은 아바스수반에게 6천만 달라의 군사지원금을 지원하며 분쟁을 키웠다.

 

예루살렘

BC 996년 다윗왕이 지금의 예루살렘을 이스라엘 수도로 삼았다.

팔레스타인 지역 중심 인구 50.

구시가지는 한 변의 길이 1km쯤 되는 성벽으로 둘러싸였다. 크기는 전체 예루살렘의 1%, 인구는 5.5%쯤 된다. 역사적, 종교적 중요성은 매우 크다. 유대인, 기독교인, 무슬림 모두의 성도이다. 유대인들은 첫 왕국인 이스라엘 왕국이 도읍했던 곳이자 출애급 때 시나이산에서 가져온 언약궤를 모시기 위해 성전을 세웠던 곳이므로 중요하다. 기독교도들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히고 부활한 곳이며, 무슬림은 무하마드가 夜行시 이곳 모리아 산의 바위를 밟고 승천했다는 이유로 각각 성지이다. 성내는 유대인, 기독교인, 무슬림, 아르메니아인 거주지역으로 나뉘는 데 각 지구는 제각기 성문을 갖고 있어 외부와 통한다.

메인 스트리트인 욥파 거리를 끼고있는 욥파문은 정뭉 해당하는 아르메니아 지구를 외부와 연결한다. 이 문이 제일 크고 외관상 가장 좋다.

욥의 문을 들어서면 성벽을 낀 또 하나의 작은 성이 나온다. 망루를 갖춘 요새인 다윗성이다. 지금은 예루살렘 역사박물관이다.

다윗성 앞은 아르메니아 지구이다. 그들은 로마, 몽골, 아랍, 터키, 러시아 등 강대국들로부터 모진 박해와 학살을 당했다. 박해가 결국 그들을 여기까지 흘러들게 했다. 그 역사는 2천 년이 넘는다. 네 구역 가운데 가장 적다. 교회, 수도원, 박물관을 제외한 주거지는 매우 저다. 이들의 종교는 아르메니아 기독교이다. 그들은 세계 최초로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였지만 일찍이 이단으로 낙인찍혀 세계종교와는 고립되어 민족종교에 머무르고 있다. 이곳에 성 야고보 수도원과 부속 박물관이 있다.

시온 성문부터 유대인 지구이다. 시온은 예루살렘이고 이스라엘이다. 시온이란 말은 구약에 152번 나온다. 2000년에 걸친 유랑생활에서 복귀하고자 내세웠던 이데올로기가 시온주의이다. 성문에는 19676월 전쟁 총탄이 남아있다.

성문 밖 시온산에는 다윗왕의 무덤과 최후의 만찬을 베풀었던 다락방도 있었다. 시온성문 밖에서 유대인 지구를 따라 몇 개의 골목을 지나면 바위의 돔이 있다. 돔의 표면에는 65km의 황금이 표면을 덮고있다. 구시가지에서 가장 높은 성전산(748m) 最高의 건물이다.

유대인을 바빌로니아로부터 해방시켰던 피르시아 제국이 알렉산드로스에게 정복당하자 한 동안 그들의 지배를 받았다. 곧 예루살렘을 되찾은 그들은 자신들의 왕국 하스모니아를 세우지만 BC 63년 폼페우스에게 100년 만에 망한다. 이리하여 로마의 지배 하에 들어간다. 로마는 예루살렘에 로마 황제의 동상을 세우려 했다. 레바논의 바알벽, 요르단의 제라시, 시리아의 팔미라 등지에도 형상을 세웠다. 그곳에는 아직도 그때의 흔적이 남아있다.

유대인은 로마의 신을 섬기려 하지 않았다. 이미 셀레우코스 왕조와도 한판 싸워 승리한 적이 있다. 그러나 로마는 무력으로 폭동을 진압하고 예루살렘의 성전가지 불태웠다. 서기 70, 유대력으로 AV8, 지금 달력으로 7월말에서 8월초이다. 유대인들에게 좋지못한 달은 모두 AV8일에 일어났다. 1성전이 불탄 것도 이날(BC 586), 반로마 항전에 앞장섰던 바루코크바르가 로마군에 처형된 날(135), 영국의 에드워드 1세가 유대인 추방령을 내린 날(1290), 스페인 이사벨 여왕이 유대인 30만 명을 추방한 것(1492)도 이날이었다.

이렇게 무성전 시대를 맞은 유대인은 커다란 정신적 공백기였다. 일부는 사해 서쪽 유대 황야에 있는 마사다 요새로 올라가 2년을 견뎠지만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자 저항군 지도자 벤야민은 집단자살을 독려하는 연설을 한다. 그리하여 모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우여곡절 끝에 예루살렘은 다시 평온을 찾는다. 그러나 로마는 성전이 불탄 자리에 주피터 신전을 세우려 했다. 이번에 사해 일대에 터를 잡고있던 바르코크바르가 이끄는 무리들이 반란을 일으킨다. 2 반로마 폭동이다. 사해 문서는 이들이 남긴 것이다.

바르코크바르의 반란을 진압한 로마제국의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유대인의 예루살렘 거주를 금지하고 예루살렘이란 이름마저 Aelia Capitolina로 바꿔버렸다. 그리고 성전산에 자신의 동상을 세웠다. 유대인의 물질적 정신적 근거를 모두 파괴해 버린 것이다. 그들은 어절 수 없이 긴 유랑 곧 디아스포라를 떠났다. 그러나 일년에 단 하루 예루살렘을 정복한 AV8일에 한해 유대인들의 성내 출입을 허용했다. 유대인들은 이 유대인들의 날 불탄 성전의 서쪽 기단벽에 머리를 대고 통곡하여 기도를 올렸다. 이렇게 통곡의 벽이 되었다.

 

통곡의 벽 오른쪽은 유대인이 거룩하게 여기는 기도 순례의 장소이다. 70년 로마에 의해 파괴된 예루살렘 제2성전 가운데 현존하는 유일한 유적지이다. 이벽은 이스람의 바위돔(Dom of the Rock)과 알 아스크 모스크를 둘러싸는 더욱 큰 벽의 일부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유대인과 아랍인들은 관할권, 출입권을 두고 오랫 동안 투쟁해왔다. 바위돔 기단과 경계를 이루는 석축의 벽이 통곡의 벽이다. 그 앞으로 펼쳐진 사각 공간이 고텔이라 불리는 서벽 광장이다. 벽은 사각의 큰 돌로 이루어져 있다. 유대인들은 자기네 건축에 사용하는 Mizzi라는 이 돌은 노란색으로 하여 유대인의 색깔이라 불린다.

통곡의 벽의 기초가 되는 예루살렘 성전도 다윗왕이 착수하여 솔로몬이 11이 걸린 BC 957년에 완성했다. 그래서 솔로몬 성전이라 한다. 길이 27m, 너비 9m, 높이 13.5m이다 내부는 황금과 단단하기로 세계 최고인 리바논 삼나무로 장식했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삼나무는 페니키아의 소 왕국 티르(성격에는 두로)의 하람왕이 선사한 것이다. 건축 양식은 시리아나 페니키아의 양식을 수용했다.

신상은 없고 희생제단을 두어 번제를 드릴 수 있게했다. 선전의 최고보물은 시나이산에서 가져온 언약궤였다. 이것을 모시기 위해 성전을 지은 것이다.

 

돔은 높이 35.4m, 돔의 24각 벽면에는 청록백흑황색돌이 섞여 여러 가지 식물과 기하학적 무늬를 그렸다. 주류는 청색이다. 청색은 물의 색깔, 샘의 색깔이다. 이것은 모스크가 무슬림에게는 물과 같은 곳임을 말한 것이다.

 

모스크 안에는 원석을 다듬어 세운 16개의 기둥이 동심원을 그린다. 천개는 하늘이다. 하늘 아래 검은색 커다란 돌이 놓여있다. 와아들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치려 했던 모리아산의 그 성스러운 바위이며 무하마드가 야행시 밟고 승천했다는 그 바위이다.

아브라함과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을 사막으로 쫓겨나 사냥군이 되었는데 아랍인들은 이스마엘을 자기네 조상으로 추앙하고 있다. 무함마드 도한 이스마엘의 직계 후예라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무슬림들은 아브라함 그들말로 Ibrahim이 알라의 계시와 언약을 받았다며 선지자로 받든다.

 

무슬림 사이에 전하는 이야기 - 어느날 아브라함은 하갈과 이스마엘을 데리고 메카를 찾았다. 그런 알라가 그에게 곧 다른 일을 맡겼기 때문에 처자식을 메카에 남겨두고 더나야 했다. 당시 메카는 사람이 살지 않은 곳인데다가 물도 없는 산으로 둘러싸인 황량한 계곡이었다. 심한 갈증에 시달리던 이스마엘은 사경을 헤메기에 이르렀다. 하갈은 누군가 지나가지 않을까 하고 이곳저곳을 일곱 바퀴나 뛰어다녔지만 허사였다. 그녀는 더 이상 가망이 없다고 생각하여 이스마엘 곁에서 마지막 기도를 드렸다. 바로 그때 이스마엘의 두발 밑에서 물이 솟아올랐다. 너무나 기뻤던 하갈은 그물을 먼저 아들에게 주어 생명을 구했다. 그리고 그 물이 다른 곳으로 흘러가지 않도록 모래로 둑을 쌓으며 잠잠! 잠잠!”하고 외쳤다. 그것은 그들 말로 물아 멈추어라는 뜻이었다.

그 물은 지금도 흘러나오고 있는데, 무슬림들은 이 물을 모든 순례자들의 종교적 갈등을 식혀주는 이 세상에 오직 하나밖에 없는 성수라 믿고있다. 메카를 순례할 때는 진리의 증표가 되는 육면체의 흑석에 입맞추고 성전 주위를 시계 반대방향으로 둥글게 일곱 바퀴를 돌고(‘타와프라한다.) ZamZam샘물로 목을 축인다. 그게 끝나면 사이(Say)라 부르는 의식을 치른다. 하갈이 이스마엘에게 먹일 물을 구하기 위해 언덕 사이를 뛰어다녔던 것을 답습하는 것으로 2개의 바위 언덕 즉 사파와 마르와 사이를 일곱 번 오가는 의식이다.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번제로 드리려 간 곳은 모리아산이다. 모리아산은 훨씬 뒷날 솔로몬이 성전을 세우면서 예루살렘의 중심이 된 곳으로 이후로 聖殿山(Temple Mount)라 불리게 된다.

바위돔 앞쪽은 이슬람 최고의 성지이다. 이 사원이 서있는 바위는 이슬람교도와 유대인 모두에게 신성한 곳이다. 초대 족장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제물로 바친 곳이다. 또 이슬람 전설에는 마하무드가 이곳에서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유대인들은 로마의 강제 추방령에 따라 1C 후반 예루살렘을 떠난다. 4C 기독교도들이 이 땅을 차지했다. 7C 중엽 이슬람의 땅이 되었다. 이슬람은 불타버린 성전터에 목조 가건물을 지었다. 691년 가건물을 헐고 모스크를 세웠다. 이것이 바위돔이다. 20C 초 돔에 황금을 덮어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11C 기독교도들이 십자군 전쟁을 일으켰으나 성지를 회복하지 못했다. 아랍의 사라딘에 의해 원정이 실패로 끝난 것이다. 그후 예루살렘은 아랍인의 것이 되어 20C 초가지 계속된다.

이역에서 유랑생활을 하던 유대인들이 새로운 주거지인 스페인, 영국, 러시아 등지에서 갖은 박해를 받으며 살았다. 그러다보니 고토 가나안에 대한 그리움은 자꾸 커져갔다. 1869년 오스트리아 출신 우대인 Theodore Herzl이 국제 시오니즘 운동을 벌이면서 돌파구를 마련한다. 유대국가 건설을 목표로 했던 그들은 아브라함과 모세가 임자있는 땅으로 들어간 것처럼 지난 2000년 간 잘 살고 있는 아랍인들 당에 유대 국가를 건설하겠다고 한 것이다. 당연히 아랍인들은 동요했고 이어 분쟁이 시작되었다. 서방의 지원을 받은 유대인들은 1948514일 팔레스타인을 영토로 하는 이스라엘공화국 건국을 선언하자 이에 항거하는 유대인 사이에 제1차 중동전쟁이 터진다. 이스라엘 건국 전 팔레스타인 전체 인구는 230, 그중 아랍인은 144만 명, 유대인은 76만이었다. 유대인들의 당 소유는 7% 정도였다. 하지만 건국 이후에는 57%의 땅을 차지하게 되었다.

19676일전쟁의 승리로 이스라엘은 West 뱅크(요르단강 서안 지구)와 가자지구를 점령하여 아랍인들은 땅이 없는 국민이 되고 말았다.

19676일전쟁의 승리로 이스라엘은 West 뱅크(요르단강 서안 지구)와 가자지구를 점령하여 아랍인들은 땅이 없는 국민이 되고 말았다.

 

기독교

1. 헬레니즘을 배경으로 한 기독교 - 예루살렘, 에베소, 안티옥, 알렉산드리아, 콘스탄티노플

2. 시리아 문화를 배경으로 한 지역 - 에데싸

 

기독교는 로마제국의 탄압으로 서방에서의 전도는 어려워졌으나 에데싸를 중심으로 한 동방지역에서의 전도는 활발하여 안티옥 일원이 그 영향 하에 들어가게 됨으로써 안티옥파가 형성된다.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공인을 얻게 된 것을 계기로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한 관변적 일파가 대두되어 알렉산드리아파와 안티옥파가 신학 교리, 교권을 두고 대립했다.

5C Gregory 1세가 교황제를 채택하고 수도원주의가 정착하면서 로마제국에 카톨릭적 색체가 분명해짐에 따라 로마 영내의 기독교와 영외(페르시아, 아르메니아, 이티오피아, 이집트의 콥트) 기독교가 분리되면서 동서방 기독교의 개념이 나타난다. 즉 로마제국의 기독교는 서방기독교, 영외의 기독교는 동방기독교로 지칭하게 되었다.

7~8C 동방기독교가 약화되고 기독교의 중심이 비잔틴과 로마를 중심으로 한 서구의 카톨릭으로 편중되면 이 양대 서방기독교 세력(비잔틴 기독교와 로마 기독교) 간에 교권 문제로 극심한 갈등이 일어난다.

1054616일 로마 Humbert 추기경이 콘스탄티노플 Michael Cerularius에게 교황의 이름으로 이단자로 단죄한 파문 칙서를 보낸다. 이로써 동 · 서 기독교로 결별하게 된다. 여기서 말한 동방 기독교는 비잔틴 영내의 기독교를 말한다. 그후 비잔틴 기독교를 모체로 한 동방기독교는 동방정교회 · 동방독립교회 · 동방귀일교회를 예하에 두게된다. 동방독립교회에서 네스토리우스파의 잔여 세력인 동시리아 교회 등이 망라되어 있다.

1965년 로마 교황 파울루스 6세와 동방정교회 全敎會 총대주교 아테나고라스 1세가 1054년 파문 처벌을 폐지하는데 합의함으로써 형식상 로마교황청으로 대표되는 서방기독교와 동방정교회로 대표되는 동방기독교 간의 반목은 일당 해소되었다.

근세에 와서는 로마 카톨릭 교회와 개신교가 서방기독교의 주체가 되고 동방 희랍 정교회가 동방기독교의 주역이 되었다.

 

안티오크,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고, 그리고 이후에 생겨난 불가리아(971), 세르비아(1346), 러시아(1589), 루마니아(1895) 총대주교 등 콘스탄티노플에 이어져 있는 다른 그리스 교회들도 같은 입장. 러시아는 건국되자 그리스 정교회로 개종. 그리스도교는 슬라브 동쪽 지방으로 전파된다.

 

딜문 - 지금의 바레인

호르산 - 모세의 형 아론 - 부논은 구리광산

겐족 - 미디안족의 분파, , 구리를 다룬다. 모세의 장인 이드로는 겐족이다.

나이아티아인 - 6C 유목민, 구약에는 세일산 에돈족에 기술 배워 정착.

왕의 대로 - 향유의 길 통과, 향유통행세로 부 축적.

와디롬 - 묽은 사막 - 에돔(신명기 41~2)

압복강 - 요단강 동쪽 - 마하라임(두 진영) 창세기 322. 야곱에 에서를 만난다. 천사와 씨름 - 이스라엘 브니엘 메시아와 화해 - 숙곳

시리아 알레포 - 에블라 - 하가-팔미라-솔로몬이 건축한 사막 도시 십자군 성채

알렉산드리아 - 생마리드라즈 - 마살리아(마르세이유)에서 라자로와 만난다. 라자로는 이곳에서 죽는다. 남프랑스 샘봄스 메시프산 정상에 마리아가 살았다. 390년 수도원 건립.

 

1. 유대인은 원래 황인종이다. (창세기 l925) - 머리카락이 검고 키가 작다.

2. 한국인의 골격 구조는 개 유대인의 골상과 같다.

3. 장례 - 베옷 입고 베로 건을 만들어 쓴 뒤 향을 피우고 대나무 짚고 아이고 아이고 곡을 한다.

4. 에비, 에미, 애기

5. 농기구 - 보습, 쟁기, 도리깨, 부삽, 불집개, 놋그릇

6. 사마리아 사마리탄 - 나부루스에 거주. 주로 아랍인이 사는 사마리아 지방이다. 이들은 유월절에 흰 두루마기를 입는다.

7. 베두인족은 유대인의 풍습을 만호이 간직하고 있다. 결혼은 부모가 사는 천막 근처에 임시 초당을 짓고 3일 간 신방. 초당 주위에 양의 피를 뿌린다. 우리는 양피 대신 빨간색으로 신부의 몸을 치장한다. 처녀때 빨간 댕기, 결혼할 때 빨간 치마. 빨간 끝동과 옷고름 달린 저고리에 연지, 곤지.

 

아틀란티스는 BC 9000년경 대홍수로 수몰

 

대진경교 중국유행비

德宗 建中 2(781, 1, 7, 일요일) 건립.

비의 건조지는 자안 義寧坊 大秦寺 설과 장안 서남쪽 150리 떨어진 주질현(盩庢縣) 五君羊城 대진사 경내라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출토지도 장안 출토설과 주질 출토설이 있다. 1625년 비를 최초로 목격한 Nicolas Trigauit의 증언에 따르면 중국 학자들의 주장대로 하면 출토지는 주질이다. 연대는 명 天啓 2(1623)

한 인부가 집을 짓느라 땅을 파다가 우연히 발견하였다 한다. 박해를 피해 땅에 묻었을 것이다. 충토 2년 후 官府에 의해 서안 교외의 金勝寺에 옮겼다가 淸 德宗 光緖 33(1907) 지금의 섬서성 박물관 내의 비림 제2관으로 옮겼다.

정면과 좌우면에 총 1,800여 자의 한문과 시리아문 해서체로 되어있다. 기독교 동전사를 연구하는 Mrs Goldon은 한국에 4년간 머물면서 전국의 사찰을 역방한 후 마지막 1년은 장안사에 체류하면서 1917년 사내에 모조비를 건립했다. 후일 일본 高野山에도 모조비를 세웠다.

같은 동방 교회 내의 두 중요 파벌의 하나 중 알렉산드리아의 Cyril학파는 일방적으로 431년 에베소 公會를 소집하고 그리스도의 신인양성설을 주장하고 마리아의 신모설을 부정한다는 이유를 들어 당시 동방교회의 안티옥파에 속하는 콘스탄티노플 교부 네tm토리우스를 이단자로 정죄 파문하였다. 이것은 당시 교권을 둘러싼 반대파의 인위적 정죄 파문이었다. 그러나 네스토리우스를 포함하여 안티옥파의 전체가 아니라 일부만이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할 뿐 신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확인됨에 따라 451(네스토리우스가 유배지 이집트에서 죽은 해) Calcedon 종교회의에서는 한 위격 안에 두 본질(two natures in one person)이 존재한다는 내용의 신앙 정의(definition of faith)를 반포함으로써 안티옥파의 신인양성설이 승인되고 알렉산드리아파의 단성설이 부정되었다.

다만 마리아의 신성에 관해서는 시종 신모설을 부정하고 있다. 그들은 어미도 없다(히브리서 73)”는 구절을 인용하여 마리아를 신모라고 하는 것은 성서에 위배되는 것으로 마리아는 Theotokos(하나님의 잉태자)가 아니라 Christokos(그리스도의 잉태자)라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마리아는 그저 그리스도의 인간적 어머니일 뿐 굳이 호칭한다면 그리스도의 어머니신의 容器라는 것이다. 그러나 후일 반발이 심해지자 여신으로 숭배하는 경향만 제거한다면 신모라는 용어 사용도 무방하다는 완화된 입장을 취했다.

앞서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Arius 논쟁이 있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장로 아리우스는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단으로 몰리지 않았다.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그리스도의 인격과 관련된 정의는 그는 인류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오셨고, 성령에 의하여 동정녀 마리아로부터 몸을 입으시고 사람이 되셨다이다.

489년 동로마 황제 Zeno의 추방령에 따라 페르시아로 이천한 네스토리우스 일파는 496년 총회를 열어 서방교회와의 관계를 일체 단절하고 독립한다는 선언을 발표하고 498년부터 독립교회로 출범하였다.

 

당대 경교는 신관이나 聖觀, 구원관 등 교링 pwjd통 기독교에 바탕한 고대 동방기독교이다. 페르시아 기독교라는 징검다리를 통하여 어떤 상관성을 찾아볼 수 있으나 이단으로 모함된 네스토리우스파 그 자체이거나 또는 東轉 同門은 아니다.

 

헷족은 히타이트, 출애급은 세티1(1291~1279 BC)

 

참고한 책

조철수, 한국 신화의 비밀 - 고대 메소포타미아에 새겨진 -, 김영사, 2003.

사무엘 헨리 후크, 박화중 역, 중동신화, 범우사, 2001.

권삼윤, 성서의 땅을 가다, 북폴리오, 2004.

존 브라이튼, 김윤주역, 이스라엘의 역사 상, 분도출판사.

제리 벤틀리, 김병화 옮김, 고대 세계의 만남, 학고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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