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실/도서관

말과 사람됨/ 이규호

추연욱 2015. 8. 1. 13:46

 

 

 

말과 사람됨

 

李奎浩(1926~2002)

 

……

사람이 일상생활에서 말한 것은 그를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 앞에서 고정적으로 확정시키는 것이 된다. 다른 사람들은 그가 말한 것을 통해서 그를 붙들고 그를 상대로 하게 된다. 그가 말한 것은 오늘도 내일도 초시간적으로 남는다. 그러므로 그는 불가피하게도 자기가 말에 의해서 구속된다.

자기가 말에 대해서 전연 책임을 느끼지 아니하고 오늘은 이렇게 내일은 저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다른 사람들은 그러한 사람을 성실하게 상대할 없는 존재로 인정하게 되기 때문에 어쨌든 사람은 그의 입에서 떨어진 말에 의해서 구속되는 셈이 된다.

 

입에서 떨어진 말은 그의 되돌릴 없는 성격 시간의 흐름을 초월해서 남은 확정성을 통해서 삶의 흐름으로부터 흘러가지 아니하고 변화하지 아니하는 어떤 초시간적이고 고정적인 것을 이룩해 낸다. 삶의 흐름 속에서도 사람들은 이것을 붙들고 의존하고 상대하고 기억하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그의 말을 통해서 아무것도 붙들고 의존할 것이 없는 삶의 흐름 속에서 불변의일성을 이룩할 있게 된다. 따라서 말에 있어서 흔들리는 것은 단순한 표현이나 생각의 변화를 의미하지 아니하고 사실은 사람의 실체 상실을 의미한다. 물론 사람은 그의 잘못된 주장과 판단을 시정할 있고 또한 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무거운 책임의식 아래서의 무거운 결단에 의한 것이라야 한다.

세상에서 사람의 입에서 떨어진 말보다도 초시간적인 불변성을 가진 것은 없다. 그러므로 사람은 그의 흘러가고 변화하는 속에서 그의 말을 통해서 어떤 초시간적인 동일성을 이룩할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나의 <사람됨의 >에서 내가 밝힌 약속의 현상학 기억해 내는 것이 좋겠다.( 이규호, <사람됨의 >, 제일출판사, 1967. 111) 사람의 입에서 떨어진 말은 되돌릴 없는 초시간성 때문에 미래를 위한 구속력이 된다고 했는데 이러한 사실은 사람이 약속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는 말에 있어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약속의 말은 그의 미래를 구속하고 다른 사람들은 주어진 말에 의존해서 사람을 상대로 한다. 우리는 약속에 있어서 사람의 말의 가장 극단적인 보기를 발견하는데 여기에서 언어의 본질에 속하는 말의 성격들이 극단한 형식으로 드러나고 분명하게 인식된다.

 

처음으로 약속의 현상의 철학적인 의미를 문제삼은 사람은 가부리엘 마르셀 Gabriel Marcel이다.

사람이 약속의 말을 주고 그것을  지키고 상대방이 말을 믿고 하는 것은 우리의 인간 이해를 위해서 어떤 의미를 가졌느냐는 것이다. 이런 물음에 대해서 마루셀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우리가 약속을 하고 그것을 지키고 상대방이 말을 믿고 하는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그의 육체적인 심리적인 상태의 변화에 덧없이 내맡겨진 순간적인 존재가 아니고 인간에서는 그의 윤리적인 노력을 통해서 그의 상대의 변화를 초월할 있는 무엇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약속을 주고받고 지키고 믿고 하는 사실은 인간 속에 시간의 흐름을 초월한 윤리적인 실체가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C. Marcel: Sein und Haben, übers, v. E. Behler. Paderborn 1954.)

물론 많은 약속들이 지켜지지 아니하고 빈 말들로 흘러가 버리는 일이 많다.

그러나 역시 환경과 상태의 끊임없는  변화에도 불구하고 약속은 지켜지는 일이 있으며 또한 지켜져야 한다고 사람들이 믿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약속의 특이한 언어철학적 성격을 더 분명하게 밝힌 사람은 한스 맆쓰이다.

그에 의하면 약속의 말에 있어서 언어의 창조적인 성격이 아주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분명하게 말이 앞서고 현실이 이에 뒤따라서 창조된다. 왜냐하면 약속의 말이 먼저이고 이 약속이 실현됨으로써 그 말이 실현화 하게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여기서는 분명하게 말이 현실을 창조하는 힘을 가졌다는 것이 드러난다.

약속을 한 사람은 그의 육체적인 심리적인 상태나 환경이나 상황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이런 것들은 으례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니까, 한 번 입에서 떨어져서 되돌릴 수 없이 객관화한 말에 의해서 그 말을 실현현실로서 채운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약속을 지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여러 가지 상황의 변화에 대항하는 윤리적인 노력이 요구된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사람됨을 위한 약속의 의미가 있다. 

 

사람은 약속한 말을 지킴으로써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화하는 순간적인 존재가 아니고 초시간적 실체로서 나타난다고 했었다. 인간은 그의 자연적인 상태에서는 이러한 초시간적  실체를 갖고 있지 않다. 그의 육체도 심리도 끊임없이 변화하는 흐름이며 따라서 초시간적인 실체로서의 동일성은 없다. 따라서 인간은 그의 자연적인 상태에 있어서 오늘의 나는 벌써 내일의 나가 아니다. 이러한 자연적인 상태에서 말하면 인간은 오늘과 내일 사이의 동일성이 없기 때문에 미래를 위한 약속은 있을 수 없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약속을 하고 지키고 그 약속을 믿곤 한다. 이것은 인간이 그의 자연적인 상태에서는 없는 초시간적인 실체를, 약속을 지키고 그의 입에서 떨어진 말에 책임을 지는 윤리적인 노력을 통해서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약속의 말을 지키는 것은 인간이 그의 자연적인 상태의 필연적인 흐름을 초월한 불변의 실체를 이룩하고 그의 윤리적인 인격의 동일성을 지키는 것이 된다. 이러한 초시간적인 불변의 실체를 이룩하지 못하고 윤리적인 인격의 동일성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은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걷잡을 수 없는 구름처럼 나타났다가 구름처럼 사라지는 것이다. 여기에서 내가 말한 초시간적인 불변의 실체윤리적인 인격의 동일성이니 하는 것은 현대 철학적인 개념으로 실존이라고 해도 좋고 인간학적으로 인간존재의 최종적이고 절대적인 핵심이라고 해도 좋고 종교적인 개념으로 영혼이라고 해도 좋다. 하여튼 이것은 우리의 사람됨의 최고의 절대적인 형태인데, 이것이 사람의 입에서 떨어지는 되돌릴 수 없는 말의 힘에 의해서 이룩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룩한다는 것은 자연적으로는 주어져 있지 않는 것을 창조한다는 뜻이다.

 ……

 

이규호, <말의 힘 언어철학->, 제일출판사, 1986년 증보 16, 128~ 132.

 

위에 인용한 글은 이규호의 <말과 사람됨>이란 논문에서 약속의 현상학적 의미를 기술한 부분을 발췌한 것이다.

또 이 글은 2011 3 28, 본 카페 <행복자유공간> 6826번으로 게시하였다.

당시 느낀 점이 많아서 이런 글을 올렸다. 새삼 그 사연을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만 약속이 갖는 의미는 깊이 새길 일이라 생각한다.

 

이규호(1936~2002)1952년 서독 튀빙겐 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4년부터 연세대학교 철학과 교수를 지냈다.  

1979 12 · 12 신군부 정권에서 국토통일원 장관,

1980년 제5공화국 문교부장관, 1985년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냈다.

 


 

 

'자료실 > 도서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실크로드  (0) 2015.09.01
시간을 측정하는 특별한 기준  (0) 2015.08.28
[스크랩] `해킹` 우리나라만 난리라고? RCS 구입한 35개국을 따져보자  (0) 2015.07.26
太史公 自序  (0) 2015.07.22
백제  (0) 2015.07.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