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덕왕과 흥덕왕릉
1. 제38대 원성왕(785~798) 김경신은,
제17대 내물마립간(356~402)의 12세손으로 전왕 宣德王(780~785)이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자 국민들의 추대로 왕이 되었다.
2. 원성왕의 두 아들은 일찍 죽었고, 맞손자 俊邕이 왕위를 이어받았다.
그가 제39대 소성왕(798~800)이다. 그는 왕이 된지 겨우 1년 5개월 만에 죽는다.
소성왕이 죽을 때 큰아들 청명은 13살, 그 남동생 체명과 여동생 章和가 있었다.
3. 왕의 자리는 맏아들 청명이 이어받아 애장왕(800∼809)이 된다.
소성왕이 죽자 남편을 잃고 어린 아들을 왕위에 올린 桂花王后는, 일연스님의 표현대로, “슬픔이 지극하여 피눈물을 흘리고 마음은 가시에 찔리는 듯” 하였을 것이다. 그런 왕후가 남편의 명복을 빌기 위해 무장사에 미타전을 지었다.
저들의 할아버지 춘추는 이곳에 무기를 감추었지만,
후손들은 “허황한 마음을 가눌 길 없어 빈 마음[虛白]이 생겨 도를 즐길 만한 곳”으로 이 터를 찾아 이미 있는 절에 미타전을 새로 지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이 어린 아들 애장왕은 10년을 근근이 버티다가 소성왕의 동생인 숙부 金彦昇의 칼에 맞아 죽는다.
동생 체명은 형 애장왕을 호위하다가 역시 반군에게 죽는다.
신라 하대의 혼란스러운 정국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하는 시점이다.
5. 김언승은 제41대 헌덕왕(809~826)이 된다.
6. 소성왕의 막내딸 장화공주는 반군편에 가담한 자신의 숙부인 秀宗에게 시집갔다.
장화공주는 남편 수종이 제42대 흥덕왕(826~836)이 된지 2개월 만인 836년 11월에 죽는다.
흥덕왕은 왕비 장화부인에 대한 사랑이 극진했던가?
<삼국사기>, 제10권, 신라본기 제10, 42. 흥덕왕조에,
"……(왕 원년, 826년) 11월에 비 장화부인이 돌아가시므로 定穆王后로 추봉하였다.
그러나 왕은 비의 생각을 잊지 못하여 슬퍼하며 즐거워하지 않으므로, 군신들은 상소하여 다시 비를 맞을 것을 청하니, 왕은 말하기를 '隻鳥(짝 없는 새)가 짝을 잃는다 해도 슬퍼하는데, 하물며 사람으로서랴? 좋은 배필을 잃었으니 어찌 그 마음을 참지 못하고 다시 아내를 맞을까보냐!' 하고 드디어 그 말을 쫓지 아니하고, 또 한 여자를 대하여도 친근하게 하지 않으며 좌우사령은 다만 환관으로 할 따름이었다."라는 기록이 있고,
<삼국유사, 제2권 기이 제2>에,
"제42대 흥덕대왕은 보력(당나라 경종의 연호) 2년 병오(826)에 즉위했다.
얼마 되지 않아서 어떤 사람이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앵무새 한 쌍을 가지고 왔다.
오래지 않아 암컷이 죽자 홀로 남은 수컷은 슬피 울기를 그치지 않는다. 왕은 사람을 시켜 그 앞에 거울을 걸어 놓게 했더니 새는 거울 속의 그림자를 보고 제 짝을 얻은 줄 알고 그 거울을 쪼다가 제 그림자인 것을 알고는 슬피 울다 죽었다. 이에 왕은 앵무새를 두고 노래를 지었다고 하나 가사는 알 수 없다."라는 기록이 있다.
흥덕왕은 즉위 3년(828) 4월에 장보고를 청해진 大使로 삼았고,
이때 金大廉이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고 돌아오는 길에 차 종자를 가지고 왔으므로 지리산에 심게 하였다. 차 마시는 풍속은 이미 선덕왕 때부터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성하였다.
<삼국사기, 제10권 신라본기 제10>, 제48대 민애왕조 끝에
“논컨대, 歐陽脩의 史論에 말하기를 ‘魯의 桓公은 隱公을 시해하고서 자립하고, 宣公은 王子 赤을 시해하고서 자립하고, 鄭厲公은 세자 忽을 내쫓고서 자립하고, 衛公 孫剽는 君인 衎(간)을 내쫓고 자립한 것인데. 성인 공자는 춘추에 모두 그들이 군주로 있는 것을 끊어버리지 않았다. 이는 모두 그 사실을 전하여 후세의 사람들로 하여금 알아 두게 한 것이다. 그런즉 四君의 죄는 가히 사람들의 귀를 가릴 수 없는 사실이니, 곧 사람들은 악함을 깨닫고 이런 일을 그치기 바란다’고 하였다. 신라의 彦昇(헌덕왕)은 애장을 시해하고서 즉위하고, 金明(민애왕)은 僖康을 시해하고서 즉위하고, 金祐徵(신무왕)은 閔哀를 시해하고 즉위한 것이니, 이렇게 모두 그 사실을 적은 것도 또한 춘추의 뜻이라 하겠다.”
흥덕왕이 죽은 후 마지막 왕 제56대 경순왕(927~935)이 왕건에게 나라를 바칠 때까지 신라는 100년쯤 더 이어진다.
이렇게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조상들이 이룬 문화적 힘 때문일 것이다.
이 100년 동안 왕은 13번이나 바뀐다.
흥덕왕릉은 안강읍 육통리 입구, 소나무 숲에 싸여 있다.
완편 소나무 숲에 거북비받침이 깨진 채로 있고,
이 근처에서 “興德”이라 쓰인 비석 조각이 발견되어 이곳이 흥덕왕릉임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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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덕왕릉 비편/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흥덕왕은 재위 11년 만에 죽었다.
발견된 비 조각에 "60살"이란 글자가 보이는데, 이 60살이 흥덕왕의 죽을 대의 나이인 것으로 보인다.
왕의 시신은 왕의 유언에 따라 장화왕후의 능에 합장되었다. 신라의 왕릉 중 기록상으로 남아있는 유일한 합장릉이다.
돌사자, 석인상, 능비는 합장하면서 새로 세웠을 것이다.
흥덕왕릉은 그의 할아버지 능인 괘릉과 비슷하다.
능원 좌우로 화표석 1쌍씩 세운 점, 관복을 입은 문인석, 호인상을 배치한 점, 무덤 네 모서리에 돌사자가 놓여 있는 점, 그리고 무덤 주위로 돌난간이 둘러져 있는 점 등이다.
흥덕왕릉은 괘릉보다 40년쯤 뒤에 조성했다.
인물상들은 왜소해져 양감이 줄어들고, 힘이 빠지고 장식적인 경향을 보인다.
호석들의 12지신상은 도식화되고, 자세가 경직되어 있다.
이렇게 정신성은 약해지고 장식성이 강하고 형식적으로 흐르는 것은 9세기 전반 조각의 양식적 변화이다.
나라가 망하는 길로 접어드니, 예술 또한 이렇게 말기적 양식을 보이는가 보다.
2012년 10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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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덕왕릉
경주에 있는 수많은 고분 중에서 신라왕의 이름이 붙어있는 릉은 모두 38기다.
그러나 이 가운데 무덤 주인이 정확하게 밝혀 진 것은 단 2기뿐이다. 바로 태종 무열왕릉과 흥덕왕릉이다.
서악동 무열왕릉은 `태종무열대왕지비`라는 글씨가 비석의 이수에 적혀 있고,
흥덕왕릉은 1977년 국립경주박물관과 사적관리사무소의 발굴조사시 상당수의 碑片이 발견되었는데 비편 중에서 '흥덕'이라는 글씨가 발견되어 왕릉의 주인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
<三國遺事> 제1권 王歷 제1
“陵在安康北比火壤與妃昌花合葬 능은 안강 북쪽 비화양에 있는데 왕비 창화부인과 합장했다”라고 해서 왕릉의 현재 위치가 명확아게 적혀 있다.
신라의 왕릉 중에서 각종 문헌연구를 통해 주인이 '거의 확실하다'고 여겨지는 것 역시 5기 밖에 없다.
양북 봉길리 문무대왕릉(대왕암)과 낭산의 선덕여왕릉, 원성왕릉(괘릉), 조양동 성덕왕릉(33대), 동천동 헌덕왕릉(41대)등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구체적 장소가 명시돼 있어 확실한 것으로 추정한다
이 외 나머지 31기는 예부터 왕릉으로 구전되어온 곳,
또 조선시대 박씨문중과 김씨문중이 합의하여 왕릉으로 억지 지정한 곳으로,
결정적 증거가 전혀 발견되지 않거나 연구결과 사실과 다른 곳이 많다
왕릉은 아니지만 김유신장군의 묘역도 사실이다 아니다를 두고 아직까지 학계에서는 논쟁을 벌이고 있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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