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보여행/인도행

[부산/ 12월 5일, 수요일] 우포늪 탐사

추연욱 2012. 12. 4. 22:41

 

[부산/ 12월 5일, 수요일] 우포늪 천연보호구역탐사 

 

 

만선, 부산물개, 별사모, 구름달, 아이리, 연이, 달사모, 안개비, 풀잎이, 아해,
달바우, 빛들, 미산, 뿌리, 탄경, 돌하, 보석상자, 우야, 소풍가는날, 비나리,
소석, 순디기, 엠42케이, 라일락, 선운재, 소영이, 산두리, 소정네, 소정네동행, 청죽,
은산, 꽃길, 뚱아찌, 소석, 수여니, 조수미, 조수미동행, 뱅쿠버, 달마루,
이렇게 39명이 함께 했다.

 

 

 

 

 

9시 35분, 우포늪생태관에 도착했다. 

 

 

 

사나흘 전부터 오늘 수요일에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가 있었다.

화요일부터는 눈이 온다고 예보했다.

그리고 많이 춥다고 했다.

 

비는 오지 않았다.

눈도 오지 않았다.

생각보다 춥지도 않았다.

두툼한 옷을 입어 오히려 불편할 정도였다.

 

참 운이 좋았다.

행사를 다 마치자 비가 조금씩 오다가,

차를 타고 돌아올 때는 많이 왔고,

부산에 도착했을 때 비는 거의 그쳤다.

중부지방에는 눈이 10여 센티나 와서 난리가 났다고 한다.

 

 

 

 

  

 

 

 

 

 

 

 

 

 

   

 

우포늪전망대로 간다. 10시.

 

 

 

 

 

 

 

  

 

 

 

 

 

 

 

 

 

 

 

 

 

 

 

 

 

 

 

 

 

 

 

 

 

 

Charles Camille Saint-Saens(1835~1921)

Le Carnaval des Animaux 동물의 사육제 No.1~14.

 

제13곡 Le cygne백조

 

http://cafe987.daum.net/_c21_/home?grpid=1G8Ig 


 

 

 

 

 

 

 

 

 

 

 

 

 

 

 

 

 

 

 

 

 

 

 

 

 

 

 

 

 

 

 

 

 

 

 

 

 

 

 

 

 

 

 

 

 

 

 

 

 

 

 

 

 

 

 

 

 

 

 

 

 

 

 

 

 

 

 

 

 

 

 목포제방, 11시 30분.

 

 

 

  

 

 

 

 

 

 

 

 

 

 

 

 

 

 

 

 

 

 

 

 

 

 

 

 

 

 

 

 

"푸른 우포늪 사람들", 12시 20분. 

 

 

 

 

  

 

 

 

 

소목주차장, 1시 20분. 

 

 

 

 

주매정, 1시 40분. 

 

 

 

 

 

 

 

우포늪삼거리, 2시 50분.

 

 

 

 

 

 

 

 

 

우포늪생태관, 3시. 

 

 

우포늪 천연보호구역(천영기념물 제524호) 탐사는 끝났다.

갈 수 있는 길은 대부분 갔다. 대략 6.5km를 걸었다.

 

그래도 겨우 3시,

그래서 창녕읍네 만옥정 공원에 가서 이 자역 문화유산 몇점을 구경하기로 한다.

 

 

만옥정공원 도착, 3시 30분. 

 

 

진흥왕척경비

 

 

 

 

 

■ 신라 진흥왕척경비(국보 제33호)

진흥왕이 拓境과 순행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일반적으로 창녕 신라진흥왕척경비· 북한산 신라진흥왕순수비· 마운령 신라진흥왕순수비· 황초령 신라진흥왕순수비 등을 일컫는다. 진흥왕은 540~576년의 37년간 재위하는 동안 정복적 팽창을 이룩하였고, 이렇게 확대된 영역을 왕이 직접 순수하면서 민심을 살피고 국가에 충성과 절의를 바친 자에 대한 공로의 포상을 선포하고 군신이 함께 경하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비이다.

 

순수란 천자가 제후국을 가는 것을 말한다. 창녕비에는 ‘巡狩管境’이란 말이 없어 척경비라 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금석문이다.

 

 

원래는 전략적 요충지였던 화왕산 기슭에 있었는데, 일제 때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진흥왕 당시 이 지역은 比火伽倻(빛벌)로 5가야국의 맹주였다. 560년 진흥왕은 이 지역을 합병하여 신라의 영토로 만들고 이 척경비를 세웠다.

화강암 자연석 앞면을 평평하게 다듬어 글자를 새겼고, 비면의 둘레에는 윤곽을 선으로 새겼다. 비문의 구성은 題記(제1행 1~8자)․紀事(제1행 11자~제11행 1자)․隨駕人名列記(제11행 8자~제27행)의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비문은 六朝風의 楷書로 각 행마다 27~18자씩 모두 27행 643자이다. 400자정도는 판독이 가능하다. 전반부는 마멸이 심하여 판독하기 어렵지만, 맨 처음에 ‘辛巳’라는 간지가 있어 진흥왕 22년(561)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진흥왕의 다른 순수비와는 달리 비문에 ‘巡狩管境’이라는 제명이 보이지 않으나, 御駕를 수행한 신료들의 명단이 열거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순수비에 속한다.

 

 

※ 진흥왕(삼국사기)

진흥왕이 즉위하였다(540년). 왕의 이름은 맥종(혹은 심맥부라함)으로 이때 나이 일곱 살이고, 법흥왕의 아우 갈문왕 입종의 아들이다. 그의 어머니는 김씨로 법흥왕의 딸이고, 비는 박씨 사도부인이었다. 그런데 왕은 어려서 즉위하였으므로 왕태후가 섭정하였다.

왕 6년(545) 7월에 이찬 이사부는 왕에게 아뢰기를 ‘국사라는 것은 군신의 선악을 기록하여 잘하고 못한 일을 만대에 보이는 것이온데 사기를 수찬하여 놓지 아니하오면 후대에 무엇으로서 사실을 볼수 있겠읍니까’하니 왕은 그렇다 하고 대아찬(5등관명) 거칠부등에게 명하여 널리 문사들을 모아 국사를 수찬하였다.

왕 14년(553) 2월에 왕은 유사에게 명하여 월성 동쪽에 새로 궁전을 지었는데 황룡이 그곳에 나타나므로 왕은 이를 의심하여 이 궁전을 불사로 고치게 하고 황룡사라는 이름을 주었다. 7월에 백제의 동북변을 공취하고 신주(경기도 광주)를 설치하고 아찬 무력을 그 군주로 삼았다. 10월에 왕은 백제의 왕녀를 그 아내로 맞아 소비로 삼았다.

왕 16년(555) 5월에 완산주를 비사벌(창녕)에 설치하였다. 10월에 왕은 북한산(경기도 고양군)에 순행하여 국토를 측정하였다. 11월에 왕은 북한산으로부터 환궁하는데 경로의 각 주, 군에 분부하여 일년동안의 세금을 면제하고, 죄수들을 특사하여 이죄를 제외하고는 모두 놓아주었다.(진흥왕 순수비가 있음)

 

왕 37년(576) 봄에 처음으로 원화를 받들었다. 처음에 군신들이 인재를 알지 못하여 근심한 끝에 많은 사람들을 무리지어 놀게하여 그들의 행실을 보아 이를 등용하려고 하였다. 이에 아름다운 두 여자를 뽑았는데 하나는 남모라 하였고, 하나는 준정이라 하였다. 그들은 그 무리를 삼백여명이나 모았는데 두 여자는 차츰 그 아름다움을 다투어 던져 죽여버렸다. 그러나 사건이 발각되어 준정은 사형되고 그 무리들은 실망하여 제대로 분산되고 말았다. 그 후에 다시 아름다운 남자들을 뽑아서 곱게 단장하고 화랑이라 이름하여 이를 받들게 하였는데 그 무리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서로 도의를 연마하고 혹은 가악을 즐기면서 산수를 찾아다니며 유람하는데 먼곳이라도 다니지 아니하는 데가 없었다. 이로 인하여 그 사람의 옳고 그름을 알게되고 그 중에서 좋은 사람을 가려뽑아 이를 조정에 추천하게 되었다.

그런 까닭으로 김대문의 <화랑세기>에 말하기를 ‘어진 재상과 충성된 신하가 여기서 빠져나오고 뛰어난 장수와 용감한 군사가 이로 인하여 생겨났다’하였고, 최치원이 말하기를 ‘우리나라에는 현묘한 도가 있다. 이를 풍류라 하는데 이 교를 설치한 근원은 선사에 상세히 실려있거니와 실로 이는 삼교를 포함한 것으로 모든 민중과 접촉하여 이를 교화하였다. 또한 그들은 집에 들어와서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아가서는 나라에 충성을 다하니 이는 노나라 사관의 취지이며, 또한 모든 일을 꺼리낌없이 처리하고 말 아니하면서 일을 실행하는 것은 주나라 주사의 종지였으며, 모든 악한 일을 하지않고 모든 착한 행실만 신봉하여 행하는 것은 축건태자의 교화라’하였다.

8월에 왕이 돌아가시므로 시호를 진흥이라 하고 애공사의 북봉에 장사하였다.

왕은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일심으로 불교를 믿고 그 말년에는 머리를 깎고 승의를 입고 스스로 법운이라 이름하며 그 평생을 마치었는데 왕비도 또한 이를 본받아 중이 되어 영흥사에서 살다가 돌아가시므로 나라사람들은 예를 갖추어 장사하였다.

 

  

 

 

 

 

 

 

 

 

■ 퇴천리사층석탑

이증기단에 삼층 탑신을 올린 전형적인 통일시라시대 석탑이다.

 

 

 

 

 

 

 

 

 

 

 

■ 선정비들

 

 

 

창녕객사

술정리에 있던 것을 옮겨왔다.

창녕객사는 3~400년 전에 처음 지은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척화비

조선 고종 3년(1866) 병인양요 후,

 대원군이 쇄국정책을 높이기 위해  전국 각지에 세운 척회비 중 하나이다.

창녕군 교하리에서 옮겨왔다.

 

1866년 7월 General Sherman호,

대동강을 거슬러와 평양 주민을 살육하고 약탈한다.

평양 주민과 관군이 합세하여 배를 불태우고, 선원을 모두 죽인다.

1866년 9월 프랑스 극동함대 7척에 군사 1천여 명이 강화도 점령.

조선 조정에 프랑스 신부 살해한 자를 처벌, 통상을 요구한다.

40여 일만에 물러가면서 강화도 일대 약탈, 방화 행궁, 외규장각 등 궁전건물을 불태우고, 군기 물자와 금은 보화, 도서를 약탈한다. 이것에 병인양요다.

 

 

 

 

 

 

 

이 장승은 관룡사 장승을 본떠 만들었다.

 

 

 

 


오늘의 일정을 마무리하고 돌아오는 차 올랐다.

이때부터 비가 오기 시작했다. 4시

오는 동안 내내 비가 많이 왔다. 

 

 

 

 

동래에 6시에 도착했다.

차가 제법 밀려 2시간이나 걸렸다.

 

오늘(12월 6일 화요일) 아침 방송에,

<아리랑>이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