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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로왕릉 능소화 구경/ 2025년 6월 26일

추연욱 2025. 6. 28. 13:47

 

 

김수로왕릉 능소화 구경/ 2025년 6월 26일

 

 

 

경전철 수로왕릉 역, 10시 5분.

 

 

 

 

전철역 계단을 내려오니 이런 석물이. 새김이 정교하고 아름답다.

 

 

 

 

해반천변에

 

 

 

 

 

 

 

 

 

다리를 건너고 조금 걸어

 

 

 

수로왕릉 정문 숭화문

 

 

 

 

 

 

 

 

가락루

 

 

 

가락루 안쪽에는 영신루란 편액이 걸려있다. 

 

 

 

 

 

 

 

 

 

 

 

 

 

 

 

 

 

 

 

 

 

 

 

 

 

 

 

 

 

 

 

 

 

 

 

 

 

 

 

 

 

 

 

 

 

 

 

 

 

 

 

 

 

 

 

 

 

 

 

 

 

 

 

 

 

 

 

 

 

 

 

 

 

 

 

 

 

 

 

 

 

 

 

 

 

 

 

 

 

 

 

 

 

 

 

 

 

 

 

 

 

 

 

 

 

 

 

 

 

 

 

 

 

 

 

 

 

 

 

 

 

 

 

 

 

 

 

 

 

납릉정문

 

 

 

김수로왕릉

 

 

 

 

 

 

 

수로왕릉 경내 고인돌

 

 

 

 

 

 

대성동 고분군

 

 

 

 

 

 

 

 

 

 

 

 

 

 

 

 

 

 

 

 

 

 

 

 

 

 

 

 

 

 

 

 

국립김해 박물관

 

 

 

 

 

 

 

 

 

 

 

 

 

김수로왕비 릉 가는 구지문

 

 

 

 

 

 

 

 

김수로왕비(허황옥 33~ 189) 능

 

 

 

 

 

 

아요디아는 인도 태양왕조의 옛 도읍지로서 서기전 5세기쯤 그 나라 왕자가 태양신의 화신으로 숭배되었다고 한다.

이 왕자가 다른 나라에 도읍지를 빼앗기고 어디론지 떠나갔다는 인도 쪽의 기록이 전해진다.

이 시기는 공주가 김해로 오기 28년 전에 해당한다.

 

태국에 아유티야라는 고도가 있다.

이 나라는 메남 강 언저리에 있었는데 아요디아가 건설한 식만지였다고 한다.

그러니 아요다아가 망해 이곳으로 망명했을 것이라는 그럴듯한 추정이 있을 수 있다.

 

공주가 싣고 온 파사석탑의 돌은 김해 지방뿐 아니라 우리나라에는 없는 약돌이라 한다.

인도와 중국위 남해 연안에서 산출된다고 한다.

참고로 덧붙이면 가락 또는 가야라는 이름은 고대 인도어의 물고기라는 말과 유사하다고 한다.

 

1792년에 세워진 수로왕릉의 정문에는 마주보는 두 마리의 물고기와 연꽃 봉오리 따위의 도형이 그려져 있다.

이러한 문양은 지금도 아요디아 고을에서 큰 건물에 쓰이는 조각과 관련이 깊다고 본다.

 

그녀가 온 시기는 아요디아가 망한 뒤였고, 6월의 풍향과 물흐름은 역풍, 역류여서 두 달 안에 김해에 닿을 수 없다.

이에 따라 태국의 아유티아에서 출발했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이와 다른 추정도 있다.

허황후가 죽고 난 뒤에 올린 시호는 普州太后였다. 보주는 중국 사천성의 가릉강 유역에 있었다.

허황옥은 바로 이곳에 살던 巴族의 중심 세력인 허씨 가문의 딸로 보는 것이다.

허씨들은 한나라 조정에 반기를 들었다가 실패로 강제로 추방되었다.

이 허씨들은 뿌리가 인도였고, 허황후 일행은 양자강을 따라 상해지방에 이르렀다가 해류를 따라 김해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아주 색다른 주장도 있다.

인도의 어떤 상인 세력이 가야와 무역을 활발히 하기 위해 어떤 여자를 아요디아의 공주로 위장하여,

수로왕에게 바쳤다고 보는 설이다.

수로 도는 수릉도 산스크리트의 ‘수라’에서 따온 말로 이해한다.

수라는 초인간적인 권력을 가진 자, 통치자, 영웅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2.고구려 백제 신라와 가야를 찾아서>, 한길사, 1998. 72~ 75쪽

 

 

 

파사각

 

 

 

파사석탑

 

 

 

 

 

 

 

 

 

 

 

구지봉

 

 

 

구지봉 고인돌

 

 

 

 

 

구지봉은 바다에 가까이 자리잡고 있는 언덕이라 해야 걸맞을 작은 봉우리이다.

지금은 그 앞에 너른 들판이 있으나 이는 일제시기에 만을 막아 간척지를 만든 뒤의 모습이다.

바다 가까이 있으니 거북이 달밤이면 자주 기어올라와서 어슬렁거리며 노닐었을 것이다.

봉우리 모양도 화폐로 쓰는 조개껍질 두 쪽을 엎어 놓은 형국이다. 거북이 웅크린 자세와 같다.

 

구지봉에 오르면 바다의 만 안쪽이 환하게 드러난다. 제사 지내는 장소로나 축제를 벌이는 장소로 안성맞춤이다.

이곳은 신성한 제사터이자 신나는 놀이터이자 풍농제나 풍어제 따위의 집회장이었다.

또 신석기시대니 청동기시대에는 이곳이 부족장들의 묘지였다.

 

지금 구지봉의 머리 부분에 해당되는 구역에 고인돌무덤이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

이 고인돌 덮개에 한석봉의 글씨라고 전해지는 ‘龜旨峯石’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아마 조선시대 사람들이 고인돌에 대한 인식이 없어서 구지봉 제단의 床石으로 생각하여 이런 글자를 새겼을 것이다.

 

구지봉은 뱀이 서려 있는 형상이기도 하다. 뱀은 거북의 머리와 함께 남성의 성기를 상징한다.

성기신앙은 고대인들과 무속에서 끈질기게 샹명력을 지니고 있었다.

성기신앙은 다산과 풍요를 비는 심층적 의식의 소산이다.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2.고구려 백제 신라와 가야를 찾아서>, 한길사, 1998. 65~ 67쪽

 

 

 

연지공원 12시 55분.

 

 

 

 

 

 

 

 

 

 

 

 

 

 

 

 

 

 

 

 

 

 

 

 

 

 

 

 

 

 

 

 

 

 

 

 

 

 

 

 

 

 

 

 

 

 

 

 

 

 

 

 

 

 

 

 

 

아쉽지만 돌아가야겠다.

너무 더워 많이 지쳤다. 오늘 폭염주의보가 내렸단다.

가까운 전철역을 찾아,

 

 

박물관 역에 도착해, 1시 45분.

전철을 타고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