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시집

주막에서/ 김용호

추연욱 2024. 7. 10. 00:29

주막에서

 

감용호(1908~ 1967)

 

어디든 멀찌감치 통한다는

길옆

주막

 

수없이 입술이 닿은

이 빠진 낡은 사발에

나도 입술을 댄다.

 

흡사

정처럼 옮아오는

막걸리 맛

 

여기

대대로 슬픈 노정(路程)이 집산하고

알맞은 자리, 저만치

위의(威儀)있는 송덕비頌德碑 위로

맵고도 쓴 시간이 흘러가고

 

세월이여!

소금보다도 짜다는

인생을 안주하여

주막을 나서면

 

노을 비낀 길은

가없이 길고 가늘더라만

 

내 입술이 닿은 그런 사발에

누가 또한 닿으랴

이런 무렵에

 

김용호, <날개>, 19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