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시집

김미선/ 시작 노트, <뜨거운 쓸쓸함>

추연욱 2022. 6. 15. 18:15

시작노트

 

김미선

 

꽃들은 어디로 갔나

그늘 얻지 못한 여윈 어깨가

햇살을 구경한다.

서늘한 오후 3시의 풍경이

어긋난 조화 속에서도

담장을 쌓아 올린다

 

시동인지 가변차선 제52018 <궤도이탈>, 도서출판 전망.

 

 

뜨거운 쓸쓸함

 

김미선(1959~ )

 

멀리서

비에 젖은 바퀴소리가

붉은 눈망을의 길을 연다

길게 쓸려가는 사랑이 다시

돌아서는 착각으로

가슴이 뛴다

등불 멀어진 길 끝에서

터진 물집이 통점을 찍는다

세상의 뒷덜미에

나무들의 완벽한 일체는

더 이상 의미가 아니다

수많은 갈등과

명치 끝에 올라 탄 울렁증이

단 순간 먼 거리를 뛰어 넘는

사랑으로 핀다

발효되지 못한 난생의 외로움

분홍 모자를 찾아 길을 나서면

오래 수태 중이던

서늘한 그림자가 지퍼를 열고

수많은 모르스 보호를 쏟아낸다

 

김미선, <뜨거운 쓸쓸함>, 지혜, 2014.

 

 

 

환상에 대하여

 

김미선

 

그의 어깨에 기대면

내 파도는 가벼워진다

모래 해변의 깨알 같은 주술이

벼랑을 밀쳐내고

망가진 어망이 오후의 햇살로

다시 일어선다

잠시 내어준 개펄처럼

물 주름 따라 흔들리는 숨결은

급상승하는 나비효과를 부른다

곳곳에 쏟아지는 날개 짓

태양을 보며 물결 휘젓고

이루지 못한 첫사랑 고백을 넘는다

한 귀퉁이가 세상 전부인

네 자그마한 어깨 하나

물안개가 몽돌처럼 안겨온다

 

김미선, <뜨거운 쓸쓸함>, 지혜, 2014.

 

 

 

아름다운 탈출

 

김미선

 

한 순간 정적으로

꽃이 지고 있다

슬픔 내려놓는 사이

꽃이 태어난다

내 몸으로 왔다가

마주보는 피안

우주의 한 모퉁이 다시 벙근다

꽃 떨어진 자리

부릅뜬 눈동자에 허공을 담는다

찰나의 사랑으로 살다가

땅의 그리움이다가

점멸하는 별을 찾아 윤회하는  

나는 동백이다

뜨겁게 꽃 지는 그늘에서

생의 무게 읽어내는 그대

물상 속에 있다

다시 꽃으로 피는 붉은 적막

봄을 부른다

 

 

풍경 안으로

 

김미선

 

떨어지는 노을이

바다 속의 또 다른 해를 비춘다

 수평선에서 민니는 공존

풍경 속에 서 있는 아비를

렌즈에 담는다

물결은 바람으로

아비는 아들에게로

묻어 두었던 소리 담아 낸다

 

아비는 아들을 낳고

아들은 아비의 그리움을 닮는다

그대의 영토인  노을

바다가 해무를 풀고

또 다른 해를 피워 올린다

아침은 창을 열어 두겠다

 

 

 

비는 기차가 되어

 

김미선

 

제대로 익혀지지 않은 낮달은

서쪽 하늘로 비켜가고

슬픔과 기쁨

아랑곳 없이 비가 내린다

 

마음에 새겨진 모난 각들이 나비를 입고

몽환의 거처를 빠져나가는

붉은 백합의 너을거림에 더 이상 민감하지 않기로 한다

 

길은 젖어서 걸음을 멈춘다

 

더 먼 곳에 귀를 대고

무엇이 되고 싶다는 것을 잊은 채

지금 나는

알아 들을 수 없는 기차의 행방을 찾아나선다

 

구름이 내게로 달려와

꽃의 영광을  잊고 꿈의 바깥을 뒤적인다

 

날개 없는 안개는 허공으로 날아오른다.

 

 

 

꽃의 탄생

 

김미선

 

나는 세찬 물살에 숨이 찼어

큰 논쟁이 이어지고

 당신이라는 벽에 부딧쳤어

질주의 임무를 부여 받아

거대한 산허리를 돌아나갔어

끈임없이 낮은 곳으로 흘러갔어

물줄기에 침식된 푸르러고

출렁이는 한 생애가

당신이 뿜어주는 멍으로 더  푸르렀어

끊어질 듯 이어지는 풀등에

다소곳이 앉았다가

때론 모래톱에 홀로 머물렀어

굽어진 모서리에 다시 돌아와 스미면

휘몰이로 떠도는 물소리

나는 허공을 물고

지친 가슴팍으로 상흔을 지웠어

굴절된 그림자가 물빛보다 진하게 흐르고

묵직한 운명이 또 다시 길을 내고 있는 동안

바다가 지향하는 하나의 행로에

나의 뜨거운 심장이 굽이 돌아 나갔어  

하양 물보라로 뒤척이며

나는 휘어져 흘렀어

 

 

 

 

 

Caspar David Friedrich(1774~ 1840)

외톨이 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