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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룡포 · 무섬마을- 2021년 10월 17일

추연욱 2021. 10. 18. 15:22

 

회룡포 · 무섬마을- 2021년 10월 17일

 

 

 

 

군위휴게소에서 바라본 풍경

 

 

 

예천 금남리 황목근(천연기념물 제400호)

9시 35분에 황목근 주차장에 왔다.

 

 

 

 

 

 

 

 

 

黃木根(천연기념물 제400)은 예천군 용궁면 금남리(금원마을) 690번지에 있다.

황목근은 수령 500년으로 추정되는 팽나무이다, 금남리 동신목이다.

 

5월이면 누런꽃을 피운다 하여 성을 ,

근본 있는 나무라는 뜻으로 이름을 木根이라 지었다고 한다.

나무의 가슴높이의 둘레는 3.2m 키는 15m이다.

토지(논과 임야 5필지) 12,232를 소유한 부자나무로 재산세를 낸다.

 

2001년 마을 회의에서 2세 나무 이름을 黃萬樹로 정했다.

 

금원마을에서 이 나무는 매년 정월 보름을 기하여 축·제관을 선정, 태평성대와 마을 평화를 기원하는 당제를 올리고,

다음날 주민들이 함께 모여 뒷잔치를 연다.

 

 

 

 

 

 

 

 

 

 

 

 

 

 

 

 

 

 

제단, 2010년 7월 18일 사진

床石에 "里社之神壇"이라 새겨져 있다.

 

 

 

 

 

 

 

 

 

 

2010년 7월 18일 시진

 

 

 

후계목 황만수

 

 

 

 

 

 

 

 

 

 

 

 

 

 

 

 

황만수, 2010년 7월 18일 사진

 

 

 

 

 

 

 

 

비룡산 회룡대

 

장안사 일주문

 

 

 

장안사 주차장, 10시 20분.

 

 

 

장안사 범종각

 

 

 

 

 

 

장안사는 예천군 용궁면 향석리 비룡산 정상 부근에 있다.

전설에 따르면 신라 때 의상(625~702)의 제자인 雲明이 창건했다고 한다.

 

<醴泉郡誌>에는 고려시대에 창건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고려 명종대에 지도림(支道林) 스님이 장안사를 중창한 것에 연유한 것이라고 한다.

 

조선 초기 이전의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

조선 인조 5(1627) 德潛이 중창했고,

숙종 35(1709) 淸敏이 범종각을 중수했다.

영조 31(1755) 法琳이 중수했다. 정조 24(1800) 孝日이 중수했다.

1925년 법당의 기와를 갈고 큰 방을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좌측에 주지실인 응향각, 우측에 승방이 있다.

 

대웅전은 조선 말기의 건물이며 안에는 목조 아미타삼존불과 3점의 탱화가 있다. 이들은 모두 최근의 작품이다.

산령각에 봉안된 산신탱화는 순조 12(1812)에 조성된 것이다.

마룻집에는 1727년에 쓴 중창기를 비롯하여 각종 중수기 현판이 걸려있다.

 

고려 때의 문인인 이규보는 <동국이상국집> 고율시(古律詩)에 이곳 용궁현에 와서 원님이 베푸는 잔치가 끝난 뒤 지은 십구일에 장안사에 묵으면서 짓다라는 시를 남겼다.

 

 

19長安寺에서 자면서

 

李奎報(1169~ 1241)

 

圖山聊得滌鹿襟 산에 이르니 塵襟(속된 마음)을 씻을 수가 없구나.

況遇高僧支道林 하물며 고승 지도림(支道林)을 만났음이랴.

산료득척록금

長劍遠遊孤客思 긴 칼 차고 멀리 떠도니 외로운 나그네 생각이오.

一杯相笑故人心 한잔 차[]로 서로 웃으니 고인의 마음일세.

 

天晴舍北溪雲散 맑게 갠 절 북쪽에는 시내의 구름이 흩어지고

月落城西竹霧深 달이 지는 성 서쪽 대나무 숲에는 안개가 깊구려.

病度流年空嗜睡 병으로 세월을 보내니 부질없이 잠만 즐기네

古園松菊夢中尋 옛 동산 소나무와 국화(菊花)는 꿈속에서 찾네.

 

지둔(支遁, 314~366)東晉)사람으로 지도림(支道林)이라고 한다.

지둔은 중국사상의 중요한 개념인 이()의 의미를 <반야경> 사상으로 변화시켰다.

는 본디 우주적 질서, 또는 자연적인 계절의 의미였으나,

반야사상의 영향으로 형이상학적인 의미를 부여해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의미로 해석해 중국인들에 소개했다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문인으로 팔만대장경 서문을 찬술(撰述)한 이규보가 고려 명종 27(1197)에 이곳 용궁현의 원님이 베푸는 잔치가 끝난 뒤 시 한편을 남겼는데,

제목은 십구일에 장안사에서 묵으며 짓다로 그가 지은 <東國李相國集>에 남아 있어.

이를 통해 장안사는 지도림(支道林) 스님이 중창하였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통일대불

 

 

 

 

 

용왕각

 

 

 

바위에 용의 모습이 새겨쟈 있다.

 

 

 

 

 

 

 

 

통일대불에서 회룡대 가는 계단은 223개

 

 

 

 

 

회룡대, 10시 40분.

 

 

 

 

 

 

 

 

 

 

 

 

 

 

회룡포 물도리동은 내성천이 350도 휘감아 돌며 모래사장을 만들고 그 속으로 마을이 섬처럼 떠 있는 곳이다.

조선조에는 귀양지였다.

 

조선 고종때부터 의성 사람들이 모여 살아서 의성포라고 했다고도 하고,

1975년 큰 홍수가 났을 때 의성에서 소금 실은 배가 이곳에 왔으므로 의성포라 부리게 되었다고도 한다.

 

최근 국토해양부와 한국하천협회가 선정한 '한국의 아름다운 하천 100'에서 '최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회룡포 물줄기를 가로지르는 '뿅뿅 다리는 건축공사장에서 흔히 쓰는 구멍이 뚫린 비계용 철판으로 만들어졌다.

'뿅뿅 다리'라는 이름의 어원은 철판 사이로 구멍이 '뿅뿅' 뚫려서라고도 하고,

다리를 건널 때마다 '뿅뿅' 소리가 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정확히는 알 수가 없다.

 

 

 내성천은

봉화군 물야면 오전리 백두대간 先達山(1,236m) 남쪽 봉황산 사이에 있는 늦은목재 아래 옹달샘에서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흐르다가 봉화군 봉화읍, 영주시 평은면 · 문수면 일대에서 무섬마을을 휘감아 돌며 흐른다.

 

예천군 용궁면에서는 회룡포를 감아돌고,

조금더 내려가 예천군 지보면과 문경시 영순면의 경계인 달지리,

삼강주막으로 유명한 삼강에서 낙동강 본류로 든다.

109.5km, 낙동강의 제1지류이다.

 

하천 상류로부터 落花岩川 · 龍角川 · 西川 · 漢川 · 錦川 등의 지류들이 내성천으로 흘러들고 있다.

물야면 오전댐 소공원(오전약수탕 가는 길목)에 ‘乃城川 三百里-이곳에서 시작되다’라는 표지석을 세웠다.

표지석은 길이 2.5m, 높이 1.5m 규모로 맑고 깨끗한 1급수 내성천 발원지를 알리고 있다.

 

오랜 세월 강변에 퇴적물은 쌓이고 쌓여 모래사장이 생겨 희한하게도 이런 웬만한 해수욕장만하다.

내성천은 조선시대에도 모래가 많아 사천(沙川)으로 불리었다.

4대강 공사로 모래는 강바닥어서 강변으로 자리를 옮겼고,

오직 내성천만 모래강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

 

모래층은 탁한 미립점토나 유기물을 걸러내어 수질을 정화하여, 생태계를 풍요롭게 한다.

내성천 중ㆍ상류에 비교적 많은 인구가 살고 있음에도 수달이 사는 깨끗한 강으로 남아 있는 것은 콩팥 역할을 해주는 모래 덕분이다.

 

이제 영주댐에 물을 채우고부터 모래는 굵어지고,

자갈들이 들어오고, 모래밭에 풀들도 나타나고, 강바닥에는 이끼들도 나타나기 시작한다.

 

 

 

 

 

 

 

 

 

 

 

 

 

2009년 12월 24일

 

 

2010년 7월 18일

 

 

 

 

 

 

 

 

 

 

 

뿅뿅다리와 회룡마을 

 

 

 

 

■ 회룡포 물줄기를 가로지르는 '뿅뿅 다리’는 건축공사장에서 흔히 쓰는 구멍이 뚫린 비계용 철판으로 만들어졌다.

'뿅뿅 다리'라는 이름의 어원은 철판 사이로 구멍이 '뿅뿅' 뚫려서라고도 하고,

다리를 건널 때마다 '뿅뿅' 소리가 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정확히는 알 수가 없다.

 

 

 

 

 

 

 

 

 

 

 

 

 

 

 

 

 

 

 

 

 

 

 

 

 

 

 

 

 

 

 

 

 

 

 

 

 

 

 

 

 

 

 

 

 

 

 

 

가늘고 고운 모래는 이제 보이지 않늗다.

자갈돌과 굵은 돌들이 모래에 덮히기 시작한다.

영주댐으로 때문인가?

 

 

 

 

 

 

 삼강주막

 

삼강주막 주차장, 12시 5분.

 

 

 

 

 

 

 

 

 

삼강나루 황포돛배

 

 

 

 

 

450살 회화나무

 

 

 

들돌

 

 

 

 

 

 

예천 삼강주막은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에 있다.

삼강주막의 '三江'은 세 개의 물줄기가 모이는 곳이다.

강원도 태백시 황지에서 발원하는 낙동강과,

경북 봉화로부터 흘러오는 내성천,

문경의 금천이 이곳에서 한 줄기로 만난다.

 

옛날 이 삼강나루터는 경남 김해에서 올라오는 소금배가 경북 안동 하회마을까지 가는 길목이었고,

과거 길에 나선 선비들이 문경새재를 지나 한양으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었다.


1900년 무렵 지어진 삼강주막은 본디 3채가 있었는데,

1934년 대홍수로 떠내려 가버리고 한 채만 남았다.

 

주막의 마지막 주모였던 유옥년 '할매'께서 지난 200590세의 일기로 돌아가시기 전까지 영업을 했다.

이후 주막은 2년여의 짧은 '임시휴업' 기간을 가졌고,

지난해 경북도청과 지역민들이 합심해 다시 문을 열었다. 현재 이곳은 마을 주민들이 공동으로 경영하고 있다.

새롭게 문을 열면서 주막의 본채도 조금 손을 봤다. 가장 큰 변화는 기존의 슬레이트 지붕을 예전 초가지붕으로 고쳤다는 것. 그러나 지붕을 제외한 본채의 몸뚱이는 최대한 현상 그대로 보존했다. 그러다 보니 좁은 부엌에 들어가면 당시 유옥년 할매의 손길이 그대로 느껴진다. 글을 몰랐던 할매는 불쏘시개로 부엌 벽에 비스듬히 선을 그어 외상값을 표기했다고 하는데, 그런 할매의 외상장부가 기록된 벽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당시는 농사를 천하의 대본(大本)으로 삼던 시절인지라 봄 보릿고개에 마신 술값을 가을 추수 후에나 갚는 '가내기'가 흔했다고.


삼강주막의 본채는 건축사적으로도 가치가 있다.

두 개의 방은 각 방마다 문이 셋씩 달렸고, 부엌은 드나드는 문만 무려 넷이다.

손님이 아무렇게나 드나들 수 있게 하기 위해,

그리고 어느 곳으로도 쉽게 술상을 내어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만든 우리네 전통 술집의 구조를 보여준다.

 

 

 

지난 2005년 故 유옥년 '할매' 생전에 찍은 삼강주막의 사진.

대구과학대학 건축인테리어학과 정용환 교수의 사진이다.

 

 

 

 

 

 

 

 

 

 

 

 

 

 

 

 

 

 

 

 

 

 

 

 

 

 

 

 

 

 

 

 

 

 

 

 

 

 

 

 

 

 

 

 

 

 

 

 

줄맨드라미

 

 

 

 

 

 

 

 

 용궁면 시장 점심 먹으러

 

단골식당, 12시 40분.

 

 

식당이 복잡해 많이 기려야 했다.

 

 

 

바늘꽃

 

 

 

핫립세이지

 

 

 

 

 

 

 

 

 

 

 

 

 

 

 

 

 

 

 

 

영주시 서천 둔치와 핑크뮬리

 

서천둔치, 3시

 

 

 

산국

 

 

 

 

 

 

 

 

 

 

 

景韋樓

 

 

 

 

 

 

 

 

 

 

 

 

 

 

 

 

 

 

 

 

 

 

 

 

 

 

 

 

 

 

 

 

 

 

 

 

 

 

 

 

 

 

 

 

 

 

 

 

 

 

 

 

 

 

 

 

 

 

 

무섬마을과 외나무다리

 

영주시 문수면 무섬로 234번길

 

수도교란 콩크리트 다리를 건너 마을로 들어간다.

이 다리는 길이 180m, 폭 5.5m로 1983년에 만들었다.

마을 뒤로 무섬교란 다리가 또 하나 더 있는데, 찾아보지 못했다. 

 

 

 

무섬마을 주차장, 4시 7분

 

 

 

주차장에 오니 정자가 바로 보인다.

 

 

여러 차례 왔지만 저 정자는 바라보기만 하고 가까이 갈 겨를이 없었다.

주차장 모퉁이로 길이 아 있었다.

 

 

 

 

 

누각 앞에 오니 작은 쪽문이 있고, 그 담벼락에 "潘南 朴氏 吾軒公 추모회"라 쓰여있다.

2층 누각 같은 팔각 정자에 "淸退亭"이란 현판이 ㄹ려 있다.

 

 

 

淸退亭

 

 

 

 

 

마을로 돌어가면 먼저 해우당이 나타난다.

해우당고택은 고종 때 의금부도사를 지낸 해우당 김낙풍의 집이다.

 

만죽재고택은 이 마을의 입향 시조인 박수 선생이 1666년에 지은 고택이다.

그밖에 김덕진, 김뢰진, 김위진, 김규진, 김정규, 박덕우, 박천립 가옥 등이 잘 보존되어 있다. 이 가운데 해우당고택, 만죽재고택, 인동장씨종택, 김규진가, 김뢰진가 등은 소수서원 옆 선비촌 재현할 때 건축의 모델이 되었다 한다.

 

 

이 마을 입구에서 보면 오른쪽으로 내성천이 마을을 휘돌아 흐르고 가운데는 둑방길,

그 왼쪽에 마을이 들어서있다.

 

 이곳 무섬마을에 사람이 들어온 것이 17세기 무렵이라 한다.

처음 이곳에 들어온 가족은 영주 지역의 명문가인 반남박씨(潘南朴氏) 입향조 박수이며,

그 뒤로 영조 때 그의 증손녀 사위인 선성 김씨(예안김씨) 대(臺)가 들어왔다.

그래서 이 마을은 수백년 동안 두 집안의 집성촌이 되었다.  

 

수도리에는 38동의 전통가옥이 있는데,

그 가운데 16동이 조선 후기에 건축된 전형적인 사대부 가옥으로 그 역사가 100년이 넘는다.

그 중 가옥 아홉 채가 민속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내성천은 경북 봉화군 물야면 오전리 선달산(1,236m) 남쪽 계곡에서 발원해 봉화읍,

영주시 평은면 水島(무섬마을)리 마을을 한 바퀴 감싸 돈 후 문수면,

예천군 지보면을 지나 문경시 영순면 삼강리에 이르러 낙동강 본류와 합쳐진다.

 

내성천은 조선시대에도 모래가 많아 사천(沙川)으로 불리었다.

4대강 공사로 모래는 강바닥어서 강변으로 자리를 옮겼고,

오직 내성천만 모래강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

모래층은 탁한 미립점토나 유기물을 걸러내어 수질을 정화하여, 생태계를 풍요롭게 한다.

내성천 중ㆍ상류에 비교적 많은 인구가 살고 있음에도 수달이 사는 깨끗한 강으로 남아 있는 것은 콩팥 역할을 해주는 모래 덕분이다.

 

40여 년 전 무섬마을에는 다리가 세 개 있었다 한다.

예전 이 자리에 있었던 다리 이름은 몽동(夢童)골다리다. '꿈속 아이들이 건너는 다리'라는 뜻인 것 같다.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로 일꾼들이 물 건너 논밭으로 일하러 가는 다리이고,

콘크리트다리 자리에 있던 다리 도랑나들다리는 아침이면 아이들이 학교 가는 다리였고,

마을 뒤편에 있었던 뒷나들다리는 영주 장날이나 나들이 갈 때 건너는 다리였다고 한다.

 

1973년 콘크리트 다리 수도교가 생긴 뒤 지난 350여 년간 이 마을과 바깥 세상을 이어준 유일한 통로인 외나무다리가 철거되었다. 

그러다가 2005년 옛 모습 그대로 복원한 것이 현재의 외나무다리다.

금빛 모래톱과 은빛 여울에 말뚝 188개를 박고 그 위에 널판 124개를 얹었다.

 

 

 

 

 

 

 

 

 

 

 

 

 

 

 

 

 

 

 

 

 

 

 

 

 

 

 

 

 

 

 

 

 

 

 

 

 

 

 

 

 

 

 

 

 

 

 

 

 

 

 

 

 

 

 

 

 

 

 

 

 

 

 

 

 

 

 

 

 

무송헌

 

 

 

 

 

 

 

 

 

 

 

 

 

 

 

 

만죽재

 

 

 

 

 

섬계고택 剡溪古宅

 

 

 

 

 

 

천일홍

 

 

 

 

 

 

 

 

 

 

 

 

 

 

 

 

 

 

 

 

 

 

 

 

 

 

 

 

 

좀작살나무

 

 

 

 

 

 

 

 

김성규 가옥(조지훈의 처가)

 

 

 

 

조지훈의 시 <별리>

 

이 돌비는 마을 아래쪽 무섬자료전시관 앞에 있다.

 

 

 

해우당

해우당은 조선 고종 때 의금부도사를 지낸 해우당 김낙풍의 집이다.

 

 

 

 

 

 

 

 

현판은 興宣大院君 이하응(1820~ 1898)이 썼다.

 

 

 

 

 

 

 

 

 

 

 

 

 

 

 

 

 

 

 

 

무섬마을 주차장으로 돌아왔다., 5시.

 

 

 

 

이곳을 출발, 교대역 앞에 내려,

다시 전차를 타고 연산동 식당에 오니 8시 35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