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나들이 1/ 봉정사, 태장재사, 함벽당 - 2021년 1월 24일
안동 나들이 1/ 봉정사, 태장재사, 함벽당 - 2021년 1월 24일
● 봉정사
안동시 서후면 봉정사 길 222.
봉정사 주차장에 왔다., 10시.
부산 교대 앞에서 2시간 30분 걸렸다.
봉정사 일주문
새로 지은 일주문은 본디 자리보다 아래쪽에 커다랗게 지어 전체의 구조가 바뀌어 버렸다.
봉정사는 2018년 6월 30일 재42차 유네스코 세계유산 위원회에서,
통도사 · 부석사 · 법주사 · 마곡사 · 선암사 · 대흥사와 함께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으로 세계유산에 등재하였다.
만세루
"天燈山鳳停寺"란 편액이 걸려있다. "東農 老煥書" 金嘉鎭(1846~1922)이 1913년에 썼다.
만세루 아래 계단을 따라 오르면 대웅전이 모습을 드러낸다.
봉정사는 신라 신문왕 2년(682)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의상대사는 이 절에다 화엄강당을 짓고 神琳 등 제자들에게 법을 전했다고 한다.
다음과 같은 창건설화가 있다.
부석사에 있던 의상이 종이로 봉황을 만들어 道力으로 날렸는데, 이 종이 봉황이 날아가 앉은 곳이 바로 이곳이었기에 여기에 절을 지어 鳳停寺라 하였다.
또 의상이 기도를 드리려 이 산에 오르자 선녀가 나타나 횃불을 밝히고 靑馬가 길을 인도하여,
이 자리에 이르게 했으므로 산을 天燈山이라 하고 청마가 앉은 곳에 절을 지어 봉정사라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극락전 상량문에 의하면 의상의 제자인 능인이 창건했다.
19세기에 몇번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을 뿐,
사지나 경전은 한국전쟁 때 인민군이 머무르면서 모두 불태운 까닭으로 자세한 내력은 알 수 없다.
봉정사 대웅전(국보 제311호)
■ 대웅전(국보 제311호)은 지금까지 확실한 건립연대가 밝혀지지 않아,
조선 초기에 지은 건물로 보고 있었다.
근래에 대웅전 보수를 위해 해체하던 중 4종의 먹글씨를 발견하였는데,
이 먹글씨 중에 종보(맨 위쪽에 있는 보) 보아지 상부에 쓰인 <법당중창기>에,
“조선 세종17년(1435)에 이르러 법당을 중창하였다”는 기록과,
지붕 속 종보 받침 長舌에서 “1428년에 미륵하생도를 그렸다”는 묵서가 발견되었다.
또 목재연륜연대 측정 결과에서도 1400년대 이전에 벌채된 부재임이 확인되어,
대웅전을 건립한 시기가 1435년 이전이라는 사실이 거의 확실해 졌다.
1363년 극락전을 중수할 때,
새로 대웅전을 지어 봉정사의 구획을 이렇게 다시 잡았을 것으로 보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대웅전은 고려 말에 지은 건물이며, 현존하는 다포계 건물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그러다가 2000년 3월 문화재청은 해체 수리하던 중,
고려 제10대 공민왕(1351~1374 재위) 10년(1361) “불단조성”이란 먹글씨를 발견하였다.
그렇다면 1308년에 지은 수덕사 대웅전 다음으로 오래된 건물이다.
■ 대웅전 현판은 고려 제31대 공민왕(1351~1374 재위)의 친필이라고 한다.
공민왕은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으로 피난온 적이 있다.
이때 봉정사 보수에 관여했을 것으로 보고있다.
"光緖 八 季 壬午夏 改彩……"라는 말이 있다.
"光緖"는 청나라 德宗 광서제(1875~1908 재위)의 연호다.
광서 8년 임오년은 조선 고종 19년 1882년이다.
고려 공민왕이 쓴 현판을 이때 다시 칠을 한 것 같다.
대웅전은 정면, 측면 3칸의 팔작지붕집에 다포식 건물이다.
안정된 비례와 웅건한 구조로 극락전보다 완성도가 높다.
앞쪽에 사대부집처럼 툇마루 난간이 있는 점이 특이하다.
천장은 다른 다포집처럼 우물천장이다. 井자 하나하나마다 그 안에 꽃문양을 그렸다.
특히 불단 위쪽 부분을 깊이 파고 작은 공포들로 굽을 돌려 파올렸다.
이는 궁궐의 정전인 경복궁 근정전이나 창덕궁의 인정전 천장의 한가운데를 파올린 것과 같은 방법으로 보개천장 또는 닫집이라 한다.
이 닫집의 천장판에는 쌍룡이 그려져 있는데, 용의 발톱은 다섯 개다.
후불벽을 치고 가운데에 석가모니불과 좌우 협시로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을 모셨다.
건물의 뒷벽이 아니고 건물 가운데에 이처럼 따로 벽을 마련하여 불상을 안치하는 것은 조선 전기부터 나타난다.
수미단에는 모란꽃이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다. 모란꽃이 불교 장식문양으로 등장한 것은 고려 말부터이다.
1625년, 1809년에 대대적인 중수가 있었다.
대웅전 영산회상벽화(보물 제1614호)
2000년 3월 문화재청에서 탱화를 보수하려고 걷어냈을 때 그 밑에서 또 다른 벽화가 나타났다.
수미단과 보개를 연결하는 주불 뒷벽의 채색 그림으로, 가로 387.5cm, 세로 380c의 크기이다.
세종 10년(1428) "미륵하생도을 그렸다"와,
"세종 17년(1435) "대웅전을 중창하였다"는 등의 기록으로 보아 대웅전 중창 때 그려진 것을 알 수 있다.
1712년 새로 후불탱화를 제작하여 봉안함으로 이 벽화가 새 탱화에 덮여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성종 7년(1476)에 그러진 강진 무위사 벽화보다 40~ 50년 앞서는 것으로,
국내 최고의 후불벽화라 보고있다.
지금은 이 벽화가 보이지 않는다.
강진무위사 극락전 아미타후불벽화(보물 제1313호)의 관세음보살
※ 용의 발톱 수는 중국에서 황제의 상징으로 7개를 썼다.
중국의 영향 아래 있는 다른 나라들은 다섯을 넘지 못했다.
한 나라 안에서는 왕의 상징으로 5개, 왕비나 세자는 4개나 3개를 썼다.
그러므로 발톱 5개는 왕의 상징이다.
민왕이 봉정사를 중창할 때 대웅전을 지은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은 이런 점에 근거한다.
※ 문화재청은 2009년 6월 30일 보물 제55호 봉정사 대웅전을 국보 제311호로 승격 지정했다.
이에 따라 봉정사는 극락전(국보 제15호)과 함께 국보 2점을 보유하게 됐다.
또 문화재청은 6월 29일,
경주 남산 칠불암 마애석불(보물 제200호)과,
강진 무위사 극락전 아미타후불벽화(보물 제1313호),
순천 송광사 화엄전 화엄탱(보물 제1366호) 등 국가지정문화재 3건을 국보로 승격 지정 예고했다.
이들 문화재는 국보 승격과 함께 각각 '경주 남산 칠불암 마애불상군',
'강진 무위사 극락전 아미타여래삼존벽화', '순천 송광사 화엄경변상도'로 지정명칭이 변경되었다.
대웅전 마당에 남근석 같은데?
전에는 없었는데?
안에서 본 만세루/ 이 누각은 전에는 德輝樓라고 했다.
■ 만세루(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25호)는 대웅전 앞에 있는 2층 누각이다.
조선 숙종 6년(1680)에 건립되었다고 전한다.
본디 德輝樓라 했는데 언제부터인가 만세루로 바뀌었다. 건립 후 여러 차례 보수가 있었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지형의 경사를 자연스럽게 이용하여 앞면은 2층 뒷면은 단층으로 처리하였다.
"민세루"란 편액이 걸려있다.
현판 萬歲樓는 1913년 낙관 글씨로 보면 石能 金斗漢이 썼다.
김두한은 또 "華嚴講堂", "無量海會" 현판도 썼다.
대웅전 왼쪽으로 승방 무량해회
화엄강당
■ 봉정사 화엄강당(보물 제448호)
승려들이 공부하는 강당 건물로 온돌방 구조를 갖추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남쪽에 두 칸 부엌, 북쪽에 4칸 온돌방이 있으나,
원래는 정면 4칸 측면 4칸으로 현재의 온돌방 뒷쪽으로 4칸의 마루가 있었다.
강당으로 사용한 건물이므로 불당에 비해 낮은 기둥을 사용하였다.
측면의 중앙에 사각기둥 3개를 세워 들보를 받치게 하였으며 그 사이에 창을 내었다.
대웅전 구역은 대웅전 죄우로 무량해회와 화엄강당을 거느리고,
앞에는 만세루가 있어 사각형을 이룬다.
가운데 건물이 화엄강당, 왼쪽이 극락전, 오른쪽이 대웅전이다.
화엄강당 건물이 대웅전 구역과 극락전 구역을 구분하고 있다.
극락전 구역과 극락전
가운데 극락전, 왼쪽 건물이 화엄강당, 오른쪽이 고금당이다.
■ 극락전(국보 제15호)은 1972년 완전 해체 복원하였는데,
이때 “신라 문무왕 때 능인대덕이 창건하고,
고려 이후 원감 등 여섯 스님이 여섯 차례나 중수를 하였으나,
지붕이 새고 초석이 허물어져 지정 23년 용수사의 축담스님이 와서 중수한 것을,
지금에 와서 다시 지붕이 허술하여 수리한다.”는 상량문을 발견하였다.
‘지금’이란 인조 13년(1625)이고, 축담이 중수한 것은 공민왕 12년(1363)이다.
이때 공민왕은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에 와있었으므로 극락전 중수에 공민왕도 관여했을 것으로 보인다.
한 건물이 지어진 후 고쳐 짓는 것은 대개 100년에서 150년을 지낸 뒤이다.
그렇다면 이 건물은 13세기 초 또는 12세기 중엽까지 거슬러 볼 수도 있다.
따라서 이 건물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최근 중국의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 南禪寺의 대전과 비슷한 옛 방식을 갖추고 있어,
남선사와 마찬가지로 8세기경까지 거슬러 보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배흘림기둥에 주심포 맞배지붕집이다.
가운데만 문을 내고 양쪽에는 창살을 달았다.
최근에 복원하면서 조선시대에 건물의 모습이 변형된 것을 고려시대 건축양식으로 돌려놓았다.
이 건물의 공포와 결구 처리방식이 고구려 고분 벽화에 나오는 것과 비슷한 점이 많다는 것과 ,
려 초에 삼국시대 복고풍이 일어 건물이나 석탑이 지방 양식을 띠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고구려계 건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공포와 결구 등은 필요한 구성요소만 있을 뿐 장식은 거의 없다.
바닥과 주위에 검은 전돌을 깔았는데 이런 방식은 고려시대에는 매우 일반적이었다.
안에는 후불벽을 치고 아미타불을 모셨다.
불상의 위쪽으로 닫집이 있는데, 고려 말의 다포계로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본디 극락전 앞마당에는 우화루라는 작은 누각이 있었는데,
극락전을 해체 수리하면서 영산암으로 옮겼다.
※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
① 봉정사 극락전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다.
1972년 해체 수리할 때 1363년에 지붕을 중수했다는 기록이 나왔다.
13세기 초 내지 12세기에 지은 것으로 부석사 무랑수전 보다 50년쯤 앞서 지은 것이다.
② 그 다음이 부석사 무량수전이다.
1916년 해체 공사 때 발견된 귀 공포의 墨書에 “공민왕 7년(1358) 왜구에 의해 건물이 불타서,
우왕 2년(1376) 원응국사가 중수하였다”고 한다.
목조건물은 일반적으로 건물을 지은지 100~150년이 지나 중수한다.
또 건축양식도 고려 후기 건물과는 다르다. 조사전보다 100년쯤 앞선 양식이다.
따라서 원래의 건물은 이보다 100년 정도 앞선 13세기 중엽에 건립된 것으로 본다.
③ 수덕사 대웅전은 1937~40년 해체 수리할 때 “충렬왕 34년(1308) 건립”이라는 먹글씨가 발견되어,
창건 연대를 확실히 아는 최고의 건물이다.
極樂殿 편액
"光緖 八壬午四月改彩, 丙寅六月日松坡童蒙書"
● 하회마을에서의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의 생일잔치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은 1999년 4월 21일 오전 11시 20분 하회마을 도착했다.
충효당을 거쳐 담연재로 가서 의자에 앉자 꾕과리 소리를 시작으로 하회별신굿 탈놀이 양반선비마당을 10여분 진행했다.
여왕이 공연자와 인사를 나누는 동안 앞뜰에 생일상을 차렸다.
여왕과 생일이 같은 주민 4명과 유기잔에 담긴 청주 축배잔을 높이 들었고 다 비웠다.
전통음식 연구회장 조옥화(당시 78세)씨가 마련한 생일 큰상은
47가지 음식과 ‘떡꽃화분’과 봉황문양으로 만든 문어오림이 올랐다.
여왕은 먹지는 않았다.
여왕은 경상북도가 재현한 순종황후 화관과 담연재에서 준비한 오방색 복주머니를 선물로 받은 뒤,
20여분 동안 머문 뒤 하회를 떠났다.
12시 45분쯤 봉정사에 도착하였다.
극락전 앞에서 돌멩이 하나를 주워 돌탑에 얹으며 “돌탑을 쌓았으니 복을 받겠다”하며 웃었다.
절에서 미리 마련한 방명록에 미리 쓰여진 "조용한 산사 봉정사에서 한국의 봄을 맞는다."라는 글귀 아래 Elizabeth라 서명하고,
청기와에도 흰색 글씨로 이름을 적었다.
1998년 아시아 유럽 정상회의(ASEM)에서 김대중 전대통령이 여왕을 초청했다.
여왕은 1년에 2번 해외 공식방문을 하는데, 한번은 연방국, 또 한번은 비연방국이다.
여왕은 외국에 나가면 여러 나라를 방문하지만 이번에는 한국 한 나라만 방문했다.
극락전은 왼쪽으로 화엄강당을 끼고 있다. 화엄강당은 대웅전 쪽을 바라보고, 돌아앉아 있다.
오른쪽으로 고금당
■ 古金堂(보물 제449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집으로 1616년에 중수한 조선 초기 건물이다.
주심포식 건물이지만 조선 중기 주심포식이 결구가 단단한 익공계로 발전해가는 과도적인 모습을 보인다.
작은 건물치고는 지붕이 크고 처마가 깊다.
이 건물이 본디 금당이었다면 이 자리에는 본디 극락전이나 대웅전이 들어서기 전인 초창기에 수도하던 암자가 있었을 것이다.
암자가 있던 자리에 금당이 지어졌고,
뒤에 절의 중심이 대웅전으로 옮겨지면서 옛 금당이란 뜻의 고금당이란 이름으로 남았을 것이된다.
금당이란 명칭은 조선시대 사찰의 원로스님의 거처로 쓰인 건물에 붙는 경우가 있다.
운문사가 그 예이다. 지금은 요사채이다.
1969년 크게 해체 수리했는데 해체 전에는 북쪽 지붕이 팔작지붕이었고, 방 앞에는 쪽마루가 달려 있었다.
극락전 앞으로는 지금은 없는 우화루로 사각형을 이룬다.
가운데 아담한 삼층석탑이 서있다.
영산암
영산암 우화루
지붕 오른쪽에 박공이 보인다. 절집 같지 않고 오히려 양반집 같다.
영산암의 입구인 우화루의 현판은 본디 극락전 앞에 있던 누각의 현판이었다고 한다.
“雨花”는 석가모니께서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처음 설하였을 때,
하늘에서 꽃비가 내렸다고 한 데서 유래한다.
우화루 2층에는 "茶香堂"이란 편액이 걸려있다.
응진전과 관심당
관심당은 송암당과 마주 보고 있다.
■ 봉정사 영산암(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26호)
봉정사 동쪽 약 100m 떨어진 곳에 있는 부속암자다.
응진전 · 송암당 · 삼성각 · 우화루 · 관심당 등 6개 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건물의 건립연대는 알 수 없으나 19세기 말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건물들은 口자 형으로 이루어져 폐쇄적인 느낌이 든다.
그러나 지형의 높이를 이용한 3단의 마당 구성과,
우화루의 벽채를 없애고 송암당을 누마루로 처리한 기법 등에서 폐쇄적인 느낌을 없애려는 노력이 보인다.
편액이 낡아 읽기는어렵지만 영산암의 법당 응진전이디.
가운데 석가모니불, 좌협시 제화갈라(연등불), 우협시 미륵보살의 三世佛
16나한
대웅전 오른쪽 옆구리에 조금 보이는 염화실
삼성각
송암당
우화루와 지붕이 이어져 있다.
일주문을 나왔다.
명옥대
■ 鳴玉臺(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74호)는
퇴계 이황(1501~1570)은 16세 때 숙부이며 스승인 李㻦의 권유로,
사촌인 이수령, 권민희, 강한과 함께 봉정사에사 3개월 정도 독서를 한 적이 있다.
50년이 지난 1665년 66세 때 이곳을 찾았다.
여기서 학문을 논하기도 했다.
후학들이 이곳에 누각 형태의 정자를 지은 것은 퇴계의 사후인 顯宗 8년(1668)이다.
옛 이름은 落水臺였으나 陸士衡의 시 <招隱詩>에 나오는 “飛泉漱鳴玉 솟구쳐 나는 샘이 명옥을 씻어 내리네.”라는 글귀에 따라,
명옥대로 이름을 고쳤다 한다.
자연석 초석 위에 원형 기둥을 세우고 누마루를 설치하였는데,
정면 2칸 측면 2칸의 평면에 鷄子欄干을 두르고 4면 모두를 개방하여 주변 경관을 감상하기 좋게 하였다.
1920년경에 고쳐 재었다고 하는데, 거의 새로 지은 것이다.
內陣柱와 기둥 위에 남아있는 흔적으로 보아,
원래 뒤쪽 2칸은 방으로 꾸며져 있던 것을 후대에 지금과 같은 누마루 형식으로 개조한 것으로 보인다.
원형이 일부 상실되어 건축적 가치가 약하다.
맞은편 바위 표면 에 “명옥대”라고 새겨놓은 글이 남아있다.
왼쪽에 "蒼巖精舍", 오른쪽에 鳴玉臺"란 편액이 걸려있다.
"蒼巖"은 퇴계의 시 <鳴玉臺>에서 따왔다.
鳴玉臺
李滉
此地經遊五十年 韶顔春醉百花前 이곳에서 노닌 지 오십 년 젊었을 적 봄날에는 꽃 앞에서 취했었지.
只今儶手人何處 依舊滄巖白水懸 함께 한 사람들 지금은 어디 있는가? 푸른 바위, 맑은 폭포는 예전 그대로인데
白水蒼巖境益奇 無人來賞澗林悲 맑은 물 푸른 바위 경치 더욱 기이한데 완상하러 오는 사람 없어 계곡과 숲은 슬퍼하네.
他年好事如相問 爲報溪翁坐詠時 훗날 호사가가 묻는다면 퇴계 늙은이 앉아 시 읊던 때라 대답해 주오.
명옥대 사적비
● 태장재사
태자재사의 문화재재청 공식 명칭은 "이상루 고택"이다.
毋自欺 자신을 속이지 말라.
태장재사 台庄齋舍
■ 안동 김씨 台庄齋舍(경상북도 민속자료 제26호)- 안동시 서후면 태장동
齋舍는 학문과 덕행,
충효가 뛰어난 인물이나,
입향조, 중시조 등을 추모하는 제사를 지내기 위해 묘소나 祠廟 옆에 지은 집을 말한다.
제사를 지내기 위해 몸과 마음을 청결히 하고,
1년에 한 번 이상 자손들이 모여서 제사 지내는 곳이다.
안동 김씨 시조 태사 金宣平 공의 묘를 지키고 봉제를 하기 위한 재사이다.
조선 영조 26년(1750)에 후손들이 건립한 것이다.
∩자형 재사와 一자형의 이상루, ㄷ 자형의 관리사로 구성되어 있다.
재사에는 제수를 준비하는 유사실과 전사청, 참제원실이 있다.
재사는 민도리집의 간결하고 검소한 건물이며,
누는 이익공의 팔작지붕 건물로 누 상부는 3면에 판벽을 치고 판문을 설치하였다.
이상루는 묘제 후에 음복과 문중회의를 여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이 지역 재사 건물 가운데 비교적 규모가 크고 각 부분이 용도에 따라 명확히 구분되어 있다.
매년 음력 10월 10일에 묘제를 지낸다.
8세기 중엽인 경덕왕 때부터 안동은 古昌郡이라 했다.
조용하던 고을 안동은 후삼국기부터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다.
안동은 경주와 소백산맥 북쪽을 잇는 곳으로 이 지역을 차지하는 세력이,
후삼국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는 전략상으로 중요한 지점이었다.
초기의 왕건은 견훤의 세력을 꺾을 만큼 강하지 못하였다.
더구나 상주는 견훤의 출신 지역이라 개성을 근거로 한 왕건은 지역적 기반초차 약했다.
고려군은 팔공산 등지에서 후백제군에 패하여 안동으로 쫓겨와 다시 병산에서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때 이 지역 호족 김선평 · 권행 · 장길 등이 왕건 편을 들어 병산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왕건은 김평선을 大匡으로, 장길과 권행은 大相으로 삼아 등용하고,
동쪽을 편안하게 했다는 뜻으로 안동이라 이름을 바꾸고 군을 승격시켜 府로 삼았다.
그리고 안동을 삼태사의 식읍으로 주었다.
김선평은 안동김씨, 장길은 안동장씨의 시조가 되었다.
권행은 본디 김씨이나 ‘능히 일의 기틀을 밝게 살피고 권도를 적절히 결정하였다’는 치하와 함께 권씨 성을 내려주어 오늘날 안동 권씨의 시조가 되었다.
<高麗史>, 태조 13년 조에 이때의 사정을 기록하고 있다.
……12월에 견훤이 고창군(안동의 옛 지명)을 포위하므로 왕이 친히 가서 구원했다.
경인 13년 정월 병술일에 왕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고창군 병산에 주둔했으며,
견훤은 석산에 주둔하니 양군의 거리가 5백보쯤 됐다.
드디어 접전해 저물 때까지 계속됐는데 견훤이 패해 달아났다.
백제 시람 김악이 포로되고 전사자가 8천여명에 달했다.
.……경인일에 고창군 성주 金宣平을 大匡으로 임명하고 權幸 · 張吉을 大相으로 삼았다.
太師는 고려 시대, 임금의 고문을 맡은 정일품 벼슬을 말한다.
太傅, 太保와 함께 三師라 불렸는데 삼사 중중 가장 높은 벼슬이었다.
■ 태사묘(경상북도 기념물 제15호)는 안동시 북문동에 있다.
金宣平 ․ 權幸 ․ 張吉 등 세 고려 개국공신을 모신 곳이다.
고려 성종 때인 938년 처음으로 안동부사에서 제사지냈다.
조선 중종 37년(1540) 현재의 위치에 묘우를 짓고 위패를 봉안하였다.
광해군 5년(1613) 규모를 확대하고 太師廟라 이름지었다.
한국전쟁 때 불타고 1952년에 다시 지었다.
입구에 敬慕樓란 현판이 달린 누각이 있다.
보물각에는 삼태사의 유물(보물 제451호)이 있다.
김태사의 묘는 서후면 태장리, 권태사와 장태사의 묘는 서후면 성곡리에 있다.
묘소 근처에는 씨족들의 시조를 비롯한 조상들의 제사를 지내고 문중이 모여 의논하고 후학을 가르치는 재사 건물들이 있다.
안동 김씨의 齋舍 태장재사(경상북도 민속자료 제26호),
안동 권씨의 능동제사(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83호)는 서후면 성곡리에 있다.
● 涵碧堂 함벽당
함벽당은 높은 곳에 있다.
안내 표지판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 함벽당(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60호)은 안동시 서후면 광평리에 있다.
조선 명종 때의 折衝將軍 康希哲이 관직에서 물러난 후 지은 정자이다.
그 뒤 玉峰 權暐의 소유가 되었다가,
다시 함벽당 柳敬時(1666~ 1737)의 소유가 되었다.
함벽당은 全州 柳氏로 임동 水谷에서 태어났다.
숙종 20년(1694) 謁聖文科에 급제한 후 사헌부 장령과 여러 고을 수령을 거쳐 순천부사를 지냈다.
목민관으로서 청백리에 뽑혔다.
건립 연대는 17세기로 전해지고 있으나, 건물 양식은 약간 후대의 것으로 보인다.
류경시가 죽은 100여 년 뒤인 철종 13년(1862)에 대대적으로 수리한 것으로 보인다.
천등산 기슭에 있는데, 문을 들어서면 정자가 남향으로 앉아있다.
온돌방 3칸을 남향으로 배치한 후 어칸의 전면으로 2칸의 대청을 돌출시켜 T자 형의 평면을 수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