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포깍지길 1구간- 2020년 12월 28일
감포깍지길 1구간- 2020년 12월 28일
7시 41분 신해운대역 출발,
9시 20분, 경주역을 나왔다.
우체국 정류장에서, 150번 버스를 탔다. 9시 45분.
봉길리 정류장에 왔다., 10시 35분.
봉길 해수욕장에서 본 문무왕릉
자연 암석에 덮개돌이 남북으로 배치되어 있다. 덮개돌은 떨어져 나온 돌이다.
물이 들어오는 곳은 빠져나가는 곳보다 15cm쯤 낮아 물이 잘 빠져나간다.
대왕암은 문무왕의 시신을 화장한 뼈를 뿌린 산골처이다.
그런데 이 대왕암이 문무왕의 유골을 묻은 수중릉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는 박정희 군사정권이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여 정권안보에 이용하려는 생각에서 조작한 것이다.
1967년 신라 오악조사단이 대왕암을 통해 군사영웅사관을 조성하려했던 박정권의 요구에 따른 것이다.
유골 장치가 있다는 설은 본격적인 발굴 조사로 부정되었다.
<三國史記> 제7권 신라본기 제7 문무왕 21년 조에,
……왕 21년(682) 7월 1일에 돌아가시므로 시호를 문무라 하였다.
그리고 그 유언에 따라 동해 어귀[東海口]의 큰 바위에 장사지냈다.
세상에 전하기를 왕이 용으로 화하여 나라를 지킨다고 하여 그 바위를 가리켜 대왕석이라 하였다.
왕의 遺詔에 이르기를,
……"또한 산곡은 변천하고 인간 세대는 옮겨가니, 吳王의 북산 무덤에 어찌 금향로의 광채를 볼 수 있으며,
魏王의 서릉을 바라보는 것도 오직 동작대의 이름만 듣게 된다.
옛날에 만기를 다스리던 英王도 마침내 한 줌의 흙무덤을 이루어 초부와 목동은 그 위에서 노래 부르고,
여우와 토끼들은 그 곁에 구멍을 파고 있으니 이는 한갓 자재만 낭비하고 거짓만을 책에 남기며,
공연히 사람들의 힘만 수고롭게 만드니, 이는 幽魂을 오래도록 건지는 도리가 아니다.
고요히 이를 생각하면 마음이 상하고 아픔이 그지없을 따름이니, 이와 같은 것은 나의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임종한 뒤에 10일이 되면 곧 궁문 밖 뜰에서 인도의 의식에 따라 불로써 살라 장사지내라.
服禮의 경중은 본래부터 정한 법도가 있거니와 상례의 제도는 힘써 검약한 것을 좇아라.
변성을 지키는 일과 州 · 縣의 과세는 그것이 요긴하지 아니한 것은 마땅히 헤아려서 폐하도록 하고,
율령의 격식으로 불편한 것이 있으면 곧 편리하게 고쳐라.
원근에 포고하여 이 뜻을 알리고 주관하는 사람은 이를 잘 시행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가까이서 본 모습
여기서 시작한다. 10시 40분.
대종천을 띠리 간다.
언덕 위에 이견정이 보인다.
대종교를 지나,
"대본삼거리" 정류장
감은사터,
■ 감은사터(사적 제31호)는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 용당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신라 제30대 문무왕 김법민(661~681 재위)은 고구려를 정벌하였고,
통일 후 신라 땅을 차지하려는 당나라의 세력을 쫓아내고 실질적인 삼국통일을 완수했다.
삼국을 통일하고 당나라도 물리쳤지만 시시때때로 쳐들어와 괴롭히는 왜구는 큰 걱정거리였다.
그래서 문무왕은 스스로 축생의 업보인 동해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고 맹세하였다.
그리하여 생전에 직접 대왕암의 위치를 잡고,
대왕암이 바라보이는 용산당을 뒤로 하고 용담이 내려다보이는 명당인 이곳 감은사터에 절을 세워 佛力을 빌어 나라를 지키고자 했다.
그래서 나라를 더욱 굳게 지키고 왜를 진압한다는 鎭護國寺의 뜻인 鎭國寺를 짓게 되었다
그러나 절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재위 21년 만인 681년에 세상을 떠난다.
그 아들인 신문왕이 왕위에 올라 곧 부왕의 뜻을 받들어 이듬해(682년)에 절을 완성하여 “感恩寺”라 이름하였다.
불심을 통하여 나라를 지키겠다는 부왕의 뜻을 이어받는 한편 부왕의 명복을 비는 효심의 발로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감은사는 삼국통일의 기념탑이라 할 수 있다.
감은사는 종래의 평지가람에서 산지가람, 고신라의 일탑 중심의 가람 배치에서 쌍탑 일금당으로 바뀌는 최초의 절이다.
동서로 두 탑을 세우고, 이 두 탑 사이의 중심을 지나는 남북 선상에 중문과 금당, 강당을 세운 형태이다.
중문 남쪽에 석축이 있고, 석축 바깥쪽에는 용담이라는 못이 있다.
용담은 금당의 마루 밑 공간과 연결되어 있으며, 동해 바다와도 연결 되어 있다.
동해의 용이 된 문무왕이 이 절로 드나들 수 있게 한 것이다.
감은사 창건당시에는 대종천이 아주 가까이 있었다.
경덕왕(742~765 재위) 때의 기록에는 바닷물이 불전 바로 앞까지 들어왔다고 한다.
조선 성종 12년(1481)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는 절이 존재한다고 하였고,
정조 23년(1799)에 편찬된 <범우고>에는 폐사된 것으로 나와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조선 중기에 폐사된 듯하다.
"감은사는 자생 풍수의 전형이다. 대종천 하구에서 육지를 바라보면 용이 바다를 향해 입을 벌리고 있는 형상이다.
그 입을 통해 왜구들이 들락거렸다. 이때 바다의 양쪽 산은 용의 입술, 경주쪽 계곡은 용의 목에 해당된다.
대종천 양안인 용당리와 봉길리의 산들은 용의 이빨이다.
삼층석탑 2기는 용의 이빨을 더욱 날카롭게 만들기 위한 어금니 또는 송곳니에 해당한다.
용이 입을 다문다면 왜구들이 씹힌다. 왜구의 배들과 도적떼를 감은사지의 용이 씹어 삼킨다면 만사는 평안해진다.
이것이 바로 우리식 풍수의 원형이랄 수 있는 풍수비보책이다.
이런 해석으로 문무왕이 용이 되려는 사연,
근처에 용자가 들어간 지명이 많은 점, 바다와 통하는 특수한 구조, 삼층탑의 입지, 배경 등이 밝혀진다."
최창조, <한국의 자생풍수>, 민음사 1997 1권 101~103쪽.
감은사터 동서삼층석탑
* 감은사터 동 · 서 삼층석탑(국보 제112호)
절의 金堂 앞에 동서로 마주 보고 있는 이 두 탑은 신문왕 2년(682)에 축조된 것으로 연대가 확실한 통일신라 초기의 탑이다.
또 신라시대의 작품으로 현재 남아 있는 것 중 가장 크다. 전체 높이는 13m이고, 刹柱의 높이가 3.9m나 된다.
삼국통일의 힘찬 기상을 표현한 탑으로서, 장중하면서도 질박하며 안정감과 상승감이 뛰어난 탑이다.
기단은 2층의 건축 기단을 하고 있는데, 단층기단이었던 삼국시대의 석탑에서 2층기단으로 바뀐 것은 이 탑이 최초이다.
상하층 각면에는 모서리기둥[隅柱]과 버팀기둥[撐柱]을 세워 목조건축의 軸部를 모방하였다.
몸돌[塔身部]에도 양쪽 모서리기둥을 새겨 역시 목조건축을 모방하고 있다.
지붕돌[屋蓋石]은 폭이 줄어들었고, 추녀 밑은 轉角에 이르기까지 직선을 이루었으며,
지붕돌받침은 5단의 층이 마련되어 있는 등 전탑의 양식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지붕 윗면[落水面]이 층을 이룬 전탑과는 달리 유연한 경사를 이루었고,
전각에는 反轉이 뚜렷하여 목조건축의 지붕을 모방하고 있다.
기단부와 몸돌의 각 부분은 한 개의 돌이 아니라 여러 개의 돌로 짜 맞추었다.
하층기단은 지대석과 면석을 같은 돌로 다듬어 12매의 돌로 구성하였으며 덮개돌[甲石]도 12매이다.
기단 양쪽에 모서리기둥이 있고 가운데 버팀기둥이 세 주씩 있다.
상층기단 면석 역시 12매, 덮개돌은 8매로 구성되어 있으며 2개의 버팀기둥이 있다.
탑신부의 1층몸돌은 모서리기둥과 면석을 따로 세웠으며,
2층몸돌은 각각 한쪽에 모서리기둥을 하나씩 조각한 판석 4매로, 3층 몸돌은 1석으로 구성하였다.
각층 지붕 윗면과 층급받침은 각기 따로 조립되었는데 각각 4장의 돌이므로 결국 8장의 돌로 구성된 것이다.
층급받침은 각 층 5단이고 지붕윗면 정상에는 2단의 높직한 굄이 있으며 윗면 끝은 약간 위로 들려져 있다.
상륜부에는 1장으로 만들어진 노반석이 남아 있고, 현재 3.9m의 쇠 刹柱가 노반석을 관통하여 탑신부에 꽂혀있다.
■ 감은사터 동서 삼층석탑에서 비롯된 전형양식은 이후 우리나라 석탑의 정형으로 정립되었다. 시대에 따라 부분적으로 다소 변화가 가해지기는 하지만 오랫동안 우리나라 석탑 양식의 표본이 되었다.
장대석에 있는 태극무늬
"太極"이란 말은 <周易 繫辭上傳>에 처음 나온다. 그러나 주역에는 태극도형 그림이 없다.
송나라 때 濂溪 周敦頤(1017년~1073)가 <太極圖說>을 발표하면서 태극도형이 이루어졌으며,
송대 성리학의 연원이 되었다.
감은사의 태극도형은 이보다 400년 앞선다.
이로보아 일찍부터 태극과 관련이 있는 음양사상에 대한 이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용당
대종천이 동해로 드는 동해구
* 대종천은 양북면 권이리 북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 권이리, 용동리를 지나며 용동천이라 불린다.
다시 외동읍 능골에서 기림사 서북쪽 계곡에서 발원한 호암천과,
탑정 서남쪽 계곡에서 발원한 장항천을 합하여 남동쪽으로 흘러 비로소 대종천이란 이름을 얻는다.
양북면 봉길리와 감포읍 대본리 사이에서 동해로 들어간다.
대종천 하구 일대를 동해구라 했다.
古山子 金正浩(1804?~1866?)의 <大東輿地圖>에는 대종천이란 말은 없고 東海川이라 했다.
이로보아 '대종천'이란 말은 일제강점기 일인들이 행정구역 개편이란 명목으로 바꾼 것으로 보인다.
고려 고종 25년(1238년) 몽고의 침략으로 황룡사구층탑이 불탔다.
황룡사에는 성덕대왕 신종보다 네 배가 넘는 100톤에 가까운 큰 종이 있었는데,
몽고군들이 이 종을 탐내어 자기 나라로 가져가기로 하고 토함산 너머의 하천 대종천까지 옮겨왔다.
그러나 종을 실은 배가 대종천에 뜨자 갑자기 폭풍이 일어 종과 배는 바다 밑에 가라앉았다.
그 뒤 풍랑이 심하게 일면 대종 우는 소리가 동해 일대에 들렸고,
최근까지도 주위 마을 해녀들이 대종을 보았다 하여 탐사하였으나 찾지 못했다.
풍랑이 일 때 울리던 종소리의 주인공은 황룡사의 종이 아니라 감은사 종으로 조일전쟁 때 왜병이 빠뜨린 것이라는 설도 있다.
황룡사 범종은 몽골 침입 때 군수품으로 징발하여 이를 녹여 무기로 만들었을 것이다.
감은사터에서 가파른오르막을 올라,
뜸북재를 넘어
이견대 · 이견정
* 利見臺(사적 제159호)는 경주시 감포읍 대본리에 있다.
동해 바다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고 한 문무왕이 용으로 변한 모습을 보였다는 곳이며,
또 그의 아들 신문왕이 682년 5월 동해의 호국룡이 된 문무왕과 삼십삼천의 아들로 태어난 김유신에게서,
나라를 지킬 보물 萬波息笛을 얻었다는 곳이다.
신문왕이 부왕을 사모하여 축대를 쌓아 만들었다.
이견대라는 이름은 <周易>의 “飛龍在天 利見大人 나는 용이 하늘에 있으니 이익이 대인을 보는 것 같다”라는 말에서 따온 것이다.
현재의 정자는 1970년 발굴조사 때에 드러난 주춧돌에 근거하여 최근에 세운 것이다.
이견대에서 본 문무왕릉
東海口
문무왕릉
봉길해수욕장에 그 많던 갈매기들이 어디로 떠났나 했더니, 모두 여기 와 있었구나.
감포깍지길 1구간은 해파랑길 11구간과 거의 같다.
가곡제단과 할배 할매 소나무
400살 잡순 부부 소나무가 시들어 걱정이다.
길따라 가다가 이런 철망에 막혔다. 간신히 철망을 넘었다.
평화의 울림 조형물
2019년 8월에 조성했다고 한다.
"바다가 육지라면" 노래비
그런 대중가요가 있었던 것 같다.
나정해수욕장
나정 인도교
빨간 등대와 하얀 등대
뭍에서 보면 빨간 등대는 왼쪽, 하얀 등대는 오른쪽에 있다.
배도 자동차처럼 오른쪽으로 통행한다.
바다로 나가는배는 뭍의 오른쪽 하얀 등대에 붙어 나가고,
들어오는배는 바다의 오른쪽 빨간 등대에 붙어서 들어온다.
용굴 가는 길,
가파른 덱 계단을 한참 올라갔다가 다시 바닷가로 내려가야 한다.
이렇게 계단이 끊어졌다. 지닌 여름 태풍 탓일게다.
줄에 매달려 내려오고, 올라갔다.
용굴
덱 난간이 이렇게 무너졌다.
해파랑길, 담포깍지길에는 고칠 의지가 아예 없는 것 같다.
감포항이 저만치 보인다.
전촌1리 거마정
감포읍
3시 55분에 감포공설시장 정류장에왔다.
경주 가는 100-1번 버스는 4시 15분에 왔다.
5시 15분, 경주 고속버스 터미널에 왔고,
5시 30분 출발 고속버스를 타고 돌아왔다.
오늘 15.5km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