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제3권 탑상 제4 황룡사 장육조에,
신라 제24대 진흥왕이 즉위한 14년 계유(553) 2월에 장차 용궁 남쪽에 대궐을 지으려 하니,
황룡이 그곳에 나타나므로 이것을 고쳐서 절을 삼고 이름을 황룡사라 하고,
기축년(569)에 이르러 담을 쌓아 17년만에 완성했다.
그후 얼마 안되어 바다 남쪽에 큰 배 한 척이 나타나서 하곡현 絲浦(지금의 울주 곡포)에 닿았다. 이 배를 검사해 보니 공문이 있는데 쓰기를,
“서축 아육왕이 누른 쇠 5만 7,000근과 황금 3만 푼을 모아 장차 석가의 존상 셋을 부어 만들려고 하다가 이루지 못해서 배에 띄우면서 빌기를, 부디 인연있는 국토로 가서 장육존상을 이루어 주기를 바란다.” 했고,
부처 하나와 보살상 둘의 모형도 함께 실려 있었다.
현의 관리가 문서를 갖추어서 보고하자 왕은 사자를 시켜 그 고을 성 동쪽의 높고 깨끗한 땅을 골라서 동축사를 세우고 세 불상(부처와 보살상 둘의 모형)을 편안히 모셨다.
그리고 그 금과 쇠는 서울로 보내서 太建 6년 갑오(574)에 장육존상을 부어 만들었는데,
공사는 금시에 이루어졌으며, 이 장육존상을 황룡사에 모셨다.
……別本에는 이렇게 말했다.
아육왕은 서축 대향화국에서 부처님이 세상을 떠난 후 100년 만에 태어났다.
그는 부처님께 공양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겨 금과 쇠 몇 근씩을 모아서 세 번식이나 불상을 부어 만들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이때 왕의 태자가 홀로 그 일에 참예하지 않으므로 왕은 그 까닭을 물었더니,
태자가 아뢰기를 ‘그 일은 혼자의 힘으로 성공하지 못할 것을 저는 벌써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왕은 그 말을 옳게 여겨 그것을 배에 실어 바다에 띄웠더니,
그 배는 남염부제(남인도)의 16개 큰 나라와 500의 중국(불경에 나오는 숫자 인용),
10천의 소국, 8만의 촌락을 두루 돌아다니지 않는 곳이 없었으나 모두 불상을 부어 만드는 일에 성공하지 못했다.
최후로 신라국에 이르러 진흥왕이 文仍林(지명, 소재는 미상)에서 이것을 부어 만들어 불상을 이루니 좋은 모양이 다 이루어졌다. 아육왕은 이래서 근심이 없게 되었다.
……불상이 이루어진 뒤에 동축사의 삼존불도 역시 황룡사로 옮겨 안치했다.
<사기>에는 이렇게 말했다.
“진평왕 5(6)년 갑진년(584)에 이 절의 금당이 이루어지고, 선덕왕 때에 이 절의 첫 번째 주지는 진골 歡喜師였고, 제2대 주지는 자장국통……”,
이제 兵火(몽골의 참략)가있은 이후로 大像과 두 보살상은모두 녹아 없어졌고,
작은 석가상만 남아 있을 뿐이다.
인도 마가다 국의 제3왕조인 마우리아 왕조의 제3대 Ashoka왕을 한자문화권에서는 阿育王이라 한다. 대략 BC 265경~238년 사이에 왕위에 있었다. BC 273경~232년 사이라는 학설도 있다. 인도사상 최초의 통일국가를 이룬 왕이다.
동축사는 신라 진흥왕 34년(573) 왕의 명으로 인도의 아소카왕이 보냈다는 1불2보살상 모형을 봉안하기 위해 창건했다.
창건 이후 경순왕 8년(934)에 중창하였고,
고려 정종(1035~1046) 때 중건,
세조 3년에 한 차례 중창하였으며,
1931년 중수하였다.
1975년 정주영의 시주를 얻어 건물을 중수하고 범종각을 신축하여 6백관에 달하는 범종을 봉안하였다.
다선실 서향각을 지나면 대웅전이 있다.
대웅전 좌우 전방에 무량수각과 요사채, 좌우 후방에 삼성과 범종각이 있다.
대웅전 앞에는 근래에 세운 5층석탑이 있다. 이 자리에는 본디 고려시대 삼층석탑이 있었으나 파손이 심하여 서편 언덕으로 옮기고 1977년 화엄사 오층석탑을 본떠 석탑을 조성한 후 대흥사주지 박영희 스님이 얻어온, 소동파가 출가 수행중 모시던 부처님 진신사리 2과를 얻어 탑 속에 봉안하였다.
서쪽 숲속에는 고려시대 삼층석탑과 <동축사사적비>, <국태민안오층석탑사적비>, <동축사중창공덕비> 등 4기의 비가 있다.
절 뒤 마골산에는 觀日臺라는 바위가 있다.
해뜨는 경치가 좋아 정만양이란 사람이 이름지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