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문화유산 답사- 2020년 1월 11일
경주 문화유산 답사 - 2020년 1월 11일
-망덕사지~ 사천왕사지~ 선덕여왕릉~ 황복사지~ 진평왕릉~ 동부지구 사적지~ 대릉원-
7시 41분 신해운대역 출발 기차를 타서,
불국사역, 9시 10분.
9시 25분, 구정노타리 정류장
9시 35분, 갯마을 앞 정류장
버스 안내 방송에서는 "보리사 입구"라 했다.
장사 벌지지
■ 長沙 伐知旨
화랑교 남쪽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고 “長沙 伐知旨”라는 입석이 있다. 이 일대를 ‘양지버들’, 주변의 모래밭을 ‘장사’라 한다.
박제상의 부인이, 남편이 고구려로 가서 눌지왕의 동생 보해를 구출하고,
다시 왜국에 볼모로 가 있는 미해를 구하기 위하여 집에도 들르지 않고 바로 왜국으로 향하여 출발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아내는 생전의 남편을 한번이라도 더 만나보기 위하여 뛰어갔으나 따라가지 못했다.
절망에 빠진 아내는 망덕사 문 남쪽 모래 위에 길게 들어누워 통곡을 했다. 그래서 이 모래벌을 장사라 한다.
또 부인의 친척 두 사람이 달려와서 부인을 부축해 일으키려 하였으나 뻗친 부인의 다리가 움직이지 않아 일으킬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곳의 지명이 ‘伐知旨’가 되었다. ‘뻗치다’의 음을 한자로 기록한 것이다.
지금은 ‘양지버들’이라 부르는데 ‘양지뻗음’이 전음된 것이다.
망덕사터(사젹 제7호)
망더사지 당간지주
목탑터
사천왕사터(사적 제8호)
사천왕사터 당간지주
목탑터
절터 뒤쪽에 있는 이 철도는 일제강점기에 건설되었다.
먼 옛날 사천왕사가 호국을 위한 절임을 알고 이렇게 절터를 두 동강이로 냈다.
이런 예는 또 있다.
무열왕릉과 김인문의 묘를 국도를 낸다는 명분으로 반으로 갈랐고,
월성과 동궁과 월지를 갈라 놓았다.
이렇게 일제는 한민족의 정기를 끈었다.
낭산(사적 제163호)은 경주시 보문동, 구황동, 배반동 일대에 걸쳐있는 높이 104m 안팎의 세 봉우리로 이루어진 펑퍼짐한 산이다.
낭산은 남북에 봉우리가 있어 마치 누에고치처럼 생겼다.
명활산과 토함산, 선도산, 소금강산으로 둘러싸인 경주시의 한 가운데 있다.
이 낭산은 신라 때부터 神遊林, 즉 신령스런 산으로 숭앙받았다.
<三國史記>에 의하면 실성왕 12년(413년) 8월에 구름이 낭산에 일어났는데,
구름이 누각같이 보이고 사방에 아름다운 향기가 퍼져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하늘의 신령이 내려와서 노는 것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한 왕은 낭산은 신령스러운 곳으로 여겨 나무 한그루 베지 못하게 하였다.
신라인들은 낭산을 중심에 두고 사방으로 하천을 팠고 주위의 산들까지도 불교의 우주관에 입각한 의미를 부여하였다.
그들은 모든 산봉우리에 불, 보살의 이름이나 불교의 사상을 담은 용어들로 바꾸어 불렀다.
그리고, 그 산 속 모든 곳을 부처님이 상주하고 부처님이 숨쉬는 도량으로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낭산 주변의 대표적 유적지로는 진평왕릉, 선덕왕릉, 신문왕릉, 효공왕릉,
문무왕의 화장터로 알려진 능지탑 등 신라시대 왕들의 무덤과, 사천왕사, 망덕사, 황복사, 중생사 등이 있는데,
이 절들은 호국이나 왕실의 복을 빌었던 곳이다.
백결선생이 살았던 곳이고, 최치원의 고택 독서당도 북쪽 산허리에 있다.
선덕여왕릉(사젹 제182호), 10시 15분.
■ 선덕여왕릉(사적 제182호)은 경주시 보문동 낭산 꼭대기에 있다.
둘레 73m의 원형토분으로, 자연석을 이용해 봉분 아래 2단의 보호석을 쌓았다.
십이지신상 조각이 있을 자리에 큰 돌들이 세워져 있다.
능을 둘러싼 소나무들이 무덤 쪽으로 돌려 서 있어 무덤을 호위하는 것처럼 보인다.
신라 제26대 진평왕(재위 579~631)과 제27대 선덕여왕(재위 632~647)
진평왕의 이름은 白淨(석가모니 아버지의 이름),
왕의 첫째 비는 麻倻夫人(석가모니의 어머니),
둘째 비는 勝鬘부인(석가모니 당시 사위국 파사익왕의 딸로 <승만경>을 설한 승만부인)이다.
후비로 花明과 玉明이 있었는데, 이들은 4세 풍월주 二花郞의 딸이다.
마야부인은 덕만과 천명 두 딸을 낳았다. <화랑세기>에 따르면 승만부인에게 아들이 있었으나 일찍 죽었다고 하였다.
진평왕의 동생 眞正葛文王 白飯과 眞安葛文王 國飯도 석가모니의 아버지 정반왕의 동생 白飯과 斛飯에서 각각 따왔을 것이다.
善德은 제석천왕이다.
제석천왕은 도리천의 善法堂에 거주하면서 선악을 주재함으로서 善德으로 상징되었다.
강인구 역주 <삼국유사>
왕족은 자신의 출신신분을 남들과 구별하기 위하여 종교적으로 불교적으로 성화하여 신성가족이라는 골품상의 관념을 세웠다.
왕족들은 인도 사종성의 왕족계층인 크샤트리아라 한 것으로 보아 불경에 나타나는 진종설을 그대로 가져 온 것이다.
선덕여왕은 신라 최초의 여왕이다.
이름은 德曼, 진평왕의 맏딸, 어머니는 摩耶夫人이다.
<삼국사기 권 제5>에 “성품이 實仁하고 事理에 밝고 민첩하였다.
진평왕이 아들이 없어 나라사람들이 덕만을 임금으로 세우고 聖祖皇姑라는 호를 올렸다.”라는 기록이 있다.
재위 16년간 당대 동아시아 최고 외교관 김춘추, 뛰어난 전략, 전술가인 김유신 등을 거느리고 삼국통일의 기초를 마련한다.
신라 최대의 사찰 황룡사 구층목탑을 지었으며, 분황사, 첨성대 등 문화적으로도 뛰어난 업적을 이루었다.
진평왕과 선덕여왕 시기는 삼국 간의 전쟁이 한창인 시기이다.
그러나 고신라의 유물들은 거의 대부분 진평왕과 선덕여왕 때 만들어진 것이다.
금동미륵보살 반가상(국보 제83호), 선방골 삼존불은 진평왕 때의 유물로 추정되며, 황룡사 9층탑, 분황사, 첨성대, 삼화령 애기부처, 부처골 감실 석불좌상은 선덕여왕 시절의 유물이다.
또한 원광법사는 진평왕 때, 자장율사, 원효대사, 의상대사는 선덕여왕 때 사람이다.
※ 신라의 문화가 발전하고 강성해지는 것은 법흥왕(재위 514~539)이 불교를 지도 이념으로 삼아 발달된 종교의 힘으로 사상체계를 정비하고,
진흥왕(재위 540~575)이 영토를 확장해서, 그것이 바탕이 되어 그후 삼국간에 벌어지는 통일전쟁에서 무열왕(재위 654~660)의 승리로 이어진다.
여왕의 능이 낭산에 있는 이유를 <삼국유사>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왕이 무병할 때 群臣에 이르기를 ‘내가 某月 某日 죽을 터이니, 나를 忉利天中에 묻으라.’하였다. 군신들은 그곳을 알지 못하여 어디냐고 물으니, 왕이 狼山 남쪽이라 하였다. 그달 그날에 이르러 과연 왕이 돌아가매 낭산 남쪽에 제사지냈다. 왕이 돌아가시고 32년이 지난 文虎(武)대왕이 四天王寺를 왕릉 아래 세웠다. 불경에 사천왕천의 위에 도리천이 있다고 하였으니 비로소 대왕이 靈聖한 것을 알게 되었다.”
(삼국유사, 권 1, 善德王 知幾三事)
도리천은 욕계의 제2천으로 須彌山 꼭대기에 있으며 帝釋天王이 다스리는 세계이다.
이 도리천을 하늘 위에 있는 것으로 상상하고 있었던 신하들은 여왕의 분부를 듣고 어리둥절해 하기만 했다.
이에 여왕은 그곳이 낭산의 남쪽 봉우리라 하였으며, 그리하여 사람들은 여왕의 능을 지시한 곳에 만들게 된다.
여왕이 죽은 지 32 년만에 그 능의 아래쪽에다 사천왕사를 짓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때서야 여왕의 예지에 탄복을 하였다.
사천왕이 거주하는 사왕천은 욕계의 제1천으로서 수미산의 중턱지점 4방에 위치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선덕여왕은 자기 무덤 아래 사천왕사가 지어질 줄 알았다는 것이 된다.
그 뒤 신라인들은 이 낭산을 수미산으로 보았다.
불교의 우주관을 전개시킬 때 세계의 중심에 두었던 수미산이 곧 낭산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들의 낭산을 중심으로 한 세계중심사상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선덕여왕지기삼사는 이념적인 면에서 여왕의 통치를 정당화하는 이야기이다.
※ 선덕여왕의 남편은?
<삼국유사> 권1 왕력 10편에 선덕여왕의 배필은 飮葛文王이라는 기록이 있다.
서울대 노태돈교수는 ‘갈문왕은 여왕의 남편이나 왕의 아버지에게 주는 尊號’로 해석하였다.
‘飮’이 누군지는 알 수 없으나, ‘飮’과 같은 듯으로 쓰인 ‘飯’은 둘이 있다.
伯飯, 國飯이다. 백반은 선덕의 삼촌이고 진덕의 아버지이다.
<화랑세기>에는,
“13세 풍월주 용춘은 진지왕의 아들로 용수의 동생이다.
용춘은 아버지인 진지왕이 폐위돼 幽宮에 3년간 살다가 죽었는데 어렸기 때문에 아버지의 얼굴을 잘 몰랐다.
용춘의 어머니인 지도태후가 진평왕(그녀에겐 아주버니의 아들이므로 장조카)을 섬기자 용춘은 진평왕을 아버지라고 불렀다.
당시 진평왕이 아들이 없어 사촌동생인 용수를 사위로 삼으려고 했다.
용수가 사양했으나 진평왕의 비인 마야부인이 허락하지 않고 끝내 사위로 삼으니 천명공주의 남편이 되었다.
천명공주는 진평왕의 딸이자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어머니이다.
또 선덕공주가 점점 자라 임금의 자질을 갖추자 진평왕은 그녀로 왕위를 이으려고 용춘을 사위로 삼았다.
그러나 후사가 없자 용춘이 물러났다.
이에 진평왕은 용수에게 또 선덕공주를 모시도록 했으나 역시 후사가 없었다.
그 무렵 마야부인이 죽은 후 僧滿皇后가 진평왕의 비가 돼 아들을 낳아 선덕을 대신해 왕위를 잇고자 했으나 불행히도 그 아들이 일찍 죽어버렸다. 그런 연유로 승만황후가 용춘형제를 미워하자 용춘은 전장에 나가버렸다.
그는 고구려에 출정하여 큰 공을 세운 후 승진하여 각간(신라 17관등의 1위)에 봉해졌다.
한편 선덕공주가 왕위에 오르기 전 용수가 임종에 이르러 부인과 아들을 동생인 용춘에게 맡겼다.
그 아들이 바로 김춘추이고 부인은 천명공주였다.
선덕공주는 왕이 되자 공주일 때 남편이었던 용춘을 다시 남편으로 삼았다.
그러나 이번에도 자식이 생기지 않자 용춘이 스스로 물러났다.
이에 군신들이 삼서제(사위를 3명 두는 제도)를 만들어 흠반공과 을제공으로 하여금 선덕여왕을 모시도록 했다.
三婿制는 한 여자가 세 남자를 들인다는 뜻이다.
여왕의 삼서는 용춘, 欽飯, 乙祭다.
이 제도의 첫 시행자는 선덕여왕이었다.
여왕이 탄생했기 때문이다. 남자 왕이 여러 후궁을 거느리는 것과 같다.
용춘은 선덕여왕의 남편의 자리에서 물러나 형수인 천명공주를 아내로 삼고,
태종 김춘추를 아들로 삼았고 진덕여왕 원년(647)에 7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화랑세기>의 이러한 기록을 따져보면 선덕여왕이 즉위하기 전 공주로 있을 때,
첫번째 남편이 용춘이고 두번째 남편이 그의 형인 용수였으며, 또 선덕공주가 왕으로 즉위한 후 다시 용춘을 남편으로 삼은 것도 알 수 있다.
또 중혼제, 형사취수제 같은 유습이 신라 중기까지 남아있었음도 알 수 있다.
‘飮’과 ‘欽飯’의 欽의 유사성으로 음갈문왕이 흠반일 수도 있다.
당시 왕실에선 이미 성골 남자가 없었기에 진평왕으로서는 용수나 용춘의 아들을 왕으로 삼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 아들이 29대왕인 김춘추였다.
그런데 삼국유사 이 부분에 대해 일본역사학자 히로나카 요시오(弘中芳男)씨는 지난 1991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용수와 용춘은 형제지간이었으며 용춘이 문흥갈문왕이고 용수는 음갈문왕이다’고 밝혔다.
역사학자 이종욱(서강대교수)씨와 이강래(전남대교수)씨도 용수와 용춘을 형제지간으로 분류하고 있다.
다음은 삼국유사의 기록이다.
‘제27대 선덕여왕 이름은 덕만이다. 아버지는 진평왕, 어머니는 摩耶夫人 김씨다.
성골의 남자가 끊어졌으므로 여왕이 즉위했다. 왕의 배필은 음갈문왕이다.’(권1, 왕력 10),
29대 태종대왕의 이름은 春秋요, 성은 김씨이고 용수(혹은 용춘이라고 함)角干을 추봉한 문흥대왕의 아들이요,
어머니는 진평대왕의 딸 天明夫人이다.‘(권1, 태종춘추공)
이처럼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모두 용수와 용춘은 동인이명이라는 것이다.
화랑세기에 三婿制라는 것이 있다. 한 여자가 세 남자를 들인다는 뜻이다.
이 제도는 선덕여왕이 첫 시행자였다. 여왕이 탄생했기 때문이다. 남자 왕이 여러 후궁을 거느리는 것과 같다.
여왕의 삼서는 용춘, 欽飯, 乙祭다.
모란꽃 이야기는 삼서제의 설화적 변형이다. 향기는 열매(아들), 씨는 종자(남자), 세 되(남자 3명 곧 삼서)
황복사터, 11시 5분
황복사터 삼층석탑(국보 제79호)
황복사터 금제 금제 여래좌상(국보 제79호)과 금제 입상(국보 제80호)
■ 황복사터는 경주시 구황동 보문평야에 있다. 이 마을이름이 강선마을이다. 낭산의 선녀가 내려왔다는 곳이다.
1937년 낭산 동쪽 기슭에서 일본인이 수집한 기와 조각 뒷면에 ‘皇福寺’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 삼층석탑이 서 있는 이곳을 皇福寺 터로 추정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 탑을 황복사터 삼층석탑이라고 하고, 그냥 이곳 지명을 따서 九黃里 삼층석탑이라고도 한다.
1968년 신라삼산오악조사단이 발굴 · 조사하였지만 절의 전체모습은 밝혀지지 않았다.
1943년 탑을 해체 수리할 때 2층 지붕돌에서 사리함이 발견되었는데 사리함 표면에 99개의 소탑이 새겨져 있고, 안에는 금으로 만든 여래좌상, 여래입상, 유리구슬, 팔찌, 금실, 사리 4알 등이 있었다.
사리함 뚜껑 안쪽에 있는 명문에 따르면, 석탑은 692년에 신문왕이 돌아가자 곧 효소왕이 즉위하여 그 원년(692)에 효소왕이 부왕 신문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웠다.
그후 702년 효소왕도 돌아가자 효소왕의 동생 성덕왕이 왕 5년(706)에 이미 있던 탑에 불사리 4알, 순금아미타상 1구, <무구정광대다라니경> 1권을 안치하여 돌아간 3왕(신문왕, 신덕왕후, 효소왕)의 명복을 비는 동시 현재의 왕과 왕후의 수복과 왕의 내외권속의 번영을 빌기 위하여 세웠다.
의상대사(625~702)는 19세 때인 643년 이곳에서 출가한다. 그렇다면 이 절은 선덕여왕 때부터 있었을 것이다. 본디 작은 절로 있던 것을 뒤에 크게 중창하여 왕실의 원찰로 삼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의상이 황복사에 있을 때 여러 무리들과 탑을 돌았는데, 항상 허공을 밟고 올라가 층계를 밟지 않았으므로 그 탑에는 계단을 설치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있다.
여래좌상의 높이는 12.2cm, 여래임상의 높이는 14cm이다.
여래좌상 입상 뒷면
낭산 추정 고분지 미완성왕릉 석재
진평왕릉(사적 제180호), 11시 45분
여기서 버스를 탔다., 12시 35분.
월성동 주민센터 정류장, 12시 45분.
동궁과 월지 연꽃단지, 12시 50분
월성입구, 1시
월성 해자
동부지구 사적지
핑크뮬리 쥐꼬리새
대릉원, 1시 40분.
미추왕릉
대릉원 후문, 2시 5분.
고속버스 터미널, 2시 5분.
2시 30분 출발 버스를 타서,
3시 20분, 노포동 터미널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