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보여행/도보여행 후기

낙안읍성 · 태백산맥 문학 기행길- 2019년 12월 23일

추연욱 2019. 12. 24. 13:04



낙안읍성 · 태백산맥 문학 기행길- 2019년 12월 23일




부산 서부 터미널에서 7시에 출발하는 순천, 완도까지 가는 버스를 타서,


10시 25분, 벌교 공용버스 터미널에 왔다.




10시 30분 출발, 낙안읍성 가는 버스가 있어,

10시 50분, 낙안읍성에 왔다.




낙안읍성마을(사적  제302호)









동문 앞 평석교 양쪽에 서 있는 개 석상 중 하나이다.

풍수지리상  험한 오봉산의 기운을 막기 위해 비보용으로 세웠다 한다.

본디 세마리였는데, 한 마리는 언젠가 사라지고 두 마리만 남아있다.



낙안읍성 동문 樂豊樓







낙안읍성 마을(사적 제302)

순천시 낙안면 동내리 · 서내리 · 남내리에 걸쳐 있다.

낙안읍성은 금전산의 남쪽 기슭 아래 펼쳐진 낮은 구릉을 포함한 평지에 동서 방향으로 긴 장방현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다.

넓은 낙암벌 너머로 북쪽은 금전산,

동쪽은 오봉산과 제석산,

서쪽은 백이산,

남쪽은 백이산 줄기에서 떨어진 옥산이 마을을 감싸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땅이 넓고 백성이 많이 살며 한 지방이 평평하게 뻗쳐 있어 남방의 형승지로는 이곳이 제일이다하였다.


현재 성곽의 전체 길이는 1,410m, 높이는 4m, · · 남 세 곳에 성안 큰 도로와 연결된 문이 있고, 치성이 네 군데 있다.

지름 1~ 2m쯤 되는 커다란 자연석으로 성곽을 쌓았는데,

아래쪽은 큰 돌을 쌓으면서 틈마다 작은 돌을 쐐기박음하였으며, 위쪽으로 갈수록 작은 돌을 썼다.

 

읍성 안은 동문에서부터 서문 쪽으로 난 큰 도로가 마을을 관통하고 있으며,

남문에서 진입하는 도로가 동서 도로와 중간 지점에서 만나면서 T자형을 이룬다.

마을을 관통하는 동서 방향의 북쪽에는 동헌과 객사를 비롯한 관아 건물이,

남쪽에는 민가들이 자리하고 있으며, 두 도로가 만나는 지점에 시장이 형성되어 있다.

읍성의 동문은 일반인의 생활 출입문이었고, 남문은 관아의 정문으로 공식적인 출입구였을 것이다.

 

낙안읍성은 조선 태조 6(1397)에 흙으로 쌓았다고 한다.

이후 1424년부터 여러 해에 걸쳐 돌로 다시 쌓아 성의 규모가 커졌는데,

<세종실록>에 따르면 당시 둘레 2865,

높이 9.5,

여장이 420개로 높이가 2.5,

옹성 없이 문이 세 곳이었고,

적대는 4개였다.

성 안에는 우물과 연못 각각 2개가 있었으며 성밖의 해자는 만들지 않았다.

이후 옹성이 설치되었고, 그뒤 언젠가 여장은 모두 무너졌다.


전설에 따르면 낙안읍성은 조선 인조 4(1626)낙안군수로 부임한 임경업 장군이,

마을 뒤 금전산 바위들을 큰 칼로 잘라내 하루만에 쌓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아마도 임경업 장군이 벌인 개축공사가 그의 공적과 뒤섞여 과장되어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마을 한가운데에는 임경업 장군 선정비가 있으며,

마을 사람들은 임장군을 마을의 수호신으로 삼고 해마다 정월 보름날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마을제를 지낸다.


읍성은 고려 말에 처음 등장해 조선 초기에 널리 퍼진다.

우리나라에만 있는 특이한 형태의 성으로,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179개 읍성이 기록되어 있다.

 































































금전산이 보인다.




읍성 안 마을길을 좀 걸어 성곽으로 오르는 길을 찾았다.






낙안읍성 남문 雙淸樓




















뒤돌아 본 쌍청루

































멀구슬나무




낙안읍성 서문















碑 받침인 것 같은데, 비는보이지 않는다.


























500년 된 푸조나무, 이순신 장군이 심었다고 전한다.




동문 낙풍루


















성곽길을 내려와 마을길 중앙대로를 따,라,간다.





임경업 선정비




"郡守林公慶業善政碑"

"崇禎元年四月"


"崇禎"은 明의 毅宗, 崇禎帝((1628~ 1644)의 연호.

숭정 元秊은 1628년, 조선 인조 2년





























내아













관아의 정문 낙민루

































성 밖으로 나왔다.










성 밖에 고인돌이 몇 기 있다.































여기서 점심을 먹고




1시 20분에  출발하는 벌교 가는 버스를 타서,

1시 40분, 벌교 공용버스터미널로 돌아왔다.









소설 태백산맥 문학기행길



1시 45분에 시작한다.







조정래 태백산맥 문학관







巫女 소화의 집
















현부자네 집














부용교(소화다리)














벌교 홍교












김범우의 집















筏橋 홍교(보물 제304호)












벌교 홍교(보물 제304) - 벌교읍 벌교리 벌교천 하구

부용산과 제석산이 마주보고 있는 가운데 있는, 벌교천 위에 걸쳐진 세 칸의 무지개다리이다.

전체 길이 2m 높이 3m 4m로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홍교 가운데 가장 크다.

부채꼴 모양의 석재를 맞춰 홍예를 만들고 네모지게 다듬은 석재로 홍예 사이의 면석을 쌓았으며,

그 위에 밖으로 튀어나오게 멍엣돌을 걸치고 난간석을 얹은 후 판석을 깔아 다리 바닥을 만들었다.


홍예마다 아래쪽 가운데 이무기돌이 박혀있다.

예전에는 이무기돌 코에 풍경을 달아 은은한 방울 소리가 울려 퍼졌다고 한다.

이는 잡귀나 재앙을 물리친다는 의미를 지닌다.


한국전쟁 뒤 강폭이 넓어지면서 홍교에 덧붙여 콘크리트 다리를 가설하였다.


조선 영조 5(1729) 선암사 승려 楚安習性 두 선사가 만들었다고 한다. 선암사 홍교보다 20년 뒤에 만들었다.

불교에서는 越川功德을 중요한 보시의 하나로 꼽는다. 그래서 승려들 가운데는 다리 축조 기술자가 많았다.

영조 13(1737)에 중수되었고, 헌종 10(1844)에 크게 개수되었으며,

984년에도 중수공사를 하였다.

중수 때마다 세운 기념비들 6개가 읍내쪽 다리 끝에 죽 서있다.


筏橋라는 지명처럼 이 홍교가 놓이기 전에는 뗏목다리를 놓고 건너 다녔는데,

걸핏하면 다리가 떠내려가 불편이 많았다고 한다.

교 사람들은 60년마다 한번씩 환갑잔치를 해주었는데, 1959년에 6갑주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7주갑은 2019년에 행해졌다.














채동선 생가











고향

정지용 시, 채동선 곡

메조소프라노 이은주








충혼탑




채동선의 부인 이소란의 묘







부용산 시비















월곡 영화골



































태백산맥 문학공원















벌교 금융조합


















벌교초등학교







남도여관




















벌교역












부용교




철다리















































https://story.kakao.com/chil5430/iX7MDeYnMQA



중도방죽, 4시 5분.










길은 이렇게 이어진다.



끝까지 가기에는 멀어,

여기서 돌아간다.





















터미널로 돌아오니 4시 25분.

다행히 4시 25분에 출발 부산 행 버스가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

차는 27분에 들어와 곧 출발했다.



7시 50분, 서부 터널에 도착했다.





































2003년 7월 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