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릉, 월정교
오릉 · 월정교
■ 五陵(사적 제172호)은 경주시 탑정동에 있다.
본디 蛇陵이라고 했다.
능이 모두 5기가 있어, 오릉이라고도 한다.
신라의 시조 혁거세 居西干(BC 57~AD 4 재위),
그의 비 閼英,
제2대 남해次次雄 (4~ 24 재위)
제3대 儒理尼師今(24~ 57 재위)
제5대 婆娑尼師今(80~112 재위)의 능묘로 전하고 있다.
※ 4대왕은 탈해니사금으로 성이 昔氏다.
모두 원형봉토분이다.
제1릉은 가장 남쪽에 있으며, 높이 약 10m로 5기 가운데 가장 높고 크다.
제2릉은 제1릉의 동북쪽에 있으며, 높이는 약 9m이다.
제3릉은 제2릉의 동쪽에 표주박 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높이는 약 7.2m이다.
제4릉은 제2릉의 서쪽에 있으며, 높이는 약 3.6m이다.
제5릉은 제4릉의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높이는 약 1.8m이다.
<삼국유사>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나라를 다스린 지 61년 되던 어느 날 왕은 하늘로 올라갔는데,
7일 뒤에 그 죽은 몸뚱이가 땅에 흩어져 떨어졌다. 그러더니 왕후도 역시 왕을 따라 세상을 떠났다.
나라 사람들은 이를 합해서 장사지내려 했으나 큰 뱀이 나타나더니 쫓아다니면서 이를 방해하므로,
오체를 각각 장사지내어 오릉을 만들고, 또한 능의 이름을 蛇陵이라 했다.
담엄사 북릉이 바로 이것이다.
태자 남해왕이 왕위를 계승했다.……."
<삼국유사>, 제1권 기이 제1 신라시조 혁거세왕.
이 기록으로 보아 오른은 박혁거세 거서간 한 왕의 무덤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오릉의 피장자는 알려진 것과 다를 수도 있다.
아직 경주일대에서 4세기 이전으로 올라가는 원형봉토분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았으며,
발굴조사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신라는 992년 동안 56명의 왕이 다스렸다.
이중 제30대 문무왕,
제34대 효성왕,
제37대 선덕왕 등은 화장해 능이 없다.
또 신라가 망한 후 개경에 살다가 죽어 철원에 묻힌 제56대 경순왕을 제외하면 52기의 능이 경주와 경주 주변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경주에서 왕릉으로 비정된 것은 38기다. 아직 능을 찾지 못한 왕이 16명이나 된다.
왕릉으로 비정된 38기 중에도 피장자가 확실한 능은 제29대 무열왕릉과 제42대 흥덕왕릉뿐이다.
그 밖의 36기 왕릉들은 구전이나 추정에 의한 것이므로 확실하지 않다.
피장자를 알지 못하는 무덤 중 왕릉급으로 추정되는 것을 ‘塚’ 또는 ‘墳’이라 한다.
혁거세왕의 비 알영이 태어났다는 알영정
2013년 1월 9일
2018년 2월 3일
■ 일정교지 월정교지(사적 제457호)- 경주시 인왕동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9, 35 경덕왕 조에,
"경덕왕 19년(760) …… 2월에 궁성 남쪽 蚊川 위에 月淨橋 · 春陽橋 두 다리를 놓았다."라는 기록이 있다.
● 月淨橋
궁궐 반월성과 그 다리 건너 남쪽 남산 지역을 이어주는 다리이다.
왕과 대신들이 남산으로 제사지내러 갈 때 이 디리를 지나갔다.
<삼국유사>에 이와 관련있는 원효대사(617~ 686) 이야기가 전한다.
"…… 스님(원효대사)이 일찍이 어느날 風顚을 하여* 거리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를 불렀다.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내게 빌리겠는가, 誰許沒柯斧
나는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찍으리. 我斫支天柱
사람들이 아무도 그 노래의 뜻을 알지 못했다.
이에 太宗(武烈王)이 이 노래를 듣고 말했다.
"이 스님이 필경 귀부인을 얻어 귀한 아들을 낳고자 하는구나. 나라에 큰 현인이 있으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없을 것이다."
이때 요석궁에 과부 公主가 있었는데, 왕이 宮吏에게 명하여 원효를 데려가라 했다.
궁리가 명을 받들어 원효를 찾으니, 그는 남산에서 내려와 蚊川橋(다리 이름을 楡橋라 한다)를 지니다가 만났다.
이때 원효는 일부러 물에 빠져서 옷을 적셨다.
궁리가 원효를 궁에 데리고 가서 옷을 말리고 그곳에 쉬게 했다.
공주가 과연 태기가 있더니 薛聰을 낳았다. ……."
<삼국유사>, 제4권, 意解 제5, 元曉不羈
※ 風顚을 하여* 師嘗一日風顚 唱歌云
"풍전은 常禮를 벗어난 행동", 이상한 행동 등의 뜻이다.
이병도는 "어느날 春意가 동하여"라 번역했다.
원효가 건넜다는 楡橋 자리에 월정교를 건립했다고 하고, 아니라고도 한다.
유교가 뒷날 월정교가 되었다 하더라도, 7세기 중반의 다리는 작은 징검다리였을 것이다.
경주부윤울을 지낸 閔周冕(1629~ 1670)이 편찬한 <東京雜記>에 "瑤石宮터는 향교 남쪽에 있고, 유교는 궁터 남쪽에 있다."고 하였다.
김유신이 자기 집 財買井(사적 246호)에서 천관녀가 있는 지금의 천관사로 갈 때도 말을 타고 이 다리를 지나갔다.
半月城南兎嶺邊 반월성 남쪽 토끼고개 기슭에,
虹橋倒影照蚊川 무지개다리 그림자 거꾸로 문천에 비치네.
蜿蜓騰漢尾垂地은 하수에 꿈틀거리며 오르는 용이 그 꼬리 당에 드리우고,
채蝀飮河腰跨天 은하수 물 마시는 무지개가 그 허리 하늘에 걸린듯.
手斬蒼蛟周處勇 손으로 검푸른 이무기를 베었으니 주처의 용맹함이요.
身成白鶴令威仙 몸이 백학이 되었으니 정령위 같은 신선이로세.
昔賢逸迹皆驚俗 그 옛날 어진이들 자취는 세상을 놀라게 했건만,
慚愧區區數往還 이내 몸 구구히 왕래만 하니 부끄럽구나.
老峰 金克己(?~ 1209), 月精橋
蜿蜓 용이나 뱀 같은 것이 꿈틀거리는 모양
채蝀 무지개
周處 중국 晉나라 때 사람. 남보다 뛰어난 勇力으로 제멋대로 행동하여, 마을 사람을 괴롭히는 호랑이, 이무기와 함께 三害로 알려지자 개과천선하여 호랑이를 활로 쏘아 죽이고 이무기도 물 속에서 죽였다 함.
令威 丁령위 중국 漢나라 사람, 신선술을 배워 학이 되었다 함.
몽골의 제3차 침입(1235년 윤 7월~ 1239년 4월) 때 경주까지 쳐들어와 황룡사를 불태웠다.
이때 월정교는 무사했다.
고려 제25대 충렬왕 6년(1280) 경주부 유수 盧景倫이 중수하였다는 기록(府尹先生案序)이 있다.
신라 때는 "月淨橋"였는데 이후 고려 때 언젠가부터 '淨' 자의 한자가 다른 "月精橋"로 바뀌어 그 이름이 지금까지 쓰이고 있다.
그후 어느땐가 불에 타 무너진 것으로 추정한다.
한때는 문천 바닥에 네 개의 교각지가 남아 있고,
나무로 된 다리는 사라지고, 다리 바닥을 지탱하고 있던 석조물과 일부 기와, 목재 부재가 묻혀 있었다.
1975년 조사하였는데, 교각은 돌기등으로 추정되고, 그 밖의 재료들은 목재와 석재를 함께 사용하여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다리 윗 부분에 사자상을 안치한 높은 화표석을 세웠다는 것도 밝혀졌다.
화표석은 신성한 구역에 경계로 세우는 것이다.
2008년부터 복원공사를 시작하여 2018년 완공하였다.
경주시가 중심이 되서 문화재청이 지원ㅎ했다.
530억 원이 들었다 한다.
복원 후 여러 논란들이 있다.
특히 김극기의 시에,
"虹橋倒影照蚊川 무지개다리 그림자 거꾸로 문천에 비치네."로 보아
다릿발 사이가 둥글었던 것 같다.
https://story.kakao.com/_2ItEa6/eDUpeqPCmL0
2011년 4월 6일
2014년 6월 23일
2014년 7월 14일
2018년 4월 11일
● 춘양교
통일신라시대 축조된 일정교의 유지이다.
<삼국사기> 경덕왕 19년(760) 조에, “궁궐 남쪽 蚊川 위에 월정교와 春陽橋 두 다리를 놓았다.”라는 기록이 있다.
처음 축조되었을 때는 춘양교라 하였으나 그뒤 민간신앙과 결합하여 일정교, 효불효교, 七星橋 등으로 불리었다.
칠성교라는 이름은 일곱 아들들이 놓았다고 해서 생겼다 한다.
발굴조사를 통하여 밝혀진 바에 의하면,
일정교는 길이 약 55m, 산판의 너비는 적어도 12m, 높이는 5m정도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교각은 센 물살에서도 견딜 수 있도록 주형으로 쌓았다.
다리의 규모와 橋臺 날개벽 석축의 사용방법, 퇴물림식 축조방법, 석재의 색깔과 재질 등 대부분 서쪽 약 700m 하류에 있는 월정교와 비슷하다.
<동국여지승람〉21권에, 춘양교를 효불효교라 불리는 내력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신라 때 아들 7형제를 둔 과부가 있었다. 私通하는 남자가 문천의 남쪽에 있었으므로 아들들이 잠들기를 엿보아서 가곤 했다.
어느날 아들들은 "어머니가 밤에 물을 건너다니니 자식된 자의 마음이 편안할 수 있는가" 하고,
돌다리를 놓으니 어머니가 부끄럽게 여겨 행실을 고쳤다.
그때의 사람들이 그 다리를 효불효교라고 불렀다.
밤이면 찬물에 발을 건너며 고생하는 어머니를 위해 다리를 놓아준 아들들의 행위는 분명히 어머니에 대한 효도이지만,
죽은 아버지에게는 불효라는 이율배반적인 성격 때문이다.
자식 없는 여인이나 젖이 적은 여인이 이 다리의 橋脚에 빌면 반드시 영험이 있고,
또 짝사랑으로 고민하는 여인이 이 돌에 빌면 상대방에게 그 뜻이 전해진다는 전설도 있다.
춘양교(일정교, 효불효교)
▲ 토함산
2011년 1월 5일
2012년 11월 14일
2014년 1월 8일
2015년 1월 11일
2016년 11월 1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