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사
■ 華嚴寺 -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진흥왕 5년(544) 인도승려 연기가 세웠다는 설,
선덕여왕 11년(642)에 자장이 중건했다는 설,
장육전(현재의 각황전)과 화엄석경을 의상이 만들었다는 설 등이 있다.
1. 그러나 1979년에 발견된 "新羅華嚴經寫經"에 의해 신라 경덕왕 때(742~765) 황룡사 소속의 화엄학 승려 연기에 의해 창건되었다는 사실이 분명히 밝혀졌다. <화엄경사경>은 경덕왕13년(754) 8월부터 만들기 시작하여 이듬해 2월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2. 이후 道詵국사(827~898)가 15세 때인 문성왕 3년(841) 이곳에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고,
선각대사 逈微(864~917)는 이곳 계단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3. 신라 말 화엄학이 南岳과 北岳으로 나뉘어 대립할 때 견훤의 福田인 觀惠는 이 절을 중심으로 王建의 복전인 해인사의 希朗과 대립된 학파를 형성했다.
4. 고려 광종 때(949~975) 洪慶선사가 낡은 건물을 중수했고,
문종(1046~1083 재위) 때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이 절에 매년 곡물을 헌납하는 것을 허락함으로써, 일주문 밖에 이 곡물을 저장할 큰 창고를 지었다.
5. 숙종(1095~1105) 때 祖衡왕사가 대대적으로 보수했다.
대각국사 의천이 이곳에 들러 연기조사의 영정에 예배하고 그를 찬탄하는 시를 남겼다. 인종(1123~1146)은 의천의 제자인 定仁왕사로 하여금 이곳에 머물며 절을 중수하고 도선국사의 비를 세우게 했다.
6. 조선시대에도 성황을 이루어 세종 6년(1424) 선종대본산으로 승격되었다.
7. 그러나 조일전쟁 때 완전히 불탔다. 조일전쟁 당시 화엄사 주지는 雪泓대사였는데, 그는 300여 승군을 이끌고 구례의 요충지인 石柱鎭에서 왜군과 싸우다 모두 전사했다. 이 시기 碧巖 覺性(1575~1660)은 승병대장으로 활약했다.
8. 그후 인조 8년(1630)에 화엄사 중건을 시작하여 1636년 대웅전을 비롯한 몇 채의 건물을 건축했고,
효종 원년(1650)에는 선종대가람으로 인정받았다.
9. 숙종 25년(1699)부터 29년까지 桂坡 性能대사가 장육전을 중건하였는데, 숙종은 覺皇殿이란 편액을 내렸다.
장육전이 이루어지고 있던 때인 숙종 27년에는 선종대가람에서 더욱 승격된 선교양종 대가람의 지위를 부여받았다.
10. 이후 부분적인 중수는 있었지만 대규모의 중수는 없었다.
※ 가람은 네 개의 공간으로 영역화되어 있다.
1. 진입공간은 일주문 ․ 금강문 ․ 천왕문 ․ 보제루로 이어진다. 건물들이 조금씩 비껴 서 있어 절집으로 깊숙이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는다.
2. 대웅전 영역
3. 각황전 영역
4. 효대 영역
1. 절의 규모에 비해 소박한 일주문에 智異山大華嚴寺란 현판이 걸려있다. 예전에는 지금 일주문 뒤쪽에 걸려있는 현판이 걸려있었다.
이 현판은 인조 14년(1636) 丙子 8년 선조대왕의 여덟째 왕자 義昌君 珖(1589~1645)이 조일전쟁 후 대웅전이 중창되고 나서 대웅전 현판과 함께 쓴 것이다.
2. 일주문을 지나 금강문 앞 오른쪽에 중창주 벽암스님 부도가 있다. 다시 금강문, 천왕문으로 이어진다. 천왕문 위로는 높은 축대를 쌓아 법당을 비롯한 중심 건물을 세웠고, 축대 아래쪽에는 생활공간을 두어 구분했다. 축대 위 불전공간은 다시 두 단으로 나뉜다. 넓은 마당을 영산전 · 범종각 · 보제루 · 운고각 · 적묵당 등이 동남으로 막아 둘러선 사이에 대웅전 쪽으로 두 탑이 벌여 서있다. 서북으로는 높은 축대를 쌓아 대웅전과 각황전을 비롯한 원통전 · 나한전 · 명부전이 있다.
3. 천왕문을 지나면 승려와 신도의 집회장소 보제루가 나온다.
정면 7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집이다. 천왕문 쪽에서 보면 2층누각이나 대웅전 쪽에서 보면 단층이다.
보제루 앞의 당간지주는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측되며 당시에는 여기서부터 산문의 시작일 것으로 보인다.
4. 보제루를 돌아서면 큰 앞마당을 가운데 두고 정면에 대웅전, 왼쪽에 각황전이 높은 석축 위에 서있다. 석축은 신라 때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며 바른층 쌓기를 한 장대석 위에 장방형의 돌을 역시 바른층 쌓기를 하고 두꺼운 판석을 덮었다.
앞마당에는 동 · 서오층석탑이 있다. 두 석탑은 석축 위의 대웅전을 중심으로 대칭을 이루지 않고, 한쪽으로 치우쳐 있어 대웅전과 짝을 이룬 일금당 쌍탑 양식이 아닌 일금당 일탑 구조로 보인다. 곧 동오층석탑은 남향한 대웅전과, 서탑은 동향한 각황전과 짝을 이룬 구조로 짐작된다.
* 동오층석탑(보물 제132호)은 대웅전 앞 동편에 위치하는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으로 높이가 6.4m이다. 대웅전과 각황전의 높은 석단 아래 서탑과 대립하여 건립되었다. 서탑은 각 면에 조각상의 장엄이 가득한 데 비하여 이 탑은 아무런 장식이 없다. 또 서탑이 2중기단임에 비하여 이 탑은 단층기단이다. 5층의 고준한 석탑이면서 단층기단을 형성하였으며 세부수법에도 간략화된 양식이 보여 이 탑의 조성연대는 서탑과 같은 9세기경으로 추정된다.
* 서오층석탑(보물 제133호)은 높이 6.4m로 2중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올렸다. 동탑과 달리 기단과 탑신부에 장식이 가득하다. 기단은 수매로 구성된 지대석 위에 하대석과 중석을 같은 돌로 붙여서 만들고 각 면에는 안상 속에 십이지신상을 배치하였다. 하층기단의 덮개돌은 4매 판석이고 상면에는 호형과 각형의 굄이 있어 상층기단을 받게 하였다. 중석도 4매로 짜였고 각면 2구씩 팔부신장 입상을 조각하였다.
탑신부의 초층 몸돌 4면에는 사천왕 입상을 배치하였다. 지붕돌의 층급받침은 각 층 모두 5단이며 추녀 밑은 수평이다. 석탑의 조성연대는 조각상이 가미된 점, 또는 옥개의 조형이 보다 유연한 느낌을 주는 점 등으로 보아 신라 하대인 9세기경으로 짐작된다.
1995년 해체 보수하면서 진신사리와 유물 47점이 나왔는데, 신라시대 조성된 필사본 다라니경과 불상을 찍어내는 청동불상 주조틀 등이 있다.
다라니경은 8C 중엽의 것으로 종이 길이는 14m, 백지에 먹으로 글씨를 썼다. 1997년 이 종이뭉치를 완전하게 보수하였는데, 다라니경의 주요 대목을 붓으로 베껴놓은 것이다. 그래서 “白紙墨書經”이라 이름붙였다.
※ 碧巖대사 覺性(1575~1660)
자는 證圓, 호는 벽암이다. 속성은 김씨로 충북 보은 사람이다. 그 선조들은 역대로 벼슬을 했다. 그는 經史百家에 통하였고, 초서 · 예서에도 뛰어났다고 한다.
선조 8년 12월에 태어났다. 9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10세에 華山에 들어가 雪黙長老에게 출가하여, 14세에 寶晶大師에게서 삭발하고 具足戒를 받고 경전 공부를 시작하였다. 이때 浮休대사 善修(1543~1615)가 화산으로 들어오자 그는 부휴대사를 스승으로 삼고 평생 그림자처럼 따랐다. 그리하여 속리산, 덕유산, 가야산, 금강산 등지의 명산을 편력하면서 함께 수행하였다. 조일전쟁으로 부휴대사가 전쟁에 참가하자 그도 해전에 참가하였다.
선조 33년(1600) 지리산 칠불사에서 하안거를 하고 있을 때 부휴대사가 병을 앓게되어 講席을 그에게 물려주었다. 丙午년(1606)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속리산 가섭암에 들어가 어머니의 명복을 빌었다.
제15대 광해군 4년(1612) 스승 부휴대사가 못된 중의 무고를 입어 그도 함께 감옥에 갇혔다. 그러나 광해군이 친히 이들을 치죄하고 그의 위의에 감복하여 하사품을 내리고 방면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부휴를 대불, 벽암을 소불이라 불렀다.
부휴대사가 산으로 돌아가면서 벽암을 봉은사에 머물게 하고 그에게 判禪敎都摠攝의 직을 내렸다. 광해군 7년(1615) 부휴대사가 입적하자, 부휴를 따르던 무리들과 강석을 그에게 물려주었다. 그러나 벽암은 그 자리를 사양하고 칠불사로 옮겨갔다. 1618년 다시 신흥사로 옮기니 대중이 700여명이나 되었다. 벽암은 번거로운 대중을 피하여 밤에 몰래 태백산 箭川洞으로 숨어버렸다.
광해군이 淸溪寺에서 큰 齋를 베풀고 궁궐의 사신을 파견하여 벽암을 모셔와 설법을 듣고 金襴袈裟를 하사하였다.
인조 2년(1624) 후금의 위협이 고조될 무렵 조정에서는 수도 방어선을 남한산성과 강화도에 두기로 결정하고 남한산성 축성 공사를 벌였다. 이때 벽암대사에게 八方都摠攝의 직위를 주어 승군을 이끌고 축성의 일을 맡게 하였다. 공사는 1626년 7월에 마쳤다. 공사를 마치자 나라에서 報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의 직과 의발을 하사하여 그 공을 치하하였다.
인조 10년(1632)부터 화엄사를 중수하여 대총림을 만들었다. 쌍계사로 들어가 그곳을 수리하였다. 인조 14년(1636) 조청전쟁이 일어나 청군이 서울에 침입하자 왕은 남한산성으로 천도한다. 이때 벽암은 3000명의 승군을 모집하여 降魔軍이라 이름하고 북상하였으나 도중에 왕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진군을 중지하였다.
전쟁이 끝나자 지리산으로 들어가 “圖中決疑”, “參商禪旨” 등을 저술하였다.
인조 18년(1640) 8월 原平府院君 元斗杓가 호남 관찰사로 왔을 때 그의 주청으로 糾正都摠攝의 직을 맡게하여 적상산성에 있는 사고를 보호하게 하였다. 1641년에 해인사로 갔다. 이해 6월 조정에서는 사명대사에게 맡겼던 소임을 그에게 맡겨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하려 하였다. 그러나 서울로 향하던 중 병으로 포기하였다. 다시 백운산 上仙庵에 숨어버렸다. 1642년에는 寶蓋山으로 들어가 법석을 베풀었다.
인조 24년(1646) 가을 다시 속리산으로 들어왔다. 동문인 孤閑 熙彦(1561~1647)과 가까이 지냈다. 고한이 화엄사로 돌아가 입적하자 그도 화엄사로 들어가 그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현종 1년(1660) 1월 86세, 법랍 73세로 입적하였다.
속리산 법주사 앞 오리숲이라는 이름의 숲길을 지나 수정교를 건너면 곧 넓은 터가 나오는데, 이곳에 碧巖대사비(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1호)가 있다.
※ 화엄십찰 - 신라 화엄종의 초조 의상(625~702)과 그의 제자들이 화엄종을 통일신라 전역에 전파시키기 위해 세운 절이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후 정복지를 교화 회유하여 사회 통합을 이루어야 했다. 그 새로운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圓融무애를 근간으로 하여 모든 것을 하나로 귀의시킨다는 화엄사상을 널리 펴고자 한 것이다. 十刹의 대부분은 옛 백제나 고구려 지역의 지방 중심지이면서 反신라적 성향이 강한 지역이다.
최치원(857~?)의 “唐大薦福寺 故寺主 翻俓大德 法藏和尙傳”(904년 효공왕 8년, 당나라 화엄종의 제3대 조사 賢首 法臟(643~712)의 전기)에는, 화엄십찰이란 말은 없고 “海東華嚴大學之所有十山”이라 하여 중악 공산의 미리사, 남악 知異山 화엄사, 북악 부석사, 강주 가야산 해인사와 보광사, 웅주 가야협의 보원사, 계룡산 갑사, 朔州 華山寺(刮地志에 말하는 鷄籃山은 바로 화산사라는 註가 있다), 양주 금정산 범어사, 비슬산 옥천사, 전주 모악 국신사, 한주 부아산 청담사 등 12개 절을 들고있다.
이 12절 중 가야산 해인사는 의상이 죽은 후 100년이 지난 802년에 의상이 법손 순응이 창건한 것이다. 따라서 의상의 傳敎十刹은 의상대사 당시에 모두 건립된 것이 아니며 꼭 10개의 절로 고정된 것도 아니다. 의상은 전교십찰의 건립을 悟眞, 智通, 表訓, 眞定, 眞藏, 道融, 良圓(혹은 亮元), 相源(혹은 相圓), 能仁, 義寂 등 10대 제자와 3천 문도들에게 부탁하였을 것이고, 그 문도들은 종조의 유지를 받들어 각 지방의 지정학적 요충지에 화엄 전교십찰의 건립을 표방하여 옛절을 중창하기도 하고, 새절을 짓기도 하여 화엄종 확산의 거점을 마련해 갔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수는 10도, 12도 될 수 있으며, 최치원 시대에는 12개 정도 되었을 것이다.
“삼국유사-제4권” 의상전교조에는, 태백산 부석사, 원주의 비마라사, 가야산 해인사, 비슬산 옥천사, 금정산 범어사, 남악 화엄사 등 여섯이 기록되어 있다.
* 대웅전(보물 제299호)은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건물이다.
<사적기>에 의하면 조일전쟁 때 불탄 것을 인조 14년(1636)에 재건하였다 한다.
대규모의 4층계단으로 연결된 높은 석축 위에 있다. 석축에서 한 걸음 물러나 자리잡은 각황전에 비해 석축 가까이 들어선 점, 대웅전 앞의 계단이 각황전 앞 계단보다 큰 것은 앞마당에서 볼 때 중심건물인 대웅전이 상대적으로 작아 보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대웅전 현판은 인조대왕의 친숙부 義昌君 珖(1589~1645)이 쓴 것으로 이 사실이 낙관에 나타나 있다.
정면 5칸(19.5m) 측면 3칸(12m)의 팔작지붕집으로 기둥 사이의 간격이 모두 같으며 정면 기둥 사이에는 각각 세 짝씩의 문을 달고 그 위에 交窓을 냈다. 공포는 내외 3출목이다.
내부는 우물천장으로 주위의 외둘레 칸은 중앙보다 한층 낮게 만들었다.
중앙의 丁자형 처마를 이룬 정교한 닫집 아래 흙으로 만든 법신 비로자나불, 화신 석가모니불, 보신 노사나불 등 삼신불을 모셨다.
바라볼 때 오른쪽에 있는 노사나불은 보살로 있으면서 願과 行을 닦아 얻은 인연으로 이룬 報身이라 하여 보관을 쓴 보살형으로 표현하였다. 이 불상들은 중창 당시 만들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후불탱화는 비로자나 삼신탱화(보물 제1363호)로 불상의 자세나 장엄과 똑같다. 이 탱화는 영조 33년(1757)에 대웅전을 보수하고 불상을 개금할 때 조성한 것이다.
* 각황전 앞 석등(국보 제12호)은 높이 6.5m로 우리나라 석등 가운데 가장 클 뿐 아니라 세계에서도 가장 크다.
또 우리나라 석등 가운데 최고 걸작품이다.
신라 석등의 기본형인 8각을 따르고 있으나 竿柱石이 鼓腹形으로 양양의 선림원지 석등 양식을 계승하였다. 이런 양식은 당시 호남지방에서 유행한 지역적 특수양식이다.
석 장의 돌로 짜여진 8각 기대석 위에 연화 하대석 · 고복형 간주석 · 연화상대석 · 화사석 · 지붕돌을 놓고 그 위에 상륜을 갖추었다.
기대 옆면에는 짝을 이룬 안상이 조각되었고, 그 위의 하대석에는 귀꽃이 있는 8엽의 복련이 크게 조각되었다.
그 위에는 卷雲紋 臺와 굽형의 간주석 받침대가 있다.
고복형의 간주석은 중간 부분에 扁球形을 두고 그 중앙에 두 줄의 띠를 둘러 8곳에 씨방을 갖춘 4잎의 꽃을 새겼다.
상대석은 얇고 평평한 8엽 앙련으로 꽃잎 안에는 복잡한 보상화문을, 대 윗면에는 화사석 괴임을 올렸다.
화사석 역시 8각으로 4면에 화창을 만들었다. 8각의 옥개석에는 똑바로 선 귀꽃을 마련하였다.
상륜은 8각 사다리꼴의 높은 노반 위에 앙화대를 마련하고 그 위에 원형으로 된 찰주 중간에 보륜과 귀꽃을 갖춘 보개를 장식하였다. 그 위에 높은 원형 기둥 위에 큼직한 연봉오리로 장식했다.
건립 연대는 통일신라시대이다.
* 각황전(국보 제67호)의 본래 이름은 丈六殿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불전이다.
무량사 극락전, 법주사 극락보전과 함께 3대 불전으로 알려져 있다.
거대한 규모이면서도 안정된 비례에 엄격한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위엄과 기품이 있다.
각황전 옆 지붕 수막새
벽암선사의 제자인 桂坡 性能대사가 숙종 25년(1699)에 공사를 시작하여 4년만에 완공하였다.
공사가 마무리되자 숙종은 각황전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사격도 더욱 높아져 선교양종 대가람이 되었다.
장육전을 수리할 때 상량문이 발견되었는데, 이 상량문은 숙종 27년(1701) 蔡彭胤이 짓고 써서 들보 속에 넣은 것이다.
상량문 끝에 두 줄의 追記가 있는데, 여기에 願堂 대시주로서 왕자 延礽君, 성조대시주로 그의 어머니 淑嬪 崔氏라 적혀있다.
연잉군은 뒤에 영조대왕으로 숙종 20년(1694)에 탄생하였는데, 연잉군을 위해 숙빈 최씨가 대시주가 된 것이다. 실제로 이런 거대한 장육전은 왕실 같은 든든한 재정 지원 없이는 이루어지기 어려운 것이다.
정면 7칸 측면 5칸의 중충 다포 팔작집으로 밖에서 보면 2층이지만 내부는 툭 터진 통증이다. 내부의 15개의 높은 기둥이 기본틀을 이루고 여기에 1층 바깥기둥과 2층의 邊柱가 부가된 구조이다.
천장은 우물천장이나 그 주변을 경사지게 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그 예가 드물다.
2층 벽은 창호로 처리해 내부에 조명을 줄 수 있도록 했다.
법당 안에는 목조 삼불 사보살,
곧 왼쪽부터 관세음보살 · 아미타불 · 보현보살 · 석가모니불 · 문수보살 · 다보불 · 智積보살을 모셨다.
지적보살에 대해서는 <법화경-화성유품>에 대통지승불이 출가하기 전에 16명의 왕자가 두었는데 그 맏아들이라 했다.
그는 다보불을 따라 사바세계에 내려와 석가모니가 <법화경>을 설하는 자리에 참석하였으며 문수보살과 함께 여자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논의를 한다.
또 그는 뒤에 동방세계에서 성불하여 아촉불이 되었다고 한다.
이 삼불 사보살은 장육전이 완성된 이듬해 조성하였다.
주존인 석가여래좌상은 높이 12자(396cm), 좌우의 여래상은 11자, 네 보살상은 10자이다. 측면 5칸 중 주준을 가운데 모셔 앞뒤 두 칸을 회랑으로 쓰고있다.
우담 정시한은 丈六像을 보았다고 했다.
현재 화엄사에는 장육상이 없다. 장육전은 본디 3층 건물이고, 안에 장육상이 봉안되어 있었을 것이다.
장육전은 불타 없어졌으나 정시한이 화엄사에 간 1686년에는 장육상이 남아 있었을 것이다. 무슨 까닭인지는 알 수 없으나 장육상은 없어지고 1702년 각황전을 새로 지으면서 불상도 새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
아미타불 · 석가모니불 · 다보불 뒤에는 불상과는 달리 각각 아미타회상도 · 영산회상도 · 약사후불탱화가 있다.
예전에는 이 전각 벽면을 돌에다 새긴 화엄경으로 장식했다. <鳳城誌>에 “의상대사가 화엄십찰을 세우면서 화엄사에 삼층으로 된 장육전을 건립하고 사방 벽을 <화엄경>을 새긴 돌판으로 둘렀다”라는 기록이 있다.
각황전 벽에는 화엄석경을 붙이고, 바닥에는 전돌을 깔았다.
후불공간을 보면 서서 입상에 예불하도록 되어있다. 책을 구하기 어려운 시기 화엄석경으로 수행승들의 수행을 돕는다. 점차 수행공간인 각황전에서 예배공간인 대웅전으로 절의 중심이 옮겨진다. 이는 수행승들 중심에서 대중들의 요구로 신앙체계가 변화한 것이다.
1686년 8월 21일 愚潭 丁時翰(1625~1707)이 화엄사를 찾았는데, "<법화경석(화엄석경)은 뒤쪽에 있는 빈 요사에 쌓여있다”고 하였다.
* 華嚴石經(보물 제1040호)은 납석에 예리한 칼로 화엄경의 방대한 내용을 새긴, '돌 경전'이다.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통일신라시대의 의상대사가 문무왕 10년(670년) 화엄사 중창할 때 장육전을 건립하면서 네 벽을 흙 대신 화엄경을 새긴 돌로 만들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 석경은 9세기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화엄의 세계를 다룬 국내 유일의 대규모 석경으로 신라 금석문화와 석재가공기술의 축약판이다.
현재 석경으로는 세계적으로 중국의 방산석경과 석교석경, 그리고 화엄석경을 꼽고 있다.
조일전쟁 때 장륙전이 불타면서 파손되었고 그후 계속 방치되어 오다가 일제시대에 각황전을 해체 수리했을 때 1차 정리되었으나,
한국전쟁으로 다시 흩어졌다가 1961년에야 겨우 정리되었다.
글씨는 쌍계사의 진감국사비를 닮았으며, 신라 명필 김생의 글씨라는 말도 전한다.
지방문화재로 방치되어 오다가 1990년에 보물로 지정되었다.
최근 석경 조각 2만여 점에 대한 탁본작업이 완료됐다.
이 가운데 훼손상태가 심한 6,200여점을 제외한 1만4천여 점은 탁본을 통해 판독이 가능하다고 한다.
<화엄경>은 중국 동진시대 불타발다라가 번역한 60권본과,
당나라 때 실차난타가 번역한 80권본,
당대 반야가 번역한 40권본이 있다.
화엄석경은 탁본의 분량 등을 고려할 때 60권본이나 80권본 중의 하나로 추측된다.
화엄석경에는 중국 北魏와 六朝, 唐諧가 서체의 주류를 이르고 있지만 간간이 약간 흘려 쓴 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서체도 있다고 한다.
이 탁본 작업을 통해 새로운 사실도 발견됐다.
조각난 돌에 쓰여진 일본 글자의 흔적을 통해 일제가 1935년과 38년 두 차례에 걸쳐 상태가 좋은 상당량의 석경을 가져간 사실을 알아낸 것이다. 이 때 같이 있었던 變相圖도 가져간 것으로 추측된다. 실제로 일본의 몇몇 박물관에서 이를 소장하고 있다.
覺皇殿이란 명칭의 유래에 대해서는 3가지 전설이 전하고 있다. 첫째는 부처님은 깨달은 왕[覺皇]이라는 설, 둘째는 조선 숙종과 관계되는 이야기, 셋째는 청나라 황제와 관련되는 설화이다.
숙종 때 성능선사가 조일전쟁으로 불탄 장육전 중건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는데, 그 기도가 감응을 얻었는지 화주승으로 공양주 스님이, 시주자는 절에서 잔심부름을 해주고 먹을 것을 얻어가는 노파가 선택되었다. 시주자로 선택된 노파는 자신의 가난함을 한탄하고 불보살의 원력으로 왕궁에 태어나기를 바라고는 연못에 몸을 던져 죽었다. 그후 노파는 공주로 환생하였는데, 한쪽 손을 쥔 채로 태어났다. 손은 5년 후 공양주스님을 만나 비로소 펴졌는데, 손바닥에 장육전이라 쓰여 있었다.
그리하여 벽암의 뜻을 이어받은 성능이 왕실의 지원을 받아 장육전을 중건하였고, 숙종이 각황전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이 이야기는 청정한 원력으로 공주로 환생한 노파의 공덕이 장육전 중창의 원동력이 되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중심인물인 공주가 숙종에게는 없다. 팔공산 파계사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전하지만 거기에는 왕자 곧 훗날의 영조로 되어있다.
상량문에 영조와 숙빈 최씨가 대시주가 되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연기설화는 실제 사실을 바탕으로 엮어진 것이다. 숙종 때의 정치상황으로 보아 숙빈측 관련 세력이 화엄사와 파계사를 원찰로 삼아 전라, 경상도에 뿌리를 내리려 한 것을 알 수 있다.
조일전쟁으로 화엄사가 불타자 당시 주지스님은 절을 복구하기 위해 부처님께 밤낮으로 빌었다. 하루는 꿈에 한 도승이 나타나 “주지의 정성이 지극하기에 부처님이 나를 보내 너의 뜻을 이룰 방법을 일러주도록 하였다. 내일 아침 날이 밝거든 아랫마을로 가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절을 지어주도록 부탁하여라. 그리하면 너의 뜻이 이루어 질 것이다.”고 했다.
꿈에서 깬 주지승은 일찍 아랫마을을 향해 걸어갔다. 바로 그때 절에서 잔심부름이나 하면서 끼니를 이어가는 할멈이 나타났다. 주지승은 기가 막혔지만 도승의 말대로 꿈이야기를 해주었다. 할멈은 놀라 자빠질 지경이었다. 자신이 화엄사를 새로 짓는데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할멈은 나중에 심한 죄책감으로 결국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이 소식을 들은 주지승은 심한 죄의식에 시달렸다. 거기다가 관가에서는 주지승에게 살인죄를 씌워 잡으려 하자 주지승은 청나라로 피신하게 되었다.
이 무렵 청나라 황제는 나이 60에 공주를 얻게되어 매우 기뻐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주는 나면서부터 울기 시작하더니 좀처럼 울기를 그치지 않았다. 황제는 노하여 대로변에 누각을 세우고 공주를 거기에 갖다 버렸다.
이 소문을 들은 주지승은 호기심이 생겨 궁궐에 가보기로 하였다. 주지승이 궁궐에 이르자 신기하게도 공주는 울음을 그쳤다. 이를 지켜본 황후는 매우 기뻐했고, 궁궐의 황제와 대신들도 뛰어나와 이 광경을 보았다. 황제는 너무도 기뻐 공주를 번쩍 안았다. 순간 공주는 웃으면서 손가락으로 주지승을 가리켰다. 주위의 눈길이 주지승에게 솔리자 주지승은 겁이 나서 도망치려 하였다. 그러자 공주는 다시 울기 시작했다. 이를 알아챈 황제는 주지승을 모셔오게 하였다.
주지승은 조선에서 있었던 일과 이곳까지 오게 된 일을 말하였다. 그러자 황제는 “공주가 주지승을 보고 울지 않는 것은 전생의 인연이 있기 때문이며, 그때의 할멈이 공주로 환생한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는 주지승의 소원인 절을 지어주기로 약속하였다. 그리하여 화엄사로 돌아온 주지승은 열심히 절을 짓고 법당의 이름도 황제의 깨달음으로 인하여 절을 짓게 되었다는 뜻으로 각황전이라 하였다.
3. 대웅전 서쪽에 원통전이 있다.
* 원통전 사자탑(보물 제300호)은 2층기단 위에 탑신을 얹고 있는 모습의 異形석탑이다. 여러 개의 장대석으로 이루어진 방형의 지대석 위에 아무런 장식이 없는 하층기단 중석을 올리고 그 위에 덮개돌을 얹었다. 상층기단은 복련대좌에 올라앉은 네 마리의 사자를 모퉁이에 배치하였다. 사자는 두 마리는 입을 벌리고, 또 두 마리는 입을 다물고 있다. 四獅子石塔의 사자들과 같이 머리에는 복련대좌와 대칭되는 앙련을 이고 있고, 그 위에는 복련을 장식한 덮개돌을 놓아 탑신부를 올렸다.
높직한 탑신의 각 면에는 네모난 궤를 두른 다음 신장상을 한 구씩 얕게 조각하였다. 탑신 위에는 한 장의 덮개돌을 놓았는데, 그 아래쪽에 앙련이 새겨졌다. 그 위에는 반구형의 석재가 있다. 전체 높이는 3m쯤 된다.
전제적인 수법은 사사자석탑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각의 세련성이 이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므로 사사자석탑보다 훨씬 뒤인 9세기 무렵으로 추정하고 있다.
선림원지 석등-강원도 양양
4. 각황전 옆으로 108계단을 돌아 오르면 孝臺가 나오는데 이곳에 사사자삼층석탑으로 부르는 세존사리탑과 석등이 나온다. 정시한은 효대가 있는 이곳을 浮屠庵이라 했다. 이곳에 암자가 있었던 것 같다.
*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과 석등(국보 제35호)은 통일신라시대의 이형석탑으로 높이 5.5m이다. 기본적으로는 2중기단 위에 3층탑신을 얹고 그위에 상륜부를 올린 신라석탑의 전형적인 기본형을 따르고 있으나 상층기단에서 특이한 의장을 보이고 있다.
하대석 위에 높직한 3단의 괴임을 마련하여 하층기단 중석을 받쳤다. 중석 각 면에는 모서리기둥만 있을 뿐 버팀기둥을 생략하고 3개씩 안상을 조각하고 그 안에 천인상을 1구씩 조각하였다. 천인은 천의를 흩날리며 악기를 연주하기도 하고, 춤을 추기도 하고, 꽃을 공양하는 자세를 취하며 부처님 세계의 화려함을 표현하고 있는데, 조각 수법이 매우 우수하다. 덮개돌은 밑에 부연이 있고 윗면에는 경사가 없다.
상층기단에는 모서리기둥 대신 모서리 각 방향을 향하고 있는 사자 한 마리씩을 배치하였다. 사자는 무릎을 꿇고 앉은 암수 두 쌍인데 사자 한 마리씩을 支柱로 삼아 네 귀에 배치하였다. 네 마리의 사자는 상하 앙 · 복련화대 위에 앞발을 뻗고 뒷발을 구부려 앉아서 정면을 바라보며 입을 벌려 날카로운 이를 보이고 있다. 이런 점은 다보탑의 돌사자상을 연상하게 한다. 이 석탑에서 네 마리의 돌자자상과 승상의 배치는 불국사 다보탑의 사사자의 배치 또는 상층기단의 5개의 각형 기둥의 배치형식과 관계있을 것이다. 사자는 수행자로서 화엄세계를 수호한다. 4사자의 표정이 각각 다른 것은 지혜, 용맹정진으로 희노애락을 끊어야 한다는 상징이다.
사자 밑에는 복련과 앙련이 조각된 받침돌을 받쳤고 머리 위에는 앙련석으로 덮개돌을 지탱하게 하였다. 중앙에는 복련대 위에 합장하고 선 승상 한 구를 세웠고, 그 머리 위에 해당하는 덮개돌 아랫면에 연꽃을 조각하여 천개로 삼았다. 승상은 얼굴의 인상이나 몸에 걸친 가사의 의문과 균정한 체구 등이 당시의 불상과 같은 조성수법을
괘석리 사사지석탑
보이고 있다. 서있는 승상의 머리가 덮개돌에 붙지 않은 것으로 보아 덮개돌을 받치는 것은 아니다. 덮개돌은 평평하고 얇으며 윗면에 약간의 경사가 있으며 중앙에 각진 2단의 괴임이 있다.
연화사자좌로 마련된 기단 위에 탑신부를 올렸다. 탑신부는 신라탑의 전형양식을 따르고 있다.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한 개의 돌로 되어있고, 각층 몸돌에는 모서리기둥이 새겨져 있는데 1층만은 모서리기둥이 없고 네 면에 문짝을 조각하고 그 속에 자물쇠와 두 개의 고리를 조각하였다. 그 좌우에는 서쪽면에 인왕상을, 남 ․ 북쪽면에는 사천왕상을, 동쪽면에는 帝釋과 梵天 등 사방의 문을 중심으로 天部의 모든 신장들이 등장하여 붓다의 사리가 있을 1층몸돌을 지키고 있다. 지붕돌 추녀는 수평이며 받침은 각층 5단씩이다.
상륜부애는 노반과 복발만 남았다. 탑 앞에는 배례석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8C 이후 화엄사상과 화엄신앙이 지배적인 이념이며 신앙이었다. 불국사 ․ 석굴암 ․ 성덕대왕신종 ․ 비로자나의 개념을 형상화하였다. 축적된 문화 역량으로 화엄사상을 토대로 새로운 문화 형태를 창조한 것이다. “화엄경”에 ‘獅子座’라는 자주 나온다. 붓다는 三昧에 들기 전에 반드시 사자좌에 앉는다. “화엄경-立法界品”에 “그때 세존께서 보살들이 생각함을 아시고 큰 자비로 머리가 되고 큰 자비로운 법으로 방편을 삼아 허공에 충만하사 사자의 기운 뻗는 삼매에 드시었다. 이 삼매에 드시니 모든 모든 세간이 깨끗하게 장엄해지고……”라는 말이 있다.
“화엄경”의 사자좌는 부처님이 상주하는 장소를 의미함과 동시에 삼매에 드는 힘찬 기운 그 자체를 사자의 용맹함에 비유한 것이다. 그러므로 화엄사사사자석탑은 “화엄경”에서 부처님이 설법에 들기 전 삼매에 드는 장면을 탑으로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탑의 몸돌을 바치는 기잔부 모서리에 네 마리의 사자를 배치함으로써 탑신은 부처님의 眞身이며 그 몸에서 진리의 설법이 나옴으로써 그 자체가 法身d l되는 것이다. 곧 화엄사사사자석탑에서 “화엄경”이 시작되는 것이다. +
이런 양식은 통일신라시대 형성되어 월악산 사자빈신사지사사자석탑, 홍천읍 사무소에 있는 괘석리석탑(보물 제540호) 등 전국 각지에 퍼졌다. 은 ․이와 비슷한
화엄사 사사자석탑을 계승한 고려시대 사사자석탑이다. 이 탑에는 화엄사 사사자석탑에 있는 인물상이 없다.
우리나라의 석등 중 독특한 양식인 쌍사자석등 역시 “화엄경”에 의하여 성립된 유물로 볼 수 있다.
사사자 삼층석탑 앞의 공양석등은 화사석 부분은 여느 석등과 같으나, 화사석을 받치고 있는 간주석 부분은 삼각형의 세 기둥 속에 무릎을 꿇고 한 손에 공양 그릇을 들고 차를 공양하는 스님이다. 사자탑 기단에 서 있는 승상과 마주보고 있다.
전설에는 석등을 받치고 있는 인물은 화엄사를 창건했다는 진흥왕 때 사람 緣起조사이고, 석탑의 승려상은 연기조사의 어머니라 한다. 효심이 깊었던 연기조사가 어머니의 명복을 빌기 위해 공양하는 자신의 모습을 석등의 형태로 조각하게 했다고 한다. 또 진흥왕 때 연기조사가 창건하였는데, 뒤에 자장율사가 효성이 지극했던 연기조사를 추앙하기 위해 세존사리탑을 이처럼 공양탑 형식으로 만들었다 한다. 효대란 이름은 대각국사 의천이 이러한 전설을 생각하고 지은 시 “寂滅堂前 多勝景 / 吉相峰上 絶纖埃 / 彷徨盡日 思前事 / 薄暮飛風 起孝臺”에서 나왔다.
석등은 원래 사리탑에 공양하는 승려상일 것이다. 양쪽의 승려상이 마주보며 한쪽이 꿇어앉은 모습에서 서있는 어머니에게 효성을 드리는 자식이 부모와 자식의 관계로 생각이 이어지고 자연스럽게 창건주 연기조사가 어머니에게 올리는 효성으로 윤색된 것이다.
그러나 조성 수법으로 보아 세존사리탑은 자장율사시대인 7C 전반기로 볼 수 없다. 이 탑은 불국사 다보탑과 쌍벽을 이루는 이형석탑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보탑보다 뒤에 나왔음이 분명하다. 8C 말 내지 9C전반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 3월 하순~4월 초 무렵 화엄사 흑매화가 핀다. 꽃색깔이 흑장미처럼 진홍색이어서 흑매화라 한다. 흑매화는 대웅전과 각황전 사이의 공터에 있다. 이들은 모두 600여 년씩 묵은 이 땅의 토종매화이거나 그 자손이다. 또 대웅전으로 오르는 층계 오른쪽 계단에 50살쯤 되어 보이는 연분홍 홍매화 한 그루가 있다. 홑꽃 홍매화로 향기가 짙다.
2012년 10월 5일 새벽 2시30분께 전남 구례 화엄사 각황전(국보 제67호)에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가 발생했다. 각황전 뒤편의 문짝 일부가 그을리고 소진됐다.
문화재청은 2008년 점화를 지연시키는 방염제를 바른 덕분으로 보고 있다.
<화엄사를 불에 태워라>
1951년 5월 지리산.
빨치산 주축부대인 남부군을 토벌하던 전투경찰대 제2연대장 차일혁은 고민에 빠졌다.
상부에서 화엄사를 소각하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미 연곡사 등 인근 사찰들은 모두 공비의 은신처를 없앤다는 이유로 불길에 휩싸였다.
차일혁은 이 명령을 거부하기로 했다. “절을 태우는 것은 한나절이면 족하지만 절을 세우는 데는 천년 이상의 세월이 걸린다”
전쟁 중이라지만 화엄사는 자랑스러운 우리 문화유산이고, 더구나 각황전은 그의 어머니의 기도처였다.
차일혁은 100여 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화엄사에 들어갔다. 그리고는 부하들에게 각황전 문짝들을 모두 떼어와 대웅전 앞에 쌓아 놓으라고 명령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절을 태우라는 명령을 받았으니 이를 어길 순 없다. 문짝을 태우는 것으로 명령을 이행한 것이다.
이로써 화엄사 전각들은 무사히 전쟁을 피할 수 있었다.
임기상, <신념과 용기로 문화재를 지켜낸 사람들>, 문화재 사랑, 통권 127호, 문화재청, 2015년 6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