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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일낮도보] [부산/ 2월 28일, 수요일] 지리산둘레길/ 금계~동강

추연욱 2018. 2. 28. 22:47



[평일낮도보] [부산/ 2월 28일, 수요일] 지리산둘레길/ 금계~동강



11시 5분, 벽송사에 왔다.

동래에서 3시간 걸렸다.


찌부둥한 날씨, 여기까지는 그래도 비는 오지 않았다.

벽송사에 내리자 비가 오기 시작했다.


서암정사에서부터는 비는, 걷기 어려울 정도였다.



벽송사 장승










* 목장승 2기(금호장군, 호법대장군)

왼쪽 장승은 몸통 부분에 禁護將軍, 오른쪽 장승에는 護法大將軍이라 음각되어 있다.

왼쪽 禁護將軍은 여장승으로 1969년 산불이 나 머리가 타고 코도 떨어져 나갔다.

눈은 툭 불거져 나오고 입은 양 끝을 벌려 성난 표정을 짓고 있다.

오른쪽 護法大將軍은 남장승으로 민머리에 눈은 튀어나오고 콧구멍이 크고 코끝이 뭉툭하다.

입은 합죽하며 입 주위에 불꽃같은 여러 갈래로 수염이 나있고 턱 밑에도 수염이 있다.


두 장승은 전체 높이는 4m쯤 되는데, 1m정도 땅에 묻혀있고,

썩은 몸통을 지탱하기 위해 둑을 쌓아 1m 정도 더 묻혀있다. 드러나 있는 부분은 2m쯤 된다.


약 80년 전에 세웠다고 한다.

단단한 밤나무로 만들었기 때문에 이제까지 그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장승의 몸통은 붉은색이다. 눈은 애초 흰색이었던 같은데 지금은 상당히 탈색되었다.

이 장승들은 명문으로 보아 사찰 입구에 세워 인왕의 역할을 대신하여 잡귀의 출입을 막는 수문장이었을 것이다.

사찰장승은 불이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수문장 같이 서서 불법을 수호한다.

예천 용문사의 호법대장군, 삼원대장군이 그 예이다.




벽송사

 









벽송사는 함양군 마천읍 추성리에 있다.

예로부터 수행처로 널리 알려졌으나 여러 번의 화재로 사적기가 불타 역사를 알 수 없다.

유물로 미루어 보아 신라 말이나 고려 초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중종 15년(1520) 碧松대사 智嚴이 중창하여 벽송사라 했다.

한국전쟁 때는 인민군의 야전병원으로 이용되었다. 이때 불탄 뒤 곧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 건물로는 금당인 보광전과 方丈선원, 간월루, 종루, 산신각이 있다.

문화재로는 <묘법연화경>, 고려 초기 양식으로 보이는 삼층석탑(보물 제474호)와 목장승 2기가 있다.


※ 智嚴대사(1464~1534)는 부안 사람으로 속성은 宋氏이다. 호는 野老이며, 居室號가 碧松堂이다.

어려서부터 책과 劍을 좋아하여 兵書에 통하였다. 뒤에 북방의 野人을 토벌할 때 종군하여 전공을 세웠다.

어려서부터 책과 劍을 좋아하여 兵書에 통하였다


28세 때 계룡산 상초암에 들어가 祖澄대사에게 출가했다.

조선 중종 3년(1508) 가을 금강산 묘길상암으로 들어가 <大慧語錄>을 보다가 크게 깨쳤다.

또 <高峰語錄>을 통해 깨달음을 더욱 깊게 했다.

그래서 지엄은 육조 혜능의 17대 적손인 대혜 宗杲(고) (1089~1163)와,

臨濟 義玄의 18대 적손인 고봉 原妙(1239~1295)를 전승하였다 한다.


중종 29년에 세상을 떠났다.

대표적인 제자로 芙蓉堂 靈觀이 있는데 영관은 서산대사 休靜의 스승이다.

영관의 제자들이 흥성하여 오늘날 한국 불교계는 거의 그의 법손으로 이루어져 있다.

쌍계사 永慕殿에 벽송대사의 진영(정조 5년 조성)이 있다.






벽송대사 진영/ 벽송사 소장



진감국사. 남악당, 벽송당 진영/ 쌍계사 소장






벽송사 삼층석탑







벽송사 부도




미인송 두 그루
















이 미인송은 300살쯤 된다고 한다.














 벽송사는 판소리 <가루지기타령>, 판소리 소설 <변강쇠전>의 무대이며,

변강쇠와 옹녀가 이곳 지리산의 마천면 일대에 살았다는 견해가 있다.


<변강쇠가>에 변강쇠가 장승을 뽑아 불에 태우는 장면이 나오는데,

“등구 마천 가는 길에 있는 장승”, “함양군 산로 지킨 장승”, “함양 동관” 등의 말이 나오는 것을 근거로 함양군에서는 벽송사에 있던 장승으로 추정하고 있다.

 

<변강쇠가>의 주요 등장인물은 옹녀와 변강쇠이다.

둘 다 살길을 찾아 돌아다니다가 만나서 부부가 되었다고 하고서 음녀 옹녀와 잡놈 변강쇠가 놀아나는 장면을 걸판지게 묘사해 음담패설의 극치를 이루었다.

특히 기물타령이라는 대목에서는 남녀의 성기를 자세히 그리는 데 대단한 솜씨를 발휘했다.

 

거듭되는 시련 때문에 최소한의 생존도 유지할 수 없는 유랑민의 처절한 처지를 우스꽝스럽게 그렸다.

그러나 이런 파격적인 웃음의 이면에 눈물겨운 사정이 있다. 여느 고대소설과 달리 불운을 돌려놓는 반전도 없다.

내용으로 보아 최하층민들 사이에서 전승되어 왔을 것으로 생각된다.

 

옹녀는 본디 평안도 월경촌 사람이다.

옹녀는 맞이하는 서방마다 줄줄이 죽을 팔자이다.

그러자 “마을에서는 이 년을 두었다가 우리 두 도(평안도, 황해도)내 ○ 단 놈 다시없고, 여인국이 될 터이니 쫓을 수밖에 없다”하여 쫓아낸다.

그러자 그녀는 “어허, 인심 흉악하다. 황 · 평 양서 아니며는 살 데가 없겠느냐. 삼남 ○은 좋다더라.”고 하면서 고향을 떠난다.


그녀는 중화, 황주, 동설령, 봉산, 서흥, 편산, 금주 떡전거리 등지를 유랑하다가 청석관에서 변강쇠를 만난다.

변강쇠는 천하의 잡놈으로 삼남에서 빌어먹다가 양서(평안도, 황해도)로 가는 중에 청석골 좁은 길에서 옹녀와 만난 것이다.

이들은 부부가 되어 청석관에서 살았다.

옹녀는 술장사를 하는 는 등 온갖 일을 마다않고 해서 돈을 조금 모으면 변강솨는 술 퍼마시고 계집질하고 노름질로 돈은 탕진하고,

밤낮 부부싸움이 벌어졌다.

그러자 옹녀는 지리산이 “土厚하여 生利가 좋다하니” 그리로 가서 山田이나 이루고 살자한다.

이리하여 지리산 첩첩한 깊은 골에 들어 빈집을 찾아 정착한다.

 

어느날 옹녀가 추위를 못이겨 변강쇠에게 땔나무를 해오라 한다.

게으른 변강쇠는 나무할 생각은 하지 않고 늘어지게 낮잠만 자고나서 어쩔 수 없이 “등구 마천 가는 길에” 있는 “朝官을 지냈는지 紗帽 品帶 갖추고 방울눈 주먹코에 채수염이 점잖은” 장승을 베어와 불에 땐다.

그러자 죄없이 쪼개지고 불태워진 장승 木神이 경기도 노들나루 지금의 노량진에 있는 조선 장승의 大方을 찾아가 억울함을 호소한다.

그러자 장승 대방은 조선 八道 장승들에게 통문을 보내 모두 불러들여 변강쇠를 징벌 할 것을 의논한다.

그리하여 변강쇠의 몸의 모든 구멍을 막아 죽이기로 결정한다.


명령을 받은 팔도의 장승들은 각각 맡은 대로 病 하나씩 등에 업고 벌떼같이 달려가서 변강쇠에게 병으로 도배를 한다. 

이름을 지으려 하나 만 가지가 넘어서 짓지 못한다 한다. 이리하여 변강쇠는 죽고만다.


휴천면 월평리 오도재에 변강쇠 옹녀 무덤이라는 무덤이 있다.

林道가 끊긴 뒤 지리산으로 300여m 올라가면 무덤 두개가 나타난다.

주인 없는 이 무덤은 1996년에 발견됐는데, 흙무더기가 높지 않고 잔디가 심어지지 않아 가묘 같다.

이곳은 200여년 전 지리산에 살았다는 변강쇠의 묘로 알려지고 있다.


원래는 변강쇠 묘만 있었는데. 함양의 변강쇠 옹녀 바로알기선양회에서 최근 그 옆에 옹녀의 가묘를 만들고 진흙으로 빚은 옹녀의 인형을 묻었다.

특히 무덤 근처에서 발견된 서낭당터는 변강쇠 살았다는 마을의 구전 내용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변강쇠 묘 부근에 맑은 물이 흐르는 옹녀샘이 있다. 모양새가 여성의 둔부같다.

이 옹달샘은 예부터 옹녀샘으로 불렸다.

이곳의 물을 마시면 정열이 샘솟는다는 말이 예부터 전해 왔다고 한다.




벽송사에서 서암정사 가는 길에 벽송사 장승을 다시 만들어 세웠다.


여장승 금호장군



남장승 호법대장군




서암정사 산문








 

 서암정사벽송사의 주지인 원응 스님이 한국전쟁 때 지리산에서 죽어간 원혼들을 위로하기 위해 조성했다고 한다.

원응 스님은 벽송사 중창에 몰두하던 1970년대 어느날 우연히 서암정사 터를 발견하고 주변 땅을 사들였다.

그런 후 1989년 6월에 홍덕희라는 석공과 함께 석굴법당 불사를 시작하여 2001년 완공하였다.

이리하여 30년 불사가 거의 마무리 됐다. 스님에 의해 벽송사가 중창되었고, 서암정사는 새로운 절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극락전, 나한전 등 석굴 속 바위벽과 천정에는 살아서 볼 수 있는 극락의 절경이 조각돼 있다.

 

서암의 연혁에 대해서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愚潭 丁時翰(1625~1707)은 1686년 함양에 있는 안국사에 머물렀는데,

“……西庵까지 걸어갔는데 거리는 벽송암에서 수리 가량이다.

지세가 높고 넓으며 지리산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 금대암과 다르지 않다”고 그의 <山中日記>에 기록하고 있다. 

 

















석굴법당에는 신을 벗고 들어가애 하는데,

신 벗는 것도 귀찮고,


전에 찍은 사진이다.

















벽송사 조금 아래에 있는 매점에서 점심,12시



매점은 문이 닫혔고,

문 앞 의자에서 점심을 먹었다. 


2011년 12월 1일, 그날도 비 엄청 왔다.

벽송사 공양간에서 우리 도시락 점심 먹게 해 달라고 했더니,

그 승려 "인연있는 곳으로 가시라"


그래서 우린 이 매점에서 밥을 먹었다.

고마운 매점 주인,

지금도 그분인지?












송문교에서 본 와룡대, 12시 5분.

와룡대에도 옛 사람들의 흔적이 남아있다.

가까이 가지 못햇으니 다음번을 위해서 남겨두는 게 좋겠다.




2011년 12월 1일, 와룡대에서

비 맞으며 캉캉?










엄천강의 멋쟁이 용유담, 3시 5분.

용유교에서 내려다 보았다.




정여창 고택, 1시 55분.




솟을대문에는 효자효부에게 하사하는 旌閭를 게시한 문패 4개가 걸려있다.




▪ 정여창고택의 문화재청 공식 명칭은 함양 정벙호 가옥(중요민속자료 제186호)이다.

이런 명칭은 지정당시 건물주의 이름을 딴 것이다.



사랑채







약간의 배흘림이 들어싰는 가둥머리에는 장식이 거의 없이 단정하다. 

 



안채로 들어가는 문




부녀자들의 공간 안채









정여창 고택(중요민속자료 제186호)은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에 있다.

개울을 따라 난 마을길을 쭉 들어가면 왼쪽으로 우물과 그 우물 자리를 표시하기 위한 종바위[鍾岩]가 있다.

이 우물은 개울(옥계천) 좌우 암반 위에 있던 샘물 다섯 개중의 하나였다고 한다.

마을이 배의 형국[行舟形]이라 우물을 파면 안 된다는 전설이 있어 마을 사람들은 이 다섯 개의 우물 말고는 일절 다른 우물을 파지 않았는데, 일제강점기 이를 무시하고 초등학교를 지으면서 우물을 판 뒤 마을이 점차 기울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우물 맞은편에 자잘한 돌로 포장된 골목길로 한참 들어가서 막다른 듯한 곳에 있는 높은 솟을대문 집이 ‘정여창 고택’이다.

이곳의 유적 명칭은 건물주의 이름을 따서 ‘함양 정병호 가옥’이라고 한다.

마당에서 솟을대문까지 박석을 깔아 돌을 밟는 발자국 소리로 손님이 온 것을 안다. 솟을대문 옆에 하마비도 있다.

솟을대문은 당상관만 가능하다. 이 솟을대문에는 효자효부에게 하사하는 旌閭를 게시한 문패가 네 개나 걸려 있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동향한 사랑채가 보인다.

 

3,000여 평의 대지 위에 사랑채, 안채, 별당, 가묘, 곳간 등 5개 건물이 샛담으로 구분되어 있다. 이 건물들은 대부분이 조선 후기에 중건되었다.  

 

사랑채에는 ‘忠孝節義’, ‘百世淸風’이라는 커다란 글씨가 붙어있다. 사랑채는 ㄱ자 팔작집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 집이다. 돌축대가 높직하고 추녀는 활주로 떠받칠 만큼 넓다, 툇마루 한쪽을 약간 높여 누각의 난간처럼 둘렀다. 사랑채의 높은 축대는 바닥이 높은 안채와 아래채에 수평을 맞추기 위해 쌓았으며 권위를 나타내기도 한다.

 


사랑채 앞마당은 돌을 모아서 산과 골짜기를 만들고 갖가지 나무를 조화롭게 심어 집터에 딸린 숲처럼 꾸몄다. 그러나 후대에 별 생각 없이 아무 나무나 마구잡이로 심은데다가 지금은 나무들이 웃자라 옛 모습과 많이 달라졌다.

 

사랑채 옆의 일각문을 거쳐 안채 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는데, 일각문을 들어서면 또 한 번 중문을 통과해야 한다.

남향한 一자형의 큼직한 안채는 경북 지방의 폐쇄적인 공간과는 달리 개방적으로 분할되어 있어 집이 밝고 화사하다.

덧난간이 있는 곳이 며느리 방이다. 일각문과 중문 왼쪽에 곳간채가 있다.

곳간의 건물은 땅을 파서 지면보다 낮게 한 것은 곳간 지붕이 사당 지붕보다 낮게 하기 위한 것이다.

안채 왼쪽에 아래채가 있고, 안채 뒤편으로 가묘와 별당, 안사랑채가 따로 있다.

 

사랑채는 정병호 씨의 고조부가 중건하였으며,

안채는 사랑채보다 건축 연대가 더 올라가 약 300년 전 청하현감을 지낸 先祖가 중건하였다고 한다.

요란한 치장이 없고 옛 손길이 그대로 배어 있는 세간들을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 

 


※ 鄭汝昌(1450~1504)은 조선 성종 때의 학자로 본관은 경남 하동이지만 함양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증조할아버지 정지의가 처가인 함양에 와서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함양 사람이 되었다.

자녀 균분 상속제가 지켜지던 당시에는 거주지를 옮길 때 처가나 외가로 옮겨가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아버지 정육을은 함길도 병마우후를 지냈고, 어머니는 목사 최효온의 딸이다.

 

그의 어릴 때 이름은 伯勖이었는데, 그의 아버지와 함께 중국의 사신과 만나는 자리에서 그를 눈여겨본 중국 사신이 “커서 집을 크게 번창하게 할 것이니 이름을 여창이라고 하라”고 했다고 한다. 호는 일부, 수옹이다. 

 

8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혼자서 공부에 힘쓰다가 김굉필과 함께 함양 군수로 있던 김종직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연구하였다.

그는 주로 성리학의 근원을 탐구하였으며 특히 <논어>에 밝았다.

1480년 성종이 행실이 바르고 경학에 밝은 사람을 구할 때 성균관이 그를 추천해 천거되었다.

성종 14년(1483)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고, 같은해 8월 성균관에서 理學에 뛰어나다 하여 또 다시 천거되었다.

그러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1486 모친상을 치른 후 지리산을 찾아가 진양의 악양동 부근 섬진나루에 집을 짓고 대[竹]와 매화를 기르며 평생을 살았다.

1487년에는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였고,

성종 21년(1490) 윤긍이 효행과 학식이 뛰어나다고 그를 추천하여 소격서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역시 자식된 자의 도리를 내세워 사양하였다. 그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예문관검열을 거쳐 시강원설서가 되었다.

한때 세자 연산군을 보필하며 <대학>을 강론하였으나 강직한 성품 때문에 총애를 받지 못했다.

 

연산군 1년(1495) 안음현감으로 있으면서 백성들이 과다한 세금 때문에 고통이 많다는 것을 알고 <便宜數十條>를 지어 시행하였다.

그는 일을 공정하게 처리하여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다. 또 고을의 총명한 젊은이를 뽑아 친히 교육하였으며 봄가을 養老禮를 행하였다.

 

1498년 무오사화 때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되었다가, 1504년에 죽었다.

갑자사화 때 剖棺斬屍되었다.

중종반정 후 중종 원년(1506) 도승지에 증직되었고, 1517년에는 우의정에 증직되었고, 광해군 2년(1610)에 문묘에 종사되었다.

그는 학문과 덕이 뛰어나, 우리나라 성리학사에서 김굉필, 조광조, 이언적, 이황과 함께 5賢으로 인정받고 있다.

 

정여창은 평소에 도가 없으면 먹을 것이 없고,

먹을 것이 없으면 백성이 없고 백성이 없으면 나라가 서지 못한다고 하여 나라의 근본이 백성임을 강조하였다.

이같은 왕도정치를 실현하려면 임금의 마음을 바르게 함이 근본이고 그 근본이 바르지 못하면 선정이 나올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남명은 지리산을 기행하여 기행문 <유두류록-남명집 권2>을 남겼는데,

지리산으로 가던 중 정여창의 옛 거처를 찾아 다음과 같이 썼다.


“陶灘에서 한 마장쯤 떨어진 곳에 정여창 선생의 옛 거처가 있었다. 선생은 바로 천령(함양) 출신의 儒宗으로 학문이 깊고 독실하여 우리 도학에 실마리를 이어 주신 분이다.”  

 










이 세 개의 돌은 삼신산을 상징한다고 한다.






2011년 11월 10일



2012년 7월 22일











송순주 전시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