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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일낮도보] [부산/ 2월 14일, 수요일] 지리산둘레길 2코스

추연욱 2018. 2. 14. 23:06



[평일낮도보] [부산/ 2월 14일, 수요일] 지리산둘레길 2코스




월평마을에서




11시 15분, 서림공원 근처 식당에 왔다.

동래에서 2시간 45분 걸렸다.




이른 점심을 먹고 시작하려한다.




이 길은 "이순신 백의종군로"이기도 하고,




그 치열한 추위, 이제 힘을 잃었다.

오늘 봄맞이 나온 것 같았다.




지리산둘레길 제2구간 시작점 서림공원









鎭西大將軍

防禦 大將軍



■ 서천리 서하동 돌장승(중요민속자료 제20호)

남원에서 운봉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서림공원이 있다.

이곳에 서림숲 또는 선두숲이라고 하는 당산이 있다.

당산거리 거리 양쪽에 남북으로 防禦大將軍과 진서대장군이 마주보고 서있다.


왼쪽 방어대장군은 2.2m로 깔대기 모양의 모자를 쓰고있다.

퉁방을 눈, 콧방울이 좌우로 넓게 벌어졌고 입술은 일자로 다물어 험악한 인상이다.

진서대장군 2.07m로 베레모 비슷한 모자를 쓰고있다. 

퉁방울 눈에 눈동자를 이중으로 새겼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이 다섯 개를 양각하였다.


<남원군지>에 의하면 진서대장군이 여자로 부부싸움을 하다가 남편한테 얻어맞아 목이 부러졌다고도 하고,

두 장군이 서로 싸우다가 목이 부러졌다고도 한다.목이 부러져 연결된 자국이 있다. 어디로 보나 남장승이지 여장승은 아니다.

언제 세웠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실상사 장승과 닮아 약 300년 전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진서대장군은 1989년에 도둑맞았다가 다시 찾았다.


운봉은 지리산 자락임에도 불구하고 농업생산이 풍부하여 삼한시대부터 군사적 요충지로 여러 세력들이 겨루던 장소였다.

왜구들이 진주를 거쳐 쳐들어오던 통로이며,

항상 외래 세력의 침입에 마음 졸이며 살던 운봉 사람들에게는,

장승은 풍요를 빌고 마을의 안녕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중요한 신앙의 대상이었다.

이 일대의 장승들은 농사로 사는 건강하고 굳센 할머니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서림공원 입구에 비석 8기가 늘어서 있다.

대부분 이 지역 단체장, 유지들의 업적을 기록한 공적비들이다.




감사 허후윤 청덕비






비머리에도 여러 개의 알터가 있다.

감사의 비에 누가 감히 아런 짓을 했을까?

어쩌면 그 자손들이 조상의 비에 알터를 만들고 조상에게 아들을 낳게 해 달라고빌었을 것이다.








그 중 가장 왼쪽 비석, 오른쪽 귀퉁이가 깨어진 비,


■ 박봉양 기념비 

운봉 사람 박봉양은,

1894년 갑오농민 전쟁 때 민보군을 조직하여 김개남 부대의 운봉, 함양 등지로의 진출을 막아낸 것을 기념하는 비이다.

비의 높이 2.5m 너비 1m 폭 30cm 정도이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훼손한 흔적이 보인다.

갑오농민전쟁이 평정된 뒤 이를 평가하는 역사적 시각이 달라 쓰러지기도 하고 다시 세워지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저 하나의 역사적 유물로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동학농민군(김개남 부대, 김개남은 없다)은 지리산 북부 영호남의 요충지인 운봉을 넘어 영남으로 진격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동학농민군은 11월 남원 산동방 부동촌까지 나아가 진을 쳤다.

운봉의 민보군 2천여 명은 관음재에 진을 치고 맞섰다.

동학농민군과 민보군의 싸움은 11월 14일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계속되었다.

이 싸움에서 수천여 명의 사상자를 낸 농민군은 남원으로 퇴각한 뒤 3천여 명의 병력으로 남원성을 굳게 지키고 나가지 않았다.

 

박봉양은 전주 병영의 지원을 받아 군세를 강화한 뒤 11월 25일 운봉을 출발하여 반암방 ‧ 원촌에 진을 치고 남원성 공격의 기회를 살폈다.

이를 알아차린 동학농민군이 선제공격을 감행하면서 28일부터 민보군의 남원성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되었다.

민보군은 남원성의 네 성문을 포위한 채 남문을 주공격 목표로 삼았다.

민보군은 성 주변에 섶을 쌓고 불를 질렀고, 대나무 사다리를 통해 성위로 올라 공격했다.

이로써 성이 함락되고 동학농민군은 북문을 통해 달아나 흩어지고 말았다.  



 



서하동 堂山祭壇


음력 정월 초하루 이곳에서 당산제를 지낸다고 한다.



비받침에 알터를 만들었다.










서림공원




지리산 둘레길 제2구간, 12시 10분.



지리산둘레길 2구간은,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동천리와 남원시 인월면 인월리를 잇는 길이다.

운봉읍 - 서림공원 - 북천마을 - 신기마을 - 비전마을 - 군화동 - 옥계저수지 - 흥부골자연휴양림 - 월평마을 - 인월면으로

이어지는 길로 10km쯤 된다.

오른쪽으로 바래봉, 고리봉을 잇는 지리산 서북 능선을을 끼고,

왼쪽으로는 고남산, 수정봉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을 바라보며 운봉고원을 걷는 길이다.

뚝방길에서 임도로 이어진다.


 




왼쪽으로 람천을 끼고 동쪽을 향해 간다.













1시 5분. 비전마을










御諱閣






어휘각은 이성계가 자신의 황산대첩을 기리고자 하여,

자신의 이름과 함께 전투에 참가한 장군들의 이름을 바위 한 면에 새겼다.

일제가 정으로 쪼아 알아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고종19년(1882)에 보호각을 세워 어휘각이라 하였다.



 
















파비각


파비각 안에는 두동강이로 잘라진 본디의 황산대첩비가 비스듬히 누워있다.








대첩비각


황산대첩비는 고려 우왕 6년(1380) 이성계가 황산 근처에서 왜구를 물리친 것을 기념해서 선조 10년(1577) 비를 세웠다.

비각은 헌종 8년(1677) 지었다.

고종 19년(1882)에 비각을 고쳐 지었다.

그 뒤 일제강점기 일제가 비를 깨부수고 글자도 알아볼 수 없도록 정으로 쪼았다.

1957년 비문을 다시 새겨 본디의 비 빋침 위에 세우고, 1973년에 새로 보호각을 지었다.



















■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 碑前마을

황산대첩비가 세워지고 나서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녔을 것이다.

그래서 비전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마을 이름이 되었을 것이다










명창은 동편제 창시자 송홍록,

고수는 동생 송광록일까?


송광록은 형 송홍록의 고수로 지내다가 뒤에는 형의 버금 가는 명창으로 등장한다.

판소리 200년 사의 가장 가장 많은 제자를 길렀으며,

판소리의 독보적인 지위에 있는 宋萬甲(1865~ 1939)은 송광록의 손자이다.




송홍록 생가




박초월 생가


여류 명창 朴初月(1915~1983)은 이곳에서 태어났다.












군화동 버스정류장, 1사 40분








吳德俊 將軍 功績記念碑











원명당 종범 대선사 부도탑, 1시 45분.







나무대각세존 석가모니비




















옥계저수지































흥부골자연휴양림 ,2시 45분.


























월평(달오름)마을, 3시 5분












































영월정


영월정 迎月亭은 전북 남원시 인월면 인월리에 있는 고려 후기의 정자이다.

고려우왕 6(1380), 당시 3도 도원수 이성계가 황산에서 왜구와 전쟁 중인 어느 날 밤 ,

너무 어두워 적을 탐지하기 어렵자 하늘을 우러러 달뜨기를 기원하였다고 한다.

그러자 밝은 달이 떠올라 적을 물리칠 수 있었는데, 이를 기리기 위하여 이 정자를 지었다고 한다.

상량문에 의하면 1960년 정월에 중건하였다.












람천 안에 "迎月臺"라 쓴 돌이 보인다.

글자 왼쪽 사각형으로 패인 곳은 비좌일 것이다.

이 바위를 비받침으로 한 '영월루'란 비가 있었을 것이다. 



2010년 2월 25일,

이때는 큰비로 람천 물이 불어 세 번째 글자를 알아보기 어려워,

"基"로 읽었는데, 틀렸다.

"臺", "영월대"다.




지리산둘레길 2구간 도보는 끝났다.


3시 20분, 이곳을 떠나,

함양 상림에 왔다. 3시 40분.





상림공원





















연리목 사랑나무, 느티나무와 개서어나무











화수정


花樹亭은  1972년 함양의 파평윤씨 종중에서 세웠다고 한다.

상림이 천연기념물(1962년 12월 3일)로 지정되고 11년이 지난 뒤다.

국가지정 기념물 안에 종중의 이름을 단 건축물을 세워졌다.

엄연한 문화재보호법 위반이다.

 

군 관계자는, “정자를 건립하던 당시 파평윤씨가 함양경찰서장으로 있어 가능했던 일”이라고 했다.

 

정자 건립 시기가 윤아무개 총경이 서장으로 재임한 기간(1971~74년)이다. 

1973년 5월 진주발 <동아일보> 기사에, 

"1973년 4월 윤 총경을 태운 함양경찰서 지프차가 산청의 도로에서 취객을 친 뒤 달아났다는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게 됐는데,

산청 경찰이 상황을 뒤집으려고 신고자인 유조차 운전자를 고문해 가해자로 둔갑시켰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사건은 박원순 서울시장이 쓴 <야만시대의 기록>에서 박정희 시대의 대표적 고문조작 사례로 기록돼 있다.

 

<한겨레 신문 > 참조






* 함양 이은리 석불


1950년 무렵 함양군 이은리의 냇가에서 출토된 것을 지금의 위치로 옮겨 놓은 것이다.

높이 1.8m의 석조여래좌상이며, 배 아랫부분이 심하게 훼손되었으나 광배와 대좌는 온전히 남아 있다.

몸체를 모두 감싼 광배에는 이중의 원형을 둘러 두광을 만들었고,

머리 주위에는 연꽃잎을 돋을새김 하였으며, 신광에는 당초무늬를 새겼다.

소발의 머리에는 육계가 납작하게 표현되었고,

순박한 표정의 얼굴에 비해 빈약해 보이는 어깨에는 통견의 옷자락이 U자형을 이루며 두툼하게 묘사되었다.

두 손은 떨어져 나갔는데, 팔꿈치 아래에서 끼우게 되어 있었던 듯 구멍이 나 있다.




思雲亭



* 사운정은 고운을 생각하는 정자라는 뜻이다.

최치원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고종 43년(1906) 후손들이 세웠다.




문창후최치원선생 신도비



* 文昌候 崔先生 神道碑는 상림 입구에 서 있는 각종 기념비, 유적비 들과 나란히 서 있다. 

상림을 조성한 최치원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23년 후손이 세웠다.



비빋침(龜趺)


















咸化樓



* 함화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짜리 팔작집으로 조선시대 함양읍성의 남문이었다.


일제강점기 도시계획으로 헐리게 된 것을 1932년 이곳 상림으로 옮겨 지은 것이다.

본디 ‘멀리 지리산을 바라본다’하여 望岳樓라 이름하였으나 상림으로 옮겨오면서 함화루로 바꾸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다음과 같은 김종직의 시가 실려있다.

 

“작년에는 내 발자취가 저 멧부리를 더럽혔구나.

망악루 위에서 다시 대면하니 무안도 하구나.

산신령은 거듭 더럽히게 될까 두려워하여,

흰 구름을 시켜 곧 문을 굳게 닫는구나” 





함화루 앞에 있는 두리뭉수리.











거대한 건물은 산삼전시관




학사루느티나무, 4시 25분.



* 학사루 느티나무(천연기념물 제407호)는 함양초등학교 옆에 있다.

높이 21m, 줄기 둘레는 9m에 이른다. 안내판엔 1000년 수령의 ‘천년목’이라 적었으나,

김종직(1431~1492)이 함양군수 때 학사루 옆에 심은 나무라고 한다.















2011년 11월 10일










學士樓



■ 학사루(유형문화재 제90호)

언제 처음 지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신라 말 최치원이 함양 태수로 있을 때 이 누각에 올라 시를 읊었다고 전하는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학사루라는 이름도 최치원과 인연이 있다고 생각하여 후세 사람들이 지었다.

현판 기둥에 내건 주련도 모두 최치원과 관련된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함양초등학교 자리는 본디 함양읍성의 객사가 있던 곳이다. 객사로 들던 2층 문루가 학사루다.

본디 옛 함양 동헌 자리였던 함양초등학교 뒤뜰에 있었다.

조일전쟁 때 불탄 것을 숙종 18년(1692)에 중건한 기록이 이전 복원할 때 발견되었으며,

1979년 현재의 군청앞으로 옮겨 복원하였다.

 

학사루는 무오사화와 관련이 깊은 곳이다.

조선 초기 영남 사림파의 종사로 명성이 높았던 金宗直(1431~1492)이 함양군수로 부임하여 학사루에 올랐다.

그때 고향이 남원인 유자광이 함양에 놀러 왔다가 써서 걸어 놓은 현판을 보고,

“어찌 이 따위가 여기에 시를 걸 수 있는가”라고 호통치며 현판을 떼어 불태워 버렸다.

학사루에서 일어난 이 현판 사건은 1498년 발생한 무오사화의 불씨가 되었다.




4시 30분, 이곳을 출발




7시 20분, 동래에 도착했다. 오는 길에 차가 좀 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