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루스트의 산문/ 이양하
프루스트의 산문
이양하(1904~1963)
어떤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생의 혐오와 신비한 견인牽引이 첫 설움보다 선행한다.
현실이란 결국 사람을 만족시킬 수 없는 것이라는 예감을 그들은 갖는 것이다.
바다는 언제든지 이러한 사람들을 매혹한다.
실지로 피로함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요 피로하기 전부터 벌써 휴식을 구하는 사람들,
바다는 이러한 사람들의 위안이 되고 격려가 되는 것이다.
바다에는 대지에서 보는 인간의 노작勞作의 흔적도 인간생활의 흔적도 없다. 거기는 아무것도 머무르지 아니한다.
그리고 지나가는 것은 또 모두가 겉잡을 새 없이 지나간다.
배가 바다를 횡단한다. 그러나 배 지나간 자국은 어떻게도 신속히 사라지는 것인지! 바다의 위대한 순결은 여기서 온다.
그것은 대지에서는 도저히 구할 수가 없다.
굳은 땅은 조금만 헐려 하여도 괭이가 필요하나 바다의 맑은 물은 여기 비하여 훨씬 취약하다.
물 위에서는 어린애의 조그만 발도 명랑한 물소리를 낼 수 있고, 깊은 이랑을 지을 수 있다.
물의 단일한 색조는 그 때문에 잠깐 깨진다.
그러나 모든 파문은 다시 잠자고, 바다는 천지가 창조되던 날의 정적으로 돌아간다.
지상은 길에 피곤한 사람, 또는 실지 길을 걷지 아니하고도 지상의 길이 어떻게 울뚝불뚝하고 평범한 것인가를 통찰하고 있는 사람도 이 바다의 푸른 길, 지상의 길에 비하면 훨씬 위험은 하나 훨씬 아름답고 불안하고 쓸쓸한 바다의 푸른 길에는 유혹을 느낄 것이다.
바다에 있는 모든 것이 훨씬 더 신비롭다.
인가도 나무도 보이지 아니하는 비인 바다의 들 위에 때때로 구름을 던져놓은 커다란 그림자,
하늘의 조그만 마을, 어렴풋한 나뭇가지까지가 신비롭다.
밤에도 쉬지 아니하고, 우리의 불안한 생활에 안면을 허락하고, 모든 것이 소멸되지 않을 것을 약속해주는 것의 매력을 바다는 가지고 있다. 바다는 불이 켜 있으면 고독을 알지 못하는 어린애의 양등洋燈과도 흡사하다.
바다도 땅과 같이 하늘에서 분리되지는 아니하였다.
바다와 하늘 사이에는 항상 색채의 조화가 있어 하늘의 색조의 미묘한 변화는 그냥 그대로 바다에 비친다.
낮에 태양 아래 반짝이던 바다는 저녁때가 되면 태양과 한가지로 죽는 것같이 보인다.
해가 지면 땅은 일시에 어두워지나 바다는 언제까지든지 애연하여 햇볕의 기억을 지니고 있다.
이것이 우울한 낙조, 잠깐 동안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마음이 황홀해진다.
기쁜 시각이다.
조금 있다 밤이 되어 하늘이 어두운 땅 위에서 슬프게 우러러보일 때, 바다는 아직 그윽한 빛을 발하고 있다.
어떤 신비로운 작용으로 그런지, 물결에 잠긴 태양의 어떤 화려한 유해로 말미암아 그런지 사람은 그것을 알지 못한다.
바다는 인간 생활을 연상시키지 아니하는 것이므로 우리의 상상도 신선하게 한다.
그리고 바다는 또 우리의 마음을 쾌활하게도 한다.
바다는 우리 마음과 한가지로 무한하고 무력한 동경, 끊임없는 실추失墜로 단속斷續되는 비약, 항상 변함이 없는 가벼운 탄식이기 때문이다.
바다는 음악과 같이 우리를 매료한다.
음악은 말과 같이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아니하고 인간에 관하여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도 없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영靈의 충동을 모방한다.
그리고 우리 마음은 이 충동의 물결과 한가지로 혹은 높이 솟고 깊이 떨어짐으로써 자기의 멸망을 잊고 자기의 우수와 바다의 우수 사이의 내면적 조화 가운데 위안을 발견한다.
바다는 말하자면 바다의 운명과 물상의 운명을 혼효하는 것이다.
나는 푸루스트를 잘 알지 못한다.
나는 아직 유명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도 다 읽어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의 젊었을 때의 짧은 에세이를 모아 놓은 <기쁨의 그날 그날>이라는 책은 나의 항상 애독하는 책의 하나이다.
나는 될 수 있으면 이러한 글과 이러한 글을 이루는 사람의 마음의 비밀을 알았으면 한다.
그리고 또 어떻게 생각하면 이 한 권의 에세이를 읽어두는 것이 그의 소설과 친해지는 데 좋은 수업이 되지 아니할까 한다. 왜 그러냐 하면 그의 소설에 있어 매력 있는 모든 것이 이미 이 짧은 에세이들 가운데 움트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 번역해본 것은 그의 <바다>라는 제목의 글이다.
독자는 혹 여기 뛰노는 물결이 없고 독자의 머리카락에 나부끼고 독자의 비공과 가슴을 벌어지게 하는 시원한 바람이 없는 것을 불만히 생각할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러한 바다를 말하는 것은 대개 프루스트로서는 흥미없는 일이요, 또 그러한 바다를 말할 처지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는 아마 파리 한복판 깊은 커튼을 드리운 그의 서재에 들어앉아, 그의 기억의 바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한 인상으로서의 바다를 회상하고 분석하여보는 것일 게다.
따라서 이 바다는 보통 일반인의 바다가 아니요, 프루스트의 마음 모든 것을 분석시키고 변용해놓고야 마는 이상한 프리즘을 통과한 바다다.
이러한 바다를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은 물론 각 사람의 기호에 달린 일이다.
그러나 물 가운데 잠긴 하늘이 새로운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과 같이 여기도 프루스트의 마음을 거쳐 새로운 아름다움,
독특한 아름다움을 갖춘 바다가 있다는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야심은 광영보다 사람을 취하게 하는 것이다.
욕망은 꽃을 피우나 소유는 모든 것을 시들게 한다. 인생을 사는 것보다 인생을 꿈꾸는 편이 낫다.
설혹 인생을 산다는 것이 역시 인생을 꿈꾸는 것이라고 하여도,
그것은 직접 인생을 꿈꾸는 데 비하면 훨씬 신비롭지 못한 동시에 훨씬 명료하지 못하고,
반추하는 동물의 희미한 의식 가운데 산재하는 꿈같이도 취약한 둔중한 꿈을 가지고 꿈꾸는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각본은 극장에서 연출되는 것보다 서재에서 읽는 편이 더 아름답다.
불후의 연인을 그려낸 시인은 흔히 하숙의 평범한 하녀밖에 알지 못하였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탕자는 또 이와 반대로 그들이 보낸 생활이라고 하느니보다 생활이 그를 이끌었다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한 편이니만큼 생활이라는 걸 생각하려야 그 방도를 알지 못한다.
나는 몸이 약하고 상상력이 지극히 조숙한 열 살 되는 소년을 안다.
그는 자기보다 나이 많은 소녀에게 순진한 사랑을 바쳤다.
그는 그 소녀가 지나가는 것을 보려고 언제든지 창가에 서 있곤 하였다.
그는 그 소녀를 보지 못하면 울고, 보면 또 봤대서 울었다.
그가 그 소녀 곁에서 지내는 순간은 지극히 드물고, 또 지극히 짧았다.
그런데 그는 침식을 잊어버린 어떤 날 창에서 몸을 던졌다.
사람들은 그가 처음 죽은 것은 소녀에게 가까이 갈 수 없는 것을 절망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사실은 이와 반대로 그가 죽은 것은 그가 그 소녀와 장시간의 대화를 한 뒤에라는 것이 판명되었다.
소녀는 그에게 지극히 친절히 대하주었던 것이다.
그래 사람들은 이렇게 상상하였다.
요컨데 그는 이러한 도취를 다시 거듭할 기회가 없을 것을 생각하고 삭막한 여생을 버린 것이라고.
그러나 그가 그의 동무의 하나에게 때때로 고백한 바로 미루어보면,
그는 그의 소위 그 꿈의 여왕을 만나볼 때마다 일종의 기만을 느끼곤 하였다고 생각이 된다.
그러나 그 소녀가 가버리면 곧 그의 풍부한 상상이 옆에 있지 아니하는 소녀 위로 달려 다시 만나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그는 그 이외의 기만의 이유를 언제든지 사정事情의 결함 가운데 찾으려 하였다.
최후에 만났을 이때 그는 이미 성숙한 공상에 이끌려 그가 아직 회의하고 있던 그의 연인을 최고의 완전성에까지 높여놓았었다.
그리고 작별한 후 이 완전치 못한 완전성을 그가 생사를 도賭하던 절대적 완전성과 비교하여 보고는 아주 실망하여 마침내 창에서 몸을 던져버린 것이다.
그후 그는 바보가 되어 오랫동안 살았다.
그리고 그 추락에서 얻은 것은 영의 망각, 사고력의 망각, 만나도 알아보지 못하는 연인의 말과 망각이었다.
소녀는 간청도 받고 위협도 받았으나 그와 결혼하여 그에게는 이렇다 할 아무런 보람도 없이 수년 후에 죽고 말았다.
인생은 이 소녀와 방불하다.
우리는 인생을 꿈꾼다. 그리고 그것을 꿈꾸기 때문에 인생을 사랑하는 것이다.
인생을 살려고 해서는 아니된다. 인생을 살려고 하면 이 소년과 같이 치둔癡鈍 가운데 몸을 던지지 아니하면 아니된다.
물론 이 소년과 같이 돌연히는 아니라고 하여도.
왜 그러냐 하면 인생에 있어서는 모든 것이 우리의 알지 못하는 뉘앙스로 차차 하강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열 살쯤 되면 사람은 벌써 꿈을 인정치 아니하거나 꿈을 아주 버리거나 한다.
그러고는 소와 같이 그때그때의 먹을 풀을 위하여 살아간다.
그러나 죽음과의 결혼에서 우리의 의식적 불후성이 탄생하 수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를 누가 알리요.
이 글에는 제목이 없다.
별로 설명의 말을 붙일 필요도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다만 한 가지 여기 있는 소년의 이야기는 비록 현실미는 희박하나 지드(앙드레 지드)로 하여금 찬탄해 마지아니하게 한 프루스트의 치밀하고 미묘한 관찰의 일단이었다는 것만을 지적해둔다.
송명희 엮음, <이양하 수필 전집>, 현대문학, 2009.
이 글은 1947년에 출판된 이양하의 제1수필집 <이양하 수필집>에 수록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