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백산 자락길/ 제1자락 답사 자료- 소수서원, 죽계구곡, 비로사
소백산 자락길/ 제1자락 답사 자료
영주 · 순흥 지역은, 삼한시대에는 진한 12국의 하나인 己柢國이었다고 한다.
1C 말에서 2C 초 신라가 이곳을 차지하여 군사적 요충지가 되었다.
5C 한때 고구려의 수중에 들어갔다가 6C 말부터 완전히 신라땅이 되었다.
<삼국사기>, 잡지 제4, 지리2 조에, "본디 고구려의 及伐山國을 경덕왕이 개명하였는데, 지금은 興州라 한다"라 하였다.
삼국통일 후에는 이곳에서 일어나는 반신라적 세력을 순화하기 위해 의상대사가 이곳으로 와서,
부석사 · 초암사 · 성혈사 · 비로사 등을 창건하여 화엄학을 펼쳤다.
고려 때에는 제25대 충렬왕(1274~ 1308) · 충숙왕 · 충목왕의 胎를 이곳에 연이어 묻어 순흥부로 승격되었다.
조선 태종 14년(1414)년에는 도호부가 되었다.
조선 초 유학이 지배이념으로 등장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 소수서원이 통일신라 때 창건된 宿水寺를 쫓아내고 이 자리에 들어섰다.
조선 세조 3년(1457) 금성대군이 이곳에서 단종복위운동을 일으키자 순흥도호부는 폐지되고, 풍기 · 봉화 · 예천으로 나뉘어졌다가,
숙종 9년(1683) 단종이 복위되면서 다시 순흥도호부로 승격되었다.
1. 선비길
■ 숙수사는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현재의 소수서원 자리에 있었다.
연혁은 전하지 않고,
유물로 보아 통일신라 때 창건된 것으로 보인다.
유물로는 당간지주(보물 제59호), 석조불상대좌, 금동불상 25위가 있다.
석조불상대좌 역시 통일신라 때의 것으로 보이고,
당간지주는 통일신라 때의 것으로 이 절을 창건하면서 세운 것으로 보인다.
■ 당간지주(보물 제59호)는 높이 3.65m로 두 지주가 마주보고 뻗어있다.
바깥면 중앙에 세로로 띠선을 새긴 것 말고는 장식이 없다. 기둥 끝으로 갈수록 조금씩 가늘어지다가 맨 끝을 둥글게 마무리했다.
당간을 받치도록 원호를 새긴 댓돌이 지주 가운데 남아있다.
1953년 12월 소수서원 곁에 고등공민학교를 짓는 공사를 하던 중에,
당간지주에서 북쪽으로 150m쯤 떨어진 곳에서 손바닥만한 크기의 금동불상 25위가 발굴되었다.
불상들은 지름 60㎝에 높이가 75㎝를 넘는 항아리에 담겨 있었다. 항아리는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 불상들은 국립대구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데, 불상은 6세기 후반~8세기에 제작된 것들이다.
여래상, 보살상, 반가사유상, 탄생불, 神將상, 공양자상 등으로 다양하다.
작은 것이 6.5㎝, 큰 것이 17.5㎝로 한 손에 잡힌다.
■ 大成至聖 文 宣王 殿座圖(보물 제17호)
공자를 향한 여러 성인과 제후들을 그렸다. 문묘나 향교의 동, 서후에 위패를 봉안하듯이 인물을 배치하였다.
■ 숙수사터 출토 금동여래입상은,
7C 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높이는 14.8cm다. 국립대구박물관에 있다.
민머리에 둥근 육계가 솟아있고, 얼굴에는 통통하게 살이 올라 있다.
지긋이 감은 눈과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머금어 정적인 분위기가 감돈다.
귀는 적당한 길이지만, 목은 원통형이어서 다소 불안정한 느낌을 준다.
사각형의 긴 신체와 시무외 · 여원인을 맺은 양손은 현실적인 비례로 안정감이 있다.
배 부분에서 물결처럼 이어지는 계단식의 타원형 주름은 한쪽으로 비껴내려 변화를 주었으며,
주름과 주름 사이에는 깊은 골을 두어 약간 투박하면서도 강직한 느낌을 준다.
가슴이 U자 모양으로 크게 열린 大衣 안쪽으로 내의가 보이나 띠매듭은 없다.
왼쪽으로 치우쳐 내려오는 대의 자락은 발목 윗 부분에서 짧게 끝나고 그 아래로 치마[裙衣] 자락이 드러났는데,
이는 왼쪽 어깨와 팔을 감싸고 넘어가는 대의 끝자락과 함께 7C에 주로 보이는 착의법이다.
연꽃대좌에는 고구려 불상의 영향이 보인다.
폭이 좁고 가운데가 볼록하게 올라왔으며 끝이 날카롭게 반전하고 있는 연꽃잎의 모습은,
연가칠칠년명 금동여래입상의 연화대좌와 비슷하다.
7C 전반 무렵 중국의 북제 · 북주 양식과 고구려 양식의 불상을 토대로 아주 세연된 불상을 만들었음을 이 불상을 통해 알 수 있다.
강우방, <불교조각, 1, 삼국시대>, 솔, 2003, 226쪽.
불상들이 항아리에 담겨 땅 속에 묻혀있는 까닭을 김재원 박사는 몽골의 침입 탓으로 보았다.
1232년 8월 사르타크[撒禮塔]가 군사 1만 명을 이끌고 침입했다. 이것이 몽골의 제2차 침략이다.
이때 몽골군 별동대는 남쪽으로 내려가 대구 근방의 부인사에 들어가 불을 질렀다. 이 절에 보관되어 있던 초조대장경이 불타버렸다.
1235년 탕구[唐古]가 이끄는 제3차 침입으로 4년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듬해 몽골군 한 부대는 경주에 들이닥쳐 황룡사와 9층탑도 불태워버렸다. 황룡사 동종은 녹여 무기를 만들어 썼을 것이다.
특히 고종 41년(1254) 차라다이[車羅大]가 몽골군 5000명을 이끌고 쳐들어온 제6차 침입 때는,
사망자는 헤아릴 수도 없고, 사로잡힌 사람이 20만 6000명(<新元史)>이 넘었다 한다.
숙수사도 이 때 불타고, 승려들도 모두 죽거나 잡혀가, 훗날 불상을 수습할 사람조차 없었을 것이라 보았다.
또 당시 김원룡 연구관도 승려들이 전란을 피하여 불상을 땅을 파 묻고 절을 떠났을 것이라 보았다.
그런데 고려시대 문신 임경식(1099~1161)의 墓誌에는 아직 숙수사가 건재한 것으로 볼 수 있는 대목이 나온다.
한편으로 주세붕의 문집에는 안향이 이곳에서 독서했기 때문에 사당을 짓고 서원을 창건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안향의 어린시절에는 숙수사가 건재했다는 뜻이다.
이렇게 보면 숙수사는 13세기 중반 이후의 어느 때 폐사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선 중종 37년(1542) 풍기군수 周世鵬(1495~ 1554)이 이 절터에 소수서원을 세웠다.
■ 우리나라 최초의 書院 白雲洞書院
우리나라 최초의 賜額書院 紹修書院(사적 제55호)
16C, 士林들은 여러 차례 사화를 당해 죽거나, 쫓겨나곤 하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승리를 거둔다.
그것은 향촌을 배경으로 자신의 세력을 확장할 수 있는 여러 조직체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 중 하나가 書院이다.
본디 유학은 교육을 중요시 하는 까닭에 고려 말 유학이 확산되면서 지방 유학자들이 향촌에다가,
개인의 재산을 털어 書堂 혹은 書齋라는 사립학교를 세워 제자들을 가르쳐 왔다.
16C 사림은 이러한 전통을 계승하여 학교의 조직과 운영을 강화하고,
여기에 선배 유학자들을 제사지내는 祠堂기능을 통합하여 서원이라는 교학기구를 창설하였다.
조선 중종 36년(1541) 풍기군수로 부임한 周世鵬(1495~ 1554)은
이듬해 8월 이 고장 출신 성리학자 晦軒 安珦(1243~ 1306)이 살던 경상도 순흥면 백운동에,
晦軒祠라는 안향의 사당을 짓고 위패를 모셨다.
이듬해 사당 동쪽 숙수사터에 우리나라 최초의 백운동서원을 세워 제자들의 교육장소로 삼았다.
주세붕 영정(보물 제717호)
서원의 설립 동기는, 주세붕이 편찬한 <竹溪志>의 서문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교화는 시급한 것이고, 이는 어진이를 존경하는 일부터 시작되어야 하므로, 안향의 심성론과 敬 思想을 수용하고자
그를 받들어 모시는 사당을 세웠고, 겸하여 유생들의 藏修(책을 읽고 학문에 힘씀)를 위하여 서원을 세웠다."……
서원의 이름 "백운동"은,
서원의 자리가 송나라 때 朱子(朱熹, 1130~ 1200)가 세운 白鹿洞서원이 있던 여산 못지 않게 구름, 산, 강 등 경치가 빼어난 곳이라 하여 이렇게 이름지었다.
1548년 10월 退溪 李滉이 풍기군수로 부임해 와서 백운동서원을 중심으로 강학을 장려했으며,
1549년 1월 임금에게 글을 올려 서원의 정식 이름을 내려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명종은 대제학 신광원에게 서원을 이름을 짓게 하여,
"旣廢之學 紹而修之 이미 무너진 유학을 다시 이어 닦게 했다"의 뜻으로 "紹修"라 하고,
명종 5년(1550) 2월에 임금이 손수 쓴 "소수서원" 현판과 토지, 노비를 내려 주었다.
왕이 서원의 현판을 내려주는 것은 국가의 공식적인 승인을 의미한다.
이리하여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로 국가의 공인을 받은 賜額書院이 되었다.
조선 제4대 세종대왕(1418~ 1450 재위)은 즉위하던 해에 서원을 설립하는 사람에게 포상하겠다고 공표했다.
세종대왕은 아마도 중국의 백록동서원을 염두에 두고 이를 장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서원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퇴계는 계속 서원 건립운동을 추진했다.
1553년 경상도 영천에서 유생들이 서원 건립에 나섰다.
圃隱 鄭夢周 (1337~ 1392)는 영천 부래산 아래에서 태어났다.
당시 그의 생가터는 몹시 퇴락했는데, 유생들이 가묘를 짓고 서원을 설립해,
정몽주의 충절을 기리고 풍속을 교화한다는 취지를 알렸다.
유생들은 가묘와 서원을 완성한 뒤 소수서원의 예에 따라 사액과 토지를 내려 달라고 요청했다.
조정에서는 몇 달 동안 토의를 거쳐 사액을 결정했다.
송나라 주희가 세운 백록동서원의 경우처럼 서원은 지명에 따라 이름을 짓는 것이 좋겠다하여 영천의 옛 이름인 臨皐를 따서,
임고서원이라는 사액을 내려 주었다.
임고서원은 두 번째 사액서원이며, 정몽주의 위패를 모신 첫 번째 서원이 되었다.
이후 서원의 이름은 지명을 따르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처음 백운동서원이 설립된 1543년에서 조일전쟁 직후인 선조 40년(1607)까지 전국에 걸쳐 75개가 설립되었고,
사액서원은 20개나 되었다.
이 중에 경상도에 37개 소로 가장 많고,
그 다음 전라고, 충청도 경기도 순이었다.
평안도에는 5개 소, 함경도에는 2개 소였다.
선조 연간에는 士林이 득세하면서 당쟁이 일어나자 자기 세력을 기르기 위해 마구잡이로 서원을 설립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사액서원만도 100개를 넘었으며,
18C에는 700여 개 소에 이르렀고,
고종 때는 1천여 개 소나 되었고, 그 중 삼 분의 일이 사액서원이었다.
서원은 정치 투쟁과 여론 형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같은 서원에 드는 사람은 官界에 나가서도 같은 패거리가 되었다.
조선 고종(1863~ 1907) 때 대원군은 영조 · 정조시대의 서원개혁정책을 계승하여 서원철폐를 단행하였다.
당시 서원은 경제적으로 면세 · 면역의 특권을 누려 국가 재정을 악화시켰고, 黨論을 유지하면서 왕권을 견제하고 있었다.
고종 2년(1865) 노론의 정신적 지주인 만동묘를 철폐하였으며,
1868년에는 사액되지 않은 서원 1천여개 소를 철폐하여 납세하도록 명령하였으며,
1871년에는 사액서원 47개 소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철폐하였다.
물론 지방 유림의 완강한 반발이 있었으나,
"백성을 해치는 자는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 해도 내가 용서하지 않는다"라 하며 단호히 밀고 나갔다.
■ 서원의 구조
선현에 제사지내는 사당은 가장 뒤쪽에,
강의와 집회 장소인 강당은 중심에,
강당 앞 양쪽에 원생들이 숙식하는 東齋와 西齋를 배치하였다. 이 세 가지가 기본 건물이다.
그래서 서원의 구조를 前學後廟라 한다.
그밖에 서적을 펴내는 장판고, 서적을 보관하는 서고,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고,
관리와 식사를 준비하는 사택, 창고 등이 있다.
주변에 누각을 세워 시회를 열거나 대화를 나누는 장소로 이용했다.
건물은 남북을 중심축으로 하여 동서로 대칭을 이루었으며, 주변 경관과 조화를 이루었다.
정문과 담장을 둘러 경계를 표시하고 사당 입구에는 중문을 두어 출입을 통제했다.
건물을 검소하고, 단순하게 지었으며, 단청은 사당에만 했다.
■ 소수서원의 배치
1. 정문 志道門으로 들어서면 먼저 강당인 명륜당(보물 제1403호)이 나타난다.
원생들이 강의를 듣는 강의실이다. 강당은 서원의 중심 건물이다.
동서로 길게 앉아있는 東向의 건물로 정면 4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집이다. 넓은 마루를 중심으로 온돌방이 딸려있다.
"白雲洞"이란 현판이 걸려있고, 대청 북쪽에 명종의 친필인 "紹修書院"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명륜당과 사당은 서원 창건 당시에 건립된 조일전쟁 이전의 건물로 역사성과 건축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4년 5월 1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소수서원 정문 지도문
강당 명륜당
2. 그 위의 日新齋와 直方齋는 원생들이 기거하는 동재와 서재다.
직방재는 원장실이다.
현판은 둘이지만 집은 이어진 한 채이다.
가운데 각각 한 칸짜리 대청이 있는 양 옆으로 온돌방이 있다. 좁은 툇마루를 앞에 두고 한 칸짜리 방들이 칸칸이 나뉘어져 있다.
3. 그 오른편 개울 쪽으로 ㄱ 字로 앉은 學求齋와 至樂齋가 있다.
4. 왼쪽 담장 안에 사당 紹修書院 문성공묘(보물 제1402호)가 있다. 유일하게 단청을 했다.
정면, 측면 3칸의 맞배지붕집으로 서쪽에 있다.
죽은자에게는 서쪽이 상석이다. 최초의 서원이어서 그런지, 전학후묘라는 서원 구성의 기본원칙이 지켜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안향을 모셨는데, 뒤에 안축과 그의 동생 安補(1302~ 1357) · 주세붕을 함께 모셔 제향한다.
사당의 외삼문 중 가운데 문은 열지 않는다. 옆의 협문으로 출입한다.
가운데 문은 위패를 다시 모실 때만 연다.
사당에서는 일년에 두 차례 2월, 9월 享祀를 지낸다.
향사 때 주세붕이 지은 경기체가 <정동곡>에 모심기노래 곡을 붙여 부른다. 다른 곳에는 없는 특별한 것이다.
향사는 엄격한 격식과 절차에 따라 수행되었으며, 참여자도 엄격하게 선발하여,
靑衿錄(성균관, 향교, 서원 등에 있던 선비들의 명부. 옛날 중국 선비들이 청백색 깃을 단 옷을 입은데서 유래한 명칭이다. 청금록에 오르면 유림에서 동료로 인정받고, 특권을 누린다)에 기록했다.
5. 사당 뒤에는 책을 보관하는 藏書閣,
그 뒤에 제사 때 음식을 준비하는 典祀廳이 있다.
6. 서둰 뒤쪽의 허함을 보충하기 위해 소나무를 심어 學者樹라 한다.
7. 당간지주 옆에 있는 敬濂亭에 올라 보면,
죽계천 건너편 바위에 "白雲洞"이란 흰 글씨와, 붉은 칠을 한 "敬" 자가 보인다.
이 바위를 敬字岩이라 한다.
"敬"은 "敬以直內 義以方外 경으로써 마음을 곧게 하고 의로써 밖으로 드러나는 행동을 바르게 한다"를 한 글자로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본래의 뜻과는 다른 이야기를 전한다.
주세붕이 이 절을 헐고 소수서원을 세울 때 이 절의 불상들을 죽계천 깊은 곳에 버렸다.
그러자 그때부터 밤마다 불상들이 뛰어올라 유생들이 그 소리 때문에 불안하여 공부를 할 수 없었다.
이 소문을 들은 주세붕이 부처님을 공경한다는 의미에서 바위에 "敬"자를 써서 자신의 경솔함을 뉘우쳤다.
그 뒤부터 불상들은 떠오르지 않았고, 사람들은 이 비위를 "敬字岩"이라 했다.
8. 죽계천 건너 敬字岩 옆에 취한대란 정자가 있고, 정자 오른쪽 숲속에 돌탑이 있다.
취한대는 퇴계 이황이 지었다. 공부에 지친 선비들이 쉬는 곳이다.
본디의 건물은 없어지고 터만 남을 것을 근래 복원했다.
■ 돌탑은 인근 청구리 사람들이 해마다 정월보름날 모여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를 지내는 곳이다.
■ 安珦(1243~ 1306)
충렬왕(1274~ 1308) 때 經史敎授都監을 설치하여 經學과 史學을 장려하고 유교 교육기관인 國學과 공자 사당인 文廟를 새로 지어 유교 정치로 나가는 조치를 한다.
이때 유교 진흥에 앞장 선 이가 안향이다. 그는 원나라에서 성리학을 수입한 최초의 학자이다.
■ 안향 영정은 국보 제111호이다.
충숙왕은 1018년 안향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궁중에 있는 원나라 화공에게 명하여 안향의 영정을 그리게 하였다.
현재 영정각에 있는 안향의 영정은 조선 명종 때 고쳐 그린 것이다.
■ 청다리는 죽계천 상류 내죽 버스정류장 앞에 있다.
다리 앞에 있는 비석에 "康熙庚寅五月 霽月橋 숙종 36년(1710) 5월에 세운 제월교"라 씌여 있다.
1966년 시멘트 다리가 놓이기 전에는 두 해마다 새로 놓는 나무다리였다.
이곳 사람들은 청다리라 부른다.
※ 이 다리에는 두가지 사연이 있다.
"너는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는 말의 원조라 한다.
청다리 근처 서원에는 공부하러 온 유생들과 이 유생들을 뒷바라지하는 처녀와 정분이 나서 아이를 낳게 되면,
유생은 처녀와 짜고 부러 다리 밑에 아이를 버리라 해놓고 자기가 우연히 다리를 지나다 그 아이를 주운 것처럼 했다.
그리고 아이를 본가에 데려가서는 자기 아이임을 감추고 다리 밑에서 불쌍한 아이를 주웠다며 기르게 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 청다리를 밤에 건너려면 동백꽃을 입에 물고 소꼬리를 붙들고 건너야 한다는 속설이 있다.
동백꽃은 청다리에 나오는 귀신이 붉은 꽃을 보고 해꼬지를 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소꼬리는 무서워서 제대로 걸음을 떼지 못하는 사람이 붙잡고 가기 위한 것이라 한다.
그 사연은 청다리 조금 못미처 왼쪽 원단촌 마을에 있는 금성단과 관련된다.
금성대군 단종복위운동과 관련되어 죽은 많은 사람들의 원혼이 청다리 근처를 떠돈다는 것이다.
■ 錦城壇(경상북도 기념물 제93호)은 금성대군(1426~ 1457)에게 제사지내는 곳이다.
금성대군은 세종대왕의 여섯 째 아들이며, 세조의 동생이다.
금성대군은 사육신들의 단종복위운동에 연루되어 유배지를 떠돌다가, 마침내 이곳으로 귀양와 위리안치 되었다.
그때 단종은 영월 청령포에 위리안치 되어 있었다.
금성대군은 순흥부사 이보흠과 함께 모의하여 고을 군사와 향리를 모으고 경상도 사족들에게 격문을 돌리는 등 단종 복위운동을 꾀했다.
그러나 누군가의 밀고로 발각되어 죽임을 당했다.
또한 그에게 동조했던 많은 선비들도 희생되었다.
이 사건이 1457년에 일어난 丁丑之變이다.
이로 인해 흥주도호부(순흥)는 폐지되었다.
그후 225년이 지난 숙종 9년(1683) 순흥도호부는 복원되었고,
금성단은 단종이 복위된 뒤인 숙종 37년(1711)에 순흥부사 이명희가 왕의 윤허를 얻어 설치했는데 모두 3단으로 되어있다.
상단은 금성대군, 우단은 순흥부사 이보흠, 좌단은 모의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한 사람을 제사지내는 곳이다.
해마다 봄, 가을에 향사를 지낸다.
영월 사람들이 단종은 태백산 산신이 되었다고 믿었듯이,
순흥 사람들은 소백산 산신령이 되었다고 믿었다.
■ 은행나무 鴨脚樹는 흥주도호부(순흥)가 폐지될 때 불타 죽었다가 200년 뒤 순흥도호부가 복원되자 다시 살아나 1200살이 되었다.
잎사귀 모양이 오리발 같다고 해서 얻은 이름이다.
지금도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면 눈물을 흘린다는 이야기도 있다.
■ 단산면 단곡3리(웃질말)의 두렛골 서낭당은 순흥에서 고치령으로 가는 옛길 장고개를 넘어가는 12자락길에 있다.
두렛골 서낭제는 금성대군을 당신으로 모시는 동제이다.
공식적인 제사와는 별도로 금성대군과 단종 복위운동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한 이들의 넋을 기린다.
매년 정월 대보름 새벽 2시에 제사를 지낸다.
또 순흥부가 부활한 것을 경축하고 줄다리기도 벌인다.
500년이 넘도록 한해도 빠뜨리지 않았다고 한다.
제물은 하늘에 제사를 올릴 때나, 임금에게 쓰는 황송아지이다.
송아지에 깍듯이 예우하고 "어른님, 대군님, 양반님" 등으로 부른다.
■ 순흥향교는 고려 충렬왕 30년(1340)에 세워졌다가, 정축지변(단종 복위운동)으로 없어졌다.
그후 조선 죽종 9년(1683) 단종이 복권되고, 순흥도 다시 도호부로 승격되면서 향교도 다시 세웠다.
향교는 공자를 비롯한 성현들께 제사지내고, 지방민을 교육하기 위하여 나라에서 세운 공립 중등교육기관이다.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향 기능만 남아있다.
영주에는 영주향교, 풍기향교, 순흥향교가 있다. 순흥향교는 이 지방에서 가장 오래된 향교이다.
■ 순흥저수지는 송림마을 앞 죽계천을 막아 만든 작은 저수지다.
송림마을 앞에 있어 송림호, 배점마을 앞에 있어 배점저수지라고도 한다.
2. 구곡길
■ 삼괴정과 배순정려각
지금은 폐교된 배점분교 앞에 나이 600살쯤 되는 느티나무 세 그루가 서 있어 三槐亭이라 한다.
마을 사람들의 쉼터이다.
이곳에 조선 중기 이 마을에서 대장간을 운영하던 배순이란 사람의 정려비(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79호)가 있다.
대장쟁이의 아들 배순은 천민 출신이어서 공부를 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매일 소수서원까지 걸어가 명륜당 문밖으로 흘러나오는 유생들의 글 읽는 소리를 듣고,
마당에서 꼬챙이로 글을 써 가며 어깨너머 공부를 하였다.
여기서 강의를 하던 퇴계 선생이 이를 가상히 여겨 안으로 불러들여 유생들과 같이 공부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배순은 성리학의 대가 퇴계의 유일의 천민제자 되었다.
퇴계 선생이 돌아가자 배순은 삼 년 상복을 입었으며,
뒷날 선조대왕이 돌아가자 매월 朔望에 뒷산에 올라 궁성을 향해 곡제사를 지냈다.
이 소문이 궁 안에까지 알려지자 나라에서 정려를 내렸다.
■ 죽계와 죽계구곡
초암사에서 배점리로 흘러내리는 계곡을 竹溪라 한다.
이 물은 소백산 국망봉 서쪽 석륜골에서 나오는 물과 비로봉 동쪽 下伽洞에서 흘러온 물이 중봉 아래서 만난다.
"榮川 서북쪽 順興府에는 죽계가 있는데, 소백산에서 흘러 나오는 물이다. 들이 넓고 산이 낮으며 물과 돌이 맑고 밝다.
상류에 있는 백운동서원은 文成公 安珦(安裕)을 제사하는 곳이다.
명종 때 부제학을 지낸 주세붕이 풍기 원으로 있으면서 창설한 것이고, 이것이 우리나라 서원이 생긴 시초이다.
서원 앞에 있는 누각은 시냇가에 위치하여 밝고 넓으며, 온 읍의 경치를 완전히 차지하였다.
이 두 고을의 시내와 산의 형세와, 토지와 生利가 안동 여러 곳의 유명한 마을과 서로 비슷하다.
따라서 소백산과 태백산 아래와 황강의 상류는 참으로 사대부가 살 만한 곳이라는 것이다."
<택리지>, 卜居總論.
죽계의 굽이굽이 경치가 빼어난 아홉 곳을 엮어 죽계구곡이라 한다.
소수서원의 창건자인 주세붕은 朱子(朱熹, 1130~ 1200)의 武夷九曲을 본받아 죽계구곡을 정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알려진 것을 없다.
퇴계 이황도 죽계 아홉 곳의 이름을 지었다. 주자의 무이구곡을 본받아 하류에서부터 상류로 올라가면서 구곡을 정했다.
1곡은 소수서원의 취한대, 2곡은 금성반석, 3곡은 백우담, 4곡은 이화동, 5곡은 목욕담,
6곡은 청련동애, 7곡은 용추비폭, 8곡은 금당반석, 9곡은 중봉합류로 정했다.
그러나 기록으로만 남아있고, 그 위치는 알기 어렵다.
1728년 순흥부사로 부임한 신필하는 구곡의 위치를 정하고 바위에 새겼다.
그는 다른 여러 구곡들과 달리 상류에서 하류로 내려오면서 구곡을 정했다.
신필하는 구곡을 설정하긴 했지만 구곡의 명칭을 정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현재 소백산자락길을 선정하면서 신필하가 정한 곳에 안내판을 세우고, 구곡 각각의 명칭은 <순흥지>에서 취했다.
순흥지, 흥주지 | 신필하 | ||
1곡 | 백운동, 취한대 | 금당반석 | 초암사와 비로사 갈림길 중간 |
2곡 | 금성반석 | 二曲, 청운대 | 초암사 입구가 보이는 길 아래 |
3곡 | 백자담 | 三曲 | 滌水臺 |
4곡 | 이화동 | 용추폭포 | 죽계2교 앞 |
5곡 | 목욕담 | 五曲 | 다리 아래 |
6곡 | 청련동애 | 六曲 | 큰 바위 앞에 작은 바위 셋 |
7곡 | 용추 | 七曲 | 과수원, 길이 꺾이는 계곡 |
8곡 | 금당반석 | 八曲 | 탐방지원센터 조금 지난 계곡 |
9곡 | 중봉합류 | 이화동 | 다리 아래 깊은 물은 용소 |
■ 죽계구곡 제4곡 龍湫는 아래 위로 편편한 반석이 깔려 있고,
죄우로 깎아지른 듯한 바위 가운데로 급한 여울이 성난 듯 달리다가 폭포를 이룬다.
그 밑에는 검푸른 물굽이가 소용돌이 치는 깊은 못을 이루고,
큰바위가 못 가운데 누워있는 모습이 용이 꿈틀거리는 것과 닮았다 하여 용추라 한다.
순흥 사람들은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낸다.
살아있는 돼지를 이곳에서 목을 베어 돼지머리를 용추 깊은 곳에 던져 넣으면 沼의 물이 끓어 오르듯 핏물이 솟구친다.
돼지의 목을 넣는 것은 용이 깃들어 있는 신성한 곳을 피로 더럽힘으로,
신령이 그 더러움을 씻어내고자 하여 곧 비를 내리게 한다는 믿음에서 이런 제사를 지낸다.
■ 죽계구곡 제3곡 滌愁帶
척수대의 "滌愁"는 이백의 <友人會宿>의 첫 구절에서 빌려온 말이다.
滌蕩千古愁 천고의 시름 말끔히 씻어버리려고
留連百壺飮 연거푸 일백 동이 술 들이켰네
良宵宜淸淡 좋은 밤은 정담 나누기 안성맞춤이요
皓月未能寢 밝은 달을 두고 애초에 잠자기 글렀네
醉來臥空山 한껏 취해 아무도 없는 산에 쓰러지니
天地卽衾枕 하늘은 이불이요 땅은 곧 베개로다
■ 安軸(1287~ 1348), 호는 謹齋. 순흥에 세력기반을 가지고 중앙정계에 진출한 신흥사대부 출신이다.
그는 동생 안보(1302~ 1357)와 함께 학문에 힘써 문명을 날렸다.
안축은 문과에 급제한 뒤 전주 사록을 거쳐 史翰이 되었다.
충숙왕 10년(1324) 원나라에 가서 과거에 급제하였고, 귀국하여 계속 관직에 있었다.
충혜왕 때 강원도 存撫使로 파견되어 <關東瓦注>란 시문집을 남겼다.
監春秋館事가 되어 이제현 등과 함께 민지가 지은 <編年綱目>을 개찬했다.
忠烈 · 忠善 · 충목 3왕의 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여러 벼슬을 거쳐, 흥녕군에 봉해졌다.
경기체가 <관동별곡>과 <죽계별곡>, 문집 <근제집>이 있다.
안보 역시 문과에 급제한 뒤 여러 벼슬을 거치다가 어머니 봉양을 위하여 관직을 사직하고 고향과 가까운 동경유수를 제수받았다.
형과 함께 학문이 높은 인물로 숭상받았다.
■ <죽계별곡>은 언제 지어졌는제 확실하지 않다.
작품의 배경인 작자의 고향 순흥이 순흥부로 승격되고,
거기 충목왕의 胎가 안장되는 일이 작가가 세상을 떠나던 충목왕 4년(1348)에 있었다.
이 두 가지 사실이 창작 동기가 되었도, 왕의 태가 안장된 것이 작품에 언급된 것으로 보아 그해에 창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안축은 험한 시대를 살았으면서도 뜻한 바를 이루고 자랑스러운 생애를 이루었다.
원래 지방 향리 가문에서 몸을 일으켜 원나라와 고려 두 나라에서 벼슬하고,
신흥사대부로서 다른 누구보다 대단한 기반을 다진 것이 자기 고향의 영광이라 하며,
그곳의 내력을 앞세워 경치를 찬양하고,
거기서 놀며 공부하며 거니는 흥겨움을 과시하고자 했다.
창작 의도와 전체적인 내용이 제1장에 잘 나타나 있다.
竹嶺南 永嘉北 小白山前 죽령 남쪽, 안동 북쪽, 소백산 앞,
千載興亡 一樣風流 順政城裏 천년 흥망에도 한결같은 풍류, 순흥성 안,
他代無隱 翠華峰 王子藏胎 년데 없는 취화봉, 천자의 胎를 갈무리한 곳
爲 釀作中興景 幾何如 중흥을 한 광경, 그것이야 말로 어떤가!
淸風杜閣 兩國頭御 맑은 기둥의 집, 두 나라에 벼슬함이여.
爲 山水 淸風景 幾何如 아, 산수가 맑고 높은 광경, 그것이야 말로 어떤가!
<죽계별곡>은 그의 다른 경기체가 <관동별곡>과 함께 그의 문집 <근제집>에 실려있다.
신라가 망하고 고려가 흥하는 천 년 동안 한결같은 풍류를 이어온 고장이며,
다른 곳에는 없는 왕자의 태를 갈무리한 곳을 자기가 나서서 중흥했다고 자랑했다.
자기는 청백리로서 깨끗한 정치를 하면서 원나라와 고려 두 나라에서 벼슬했기에 산수의 격조를 더 높였다고 했다.
이 노래는 5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2장에서는 사찰의 누각 · 정자 등을 찾아서 기녀들과 어울려 노는 광경을,
제3장에서는 향교에서 글을 배워 유학을 익히고, 철 따라 시를 읊고 음률을 즐기는 광경을 자랑하고,
제4장에서는 기녀들과 어울려 놀다가 헤어져서 멀리 두고 생각하는 마음을 읊었으며,
제5장에서는 성스러운 태평성대이니 사철 즐거운 놀이를 벌이자고 했다.
자기 고장의 아름다운 풍속을 말한 대목은 적고,
부귀에 겨워 절경을 찾으며 질탕한 놀이를 벌인다는 내용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안축은 이 노래를 지어 기생들로 하여금 부르게 했을 것이다.
퇴계는 한림별곡 유의 경기체가는
"교만하고 방탕한 기풍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비루하게 희롱하며 남녀가 서로 어울린 점"이 마땅하지 않다고 했다.
3. 달밭길
■ 초암사는, 의상대사(625~702)가 부석사를 창건(신라 문무왕 16년 676년)하기 이전에 창건했다.
의상대사는 화엄학을 펴기 위해 절을 지으려고 소백산을 두루 다닌 끝에,
지금의 부석사 터를 찾아 불사 준비를 했으나 서까래가 없어졌다.
의상을 道力으로 살펴보니 이 초암사터에 떨어져 있으므로 부처님이 점지해 준 터라 믿고,
여기에 草庵을 짓고 한동안 수행한 뒤 부석사 불사를 마무리했다 한다.
그 뒤의 연혁은 알 수 없고,
1950년 6 · 25 전쟁 때 불탔다가 재건했다. 그러나 승려가 없어 폐사 직전에 있던 것을,
1980년대 초 비구니 寶元이 대웅전과 종각, 산신각 등을 지었다.
통일신라 후기 양식의 삼층석탑 하나와, 고려시대의 부도 2기가 있다.
■ 月田계곡
■ 쇠자우골 소발자국
쇠자우골은 월전계곡 들머리에서 달밭골 가는 길 중간쯤 잣나무숲이 우거진 곳에 있다.
소발자국이 찍힌 바위가 있는 골짜기라 하여 쇠자우골이라 한다.
원래는 소발자국이 찍힌 흔적이 세 개 있다고 전하는데, 지금은 하나만 보인다.
지름이 20cm가 넘는다.
달밭골 사람들이 이 길을 지나다니며 위치를 알리는 이정표로 썼을 것이다.
■ 월전동
■ 성재
■ 달밭골
초암사에서 성재 넘어 남쪽 곧 풍기쪽 마을은 달밭골이라 한단다.
■ 비로사는 영주시 풍기읍 삼가리에 있다.
신라 신문왕 3년(683) 의상대사(625~702)가 창건했다. 소백산사라고도 했다.
신라 말 한 승려가 중창하고, 眞空(855~ 938)을 청해 이곳에 살게 했는데,
그때 고려 태조가 찾아와 법문을 듣고 그를 매우 존경했다.
그가 이 절에서 입적하자 진공대사라는 시호와 普法이란 탑호를 내려주었다.
고려 인종 4년(1126) 김부식으로 하여금 이 절에 佛牙를 봉안하게 했고,
우왕 11년(1385) 幻庵이 중창했다.
조선 세조 때(1455~ 1468) 福田 5명을 두어 <화엄경>을 강의하게 했고,
예종 1년(1468) 金守溫(1410~ 1481, 고승 信眉의 동생)이 사재를 들여 왕실의 복을 비는 도량으로 삼았다.
선조 25년(1592) 조일전쟁에 석불상 2위와 당간지주만 남고 몽땅 불탔다. 그 뒤 몇 차례 중창 · 증축했다.
1908년 8월 15일, 화재로 법당을 제외한 모든 건물과 寺誌가 불타 버렸다.
그 뒤 몇 차례 중창으로 오늘에 이른다.
석조비로자나불과 석조아미타불(보물 제996호), 석조당간지주, 진공대사보법탑비 등 신라말과 고려 초의 유물들이 있다.
진공대사보법탑비는 고려 태조 22년(939)에 세워졌는데, 최언위(868~ 944)가 짓고, 이환추가 글씨를 썼다.
비 뒷면에 遺誡를 새긴 것이 특징이다.
선조 5년(1572) <월인석보>를, 1573년 <水陸無遮平等齋儀撮要>, 1574년 <묘법연화경>이 각각 판각되었다.
영주 북쪽를 둘러싼 소백산 이쪽저쪽으로 뻗은 자락에 의상대사가 세웠다는 초암사 · 비로사 · 성혈사 · 흑석사 · 축서사 등이 있다.
이들 절을 5부석이라 한다.
이 절들은 의상대사가 화엄의 종찰(부석사)를 세울 터를 찾아다니며 잠깐 거처했던 곳인 것 같다.
법사 진정은 신라 사람이다.
속인으로 있을 때 군대에 예속되어 있었는데, 집이 가난하여 장가를 들지 못했다.
군대 복역의 여가에는 품을 팔아 곡식을 얻어서 어머니를 봉양했는데, 집안의 재산이라고는 오직 다리 부러진 솥 하나뿐이었다.
어느날 중이 뭌ㄴ간에 와서 절을 지을 쇠붙이를 구하므로 어머니가 솥을 시주했는데,
이윽고 진정이 밖에서 돌아오자 어머니는 그 사싫을 말하고 또한 아들의 생각이 어떤가를 살피니,
진정이 기쁜 안색을 나타내며 말했다.
"불사에 시주하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비록 솥이 없더라도 무엇이 걱정되겠습니까."
이에 瓦盆을 솥으로 삼아 음식을 익혀 어머니를 봉양했다.
일찍이 군대에 있을 때 사람들이 의상법사가 태백산에서 설법을 하여 사람을 이롭게 한다는 말을 듣고,
금시에 사모하는 마음이 생겨 어머니에게 고했다.
"효도를 마친 뒤에는 의상법사에게 가서 머리를 깎고 도를 배우겠습니다." 어머니는 말했다.
"불법은 만나기 어럽고 인생은 너무나 빠를 것이니, 효도를 마친 후라면 또한 늦지 않겠느냐. 그러니 어찌 내 늦기 전에 네가 불도를 아는 것만 하겠느냐. 주저하지 말고 빨리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진정은,
"어머니 만년에 오직 제가 있을 뿐이온데 어찌 버리고 출가할 수 있게습니까" 했다. 어머니는,
"아! 나를 위하여 출가를 못한다면 나를 지옥에 떨어지게 하는 것이다. 비록 생전에 三牢七鼎(풍성한 음식)으로 나를 봉양하더라도 어찌 가 되겠느냐. 나는 의식을 남의 문간에서 얻더라도 또한 가히 천수를 누릴 것이니 꼭 내게 효도를 하고자 하면 네 말을 말라"고 하였다.
진정은 오랫동안 깊이 생각하는데 어머니가 즉시 일어나서 쌀자루를 모두 털어 보니 쌀 일곱 되가 있었다.
그날 이 쌀로 밥을 짓고서 어머니는 말했다.
"네가 밥을 지어 먹으면서 가자면 더딜까 두려우니 마땅히 내 눈앞에서 그 한 되 밥을 먹고 여섯 되 밥은 싸 가지고 빨리 떠나거라."
진정은 흐느껴 울면서 굳이 사양하며 말했다.
"어머니를 버리고 출가함이 그 또한 자식된 자로 차마 하기 어려운 일이거늘,
하물며 며칠 동안의 미음거리까지 모두 싸 가지고 떠난다면 천지가 저를 무엇이라 하겠습니까"
세 번 사양했으나 어머니는 세 번 권했다.
진정은 그 뜻을 어기기 어려워 길을 떠나 밤낮으로 3일만에 태백산에 이르러,
의상에게 의탁하여 머리를 깎고 제자가 되어 이름을 眞定이라 했다.
3년 후 어머니의 부고가 오자 진정은 가부좌를 하고 선정에 들어 7일만에 일어났다.
설명하는 이는 말하기를 "추모와 슬픔이 지극하여 거의 견딜 수 업었으므로 定水(의식을 통일하여 한 곳에 집중하는 마음)로써 슬픔을 씻는 것이다." 했다. 혹은 "선정으로써 어머니게서 사시는 곳을 관찰하였다"고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이것은 實理와 같이 해서 명복을 빈 것이라 하였다.
선정을 하고 나온 뒤에 그 일을 의상에게 고하니 의상은 문도를 거느리고 소백산 錐洞에 가서 초가를 짓고 제자의 무리 3천 명을 모아 약 90일 동안 華嚴大典을 강론했다.
강론하는데 따라 門人 智通655~?)이 그 요지를 뽑아 책 두 권을 만들고 이름을 <錐洞記>라 하여 세상에 널리 폈다.
강론을 다 마치고 나니 그 어머니가 꿈에 나타나서 말했다.
"나는 이미 하늘에 환생하였다."
<삼국유사>, 제5권, 효선 제9,
진정사 효선쌍미(효도와 선행이 모두 아름답다)
추동은,
현재 풍기읍의 영전동이다. 지금은 송곳골로 불린다.
이곳에는 19세기 중반까지도 영전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과수원으로 변했다.
삼가야영장
소수서원은 정원 30명이 입학한다. 가장 적은 해는 3명, 가장 많은 해는 28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