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보여행/인도행

[부산/ 8월 20일, 토요일] 서산대사길 · 지리산 옛길

추연욱 2016. 8. 21. 10:35



[부산/ 8월 20일, 토요일] 서산대사길 · 지리산 옛길




10시 25분, 신흥교 지리산 엣길 진입로에 왔다.




커피빈, 밝은길, 은산, 호암청송, 옛사랑, 공염불, 겨울맘, 김대감, 눈부신아침, 단비,
풍경하나, 빈잔의자유, 함걸어볼까, 깊은산, 영아, 준혁짱, 달빛, 크로버, 바위꽃, 토토스,
노고단운해,보거스, 핑크오리, 훌랄라, 어나, 비파, 비나리, 한계도전, 새벽거인, 자애, 생이,
숭이, 모델, 산토스. 언제나걷기. 마야, 달마루.
모두 37명이 함께 했다.









시작한다. 10시 35분.




























서산대사의 의자, 11시 10분.













청허당을 흉내내어 쓰다

내가 걷는 백두대간 40


이성부


가까이에서 엎드린 산

먼 데서 손 흔들어 나를 부르는 산

내 눈에 뛰어드는 우리나라 모든 산

오르거나 내려가거나 자빠지거나

무르팍 피 머금어 잠시 주저앉아 길만 나무라다가

문득 바라보면 모두 내 고향 산이거니

입석대에 올라 내려다보던 열네살 때

빛나던 고을의 보잘것없음 구름사이로 숨어버리고

마흔두살 때 천왕봉에서 생각하던 세상살이

 산과 강의 마음으로 만져보면

모든 도시들 개미둑을 닮아 부스럭거리네

천하에 잘나서 거들먹거리는 사람들 걸음걸이

그것이 저의 죽음인지도 모르면서

시고 단 데 모여드는 벌레들 같아 어리석구나

육십이 다 된 시쓰는 놈은

지팡이 날리며 산으로만 들어가 헉헉거리고

일흔 넘어 스님은 서산 옛절에 머물다가

산에서  내려와 창칼을 잡았으니!


이성부, <지리산>, 창작과비평사, 2002.

  















































지리산 기슭, 깊숙한 곳에 있는 마을 의신.

그건 옛날 얘기.




의신마을, 반달곰 생태학습원, 12시 20분.


























점심, 12시 25분.
























대성골로 간다. 1시 30분.




여기가 대성골 진입로다. 1시 25분.



















대성마을, 2시 30분.

오늘은 어수선하다.

























































지리산 깊숙한 계곡 대성골,

맑은 계곡에 놀고,



돌아간다. 3시.














의신마을 출렁다리 밑을 갔다가,



또 쫓아 올라와서 지리산 팬션 옥상



이리저리 뛰어 다녀야 했다. 








깜짝 이벤트에 감사드린다.

















5시에 이곳 의신마을 출발,



5시 30분, 화개장터에 왔다.











※ 화개장터

화개마을은 화개동천의 물이 섬진강 본류와 마주치는 곳이며, 하동읍과 구례읍이 각각 50여리 떨어진 중간지점이다.

장터 앞에 있는 <기념비>에 섬진강이 수문을 연 이래 영남과 호남을 잇던 이곳에 삼한시대 화개관이라 불리던 요새가 장터 역할을 했다는 이야기가 쓰여있다.

고려때는 화개部曲이라 하였다.

‘부곡’은 천민집단 또는 특정 기능을 가진 집단이다. 이곳에는 예인들이 많았다.

화개마을은 사하촌의 성격도 강하여, 예인들은 절의 행사에도 동원되었을 것이다.

남효온에 의하면, 부곡의 우두머리 관리는 재임기간 동안 머리 깎고, 승복을 입었으며, 僧首라 불렀다.

화개장은 조선시대 5대장 중 하나였다.

1726년 번성기를 맞아 전국적으로 손꼽히는 시장이 되었고, 객주의 오고감이 끊이지 않았다고 하였다.

 

옛날에는 여기까지 배가 들어왔다.

장돌뱅이들은 화개장(1, 6일), 구례장(2, 7일), 구례읍장(3, 8일), 순천장(4, 9일) 구례 토지장(5, 10일)을 돌아다녔다.

이들의 장 선택 원칙은 하룻밤 사이 이동할 만한 거리인 40~60리 떨어진 곳들을 찾는다.

5일장은 1800년대 정착된다.


동쪽인 하동에서는 건어물을 배에 싣고 강을 거슬러 올라왔고,

서쪽 구례 쪽에서는 쌀, 잡곡 등을 역시 배로 실어 날랐으며,

북쪽 함양, 남원 쪽에서는 삼베, 죽세공품 등을 메고 지고 화개재를 넘어 이곳에 왔다.


장이 파할 때쯤에는 남사당 패거리들이 찾아와 징과 장구들을 두드리며 신나는 놀음으로 장꾼들을 모았고,

나룻배 오가는 뱃머리 주막들은 장돌뱅이들로 넘쳤을 것이다.


마을 앞을 지나는 국도 옆으로 섬진강이 흐르고, 그곳에 화개나루가 있었다.

화개나루(섬진나루)에는 화개와 광양을 잇는 줄배가 있었다.

2003년 5월에 동서화합다리가 개통되면서 줄배는 그 사명을 다하고 사라졌다.


이곳은 섬진강폭이 가장 넓은 곳이다.

밀물 때는 바닷물이 역류하여 강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곳으로 뻘과 모래가 섞여 재첩이 잘 자란다.

여기서부터 쌍계사까지 10리 벚꽃길,

남해바다까지 하동포구 80리 길이 이어진다. 


그러다가 한국전쟁 이후 지리산의 빨치산 토벌 등으로 산촌이 황폐해지면서 화개장도 함께 쇠퇴해 갔다.


1999년 12월, 하동군 화개면 탑리 726-8번지 일원 부지 면적 9,917㎡에 17억 원 가량의 예산을 들여 전통 장옥 3동, 장돌뱅이들의 저잣거리와 난전, 주막, 대장간 등 옛 시골장터 모습을 원형 그대로 되살리고,

주차장과 화장실 등 편의 시설을 곁들여 2001년 봄에 개장하였다.

 

▴ 십리 벚꽃길 - 화개에서 화개천을 따라 쌍계사까지 이어지는 10리길에 4월 초에는 벚꽃길이 펼쳐진다.

1928년 화개면장을 지낸 김진호라는 사람이 소로길을 넓히면서 벚꽃 묘목을 일본에서 구해다가 심은데서 비롯된다.

한때 비난하는 말도 많았지만 지금은 화개의 명소가 되었다.


▴ 화개계곡은 지리산에서 흘러내려 의신에서부터 화개 장터를 지나 섬진강으로 들어간다. 의신에서 16km쯤 된다.
















































역마상














※ 김동리의 소설 <역마>

<역마>의 첫머리에는 화개장터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기에 여기에 소개한다.

 

‘화개장터’의 냇물은 길과 함께 세 갈래로 나 있었다. 한 줄기는 전라도 구례 쪽에서 오고 한 줄기는 경상도 쪽 화개골에서 흘러내려,

여기서 합쳐서,

푸른 산 그림자와 검은 고목 그림자를 거꾸로 비추인 채,

호수같이 조용히 돌아, 경상 · 전라 양 도의 경계를 그어 주며,

다시 남으로 흘러내리는 것이,

섬진강 물이었다.


하동, 구례, 쌍계사의 세 갈래 길목이라,

오고가는 나그네로 하여, 화개장터엔 장날이 아니라도 언제나 흥성거리는 날이 많았다.

지리산으로 들어가는 길이 고래로 허다하지만 쌍계사 세이암의, 화개협 시오리를 끼고 앉은 화개장터의 이름이 높았고 경상 전라 양도 접경이 한두 군데일 리 없지만 또한 이 화개장터를 두고 일렀다.

장날이면 지리산 화전민들의 더덕, 도라지, 두릅, 고사리 들이 화개골에서 내려오고 전라도 황화물 장수들의 실바늘, 면경, 가위, 허리끈, 주머니끈, 족집게, 골백분 들이 또한 구례 길에서 넘어오고, 하동 길에서는 섬진강 하류 해물 장수들의 김, 미역, 청각, 명태, 간조기, 간고등어 들이 들어오곤 하여, 산협하고는 꽤 은성한 장이 서는 것이기도 하였으나 그러나 화개장터의 이름은 장으로 하여서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장이 서지 않는 날일지라도 인근 고을 사람들에게 그 곳이 그렇게 언제나 그리운 것은 장터 위에서 화개골로 뻗쳐 앉은 주막마다.

유달리 맑고 시원한 막걸리와 펄펄 살아 뛰는 물고기 회를 먹을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주막 앞에 늘어선 능수버들 가지 사이사이로 사철 흘러나오는 그 한많고 멋들은 진양조, 단가, 육자배기 들이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여기다 가끔 전라도 지방에서 꾸며 나오는 남사당, 여사당, 협률, 창극, 신파, 광대 들이 마지막 연습 겸 첫 공연으로 여기서 반드시 재주와 신명을 떨고서야 경상도로 넘어간다는 한갓 관습과 전례가 이 화개장터의 이름을 더욱 높이고 그립게 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가운데도 옥화네 집은 술맛이 유달리 좋고 값이 싸고 안주인 - 즉, 옥화 - 의 인심이 후하다 하여 화개장터에서 가장 이름이 들린 주막이었다.

얼마 전에 그 어머니가 죽고 총각 아들 하나와 단 두 식구만으로,

안주인 옥화가 돌아올 길 망연한 남편을 기다리며 살아간다는 것이라 하여 그들은 더욱 호의와 동정을 기울이는 모양이기도 하였다.

혹 노자가 달린다거나 행장이 불비할 때 그들은 으레 옥화네 주막을 찾았다. …….


……

……



타고 난 사주팔자는 피할 수 없는 법,

이 소설의 종결부에는 올은 것은 오고 마다.


…….

그리고 나서 한 달포가 지난 뒤였다.

성기가 좋아하는 여러 가지 산나물이 화개골에서 연달아 자꾸 내려오는 이른 여름의 어느 장날 아침이었다.

두릅회에 막걸리 한 사발을 들이키고 난 성기는 그 어머니에게,


"어머니 나 엿판 하나만 맞춰 주."

하였다.

 "……."


옥화는 갑자기 무엇으로 얻어맞은 듯이 성기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지도 다시 한 보름이 지나, 뻐꾸기는 또다시 산을림처럼 유창하게 울고 늘어진 버들가지엔 햇빛이 젖어 흐르는 아침이었다.

새벽녘에 잠깐 가는 비가 지나가고, 날은 다시 유달리 맑게 개인 화개 장터 갈림길 위에서, 성기는 그 어머니와 하직을 하고 있었다.

갈아입을 옥양목 고의 적삼에 명주 수건까지 머리에 동여매고 난 성기는 새로 맞춘 새하얀 나무 엿판을 질빵해서 느직하게 엉덩이 즈음에다 걸고 있었다.

윗목판에는 새하얀 엿가락이 반 넘어 들어 있었고, 아랫목판에는 팔다 남은 이야기책 몇 권과 간단한 방물이 존 들어 있었다.


그의 발 앞에는, 물과 함께 갈리어 길도 세 갈래로 나 있었으나,

화개골 쪽엔 처음부터 등을 지고 있었고,

동남으로 난 길은 하동,

서남으로 난 길이 구례,

작년 이맘때도 지나 그녀가 울음 섞인 하직을 남기고 체 장수 영감과 함께 넘어간 산모퉁이 고갯길은 퍼붓는 햇빛 속에 지금도 환히 장터 위를 굽이 돌아 구례 쪽을 향했으나, 성기는 한참 뒤 몸을 돌렸다.

그리하여 그의 발은 구례 쪽을 등지고 하동 쪽을 향해 천천히 옮겼다.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옮겨 놓을수록 그의 마음은 한결 가벼워지어,

멀리 버드나무 사이에서 그의 뒷모양을 바라보고 서 있을 어머니와 주막이 그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 갈 무렵 하여서는,

육자배기 가락으로 제법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가고 있는 것이었다.   

 


소설 <역마>는 1948년 잡지 <白民>에 발표된 작품이다. 驛馬煞로 표상되는 唐四柱라는 동양인과 한국인의 깊은 운명관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삶은 대부분 자신의 의지나 선택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운명적으로 주어진 역마살에 둘러싸여 있으며, 배경인 화개장터 역시 역마살이 낀 장돌뱅이들의 집결지이다.

토속적이고 샤머니즘적인 역마살이라는 이 운명을 거역하기보다 거기에 슬기롭게 순응함으로써 생의 리듬을 얻어 살아가는 한국적인 인간상, 즉 인간은 자신의 운명에 따라 살아갈 때 가장 행복을 느낀다는 것을 보여준다.















20분쯤 시장을 돌아보았다.

장은 이미 파장이지만,

그러면 어떠랴.



5시 50분, 오늘의 일정은 다 끝났다.

돌아간다.



8시 20분에 서면에 도착했다.



아침 요깃감으로 맛있는 떡(빵?, 빵떡?) 주신 비니리 님,

달갈 구워오신 옛사랑 님,

수박 주신 바위꽃 님, 

맥주와 막걸리 주신 호암청송 님, 은산 님,

돼지고기 수육과 맥주 주신 김대감 님,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