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과 서산대사
지리산과 서산대사
서산대사 진영-통도사 소장
서산대사의 생애와 행적은 그의 자서전인 <上完山盧府尹書>와
李廷龜가 찬한 <賜國一都大禪師 禪敎都摠攝 扶宗樹敎 普濟登階尊者 西山淸虛堂 休靜大師 碑銘竝書>와,
李雨臣이 찬한 <休靜大師 碑銘竝書>,
徐有鄰의 <西山大師記績碑銘竝書>,
정조대왕의 <西山大師 畵像堂銘竝書> 등에 기록이 있다.
1. 서산대사(1520~1604)는 아버지 完山 崔氏 崔世昌, 어머니 漢南 金氏의 외아들로 평안도 安州에서 태어났다.
아명은 雲鶴, 자는 玄應, 호는 淸虛, 법명은 休靜이다. 西山대사, 白樺道人, 頭流山人, 妙香山人 등의 별호가 있다.
2. 9살에 어머니를, 다음해 아버지를 여읜다. 고아가 된 그를 안주 목사 李思曾이 서울로 데려가 공부를 시켰다.
이 무렵의 상황을 서산대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서울에 가서 성균관에 들어가 유생들의 틈에 이름을 기록하였는데, 나이가 12살이었다. 그러나 나는 공부에는 힘쓰지 않고 동무들을 따라 헛되이 놀기만 했다.
하루는 한 늙은 학사가 흥인문 밖 沙川의 언덕에 서당을 짓고 5, 6명의 제자를 모아 의형제를 맺어 열심히 공부하라고 가르쳤다. 거기서 3년간 열심히 공부하여 생원시를 보았으나 합격하지 못했다. …… 15세에 스승이 전라감사가 되어 호남으로 떠났다. 우리 동문 세 사람은 의논 끝에 감사님을 찾아 전주로 갔다. 우리가 도착하고 보니 그분은 상을 당하여 서울로 돌아가고 없었다. 우리는 답답하여 어쩔 줄 몰랐다. 이런 가운데 동무 한 사람이 스승을 찾아왔다가 일은 틀렸으나 빈손으로 돌아가기 보다는 남쪽 산천을 구경하는 것이 좋겠다 하여 모두 옳다 하고 가벼운 차림으로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중종 29년(1534)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 우연히 지리산에 들어가게 되었고,
휴정이란 법명을 얻을 때까지 전후 20년을 주로 의신골에서 살았다.
3. 이렇게 6개월여 여기저기 흩어진 암자에 머물며 유람하다가 쌍계사의 어느 암자에서 崇仁이라는 스님을 만난다.
숭인스님은 그에게 ‘마음을 비우는 공부를 하여 공명심에 연연하는 생각을 영원히 비워라. 書生의 業은 평생을 바빠도 백년의 노력이 허튼 이름뿐이니 실로 안타깝다’고 하였다.
18세 때 그는 이런 숭인스님의 권유로 머리를 깎고 마음을 비우는 공부를 시작한다.
숭인스님에게 불경을, 芙蓉堂 靈觀선사(1485~1571)에게서 3년 동안 선을 배운다.
21살 때 깨달은 바 있어 비로소 중이 된다.
이때 <花開洞>이라는 시를 짓는다.
화개동에 꽃이 지는데 花開洞裏花猶落
청학동 둥우리에 학은 아니 돌아오고 靑鶴巢邊 鶴不還
잘있거라 홍류동 아래 흐르는 물이여 珍重紅流橋下水
너는 바다로 돌아가고 나는 산으로 돌아가려네. 汝歸滄海我歸山
이리하여 의신사의 암자 三鐵屈에서 3년, 대승사에서 2년, 의신, 원통, 원적, 은적암 등에서 서너 해 동안 수도에 전념한다.
삼철굴은 의신마을에서 덕평봉 선비샘으로 곧장 오르는 가파른 산길 주변에 있었다.
마을 뒤편에 차례로 하철굴, 중철굴, 상철굴이 있었다.
원통사터는 의신마을에서 30분 정도 걸어올라야 한다. 마을 끝 왼쪽 골짜기는 우남골이다.
이곳에는 우남사란 절이 있었고, 오른쪽 골짜기가 원통골이다. 골짜기 끝에 원통사터가 있다.
이곳은 지리산 최고의 명당으로 꼽는 곳이다.
지리산에서 흘러내린 주맥이 타원형의 울타리를 두르고 있는 한가운데 지점이다. 정남향에 백운산이 보인다. 절터 한편에 옹달샘이 있다.
이곳에 서산대사가 득도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지리산을 편력하던 중 어느날 벗을 찾아 鳳城(남원)으로 가다가 우연히 낮닭 우는 소리를 뜯고 크게 깨달아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白髮吣非白 머리 희어도 마음은 젊다고
古人曾漏泄 옛 사람 일찍이 일렀더구나.
今聞一鷄聲 닭울음 한 소리 듣고나니
丈夫能事畢 장부의 할 일을 다 하였도다.
忽得自家底 문득 자가 것을 깨닫고 나니
頭頭只此爾 온갖 것이 다 이뿐이로세.
千萬金寶藏 팔만대장경도
元是一空紙 본디 한 장 빈 종이로세.
신흥동에서 오른쪽으로 깊숙이 들어가면 단천마을, 의신마을, 빗점마을 등이 나온다.
李仁老(1152~1220)가 <破閑集>에서 "여기가 바로 선경"이라 찬탄한 곳이다.
신선이 산다는 이곳은 그러나 한국전쟁 때 극심한 전화를 입었다. 남부군 사령관 이상현이 목숨을 잃은 곳도 빗점골이다.
4. 명종 7년(1552) 32세에 주위의 권고로 문정왕후와 虛應堂 普雨(?~1565)가 부활시킨 승과에 응시하여 첫 관문인 中禪科에 합격하고, 다시 大選을 거쳐 禪敎兩宗判事가 되어 3년을 지낸다. 이때 왕실과 인연을 맺은 봉은사 주지직을 2년간 역임한다.
그러나 대사는 산을 떠난 승려생활이 싫어 37세 때 다시 산으로 들어간다.
금강산, 묘향산, 구월산에 머물면서도 언제나 지리산에 대한 그리움에 가득차 있었다고 그의 서간문에 술회하고 있다.
5. 명종 15년(1560) 다시 지리산으로 돌아왔다.
신흥계곡의 허물어진 內隱寂庵을 중수하고, 淸虛院을지어 거처를 마련하고,
이곳에서 6, 7년을 머물면서 많은 책을 짓는데, <禪家龜鑑>도 이곳에서 마무리짓는다.
이 무렵 지은시 두편을 소개한다.
頭流有一庵 두류산에 암자 하나 있으니
庵名內隱寂 이름은 내은적이라.
山深水亦深 산 깊고 물 깊어
遊客難尋迹 노니는 선객 찾아오기 어려워라.
東西各有臺 동서에 각각 누대가 있으니
物窄心不窄 물은 좁아도 마음은 좁지 않네.
淸虛一主人 청허라는 한 주인
天地爲幕席 천지를 장막과 자리삼아
夏日受松風 여름날 솔바람을 즐기고.
<內隱寂>
배꽃 천만 조각 梨花千萬片
청허원으로 날아드네. 飛入淸虛院
목동의 피리 소리 앞산을 지나건만 牧笛過前山
사람도 소도 보이지 않네. 人牛俱不見
<人境俱奪>
※ 은적암의 샘 - 표고는 약 360m이다. 이 물은 절골계곡을 이루고 금반마을을 지나 논골에서 내려오는 물과 합쳐 하동호(청암댐)로 흘러들고, 황천강을 만들고 섬진강으로 들어간다.
아래쪽 샘은 물의 양이 많고 잘 다듬어 두어 현재 사용하고 있다.
샘은 큰 부자추(복유지)나무 뿌리에서 나오는데, 나무는 샘 전체에 그늘을 드리워 보호하고 있다.
위쪽샘은 책상만한 바위 아래에서 고였다가 흘러넘쳐 나는데, 물의 양이 아래 샘보다 약간 적고 자연 그대로 소박한 모습이다.
은적암 가는 길은 청암면 중이리 금반마을 화관 옆 절골계곡을 따라 난 포장된 길을 200m 오르다가,
오른쪽 좁은 논길로 들어선다. 금반에서 30분쯤 되는 거리에 있다.
6. 그러나 유생들이 <선가귀감> 원고를 불태워버린다.
그러자 그는 지리산을 떠나 묘향산으로 간다.
불교 탄압과 그에 따른 역작이 불태워진 것이 가슴아팠던지 다시는 지리산을 찾지 않는다.
7. 69세 때인 선조 22년(1589) 기축 10월 정여립 사건에 승려 無業이 대사를 모함하는 글을 썼다.
만국의 서울은 개미집이요 萬國都城如蟻垤
천고의 호걸은 하루살이라. 天下豪傑若醯鷄
밝은 달을 베개하고 고요히 누웠으니 一窓明月淸虛枕
끝없이 부는 솔바람 갖은 곡조 아뢰네. 無限松風韻不齊
라 읊은 <香爐峰詩>가 임금을 모독하는 글이며, 정여립과 음모가 있다고 무고하였다.
그 때문에 어전까지 잡혀갔다.
그러나 그의 인격과 성품이 도리어 임금을 감동하게 하여 선조대왕은 墨竹 한폭을 하사하고 賦詩를 지어올릴 것을 명하므로,
<敬次 先祖大王御賜墨竹詩韻>이라는 시를 지어올린다.
“瀟湘一枝竹 소상강의 이름난 대 한 가지
聖主筆端生 우리님 붓 끝에 났구나.
山僧香爇處 산승이 향을 피우는 그 곳에
葉葉帶秋聲 잎사귀마다 가을 소리가 들랄 듯하여라.
이 시를 본 임금도 친히 다음의 시 <先祖大王賜西山大師墨竹詩>로 화답하였다.
葉自毫端出 잎은 붓끝에서 나온 것
根非地面生 뿌리도 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月來無見影 달이 와도 그림자를 볼 수 없으니
風動不聞聲 바람 분들 소리가 들릴 건가.
8. 72세 때인 1592년 의주에 피난가 있던 선조의 부름을 받는다.
살생을 금하는 것이 승려의 본분이지만 나라를 구하기 위해 그는 전쟁터 나아간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격문을 전국에 돌려 각처의 승려들이 구국에 앞장서도록 하였다.
“서라, 일어서라. 나오라. 때는 왔다. 나라를 위하여 싸울 때가 왔다. 죽음으로써 나라를 건져야 한다. 이때를 당하여 구차하게 살려는 것은 죽는 것만도 못하다. 살기만 도모하면 죽음이 있고, 죽기를 각오하면 살길이 터지는 법이다. 나의 사랑하는 승도여, 일어나라, 불도여, 일어나라. …… 주야 공부가 생사를 초월한다는 공부였으니 겁날 것이 무엇이며, 혈혈단신에 두려울 것이 무엇이냐 …… .”
이에 제자 雷黙堂 處英은 지리산에서 궐기하여 권율의 휘하에 들어가고, 四溟堂 惟政(1544~1610)은 금강산에서 승군 1000여명을 모아 평양으로 갔다.
대사는 문도 1500여명의 의승을 순안 법흥사에 집결시키고 스스로 의승군을 통솔하여 명나라 군사와 함께 평양을 탈환하였다.
명나라 장수 이여송은 서산대사를 이렇게 칭송하였다.
無意圖功利 공리는 생각할 리 없고
專心學道仙 오로지 불도만 닦았노라.
今聞王事急 이제 나라 일 급하다는 말 듣고
總攝下山嶺 동지를 모아 산을 내려왔노라.
9. 선조는 서산대사에게 八道禪敎都摠攝이라는 이름의 군직을 내렸으나,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군직을 제자인 사명당 유정에게 물려주고 묘향산으로 들어갔다.
또 선조가 서울로 환도할 때 승군 700여명을 거느리고 개성으로 나아가 御駕를 호위하여 맞이하였다.
선조는 그에게 國一都大禪師 禪敎都摠攝 扶從殊敎 普濟登階尊者라는 존칭과 정2품 당상관 작위를 하사한다.
10. 이후 서산대사는 남북의 강산을 두루 돌아 漫行을 하다가,
선조 37년(1604) 85세 되던 1월 묘향산 圓寂庵에서 설법을 마치고 자신의 영정을 꺼내 그 뒷면에
八十年前渠是我 팔십년 전에는 저가 나이더니
八十年後我是渠 팔십년 지난 이제는 내가 저로다.”라고 써서 사명당과과 처영스님에게 주고,
다음과 같은 <臨終偈>를 쓴 뒤 가부좌하여 입적하였다.
千計萬思量 천만 가지 온갖 생각
紅爐一點雪 불에 내린 흰눈 한 조각
泥牛水上行 진흙 황소가 물 위로 가고
大地虛空裂 땅과 허공이 꺼져 버렸네,
다비를 마친 뒤 제자 圓峻, 印英 등이 뼈 한조각과 사리 3알을 얻어 보현사와 안심사에 부도를 세우고 봉안하였다.
뼈는 사명당과 自休 등이 금강산 유점사 북쪽 바위 속에 안치하였다.
사명당과 처영스님은 金襴袈裟와 발우를 스승의 뜻에 따라 “만세토록 허물어지지 않을 땅”, “宗通이 돌아갈 곳”인 해남 두륜산에 안치하였다. 이리하여 서산대사의 법맥은 대둔사로 이어지게 된다.
묘향산 酬忠祠, 밀양 표충사에서 대사에게 제사를 올리고 있고, 해남의 대둔사에 대사의 유물전시관이 있다.
지은 책은 <禪家龜鑑>, <禪敎釋>, <三家龜鑑>, <雲水壇>, <淸虛集> 4권이 있다.
11. 서산대사는,
“禪은 부처의 마음이고, 敎는 부처의 말씀이다.
……선과 교의 근원은 부처님이고 선과 교의 갈래는 가섭과 아난이다.
말 없음으로써 말 없는데 이르는 것은 선이고,
말로써 말 없는데 이르는 것이 교다.
또한 마음은 禪法이고,
말은 敎法이다.
법은 비록 한맛[一味]이지만 뜻은 하늘과 땅만큼 아득히 떨어진 것이다."
<禪家龜鑑 五>라 하여 선 우위의 입장에서 선종과 교종을 통합하려 하였다.
또 불교에 근본을 두고 불교 · 유학 · 도가사상을 아우르고자 하는 노력[三敎會通]을 계속하였다.
그의 이러한 절충주의는 당시 유교 지배체제 아래 지배체제와의 대립을 피하고 불교의 명맥을 유지하려는 노력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의 불교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이념적 변화를 모색해왔다.
통일신라를 이끈 주도적 이념은 화엄사상이며,
후삼국 시기 전국시대를 주도하던 이념은 선종사상이었다.
고려 중기 초반 문신 관료체제를 기반으로 한 중앙집권 강화시기에는 법상종,
중기 왕권 강화시기에는 천태종이 주도 이념으로 등장하였다.
무신의 난 이후 최씨 정권시기에는 조계종이 등장하여 무신정치를 이념적으로 뒷받침하였다.
그러다가 불교 이념 전체가 노쇠현상을 드러내자 성리학에 주도권을 빼앗기게 된다.
조선조 초기에는 11개 불교 종파가 있었는데 태종 6년에서 7년 어느 때 7개의 종파로 축소된다.
그러다가 세종 6년 선 · 교 양종으로 강제 통합된다.
고려 광종때 시작된 승과제도는 고려, 조선초까지 명맥을 이어오다가,
연산군의 불교 탄압으로 한때 중단된 것이 중종 2년(1507) 완전히 폐지된다.
승과가 폐지되자 종단도 명맥을 유지하기 어려워졌다.
그러다가 명종 5년(1550) 문정왕후와 보우의 노력으로 선교 양종을 일으키고 봉은사를 선종 본사로,
봉선사를 교종 본산으로 삼고 명종 7년 승과를 부활시킨다.
승과의 제1기 합격자가 서산대사이다.
이리하여 서산대사 휴정이 선교양종도총섭이 되므로 선교양종이라는 단일 종파로 통합된다.
결국 서산대사 이후는 서산종이라 할 수 있는 유일한 종단으로 명맥을 유지하게 된다.
조일전쟁 이후 거의 모든 승려들의 법맥이 서산일파에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서산 일파에서는 이를 계기로 자파의 법맥을 普照 知訥(1158~1210), 懶翁 慧勤 (1320~1376), 芙蓉 靈觀(1485~1571)으로 이어지는 조계종의 맥에서 옮겨 놓으려는 시도를 한 듯하다.
곧 나옹 대신 太古 普愚(1301~1382)를 중흥조로 하여 서산대사의 스승인 부용 영관선사를 그 5세 법손으로 바꾼 다음 臨濟宗을 표방한다. 태고화상은 중국 임제종 19대 조사인 石屋 淸珙의 衣鉢을 전수해 와서 임제종 29대 조사이기 때문이다.
서산대사 이래 선교통합의 단일종이 되면서부터 律宗의 본산이던 양산 통도사를 佛寶宗刹로,
화엄종 본산의 하나인 해인사를 法寶宗刹로,
전통 선종인 조계종 종찰인 송광사를 僧寶宗刹로 하여 볼법승 삼보종찰을 설정하여 조선 불교의 기본 도량으로 삼게 된다.
12. 이런 상황에 서산대사의 종지를 받드는 문도들은 서산 종찰 건립의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하여 우선 서산대사의 열반처이며, 승군 지휘소였고 대사의 고향 난주 부근에 있는 묘향산 보현사를 종찰로 삼으려 하였다.
그리고 사명대사가 주석하던 금강산 유점사에도 사리탑과 탑비를 세워 그 근본 도량으로 삼으려 하였다.
그러나 서산대사는 그 종찰이 해남 대둔사에 세워지기를 바랐다.
표충사(밀양시 단장면 구천리)의 表忠祠는 영조 14년(1738) 조정으로부터 사액을 받아,
서원 사찰의 형태를 갖추고 사찰이 면세를 받고 제수는 관가에서 지급받는 혜택을 받는다.
표충사는 좌우에 표충서원과 유물관을 거느리고 있다.
안에 사명대사를 主壁으로 하고 왼쪽에 그의 스승 서산대사, 오른쪽에 기허당 靈圭대사(?~1592)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
진경산수화와 풍속화가 유행하던 영조 14년 무렵 그려진 초상화이다. 영규대사의 영정은 갑사 표충원에도 있다.
밀양 표충사 표충사
표충사 표충각 서산대사 진영
대둔사(해남군 삼산면 구림리)의 表忠祠 구역에는 의중당 등 제례와 추모 행사 등을 위한 건물들이 있고, 문 안쪽에 표충사와 조사전 비각이 있다.
서산대사의 사당은 아직 조정에서 사액되지 않았는데,
밀양의 표충사는 사명당의 사당이기는 하지만 스승을 제자의 사당에 배향시킨 것은 서산 문중 문도들을 불만스럽게 하였다.
이에 서산 문중에서는 서산 종문의 종찰인 대둔사와 보현사에 서산대사의 사액 사당을 건립하려는 노력을 전개한다.
마침내 정조 12년(1788) 대둔사에 表忠祠, 보현사에는 酬忠祠라는 사액을 받아 서원사찰의 형태를 갖추게 된다.
대둔사 표충사에는 서산대사와 그의 제자로 사명당 유정과 처영대사의 화상을 봉안하였다.
철종 12년(1681) 다시 옮겨 지은 건물이다. 금물로 쓴 편액은 정조가 직접 써서 내려준 것이다.
유물전시관에는 가사와 발우, 친필 선시, 신발, 선조대왕이 내린 교지 등 서산대사의 유물과 정조대왕아 내려준 금병풍 등이 있다.
해남 대둔사 표충사
頭流山神興寺凌波閣記
세상에서 이르기를 바다 가운데 세 개의 산이 있다고 하는데 두류산은 그 가운데 하나다. 두류산은 우리나라 호남과 영남 두도 사이에 있다.
산에는 절이 있으니 이름을 신흥사라 하고 절 곁에는 골짜기가 있어 이름을 花開洞이라 한다. 골짜기는 좁아서 마치 사람이 독 안으로 드나드는 것 같다.
동쪽을 바라보면 푸른 골짜기 하나가 보이는데 이것이 청학동이다. 푸른 학이 거기에 있다. 남쪽을 바라보면 여러 개의 봉우리가 강불 위에 솟아 있는데 그것이 白雲山이다. 흰구름이 여기서 생겨난다.
골짜기 안에는 마을이 하나 있는데 대여섯 집이 자리잡고 있다. 꽃나무, 대나무가 우거지고 닭울음, 개 짓는 소리가 들려오는데 거기서 사는 사람들은 옷차림이 소박하고 머리 단장은 예스럽다. 살아가는 형편은 오직 밭 갈고 우물 파는 것을 알 뿐이요, 찾아오는 사람이란 다만 늙은 중이 있을 따름이다.
골짜기에서 신흥사의 대문에 이르는 어간에 남쪽으로 십여 발자국을 가면 동쪽과 서쪽에서 흘러오는 시냇물이 합쳐져서 하나의 내를 이룬다. 맑은 물이 돌에 부딪치면서 우불구불 흘러 소리를 내고, 달리던 물결이 한 번 뒤번지면서 수천 송이 눈꽃을 이루어 참말로 볼만한 구경거리다.
시내의 양쪽 언덕에는 수천 개의 돌 소, 돌 양이 누워있는데 이것들은 처음 하늘이 험준한 곳으로 만들면서 신령스런 이 골짜기를 숨기려 하였던 것이다. 만양 겨울에 얼기나 여름에 물이 나면 사람들이 들어올 수가 없으니 이것이 흠이다.
신유년(1561) 여름에 이 산에 거처하는 승려 玉崙이 동ㄹ료 승려인 祖演에게 부탁해서 시내 골짜기에 있는 돌 소, 돌 양들을 일쿠어 기둥으로 세우고 하나의 긴 다리를 놓았고 다리 위에는 다섯 칸 되는 높은 누각을 세우고 각각 단청을 입혀 장식하였다. 그리고 다리의 이름을 紅流橋라고 하였고, 누각 이름은 凌波閣이라 하였다. 밑에는 황룡이 물결 위에 누워있고 위로는 붉은 봉황새가 하늘을 나는지라 형세는 端禮의 원각 黿閣과 같으나 張儀의 龜橋와는 많이 다르다. 불승이 여기에 오면 도를 닦을 마음이 생기고, 시인이 여기에 오면 시구가 떠오르며, 도사가 여기에 오면 본래의 모습을 바꾸지 않고서도 바람을 몰아 하늘로 오를 수 있다.
이리하여 옥륜과 조연, 스님은 아득한 이 세상에 마음을 붙이고 몸은 떠가는 구름에 맡긴 채 때때로 자팡이를 짚고 나와서는 혹 거기서 시를 읊기도 하고 혹 거기서 차를 마시기도 하며 혹은 그 사이에 드러누워서 늙어간다는 것을 잊어버리기도 한다.
그리고 또 능파각으로 말하면 몸이 백 척 높이에 올라가니 별을 따는 듯한 맛이 있고 눈은 천리를 내다보아 하늘에 오르는 듯한 맛이 있다. 외로운 물오리가 스러져 가는 노을과 나란히 나는 것은 騰王閣의 맛을 내며 하늘 한 끝에 세 개의 산봉우리가 머리를 쳐든 것은 鳳凰臺의 맛을 가진다. 맑은 내와 아름다운 풀은 黃鶴樓와 비슷하고 떨어진 꽃잎이 물에 흐르는 것은 桃花園과 흡사하며, 가을이 되어 비단을 펼친 듯한 경치는 적벽의 맛이 나고 반가운 손님을 맞이하고 보내는 데는 虎溪의 맛이 있다. 또 짐을 진 사람, 임을 인 사람, 농사꾼, 낚시꾼, 빨래하는 사람, 목욕하는 사람, 바람 쏘이는 사람, 노래부르는 사람이 있고 풍치를 구경하고 달을 바라보는 사람도 있어 이 누각에 올라서면 온갖 즐거움을 다 누릴 수가 있다. 그러니 이 누각이 사람들의 흥취를 돋우는 것이 적지 않다.
바람 불고 비 내리고 얼음 얼고 눈이 와도 냇물을 건너는 사람들은 옷을 걷지 않아도 되니 냇물을 건널 수있게 하는 그 공이 또한 크다.
그런즉 누각 한 채를 이루어서 온갖 즐거움이 다 갖추어지게 되었으니 어찌 반드시 어진 사람이 있어야 그런 것들을 즐길 수 있다고 하랴. 다만 옛날에는 하늘이 신비로운 이 고장을 감추어 두었는데 지금 두 스님이 구름을 꾸짖어 쫓아내고 산이며 절간이며 골짜기며 시냇물이 이 세상에서 이름을 숨기기 어렵게 만들었으니 그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비록 그러하나 어찌하면 維摩의 손재주를 얻어 이 누각을 당기어서 천 간, 만 간을 이루고 필경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커다란 집을 만들어 이 세상 사람들을 보호하여 주겠는가.
갑자년(1564) 봄에 쓴다.
오복희 역, 겨레고전문학선집 9,義兵長詩文集 임진년 난리를 당하매, 보리,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