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휴일도보] [부산 /7월 /10일 일요일]충남 부여로 갑니다
[공휴일도보] [부산 /7월 /10일 일요일]충남 부여로 갑니다
11시 10분, 부여읍 관북리에 있는 식당 백제의 집에 왔다.
부산에서 4시간 반쯤 달려왔다.
여기서 이른 점심을 먹기로 했다.
차를 타고 정림사지 주차장으로 와서,
정림사지로 간다.
12시.
정림사지
탑의 일층몸돌에
"大唐平百國碑銘" 이라 새겨져 있다.
이것은 나당연합군 총사령관 소정방이 660년 ,
백제를 정벌하고 그 기념으로 이미 있던 탑에다 글을 새긴 것이다.
건물 안에는 석불좌상(보물 제109호)가 봉안되어 있다.
백제역사유적지구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유산은 아래와 같다.
이 쪽문을 지나 정림사지박물관으로 간다.
국립부여박물관
부여석조
부여석조는 국랍부여박물관 현관에 있다.
이 석조는 부소산 기슭의 옛 부여박물관 동쪽 우물 자리에 있던 것을 이리로 옮겼다.
본래 그 자리가 왕궁으로 추정되므로 이 석조는 궁에서 연꽃을 띄워놓던 석련지인 것 같다.
전체적으로 사발 모양으로 오므라들어 소담하다는 인상을 주며 아무런 장식이 없어 매우 단아하다.
직사각형이 기본인 신라 석조와는 다른 모습이다.
궁남지, 1시 20분.
궁남지
백제 제29대 무왕(600~ 641 재위)
무왕 34년(633),
"3월에는 궁성의 남쪽에 연못을 파고 210여 리에서 물을 이끌어 들이고, 사방의 언덕에 버드나무를 심고,
연못 속에 섬을 만들었는데, 方丈仙山을 모방하였다."
무왕 39년(638) "3월에는 왕은 비빈들과 더불어 연못에 배를 띄우고 놀았다."
<삼국사기>, 제27권 백제본기 29 무왕조.
포용정 안에 있는 이 편액에는 향가 <서동요>기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서용과 궁암지는 관계없다.
궁남지를 나와 구드레나루로 간다.
신동엽 시비, 2시 40분.
시비의 뒷면에,
그의 시 <산에 언덕에>
신동엽(1930~1969)의 시
부여고을 동남마을에서 태어났다.
전주사범과 단국대학에서 수학하고 충남 주산농고와 서울 명성여고 등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일생 동안 시작에 전념하였다.
그의 시는 '빨갱이' 시비가 끊일 날이 없었다.
시 <진달래 山川>이 그러했고,
그의 시집 <신동엽 전집>이 유신체제 아래서 불온문서로 판금되고 말았다.
당시 문단은 폐쇄적인 시대적 상황에 동조하고 있었다.
그의 시에서 동족상잔에서 오는 갈등이나 잘못된 역사에 대한 분노 또는 그것을 바로잡겠다는 굳건한 의지를 읽지 못한 이유도 그러했을 것이다.
이러한 외세, 분단, 민주화 등의 문제를 처음 시에 끌어들인 것이 신동엽 시의 가장 큰 미덕이며,
그의 시가 영원히 살아 있을 수 있는 비결인 것이다.
체구가 작으면서도 대범하고, 겉으로는 유순해 보이면서도 안으로는 강한 사람, 이것이 신동엽 시인에 대한 사람들의 인물평이다.
이 근처에 신동엽 생가가 이는데,
찾아볼 틈이 없어 아쉬웠다.
시비에 있는 시 <산에 언덕에> 말고
다른 시, <껍데기는 가라>를 읽어 본다.
구드레나루 가는 길,
금강(백마강)변 넓은 둔치가 형성되어 여러 꽃들이 피어있다.
황량한 들판,
금강을 옆구리에 끼고,
가을날 저녁때 지는 해를 바라보며 느긋하게 노닐었으면 좋겠다.
지금은 그늘 하나 없는 이곳,
하도 더워 빨리 벗어나고 싶은 생각밖에 없다.
구드래나루(사적 및 명승 제6호) - 부여군 부여읍 구교리
일본말의 구다라는 ‘큰나라’ 곧 섬기는 나라, 본국, 대국의 뜻이면서 동시에 백제를 뜻한다.
또 ‘굿들개’가 변해서 된 말로 천지신명에게 제사를 모시던 곳이라 보기도 한다.
나루에서 상류쪽으로 고란사 아래 ‘대왕포’가 있다.
<삼국사기> 무왕 37년(636)조에,
“3월에 왕은 신하들을 거느리고 사비하(백마강) 북포에서 연화를 열고 놀았다.
이 포구의 양쪽 언덕에 기암과 괴석을 세우고 그 사이에 기이한 꽃과 이산한 풀을 심었다”고 하였다.
구드레나루 조각공원의 작품들이다.
공원 전시장이 넓고 작품들도 많다.
돌 조각작품이 대부분인 것 같고,
대작들이다.
부소산성 올라가는 길이다.
백마강길이라 쓰여있다. 3시 30분.
扶蘇山 西腹寺址
삼충사 정문 의열문
중문 충의문
三忠祠
백제 말의 세 충신인 성충, 흥수, 계백의 위폐를 모신 사당이다.
1957년에 처음 세웠고, 지금처럼 크게 만든 것은 1981년이다.
영일루, 3시 55분.
영일루는 사비성의 東臺인 영일대가 있던 자리다.
지금의 건물은 1964년 홍산에 있던 홍산문루를 옮겨 지은 것이다.
이곳은 부소산 동쪽 산봉우리이니, 해맞이하기 좋은 곳일 것이다.
반월루, 4시 5분.
군창지
백제 때의 군대 곡식 창고이다.
부소산은,
부여의 북쪽인 쌍북리에 있는 해발 100m쯤 되는 나지막한 구릉이다.
북쪽으로 강을 두르고 바로 산이 막혀있어 북으로부터 내려오는 고구려 군사를 막기에 알맞게 되어있다.
이 산에 왕궁과 시가를 지키는 최후의 기지인 부소산성이 있다.
산성이 완성된 것은 538년 성왕이 수도를 사비성으로 옮기던 무렵으로 보이나,
그보다 앞서 500년쯤 그 선왕인 동성왕이 산봉우리에 쌓았다. 또 605년에 무왕이 다시 고쳐 쌓았다.
성곽은 산꼭대기에 테뫼식(머리띠식)으로 쌓고 그 주위에 다시 포곡식(성의 안에 낮은 분지가 있는 형식)으로 둘렀으며,
성을 쌓는 방식은 흙과 돌을 썪어 다진 토석혼축식이다.
경사면에 흙을 다진 축대를 쌓아 더욱 가파른 효과를 냈다. 성곽은 2,200m에 걸쳐 부소산을 감싸고 있다.
부소산을 좀 돌아다니고,
다시 영일루로 왔다. 4시 20분.
낙화암 시비, 4시 40분.
낙화암
백화정 아래 바위벽이 낙화암이다.
<삼국유사>에는,
"백제고기에는, 부여성 북쪽 모퉁이에는 큰 바위가 아래로 강물을 바라보고 있는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자왕과 모든 후궁들이 화를 면치 못할 중 알고 서로 말하기를
'차리리 자살할지언정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하고
소로 이끌고 와서 강에 투신하여 죽었다. 한다.
그래서 세상에서 墜死巖이라고 하나, 이것은 속설의 잘못된 것이다.
다만 궁녀들은 그곳에서 떨어져 죽었다."
<삼국유사>, 제1권 記異, 太宗春秋公
고란사, 5시
고란사 현판,
송광사 침계루에 걸린 편액과 같은 글씨체.
海岡 金圭鎭(1868~1933)의 글씨.
고란사 극락보전
고란사 선착장, 5시 5분.
우리들만 탈 배, 저기 오고 있다.
물가의 저 바위가 釣龍臺란다.
소정방이 이곳에서 백마를 미끼로 용을 낚았단다.
낙화암 아래 암벽에 낙화암이라 쓰여있다.
우암 송시열이 썼다고 뱃사공이 말했다.
浮山
浮山(뜬섬)은 오산, 일월산과 함께 사비 세 영산 중의 하나이다.
이 산의 산신들이 오가며 백제를 지켰다고 한다.
백제시대에는 부여를 '사비'라 했다.
'사비'는 '새벽'의 토박이 말이다.
그리고 '부여' 또한 '날이 부옇게 밝았다'는 말을 한자로 옮긴 것이다.
꿈꾸는 백마강
Ladies Talk와정금화
바위 벽에 自溫대 라 쓰여있다.
규암선착장에 왔다.
하류에 백제대교를 건너는 곳에 구암나루터가 있다. 숲이 우거진 절벽에 수북정이 있다.
조선 광해군 때 양주목사를 지낸 김흥국이 인조반정을 피해 이곳에 와 지은 것이다.
그 아래쪽 바위가 窺岩이다. ‘엿바위’를 한자로 옮긴 말이다.
이 바위에 自溫臺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자온대", "저절로 따뜻해지는 바위"란 뜻이다.
백제 대 왕들이 규암나루를 건너 왕흥사에 행차하는 일이 많았는데,
왕흥사는 법왕 2년(600)에 지어 무왕 35년(634)에 완공한 백제의 국찰이었다.
왕이 강을 건너 왕흥사에 가다가 잠시 쉬면서 바위에 걸터앉으면 바위가 저절로 따뜻해졌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아마도 왕에에 아첨하는 신하들이 왕이 오기 전에 미리 바위를 데워놓았을지 도 모르는 일.
배에서내려 수북정에 왔다.
규암리 주차장에서
"…… 그건 너, 그건 너,
그건 너 때문이야…… ."
수박과 생맥주,
열받은 하루,
깔끔하게 마무리한다.
백제교에 올라왔다.
백제교는,
차는 다니지 않고, 사람, 자전거만 다니는 다리인 것 같다.
다리 위에서,
우리가 내린 선착장이 보인다.
"자온대"란 글도 잘 보인다.
6시 15분에 이곳을 출발,
10시 25분 부산 서면에 도착했다.
달미루
사진/ 청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