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시집
김수영/ 봄밤, 풀
추연욱
2016. 4. 7. 18:59
봄밤
김수영(1921~ 1968)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赫赫한 業績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오오 봄이여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너의 꿈이 달의 行路와 비슷한 廻轉을 하더라도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기적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오오 인생이여
災殃과 不幸과 格鬪와 청춘과 천만인의 생활과
그러한 모든것이 보이는 밤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 같이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節制여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靈感이여
김수영, <달나라의 장난>, 춘조사, 4292.
풀
김수영(1921~ 1968)
풀이 눕는다.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비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창작과 비평>, 1968,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