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의 역사가 시작된 것은 19세기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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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졸라
"나는 졸라를 향한 존경과 가없는 찬사에 사무쳐 있다.
군인과 성직자 같은 겁쟁이 위선자 아첨꾼들은 한 해에도 백만 명씩 태어난다.
그러나 잔다르크나 졸라 같은 인물이 태어나는 데는 5세기가 걸린다."
Mark Twain(1835~ 1910)
지식인의 역사가 시작된 것은 19세기 말이었다
베르나르 앙리 레비
언제나 제기되는 질문 :
왜 그때인가? 하필이면 왜 지난 세기말인가? 어째서 볼테르의 시대나 위고 Hugo의 시대는 아닌가?
그들도 서로 논쟁을 벌이지 않았던가? 그들도 자신들의 문필과 재능을 “대의명분”을 위해 사용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들도 이런 자격으로 역사의 장을 열어봄직하지 않았던가?
첫 번째 답변,
그것은 단어의 문제다.
단어 그 자체의, 드레퓌스 사건 이전에는 지식이인이란 단어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있다.
만일 그랬다 하더라도, 심지어 라루스 Larousse나 리트레 Littre 같은 사전들 속에서 그 단어를 찾아볼 수 있었다 하더라도 그때는 명사(지식인, 인텔리)의…… 뜻보다는 형용사의 뜻으로 쓰였다.
당시에는 “知的” 판단이란 말을 사용했을 때, 여기서 “지적”이란 말은 피상적이거나 분명치 않다는 뜻과 동의어였다.
그리고 어떤 작가의 “지적” 경향에 대해 언급할 때, 그것은 그 작가가 지니고 있는 경직된, 참된 사유와는 반대되는 것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드레퓌스 사건을 기다려야만 한다. 많은 남녀 지식인들이 그 형용샤를 다시 수정하고 그것의 의미를 뒤집고 바꾸어 놓기 위해서는,
그것을 다만 하나의 명사라기보다는 영광의 칭호, 하나의 상징으로 바꾸어 놓기 위해서는 드레퓌스 사건까지 기다려야 한다.
우리는 지식인들이다……, 지식인 일파다……. 이러한 외침 속에는 일종의 도전이 내포되어 있다! 무례함이!
거의 불손하다 싶은 이 형용사를 사용하고 그것을 마치 깃발처럼 흔들어대는 아주 대담한 태도가 깃들어 있는 것이다.
그건 바로 졸라 Emile Zola(1841~ 1929)의 태도다.
또 1898년 1월 14일부터 조르주 끌레망소 Geroges Clemenceau(1841~ 1902)가 졸라의 지지를 받아 <문학, 예술, 사회의 여명>지에 발표한 그 유명한 <선언> - 이른바 지식인 선언이라는 – 속에 내포된 태도다.
이것이 바로 첫 번째 답변이다. 명목론적인 답변. 내가 그렇게 되고자 애쓰고 있는 합리적인 명목론자에게 이것은 진실한 답변이 될 것이다.
두 번째 답변,
그것은 수의 문제다.
대다수, 드레퓌스에 이어 졸라의 편에 섬으로써 깃발 아래 함께 모였던 무수히 많은 사람들. 볼테르는 구석에서 혼자였고 위고는 유폐당했다.
그 당시에 정치적으로, 심지어 도덕적으로 어떤 입장을 취했던 작가들은 지성의 정상적인 운행에서 예외적인 인물들로 보였다.
반면, 바로 거기서 하나의 그룹이 형성된다. 다수가, 수많은 시인들 작가들 화가들 교수들로 이루어진 그들은 이제, 명시된 자격을 가진 공인으로서 국가의 사건들 속에 개입하기 위해 자신들의 펜이나 붓을 휘두르는 것이 자신들의 권리라는 판단을 내린다.
그리고 적대자들, 드레퓌스를 모욕하는 자들과 국시를 지지하는 자들도 침묵하거나 회피하는 대신에,
그리고 자신들의 분개나 신념을 마음속에 가두에 두는 대신에,
다시 말해 선동가들에 맞서 전통적으로 지켜오던 침묵과 학구적인 평온을 언제까지 고수하는 대신에,
이제는 자신들도 사건에 개입하기 위해 서로 똑같은 말과 똑같은 태도를 취하게 되고 그들 역시 다양한 단체를 결성, 동맹관계를 이룬다.
기계적인 모방 심리에서일까? 아니면 열광에 의한 것인가? 그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또한 사람들은 거기서 사상계에 새로운 유형의 인물이 나타나는 것을 주목해 볼 수 있다.
다른 시대들을 대표하는 율법학자, 성직자, 궤변론자 또는 박학자들만큼이나 새롭고 특별한 인물이다.
바레스 그조차도 그의 <자아예찬>을 한 <젊은 프랑스 지식인>의 수련 소설로 소개하지 않았던가?
세번째 답변,
가치의 문제다.
볼테르나 위고도 분명 가치를 위해 투쟁했다.
그들은 칼라스 Cllas나 랄리 톨렌달 Lally Tolendal을 위해 싸우고 제2제정과 나폴레옹3세를 고발하면서 그들이 선을 위하여 싸운다는 감정을 가졌다. 그러나 그 반면에 그들이 구상하지 못한, 설사 그랬다 하더라도 그들에게는 유치하고 미친 짓으로 보였을 한 가지 사상이 있다.
바로 작가에 대한사상이다.
즉 작가의 사명은 정의, 진리, 선이라는 이상과 국가라는 현실 공간 사이의 중재자가 되는 데 있다는 사상이다.
한편에는 국가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정의와 진리와 선이 있다. 지상권과 교권, 세속적인 공간과 이상으로 가득 찬 천국,
그리고 바로 이 두 질서와 두 공간 사이에 신흥종교의 새로운 사제들, 즉 지식인 집단이 존재하게 된다.
그들은 모두가 이상으로 가득 찬 천국의 존재자이기를 자처하며 실추된 온갖 초월의 표징들을 스스로 다시 취한다.
이런 사상이 싹트게 된 바탕에는 분명, 그에 따르는 ,
철학적 상황(그 당시 대학에서 승리를 거두게 되는 신칸트주의)과 신학적 상황(어떤 사람들이 “신의 죽음”에 대해 말하면서 고발했던 이런 엄청난 위기의 완성),
정치적 상황(이 사건과의 연관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교회와 정부의 분리),
그리고 대중매체의 상황(계몽주의자들이나 낭만주의자들도 그 정도로까지는 마음대로 사용하지 못했던 중개 도구로서의 대형 신문들의 탄생)이 깔려 있었다. 어쨌든 사실은 거기에 있다.
사람들이 대담하게도 …… 지성사에서 놀라울 정도로 …… 자신을 세상과 우주 사이의 중개자로 자처하기 위해서는 이런 여러 힘들의 결합이 필요했던 것이다.
지식인은 바로 이런 일을 위한 사제였다.
베르나르 앙리 레비, 한지희, 김희숙 번역, <자유의 모험>, 동아출판사,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