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仁顯王后

추연욱 2015. 1. 23. 14:10

 

仁顯王后(1667~ 1701)

 

조선 제19대 왕 숙종(1674~ 1720 재위)繼妃.

아버지는 병조판서 여양부원군 閔維重,

민유중은 송시열, 장인 宋浚吉의 제자이며, 노론의 중심 인물이다.

 

인경왕후가 죽자 1681

숙종 6(1680) 숙종의 첫 왕비 金萬基의 딸 仁敬王后가 죽고 5월 경신대출척으로 서인들이 다시 집권한 뒤, 1681년 가례(嘉禮)를 올리고 숙종의 계비가 되었다. 이때 왕비의 나이 15, 왕의 나이는 21.

인형왕후는 외할아버지 송준길에게서 교육을 받아 현숙한 여자라는 평판을 들었다. 궁중으로 들어와 후궁들을 덕으로 잘 거느렸다.

 

덕이 있는 부인이긴 하지만 여자로서는 별 매력이 없었던지., 거기다 임신도 하지 못했다.

 

장옥정, 그녀는 한미한 가문 출신으로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청상과부인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이 무렵 재상을 지낸 조사석이란 이가 이 과부 곧 장옥정의 어머니를 탐내 정부로 삼았다.

이 과부의 시동생이지 장옥정의 삼촌으로 張炫이란 자가 있었는데 역관으로 돈을 엄청 벌어 장안의 부자로 알려졌다. 장현은 조사석과 친했다. 모르긴 해도 장현이 자기 형수를 조사석에게 들였을 것이다. 또 미모에 총명한 질녀 옥정을 이런 인맥을 이용해서 궁녀로 들였을 것이다. 옥정을 미끼로 정치권력을 잡아보려는 포석이었을 것이다.

 

그러자 젊은 왕은 자연히 장씨의 처소를 찾았다. 장씨는 영리하고 애교도 잘 부리고, 정치적 감각도 뛰어나 왕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왕은 장씨의 내명부 품계를 종4淑媛으로 올리고, 노비 100명을 주었다. 장씨가 임신하자 숙종은 정2품 소의로 승격시켰다.

숙종 14(1688) 장소의가 아들을 낳자 임금의 총애는 더욱 두터워졌고, 노론은 장씨를 주목하기 시작한다.

 

장소의의 어머니는 대궐 안까지 가마를 타고 드나들었고, 그녀의 오라비 장희재는 의금부 별장으로 특채되어 위세를 부렸다.

 

16891월 숙종이 장소의 아들 (, 이이가 뒤에의 경종이 된다)을 원자로 책봉한다는 분부를 내리자 노론은 중전(인현왕후)이 아직 젊으니 더 기다리자라고 하며 반기를 들었다.

그러나 왕은 반대 의견을 무시하고 을 원자로 책봉하고 장소의를 으로 승격, 禧嬪으로 삼았다. “은 세자의 아내와 같은 품계다. 중전 다음 품계이다. “禧嬪은 장씨의 특별 호칭이다.

 

이때 화양동에 살고있던 송시열이 앞장서서 이 일을 반대하였다.

 

숙종은 송시열을 제주도에 위리안치, 제주도로 가는 도중 정읍에서 사약을받는다.

 

숙종은 이 일을 계기로 노론 계역 사람들을 대부분 죽이거나 파직, 또는 유배보내고 남인을 등용한다.

이것을 기사환국이라 한다.

 

1689424일 숙종은 인현왕후를 폐위, 궁중에서 내쫓는다.

궁중생활 8년 만에

庶人이 된 민씨는 안국방 친정집으로 간다.

인현왕후의 친정은 몰락하여 혼자 친정을 지켜야 했다. 먹을 것도 땔감도 부족하였다. 친지와 이웃들도 감시의 눈길이 무서워 그녀를 도우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인현왕후를 동정하게 되고, 숙종과 왕비 장씨를 미워하게 되었다.

 

16906월 원자 윤을 왕세자로 책봉하고, 장소의를 왕비로 책봉하였다. 중인 집안의 딸로 왕비에 오른 장씨는 기고만장하였고, 그녀의 오라비 장희재는 출세를 거듭하여 총융사가 되어 군사권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1694년 김춘택(金春澤한중혁(韓重爀) 등의 폐비복위운동을 계기로 갑술환국이 일어나 다시 남인이 밀려나고 소론이 정권을 장악하자, 장씨는 희빈으로 내려지고 민씨가 다시 왕비로 복위되었다. 17018월 원인 모를 질병으로 죽었고, 이와 관련되어 희빈 장씨도 무고사(巫蠱事)로 사사(賜死)되었다. 존호는 효경숙성장순(孝敬淑聖莊純), 휘호는 의열정목(懿烈貞穆), 능호는 명릉(明陵)이다. 그녀의 일대기를 그린 소설 인현왕후전이 전한다..

(현종 8)(숙종 27).

西浦 金萬重(1637~ 1692)

 

서인과 남인 간의 권력 다툼 과정에서 희빈 장씨(禧嬪張氏)와 함께 희생양이 되어 요절했다.

여흥민씨(與興閔氏)로 아버지는 노론(老論)인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유중(維重)이며, 어머니는 서인의 거두 송준길(宋浚吉)의 딸이다.

 

장숙정 21세 때 입궁. 숙종보다 두 살 많다.

장숙정의 아버지는 역관이며 당대 최고 부자였다. 숙종은 그 돈에 관심이 있었을 수도 있다.

장희빈은 남인이 지지했고, 인현왕후는 서인이 지지했다.

 

숙종 때 상평통보- 장희빈 아버지의 상업 기반?

 

숙빈 최씨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정읍 태인 출신,

궁녀의 하인 무수리

미인은 나닌 듯, 건강한 여인,

평민이거나 그 이하의 신분.

인현왕후와 관련이 있는 인물인 듯. 인현왕후의 복위를 위해서 갖널히 기도했다. 이 점이 숙종의 환심을 산 듯.

인현왕후는 노론이 지지. 영조의 지지 기반이 노론

 

숙종 임병란 등 국란 마감. 재출발 기틀을 마련하려 노력.

당쟁을 조정하지 못하고 정치적 이용, 그래서 당쟁의 폐단이 극대화 된다.

사회 희생자 복권.

 

 

謝氏南征記

주인공 사씨(謝貞玉)는 한림학사 유연수와 결혼하여 오래도록 아이를 낳지 못하자 喬氏를 첩으로 맞게 했다. 교씨는 아들을 낳자 교만해져 흉계를 꾸며 사씨를 쫓아낸다.

사씨는 남방을 유랑하다가 후에 교씨의 흉계가 드러나 남편이 회개하여 다시 맞아들여 행복한 여생을 보낸다.

 

김만중은 인현왕후를 염두에 두고 사씨남정기를 썼기 때문에 사씨 부인의 생애는 인현왕후와 유사한 점이 많다.

 

사씨남정기에서는 처첩 사이의 불화가 심각해 선악과 생사를 건 싸움이 벌어졌다.

유한림이란 사람의 처 사씨는 현숙한 덕을 온전히 갖춘 부인이다. 그러나 후사가 없어 자기가 주선해서 첩 교씨를 맞아들이게 한데서 사건이 생긴다. 교시는 지독한 악인이라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유한미의 환심을 사고 사씨를 모함해 쫓아냈다. 사씨가 남쪽 낯선 지방으로 가서 고초를 겪은 이야기라 해서 <사끼남정기> 또는 <南征記>라 했다. 그러다가 남편 유한림 또한 교씨가 간부와 짜고 모해하는 데 걸려들어 귀양 가는 신세가 되었기에 마침내 사건의 진상을 알고 자기 지위를 회복하자 교씨를 잡아 처단했다.

유한림을 임금으로 바꾸어놓고 생각해 보면 궁중에서 벌어진 사태의 간접적 표현이거나 충신과 간신 아이의 싸움과 상응한다. 그러기에 숙종이 인현왕후를 내치고 장희빈을 맞아들였던 일을 은근히 나무라고 숙종의 마음을 돌리게 하려고 이 작품을 지었다는 말이 나올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