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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영화 <제7의 봉인, The Seventh Seal>

추연욱 2014. 10. 14. 2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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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제7의 봉인, The Seventh Seal>

 

<제7의 봉인, The Seventh Seal>, Ernst Ingmar Bergman(1918~2007), 1957년에 개봉했다.

 

1. 영화의 첫 장면이다. 독수리가 먹구름 가들찬 하늘에 날고있다.

 

 

 

“네째 천사가 나팔을 불었습니다. 그러자 태양의 삼분의 일과 달의 삼분의 일과 별들의 삼분의 일이 타격을 받아 그것들의 삼분의 일이 어두워졌으며 낮의 삼분의 일이 빛을 잃고 밤의 삼분의 일도 마찬가지로 빛을 잃었습니다. 나는 또 독수리 한 마리가 하늘 한가운데서 날아다니는 것을 보았고 그것이 큰 소리로 ‘화를 입으리라. 땅 위에 사는 자들은 화를 입으리라. 아직도 천사들의 불나팔 소리가 셋이나 남아있다’하고 외치는 것을 들었습니다. ” <요한묵시록> 8장 12~13절.

 

2. 바닷가 자갈밭에 두 사람이 늘어져 누워있고, 말은 바닷물에 발을 담그고 쉬고있다. 그들이 타고온 배는 난파되고 두 사람이 파도에 떠밀려 여기까지 왔는지 아니면 배가 그들을 내려주고 떠났는지는 알 수 없다. 그것은 아무래도 좋다. 어쨌든 그들은 조국땅 스웨덴에 들어온 것이다.

 

그들은 기사 안토니우스 블로크와 그의 시종 옌스이다. 기사는 소년의 나이에 어느 신학자의 꼬임에 빠져 시종을 데리고 십자군 전쟁에 참가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10년 동안 모진 고생끝에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십자군이 돌아오고, 흑사병이 유럽 전역에 창궐하던 14C 중엽이다. 이 영화는 당시 유럽의 상황이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기사 안토니우스 블로크역은 Max von Sydow(1929~)가 맡았다. 2002에 나온 <Minority Report>에서 범죄예방시스템을 장악하여 세상을 공포로 몰아넣은 사람이다. 위선과 사악함을 인자한 미소로 위장한 인간.

 

왼쪽이 기사 오른쪽이 시종 옌스이다.

 

 

 

시종 옌스, 그는 여자를 싫어한다. 여자는 단지 살림하는데 필요한 존재이다. 섬겨야 하는 주인 기사와 냉소적인 관계이다.

그는 “어느쪽으로 돌아서도 엉덩이는 뒤쪽”이라는 정도의 진리를 깨달은 현실적인 인물이다.

그는 세계에 대해 냉소한다. “죽음 앞에서는 냉소, 주님 앞에서는 폭소, 자신 앞에서는 조소, 여자 앞에서는 미소.”라고 자신있게 말한다.  

 

기사는 자기의 성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영화는 집으로 가는 과정에 벌어진 몇 가지 에피소드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영화는 줄거리라 할 만한 것이 없다. 이미지들로 전개되고 있다. 이 길이 곧 죽음으로 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지금 까지도 길이었고, 앞으로도 길이다.

 

기사는 정신을 차리고 기도를 한다.

기사는 죽음을 본다.

 

 

죽음의 사자가 막아선다.

“나는 이미 오래 전부터 너의 곁에 있었다.”

“알고 있었다.”

“준비 됐나?”

“육신은 준비됐지만 나는 아직……. 잠시 기다려라”

“다들 그렇게 말하지만 나는 연기하지 않는다.”

 

 

기사는 죽음의 사자에게 영혼을 걸고 체스를 두자고 제안한다.

체스 시합은 영화 내내 계속된다.

 

기사는 체스로 시간을 번다. "내가 버티는 한 나는 산다."

 

 

 흑사병 탓인지 항간에 흉흉한 소문들이 가득하다.

“말 두 마리가 서로 뜯어먹었다”느니, “무덤들이 입을 벌리고 해골들이 널렸다”느니, “하늘에 해가 4개가 떴다”느니…….

흑사병은 하나님의 천벌이라 생각한다. 주막은 세상의 모든 소문들이 모인다.

“한 여자가 소머리를 낳았다., 불로 정화하려다가 죽은 사람도 많다.”

심판의 날이다.

천사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무덤이 열린다.

그러니 살아 있는 동안 먹고 마시자.

 

3. 광대 요프일가 아내 마아, 광대 아들 마카엘를 만난다. 요프는 배우이며, 음유시인이며 마술사이다.

광대 요프는 맑은 영혼을 가졌다. 성모마리아가 아기 예수에게 걸음마를 가르치는 모습을 현실로 본다.

 

4. 시종은 어떤 화가의 작업실로 들어간다. 화가는 사제의 주문으로 그린 그림을 보여준다. “죽음의 춤”, 죽음이 가까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교훈적인 그림이다. 당시 인간세상의 축도이다. 마치 우리나라 불화 감로탱을 보는 것 같다.

이 그림은 마지막 장면을 위한 복선이다.

 

그림 <죽음의 춤>

 

 

 

이때 기사는 교회로 들어가 고해를 한다.

 

 

“저는 마음이 텅 비어있습니다. 이 공허함은 제 자신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제 모습을 보면 역겹고 두렵습니다. 저는 이웃에게 무심해서 마음의 문을 닫고 살았습니다. 이제는 환상 속에 갇혀 악령의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도 죽고 싶진 않겠지?”

“죽고 싶습니다.”

“그럼 뭘 기다리지?”

“확실히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직접 느끼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것입니까? 왜 하나님은 막연한 약속들과 기적 속에 숨어 계셔야만 합니까. 우리 자신도 못 믿는데 어떻게 남을 믿을 수 있습니까. 왜 내 안의 하나님을 죽일 수 없습니까. 왜 하나님은 내가 저주하고 도려내고 싶어 하는데도 내 안에 애처롭게 살아 계십니까. 왜 내가 지울 수 없는 당황스런 현실로 계십니까. 난 확실히 알고 싶습니다. 믿음이나 추측이 아닌 확실한 지식을. 하나님은 우리가 창조해낸 우상일지도 모릅니다. 제 인생은 아무 의미도 없는 탐구의 연속이었습니다. 신께서 그분의 손을 내미시고 그분의 얼굴을 보이시며 제에게 말을 걸어주시기 바랍니다. 어둠 속에서 그분께 목놓아 외쳤지만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진심을 털어놓는다.

“체스 게임으로 남은 일을 처리할 말미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뜻깊은 일을 하기 위해” 체스의 전략을 말한다.

사제가 고개를 돌리자 기사의 귀향길을 따라오고 있던 죽음의 사자, 곧 체스의 상대임을 알게된다. 적에게 체스의 작전이 노출되었다. 그는 곧 죽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살아 있음을 기뻐한다. 해결해야할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흑사병 탓인가. 극단적인 짓들이 벌어진다. 채찍질 고행(중세 유럽 광신도),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고 참회하면서 스스로 채찍질하기도 하고…….

 

 

 

 

 

 

 

 

 

 

 

 

사제는 외친다.

“하나님께서 천벌을 내리셨소. 지금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아시오. 죽음이 등 뒤에 있소.”

 

 

 

 

 

5. 물을 구하러 어떤 집에 들어갔다가 라발이라는 사나이를 만난다. 그 사나이는 “천당과 지옥의 박사”인 신학자이다. 그가 십자군에 지원하도록 부추긴 사나이다. 지금은 죽은 자의 물건을 훔치는 좀도둑이다. 그리고 여기서 이 사나이에게 곤욕을 치르는 여자를 만나 동행하게 된다.

 

6. 광대의 시시한 공연도 있었고,

광대의 대장인 스카트가 대장장이 플로그의 아내 리사와 도망가는 일이 벌어진다. 이런 일은 인간이 사는 세상에 어디서나 벌어지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당시의 상황을 리얼하게 그리고 있기도 하다.

 

광대 일가 3명과 가까워진다. 기사는 광대의 아내 마아에게 말한다.

 

 

 

“신앙은 곧 고통이요, 아무리 불러도 대답없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과 같소. 당신들과 이렇게 앉아 있으니 모든 게 비현실적이고 나와는 상관없는 것 같소. 이 순간을 잊지 못할거요. 딸기와 우유, 저녁놀에 물든 당신들의 얼굴, 수레 안에 잠든 미키엘, 류트를 타는 요트. 나는 이야기를 기억하면서 이 기억을 신선한 우유가 철철 넘치는 그릇처럼 내 두 손에 조심스럽게 간직할 것이오. 그리고 이 기억은 나에게 충만 그 자체가 될 것이오.”

기사는 그들과의 시간에서 충만한 평화와 안정을 느낀다.

 

이때 죽음의 사자가 나타난다.

“기다리고 있었다. 작전이 누설되었으니 퇴각의 북을 쳐야지.”

 

 

 

 

 

 

그러나 아직은 죽을 때가 아니다. 기사는 승산없는 싸움으로 삶을 조금 연장한다.

광대가 가려는 남쪽은 흑사병이 심하니 자기를 따라 숲을 거쳐 자기 집으로 가자고 제안한다. 이리하여 광대일가 3명과 함께 집으로 간다. 가다가 대장장이와 아내 리사가 돌아와 함께 간다.

 

7. 화형장으로 가는 소녀를 만난다. 그녀는 악마와 동침했기 때문에 페스트가 퍼졌다는 죄목으로 화형당한다.

기사는 소녀에게 악마에 대해 묻는다.

“너는 악마와 함께 있었다지? 나도 만나 보고싶다. 악마에게 하나님에 관해 물어보려고. 악마는 누구보다 (하나님) 잘 알거야.”

“내 눈에 악마의 모습이 보이나요. 신부님은 제 눈에서 악마를 볼 수 있다고 했어요. 병사들은 제게 손을 대려고도 하지 않아요. 악마는 어디든 나와 함께 있어요.”

 

 

 

 

아무 답도 얻지 못했다. 이 영화는 ‘선과 악은 같다’는 주제를 단순하게 그려내고 있다. 주인공은 기사가 아니라 ‘믿음’이다.

소녀에게 약을 먹여 고통없이 죽게 한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이것밖에 없다.

 

 

 

8. 라발은 흑사병에 걸려 몸부림치며 죽는다.

 

9. 이때 죽음의 사자가 나타나 체스 게임을 벌인다. 마지막 게임이다.

기사의 여왕말이 죽는다. 죽음을 암시한다.

“다음에 만날 때 너와 네 동료들의 마지막 날임을 기억하라.”

“그때 네 비밀을 털어 놓겠느냐?”

“나에게는 비밀이 없다.”

 

 

 

광대의 맑은 눈에는 이 장면이 보인다. 광대는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몰래 달아난다.  

 

10. 폭풍이 몰아치는 밤 기사는 집에 도착했다. 흑사병으로 다 떠나고 아내 혼자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내 카린에게 말한다.

“이젠 다 끝났소. 좀 피곤하오.”

 

 

 

 

식탁에서 아내가 <요한계시록>을 읽는다.

“어린 양이 일곱 째 봉인을 떼셨을 때 약 반 시간 동안 하늘에는 침묵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일곱 천사를 보았는데, 그들은 나팔을 하나씩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첫째 천사가 나팔을 불었습니다. 그러자 우박과 불덩어리가 피범벅이 되어서 땅에 던져져 땅의 삼분의 일이 타고 나무의 삼분의 일이 탔으며 푸른 풀이 모두 타버렸습니다.……

 

일곱째 천가가 나팔을 불었습니다. 세상 나라는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었고, 그리스도께서 영원무궁토록 군림하실 것이다.……”<요한계시록>, 8장 13절~110장 15절

 

 

이때 죽음의 사자가 나타난다. 모두에게 보인다.

 

광대도 본다. 그리고 말한다.

“먹구름이 몰아지는 하늘을 배경으로 맨 앞에는 죽음의 사자가 낫과 모래시계를 들고 기사, 시종 옌스, 대장쟁이 플로그와 그의 아내 리사, 라발과 맨 뒤에는 스카트가 류트를 들고 장엄한 춤을 추며 해돋는 이쪽에서 어둠을 따라 저쪽으로 멀리멀리 사라진다.”

 

 

 

 

 

 

낫과 모래시계라,

죽음의 사자는 크로노스(kronos)이다. 그는 낫으로 그의 아버지 우라노스(Ouranos)의 생식기를 잘랐다.

크로노스는 시간이다.

 

“사도들은 다 같이 모인 자리에서 예수께 이렇게 물었다. ‘주님, 주님께서 지금이 이스라엘 왕국을 다시 세워 주실 때가 바로 지금입니까?’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권능으로 결정하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다’……”<사도행전> 1장6~7절.

 

“때와 시기”의 희랍어 원문은 크로노스와 카이로스이다. 둘 다 시간을 뜻한다. 크로노스는 시간의 경과, 카이로스는 정해진 시간이다. 인간은 시간의 경과, 무의식적 시간에 잡아먹힌다.

그런 결정의 시기는 인간이 알 바 아니요 절대자의 손에 맡겨져 있다는 것이다.

 

크로노스 역시 아버지 우라노스처럼 자기가 낳은 자식을 하나하나 먹어치운다. 시간은 모든 것을 변하게 만든다. 소멸도 생성도.

우라노스의 잘린 생식기에서 흐른 피는 바다에 떨어져 여신 아프로디테로 탄생한다. 그래서 인간의 삶은 계속된다.

그래서 사랑이 계속의 원리이다.

 

11.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사나이가 여행길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한다. 기사가 체스 게임으로 사자로부터 말미를 얻어 알아내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죽음의 사자와 체스 게임은 승산없는 싸움이다. 어쩌면 죽음의 사자에 대한 불경으로 시시포스처럼 지옥에 떨어져 돌덩어리를 산 위로 져 올리는 행위를 영원히 반복해야 하는지도 모르는데.

 

신으로부터 구원을 확신하는 일, 삶의 허무를 극복하기 위한 답을 얻어야 했다. 화형당하는 악마 소녀에게서도, 죽음의 사자에게서도 그 답은 얻지 못했다. 신의 침묵하기 때문이다.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답은 얻었다.

죽음의 사자로부터 요프와 마아 가족을 구한 것은 그가 던진 마지막 긍정의 몸짓이다.

 

베리만은 신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방식에 대한 불만이 많았다. 그는 이 주제를 줄기차게 반복하여 추구했다. <어두운 유리를 통해>, <겨울 빛>, <페르소나> 등이 그런 작품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