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호연지와 군자정
유호연지와 군자정
유호연지와 군자정에 도착했다. 9시
유호연지의 君子亭은 慕軒 李育(생몰 연대는 모른다. 조선 중기에 살았다)이 1531년에 처음 지었다.
慕軒 李育
고려 때부터 명문가문인 고성 이씨 가문의 사람이다,
본디 안동에서 살았다.
모헌 이육선생은 형제가 다섯인데, 모두金宗直(1431~1492)의 제자였다.
성종 이후 김종직 등 영남의 신진 사류들이 중앙 정계에 등장하면서 유자광 등 훈구파와 갈등이 생긴다.
이 갈등은 연산군 4년(1498) 김종직 문하의 김일손이 <성종실록>을 편찬하면서 <조의제문>을 사초에 삽입하자, 훈구파로부터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방한 글이라 하여 문제삼게 되었다. 결국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려져 김종직 문인들이 대거 숙청된다.
이 사건에 안동 출신 부제학 이윤, 정언 이주 형제가 연루되어 진도 등으로 귀양갔고,
막내인 이육 또한 벼슬을 버리고 두 형님의 뒷바라지에 나섰다.
어느날, 안동에서 진도로 가는 도중 이곳 청도에서 하룻밤을 잤다.
이렇게 청도와 인연을 맺은 이육은 뒷날 갑자사화(1504)가 나자,
아예 청도 유등리로 이주하고 다시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戊午士禍(연산군 4년 1498년)에 伯兄 雙梅堂公은 거제도,
仲兄 忘軒公은 진도 유배된다.
甲子士禍(연산군 10년 1504년)에 忘軒公은 진도에서 제주도로 移配되었다가 斬刑되고
先親 承旨公은 賊子를 두었다는 이유로 부관참시되었으며,
季氏 修撰公 宵는 진도로,
숙부 留守公 浤은 寧海)로,
佐郞公 洺은 盈德)으로 유배돤다.
이렇게 되자, 모헌 이육선생은 세상에 뜻을 끊고 세거지 安東에서,
"山不高而秀麗 하고 地不廣而肥沃 산은 높지 않으나 수려하고 땅은 넓지 않으나 비옥한" 이곳 청도의 柳谷 竹林村으로 옮겨 정착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못을 파고 蓮을 심고 연못 안에에 정자를 지어 君子亭이라 이름지넜다.
때로 벗들을 불러 시를 짓고, 후진들에게 글을 가르치면서 悠悠自適한 여생을 보냈다.
글들이 많이 있었겠지만 兵火 등으로 남은 것이 없다.
<모헌공의 유허비>에서.
유호연지 안에 있는 군자정
큰 길에서 군자정으로 들어가는 돌다리, 遠觀橋.
주돈이의 <愛蓮說>에 나오는,
"可遠觀而不可褻翫焉 멀리서 바라볼 수는 있지만 함부로 가지고 놀 수는 없다."에서 온 말이다
정자 앞의 작은 문 一鑑門
"一鑑"은 朱子(1130~1200)의 시 <觀書有感>에서 따온 말이다.
半畝方塘一鑑開 조그만 반 이랑 네모 연못에 거울처럼 열리니
天光雲影共徘徊 하늘빛과 구름그림자 그 안에 떠 있네.
問渠那得淸如許 무엇일까 이 연못이 이리 맑은 까닭은
爲有源頭活水來 샘이 있어 맑은 물이 흘러오기 때문이지.
군자정이란 이름의 '군자'는 <愛蓮說>에,
"蓮 花之君子者也 연꽃은 꽃 중의 군자" 란 말에서 유래한다;
정자 안에 "모헌정사"란 현판이 걸려있다.
이곳에서 마을 자제들을 가르쳤다.
지금도 음력 8월 18일에는 지방 유림들이 모여 예전처럼 시회도 열고 성현의 가르침을 재현한다.
유호연지를 한 바퀴 돌아보기로 한다.
愛蓮說
周敦頤(1017~1073)
물이나 땅에서 자라나는 풀이나 나무의 꽃은 사랑스러운 것이 매우 많다.
晉나라 도연명은 홀로 국화를 사랑하였다. 당나라 이래로 세상 사람들은 모란을 무척 좋아한다.
나는 홀로 연꽃이 더러운 진흙에서 나왔으면서도 진흙에 물들지 않고, 맑은 잔물에 씻기면서도 요염하지 않은 것을 사랑한다.
줄기 속은 비었고, 겉은 곧으며 넝쿨로 자라거나 가지를 치지 않으며, 향기는 멀수록 더욱 맑고 당당하고 깨끗하게 서 있어서 멀리서 바라볼 수는 있지만 함부로 가지고 놀 수는 없다.
내가 생각하기에,
국화는 꽃 중의 은자이고,
모란은 꽃 중의 부귀한 자이며,
연꽃은 꽃 중의 군자이다.
아! 국화를 사랑하는 이가 도연명 이후에 또 있었다는 것은 들은 일이 거의 없다.
연꽃을 사랑함을 나와 함께하는 이는 몇이나 될까?
모란을 사랑하는 이는 마땅히 많을 것이다.
水陸草木之花 可愛者甚蕃 晋陶淵明獨愛菊 自李唐來 世人甚愛牧丹
予獨愛蓮之出於淤泥而不染 濯淸漣而不妖 中通外直不蔓不枝 香遠益淸 亭亭淨植 可遠觀而不可褻翫焉
予謂
菊 花之隱逸者也
牧丹 花之富貴者也
蓮 花之君子者也
噫 菊之愛 陶後鮮有聞
蓮之愛 同予者何人
牧丹之愛 宜乎衆矣
김학규 역, <古文眞寶> 後集, 명문당, 1991.
詠蓮 연꽃을 보고
容軒 李原(1368~1430)
風來水面遠飄香 물 위에 바람 부니 멀리서 향기 실려 오고
淨植亭亭異衆芳 깨끗하게 자란 포기 다른 곷과 다르네.
料得濂溪當日愛 생각컨데 주렴계가 그때 사랑 얻은 것은
非關翠蓋與紅粧 푸른 잎과 붉은 꽃 때문 만은 아니겠지.
시비에는 틀린 글자들이 보인다.
제목의 '咏'은 '詠',
'浮'는 '淨',
'주염계'는 '주렴계',
'興'은 '與'로 고쳐야 맞을 것 같다.
갤러리, 찻집, 레스또랑 등이 있는데,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모두 문이 잠겨있다.
연지를 한 바퀴 도는데 50분쯤 걸렸다.
어떤 젊은 부인이 연꽃을 즐기고 있었다.
이야기를 주고 받는 중,
이서고등학교 출신이고,
대구 수성오거리에 살며,
청도읍에 친정부모가 살고 있어 그리로 가는 길에 이곳에 들렀다고 했다.
청도까지 태워 주겠다고 했다.
더 둘러보구 싶은 것도 있었으나, 덥고 돌아갈 일도 아득해 차를 얻어 탔다.
차에서 이호우 · 이영도 생가를 아시냐고 물었더니,
시간이 좀 있으니 그리로 같이 가자고 해서 갔다.
청도읍에서도 제법 멀었다. 유천이었다.
이호우 · 이영도 생가에 왔다. 10시 45분.
청도군 청도읍 유천길 46.
문이 잠겨있다.
기와로 덮은 담 오른쪽 집이다.
사람이 살지 않는 듯, 잡초가 무성하다.
등록문화재 제293호
근대문화유산
어렵게 찾아 왔는데,
껍데기만 보았다.
이호우를 처음 안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였다.
국어 교과서에 <달밤>이 실려 있었다.
낙동강 빈 나루에 달빛이 푸릅니다.
무엔지 그리운 밤 지향 없이 가고파서
흐르는 금빛 노을에 배를 맡겨 봅니다.
낮 익은 풍경이되 달 아래 고쳐 보니.
돌아올 기약 없는 먼 길이나 떠나온 듯,
뒤지는 들과 산들이 돌아 돌아 뵙니다.
아득히 그림 속에 정화(淨化)된 초가집들,
할머니 조웅전에 잠 들던 그 날 밤도
할버진 율(律) 지으시고 달이 밝았더니라.
미움도 더러움도 아름다운 사랑으로
온 세상 쉬는 숨결 한 갈래로 맑습니다.
차라리 외로울망정 이밤 더디 세소서.
이호우, <爾豪愚시조집>, 영웅출판사, 1955.
이 시조는 본디 1941년 <文章>지에 발표된 시조다.
중학생 때도 이 시조가 좋았다.
지금은 더 좋다.
개화
꽃이 피네, 한 잎 한 잎.
한 하늘이 열리고 있네.
마침내 남은 한 잎이
마지막 떨고 있는 고비.
바람도 햇볓도 숨을 죽이네.
나도 가만 눈을 감네.
전에는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려 있었다.
그래서 가르쳤다.
참 어렵다.
꽃이 피는 순간의 긴장, 현대적 감각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한 편 더 읽어 보기로 하자.
길
이미 한 여인을 잃어도 보았으매
일찍 여러 벗들을 보내기도 하였으매
이제 내 원수로 더불어 울 수조차 있도다
여우도 토끼도 산은 한품에 안고
비록 더러운 흐름도 바다는 거뒀어라
이제 내 오고 가는 일 묻자 하지 않도다
한번 우러러면 한 가슴 푸른 하늘
밤이면 별을 사귀고 낮이면 해를 믿어
이제 내 홀로의 길을 외다 아니 하도다.
李鎬雨(1912~ 1970)
호는 爾豪愚
1941년 <문장>에 닫밤이 추천되어 등단한다.
1955년에 <이호우 시조집>이 출간되었고,
동생 이영도와 함쎄 <오누이 시조집>이 있다.
李永道(1915~ 1976)
호는 丁云
1945년 동인지 <죽순>에 시조 "제야"로 등단한다.
통영여고, 부산 남성여고, 마산 성지여고 교사를 지냈다.
시저집 <靑苧集 1954>, <석류 1968>, <언약 1976>가 있다.
낙화
뜨겁게 목숨 사르고
사모침은 돌로 섰네.
겨레와 더불어 푸르를
이 증언의 언덕 위에
감감히
하늘을 덮어
쌓이는 꽃잎
꽃잎.
아쉬운 김에 마을을 둘러 보았다.
이 마을은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것 같다.
마치 영화 촬영을 위한 셋트인 것 같다.
청도역, 12시 15분.
청도역에서 12시 28분에 출발하는 기차를 타서,
1시 15분에 구포역에도착했다.
7시 25분 구포역 출발,
8시 7분 청도역 도착,
8시 40분 출발하는 2번 버스를 타서,
9시에 유호연지 앞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