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시집

문병란/ 호수, 나그네, 꽃씨

추연욱 2014. 7. 15. 23:43

湖水

 

문병란(1935~ )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온 밤에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무수한 어깨들 사이에서

무수한 눈길의 번득임 사이에서

더욱더 가슴 저미는 고독을 안고

시간의 변두리로 밀려나면

비로소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수많은 사람 사이를 지나고

수많은 사람을 사랑해버린 다음

비로소 만나야 할 사람

비로소 사랑해야 할 사람

이 긴 기다림은 무엇인가.

 

바람 같은 목마름을 안고

모든 사람과 헤어진 다음

모든 사랑이 끝난 다음

비로소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여

이 어쩔 수 없는 그리움이여.

 

문병란 시선집, <땅의 戀歌>, 창작과 비평사, 1981.






나그네


문병란


먼 길 헤매다

몇 해 만에 돌아와 보니

사람들 얼굴이 바뀌어졌네.


아는 얼굴들

어디론가 사라지고

내 자리엔

다른 얼굴이 은은히 웃네.


나는 어는 하늘가로 떠돌아 왔는가

나는 어느 별 아래로 헤매어 왔는가


빈 손 가지고 떠났다가

빈 손 가지고 돌아와

오늘은 얼굴을 반쯤 가리메

살며시 돌아서 찡긋이 한 눈을 감네.


 

 

꽃씨

 

문병란

 

가을날

빈손에 받아 든 작은 꽃씨 한 알!

 

그 숱한 잎이여 꽃이여

찬란한 빛깔이 사라진 다음

오직 한 알의 작은 꽃씨 속에 모여든 가을.

 

빛나는 여름의 오후,

핏빛 꽃들의 몸부림이여

뜨거운 노을의 입김이 여물어

하나의 무게로 만져지는 것일까.

 

비애의 껍질을 모아 불태워버리면

갑자기 뜰이 넓어가는 가을날

내 마음 어느 깊이에서도

고이 여물어가는 빛나는 외로움!

 

오늘은 한 알의 꽃씨를 골라

기인 기다림의 창변에

화려한 어젯날의 대화를 묻는다.

 

문병란 시선집, <땅의 戀歌>, 창작과 비평사, 19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