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연욱 2014. 6. 3. 08:41

 

 

실상사의 아침/ 2007년 10월

 

 

 

실상사(사적 제309)는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에 있다.

 

신라 제42대 흥덕왕 원년(828)證覺國師 弘陟이 구산선문의 하나인 실상산문을 열면서 창건했다.

홍척은 도의선사와 함께 당나라에 들어가 西堂智藏(739~814)에게 선법을 깨우친 뒤 흥덕왕 원년(826)에 귀국하여 이 절을 세우고 선종을 전파했다.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이곳에 절을 세우지 않으면, 우리나라의 정기가 일본으로 가 버린다 하여 절을 세웠다고 한다.

 

그 뒤 2代祖 秀徹(817~893)을 거쳐 3대조 片雲이 크게 절을 중창하고 선풍을 크게 떨치게 되었다.

930년에는 견훤이 실상사에 많은 시주를 하여 세력을 과시한 적도 있다.

 

<지리산실상사사적>에 따르면, 조선 세조 14(1468)에 화재로 몽땅 불타고 승려들은 백장암에 기거하면서 그 명맥을 이어 왔다. 200여년 동안 폐허로 있다가 숙종 5(1679)碧巖 覺性(1575~1660)이 삼창했다.

1690枕虛를 중심으로 300여 명의 수도승들이 절의 중창을 조정에 상소하여 숙종 5(1700)에는 36동의 건물을 세웠다.

순조 21(1821)년에도 중건되었다.

그러나 고종 19(1821) 함양 출신 양재묵과 산청 출신 민동혁 등이 불을 질러 건물들이 불타버렸다.

1884月松 등이 10여 채의 건물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 17교구 본사인 금산사의 말사이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보광전을 비롯하여 약사전 · 명부전 · 칠성각 · 선리수도원 · 누각 · 극락전 등과 부속 건물이 있다.

 

실상사는 지리산 천왕봉을 바라보며 여러 봉우리를 꽃잎으로 삼아 꽃밥에 해당하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반야봉, 노고단, 고리봉 등지에서 흘러내린 물이 모여 만수천이 작은 개울을 이루어 실상사 앞을 흐른다.

절은 지리산 자락의 다른 절과 달리 평지에 들어서서 사역을 따라 담장을 낮게 두르고 담 안으로 키 큰 나무들로 둘러 색다른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절 앞을 흐르는 만수천에 해탈교가 있다.

해탈교를 지나기 전후 세 기의 돌장승이 있고, 해탈교를 건너 논길을 200m쯤 걸어가면 천왕문이 나온다.

천왕문으로 들어서면 절 마당에 삼층석탑 두기가 동서로 나란히 서있고, 뒤쪽 중앙에 석등과 금당인 보광전이 서있다.

보광전 양 옆으로 약사전과 칠성각이 있다. 석등 양 옆으로는 명부전과 요사채 들이 들어서있다.

 

천왕문과 삼층석탑 중간에 종루, 종루 뒤쪽에 건물터가 있다.

이 건물터는 원래의 가람과는 별도로 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이야기만으로 전하는 오층목탑이 있었던 장육전 지리로 추정하고 있다.

요사채 쪽 사잇길로 들어가면 극락전이 있고, 극락전 주변에 홍척스님의 부도와 부도비 그리고 수철스님의 부도와 부도비가 있다.

 

 

실상사 천왕문

 

 

 

 

구산선문

 

신라땅이 곧 불국토라고 믿고 있던 통일신라 초기 신라인들은 모든 현상은 하나의 이치로 돌아와야 한다(萬法歸一)”는 화엄사상을 받아들여, 통일왕국의 주도 이념으로 삼아 화엄불국토 건설을 실현하고자 한다.

 화엄불국사의 조영은 이 꿈의 실현을 표방한 것이었다.

 

그러나 8세기 후반 경덕대왕대를 정점으로 하여 통일왕조는 왕실의 내분과 지배층의 부패로 인해 서서히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계속되는 왕족간의 왕위 다툼으로 지방에서는 독자적 경제기반을 가진 호족세력이 성장하기 시작한다. 이로 말미암아 절대화되어 있던 진골왕족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그들의 이념적 바탕인 화엄사상도 더 이상 주도 이념의 구실을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새 사회를 이룰 새로운 이념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 무렵 당나라에서는 不立文字 直指人心이라는 종지를 내건 달마 선종이 크게 유행하고 있었다.

중국 선종의 초조 菩提達磨(?~528)520년 인도에서 중국으로 와 숭산 소림사에 머물면서 선종을 전했다.

달마의 법맥은 5弘忍(601~674)까지는 한 갈래로 이어오다가, 6慧能(638~713)에 이르러 남종선과 북종선으로 갈라진다. 神樹대사(606~706)를 초조로 하는 북종선은 漸修를 주장하며 皇室의 비호를 받으며 북방지역으로 전파되었다. 頓悟를 주장하는 남종선은 남종선의 초조이자 6조로 인가받은 慧能이 주석하던 廣東省 韶州 曹溪山 보림사를 중심으로 남중국 전역으로 퍼진다.

 

신라 사회는 여전히 골품제도를 바탕으로 한 신분사회였다. 자질과 능력이 뛰어나도 육두품 이하 하층귀족층 출신들은 최고 집권층이 될 수 없었다. 이렇게 신분상의 제약을 받던 육두품 이하의 하층 귀족계급 출신 승려들이 대거 당나라로 건너가서 신사상을 체득하고 돌아온다. 그 중에서도 특히 혁신적인 남종선을 배워 당나라의 선문 조사의 印可를 받아오는 이들이 많았다.

 

인가를 받은 선사는 一門을 개설하여 조사가 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다.

9세기 전반부터 개설되기 시작한 구산선문은 이렇게 우리나라 선사들이 당나라에 건너가서 당나라의 선문 조사들로부터 인가를 받고 돌아와 설립한 것이다.

 

그중 가장 먼저 남종선의 心印을 받고 돌아온 사람은 도의선사였다.

도의선사는 설악산 진전사에서 40년 동안 선정을 닦으며 염거화상(?~844)에게 법을 전한다.

염거화상은 설악산 億聖寺(선림원)에 주석하면서 보조선사 체징(804~880)에게 법을 전해 주었고 체징은 장흥 가지산으로 가서 가지산문을 연다. 이어 8개의 산문이 열린다.

이를 9산선문이라 한다. 이들은 9세기 초반부터 10세기 초반에 걸쳐 그 지방 호족의 후원을 받으며 모두 개산했다.

 

9산선문은 가지산문(장흥 보림사-도의), 실상산문(남원 실상사-홍척), 사굴산문(강릉 굴산사-범일), 동리산문(곡성 태안사-혜철), 성주산문(보령 성주사-무염), 사자산문(영월 흥녕사-철감), 희양산문(문경 봉암사-도헌), 봉림산문(창원 봉림사-현욱), 수미산문(해주 광조사-이엄) 등이다.

이 가운데 굴산사, 성주사, 봉림사, 광조사는 폐사되어 절터만 남아있다.

 

선종의 사회적 성격은 성속의 통일과 계급의 평등이었다.

인도와 중국은 신분제도와 경제수준에 따라 불교의 불평등 구조를 만들어냈다. 선승들은 사회구조의 이질성이 빚는 마찰을 변증법적으로 통일하려고 노력하였다. 선승들은 승려와 신도의 차별을 없애고 스스로 일하면서 자급자족하는 생활을 하였다. 선종이 주장한 노동관과 평등관은 실천성을 수반하였고, 중생제도에 접근한 사상이었다. 그러나 한편 개인주의, 분파주의로 내닫고 직관을 강조하여 배타적으로 흘러갔다.

 

이러한 한계성으로 9세기 말 농민봉기가 치열하게 전개될 때에 선종은 지배 이데올로기로서의 기능을 다하지 못하였다. 농민들은 유격전을 벌이면서 산을 근거지로 삼았다. 결국 선종은 농민전쟁이 본격적으로 벌어지자 지방 호족들과 연결하는 쪽으로 흘러갔다. 선종은 농민들과 연계성을 갖지 못하고 후원자도 되지 못했다. 이때 선종 사찰과 승려들은 많은 피해를 입었다.

 

심정적 동의와는 달리 폭력적인 방법으로 질서를 파괴하고 사회를 변혁하려는 농민들을 옹호하기에는 선승들의 이론적 토대가 부족하였고, 현실적인 용기도 없었다. 선종과 선승들은 결국 민중적 지배 이데올로기를 실천적으로 확립하지 못하고 그 역할을 미륵신앙에 떠넘겼다.

 

선종은 사상적 측면이 강한 반면 미륵불을 받드는 것은 신앙 중심이다. 신라 중대에는 정토신앙이 미륵신앙을 크게 앞질렀다. 그러나 하대로 내려오면서 민중을 중심으로 한 미륵신앙이 정토신앙을 압도하였다. 
 


 

 

 

 

 

 

 

 

 

 

 

 

 

 

 

 

 

 

 

 

 

 

 

 

 

 

 

 

 

 

 

 

 

 

 

 

 

 

 

 

 

 

 

 

 

 

 

 

 

 

 

 

 

 

 

 

 

   

* 세 기의 돌장승, 해탈교를 지나기 바로 전에 하나가 서있다. 높이는 약 3m로 큰 편이다.

 

몸통에 擁護金沙逐鬼將軍이란 글씨가 희미하게 남아있다. 수염을 땋아 왼쪽으로 구부렸고, 머리에는 벙거지 같은 모자를 썼다. 눈은 물안경을 쓴 듯 튀어나왔다. 주먹 같은 코는 벌름거리는 듯하고 굵은 이빨은 입술 밖으로 드러났으며 송곳니는 자 모양으로 길게 튀어나왔다. 목에는 힘을 준 듯 힘줄이 솟아있다. 본디 마주보고 있는 장승이 하나 더 있었는데. 1963년 홍수 때 떠내려갔다고 한다.

 

 

실상사 장승/  용호금사축귀대왕

 

 

해탈교를 건너면 왼쪽 나무 밑에 대장군, 마주보고 上元周將軍이 있다.

대장군은 높이는 2.5m이다. 받침돌에는 擁正三年乙巳三月立東邊이라는 글자가 있다. 옹정 3년은 1725년이다. 숱이 많아 보이는 수염은 왼쪽으로 구부러져 있다. 검은 줄이 바위 위로 눈과 입을 가르며 그어져 있어 험상궂어 보인다. 미간 위에 불상의 백호처럼 둥글게 도드라진 점이 있다. 눈썹을 치켜올려 사납게 보이며 비뚤어진 입은 비죽거리며 비웃는 듯하다.

 

 

실상사 장승/ 대장군

 

 

상원주장군은 높이는 2.5m이며 몸통에 辛亥年五月이란 글자가 있어 마주보고 있는 대장군보다 6년 뒤에 세운 것이다. 눈알이 동그랗게 튀어나왔다. 역시 대장군처럼 백호로 보이는 동그란 점이 있다. 이것이 두 장승이 사찰장승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턱수염이 세 갈래로 나뉘어 있는데 점잖으면서도 무서운 인상을 준다. 상원주장군 뒤 논 가운에 입석 하나가 있다.

장승 3기 모두 비교적 큰 편이고 조각도 정교하다. 옹호금사축귀장군과 상원주장군은 모습이 비슷하고 대장군은 약간 다른 모습이다.

 

 

* 실상사 동 · 서삼층석탑(보물 제50)

실상사 금당인 보광전 앞에 동서로 나란히 세워진 쌍탑으로 높이는 8.4m이다.

수법과 규모는 거의 동일하다. 2중기단위에 건립되었는데, 탑의 주변에는 넓은 방형의 탑구가 돌려있다.

 

넓은 지대석 위에 하대석과 중대석을 한데 붙여 4매로 짠 하층기단을 올렸다. 하층기단 중석에는 버팀기둥을 새겼다.

덮개돌은 한 장으로 이루어졌는데, 경사가 심하다. 상층기단 중석 역시 4매로 구성되었는데, 역시 버팀기둥을 새겼고, 덮개돌 역시 경사가 심한 편이다.

 

몸돌과 지붕돌은 따로 만들었으며 각층 몸돌에는 모서리기둥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의 추녀 밑은 수평이고 층급받침은 4단이다.

상륜부는 찰주를 중심으로 노반, 복발, 앙화, 보륜, 보개, 수연, 용차, 보주의 순으로 되어있는데, 동탑은 용차가 반쯤 훼손되었고 서탑은 수연이 없어졌으나 각 부분이 이처럼 거의 보전된 것은 희귀한 예이다.

불국사 삼층석탑의 상륜부를 만들 때 모델로 삼았다.

 

 

탑의 상륜부 세부 명칭

 

 

탑 상하의 체감률이 자연스럽고 조각은 섬세하고 우아하여 매우 아름답다.

세부의 조각은 섬세하여졌으며 기단이 탑신에 비하여 높아져 전체적으로 고준해 보인다.

이것은 탑의 장식적인 의의가 가중됨에 따르는 변형이라고 할 수 있다. 두 석탑의 위치는 정확히 중문터와 금당 사이 1/3 지점에 세워졌고, 다시 금당과의 중간 자리에 석등을 세워 정확한 비례로 배치하였다.

실상사 건립연대와 같은 흥덕왕 3(826)에 증각대사가 세웠다.

 

 

실상사 동서삼층석탑과 석등

 

 

* 실상사 석등(보물 제35)은 높이는 5m이며 간주석은 고복형이다. 전체적인 형태는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이나 임실 용암리 석등과 비슷하여 이 지방에서 유행한 지역적 특수양식이다.

석등의 측면에는 등을 켤 때 오르내릴 수 있는 석조계단이 남아 있다. 이것은 현존하는 석등 가운데 유일한 예로, 석등이 供養具로서의 장식적인 의미와 더불어 실용적 등기로 사용된 사실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실상사 석등

 

 

8각의 지대석 위에 폭이 좁은 기대석을 놓고 각 측면에 안상을 새겼다. 하대석은 기대석보다 폭이 넓으며 귀꽃을 갖추었다. 윗면에는 3단의 간주석 받침을 새기고 그 위에 고복형 간주석을 올렸다. 중간 장구형의 표면 중앙에 3줄의 띠를 두르고 여덟 곳에 4엽의 무늬로 장식하였다. 장고의 상하에 16엽의 앙련과 복련을 새겼다. 상하의 장고에도 각각 아래 위에 복련과 앙련을 새겨 이를 합하면 가운데 장고와 같은 모양이 된다. 8각의 상대석은 밑면에는 3단의 받침을, 윗면에는 3단의 화사석 받침을 새겼다. 8엽의 연판 안에는 보상화문과 한 개씩 꽃무늬를 새겼다.

 

화사석 8면에 모두 화창이 있고 그 주위에 1단의 틀을 만들었는데, 그곳에 문을 고정시키기 위한 못구멍이 있다. 8각의 지붕돌은 8엽 연화로 장식하였고, 끝에는 귀꽃이 있다. 그 위에 복발 모양의 노반이 있다. 찰주 위에 작은 보개를 덮고 그 위에 보주를 올렸다.

 

조성연대는 실상사의 창건(828)과 비슷한 시기인 9세기 중엽 이후로 보이며,

크기가 장중하고 장식이 화려하며, 단정한 비례미가 돋보여 통일신라 후기의 대표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 우리나라의 석등

 

 

삼국시대 석등은 익산 미륵사지에서 발견된 석등의 부재밖에 남아있지 않다. 이를 통해 8각형을 기본으로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석등은 통일신라시대에 그 형태가 완성된다.

석등의 형태는 하대석 위에 중대석[竿柱石]을 세우고 그 위에 상대석을 놓아 화사석을 받치게 하고, 그 위에 지붕돌을 덮는다. 그 형태는 평면이 8각이다.

후대에 이르러 8각의 화사석 4면에 보살상이나 사천왕을 조각하기도 하였다.

또 지방에 따라 鼓腹形이라 하여 간주를 북이나 장구의 모양으로 조성하는 석등이 유행하였다. 이와 달리 사자 두 마리가 상대석을 떠받치는 형상의 간주를 조성하는 경우도 있다.

 

고려 초기의 석등은 전대의 전통을 이어받은 예도 있으나, 각부의 조각수법이 세련되지 못하고, 전체적인 형태가 다소 둔중하다. 그러나 신라 이래의 8각형에서 벗어나 평면 4각형이 유행하고 고복형 간주를 사용하며 화사석은 4개의 기둥을 세워 사방이 트이도록 조성한 예도 있다.

 

조선조에는 여전히 사각형으로 평면을 유지하고 있다. 경기도 양주의 회암사 석등 말고는 별로 주목할 것이 없다.

 

근대 이전의 석등은 네팔과 중국에 각각 2점이 있다. 우리나라에는 모두 280여점이 있는데, 90%가 불교 유물이다. 거의 완전한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은 60여기 정도, 나머지 220기는 부재의 일부만 남아있다.  
 


 

 

* 보광전은 정면 3, 측면 2칸으로 본디의 금당터 기단 위에 또 하나의 작은 기단을 만들어 세운 작은 건물이다.

본디 금당은 정면 7, 측면 3칸의 건물로 추정된다. 안에는 홍척, 수철 두 스님의 영정과 범종이 있다. 범종은 현종 5(1664)에 제작하였다. 당좌는 일본 지도 비슷한 무늬가 그려져 있다. 한때 이 종을 치면 일본이 망한다는 소문이 있었다고 한다.

 

 

실상사 보광전과 석등

 

 

 

* 약사전의 실상사 철제여래좌상(보물 제41)

약사전은 현존 건물 중 유일한 조선 중기의 격식을 갖춘 단정한 건물이다.

전설에 따르면 당시 왜구가 남해안과 전라도 일대에 자주 출몰하여 노략질을 일삼던 때라 홍척이 도선에게 부탁하여 절터를 알아보고 있었는데, 현재의 약사전 자리에 절을 세우지 않으면 우리나라의 정기가 일본으로 빠져나간다는 말을 듣고 절을 세웠다고 한다.

약사전의 창호는 무궁화이고 약사전 앞에는 무궁화나무가 있다.

 

 

 

 

 

약사전에 봉안된 철제여래좌상은 전신의 높이는 273cm이다.

후대에 기록된 사적기에 약사불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인지 현재 약사전에 봉안되어 있다. 이 철제여래좌상은 수철이 4천근의 철을 들여 주조한 것으로 현재 지리산 최고봉인 천황봉과 일직선상에 있는데, 우리나라의 정기를 일본으로 보내지 않겠다는 호국적 이념에서 이곳에 안치하였다고 한다. 이 불상은 나라에 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땀을 흘린다고 한다.

 

이 불상은 약 2세기 동안 절터의 노천에 방치되었기 때문에 곳곳에 산화가 진행되고 있는데, 광배는 없어졌다. 특히 무릎 부분이 많이 손상되었다. 대좌는 흙으로 된 方形土壇인데 현재는 허물어지고 깨어져 제 모습이 많이 없어졌다. 하체의 파손 정도가 심하다. 대좌 위에 꼿꼿한 자세로 결가부좌하여 정면을 향하고 있다.

 

1987년 복원불사 때 복장에서 손이 나왔다.

오른손은 가슴에 들어 엄지와 셋째 손가락을 맞대고 다른 손가락은 활짝 편 시무외인을 하고 있으며, 왼손은 무릎에다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올려놓고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맞대고 있는 모양이다. 아미타불의 하품중생인이다. 그러므로 이 불상은 아미타불이다.

 

 

 

 

원래는 오른손은 팔목이 절단되었고 엄지와 중지 외에는 손가락 끝마디가 잘렸으며,

왼손은 손목이 약간 파손되었고 엄지와 새끼손가락 끝마디가 약간 손상되었다.

현재의 손은 나무로 만들어 끼웠는데, 복장에서 나온 원래의 손을 그대로 복제한 것이다.

 

이 불상은 9세기 중엽을 전후하여 그 조성이 늘어난 철불의 한 예로, 구체적인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양식적인 면에서 볼 때 8세기의 긴장감과 활력이 넘치던 불상양식이 보다 해이해지고, 보다 활력이 감퇴된 양식으로 변하였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듬직한 얼굴, 당당한 가슴, 불쑥 나온 아랫배 등에서는 아직도 긴장감이 나타나 있으나, 8세기에 나타나던 유연한 탄력감이 아닌 경직되고 이완된 모습을 보여준다.

 

 

실상사 철불

 

실상사 약사전의 철조여래좌상은 경주의 획일적인 중앙 양식과 달리 지방양식이다.

거대한 상체에 비해 가부좌한 하체가 빈약하여 입상같은 느낌을 준다.

얼굴은 신체에 비해 크고 둥글며 수평으로 길게 새긴 눈과 짧은 코는 굳은 표정이다.

얼굴에 비해 신체는 다소 볼륨이 떨어지지만 계단 모양으로 새긴 대의의 옷주름은 융기선으로 표현하였고, 옷주름 사이에는 억양이 있고 흐름도 활달한 표현이다.

 

8C 조각의 여운이 남아있어 창건 당시(828)에 조성되었을 것이다.

이에 비해 9C 후반에 만들어진 대형 불상들은 얼굴이 작은 반면 신체의 거대함이 강조되고 옷주름도 앏은 평판을 잇댄 듯 도식적으로 표현되었다.

 

실상사가 창건되었다는 흥덕왕 3(828)은 홍척대사가 이곳으로 옮겨온 때라 생각된다. 사찰 창건은 대략 10년이 걸린다고 보면 840년 전후 창건이 완성되었을 것이다. 철불도 830~840년 경 조성되었을 것이다. 이점은 양식상으로도 나타난다. 8C 신라불상의 탄력감과 세련된 이상적 사실주의 양식보다 해이해지고 활력이 감퇴된 9C의 현실적 사실주의 양식이 나타난다 

 

우리나라 철불로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은 황룡사 석가삼존불 중 좌우 협시보살이 철로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실물과 문헌자료(보림사 보조선사창성탑비)로 명확한 것은 858년에 조성된 보림사 노사나불이다.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은 조성 연대가 확실한 신라 최초의 철불이다.

실상사 철불은 보림사 철조비로나나불보다 이른 시기의 철불이다. 이보다 더 이른 시기의 철불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강우방은 전보원사지 철불상을 8C에 조성된 것으로 보고있다) 그런 의미에서 실상사 철불은 철불상의 기원상으로 볼 수 있다. 이후 신라 고려 철불의 유행기점이 되는 작품이다.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 좌상

 

  

2금당 또는 선법당의 본존불로 선종에서 철불로 주조한 효시 작품으로,

선종에서 유행한 지권인의 비로자나불이 아니라 아마타의 하품중생인 아미타 철불이다.

 

화엄종은 8C에는 주존불로 아미타불, 35대 경덕왕(742~765 재위) 대를 전후해서 아미타불을 대거 조성한다. 9C에는 비로자나불을 주로 봉안한다. 9C 이후에는 화엄종 사찰에 두 불상을 동시에 봉안한다. 비로자나불이 주불로 등장하면서 옛 주불인 아미타불과 함께 신앙했다.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과 금동아미타불이 그 대표적인 에다. 이런 양식이  풍기의 비로사로 계승된다.

 

보광전에는 은 원래부터 비로자나불을 봉안했을 것이다.

현재의 약사전은 제2금당 또는 선법당이었을 것이다. 여기에 철조아미타불을 봉안했을 것이다. 화엄종, 홍주종계 선종에서는 9C때 제2주존으로 아미타불을 봉안했다.

 

9C 화엄종에서는 8C 화엄종 사원에서 금당 주존불로 봉안했던 아미타불상을 비로자나불과 함께 봉안하고 있는데, 이런 주존 봉안 방식은 홍주종 선종에서도 채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풍기 비로사에는 900년 전후의 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석조아미타불좌상을 함께 남아있는데 900년 전후한 시기 진공대사가 소백산사를 중수하면서 조성한 상으로 생각된다. 진공대사는 원래 화엄종 승려였는데 홍주종계 가지산문 도의에게 사사하면서 선종으로 전향했다. 홍주종계 선종인 실상산문에도 이런 주존 봉안 형식이 채용되었을 기능성이 크다.

 

중국 유학한 9C 선종 승려들은 원 출신은 화엄종 승려들이 많았다.

9산선문 가운데 7개선문의 조사들이 화엄종 출신이었다. 화엄종 승려들이 선종으로 전향한 것은 화엄종과 선종의 교리가 상당히 부합한다. 특히 洪州宗이 화엄종과 근본교리가 같다. 신라의 화엄종 승려 가지산문의 도의, 실상산문의 홍척, 동리산문의 혜철 등은 마조 도일의 홍주종에 속했다. 馬祖 道一(707~786)의 화엄사상의 원리를 수용하여 이를 바탕으로 선종의 일파를 이룬 것이 홍주종이다.(홍주종은 홍주 남악의 회양)

 

화엄종 절인 보원사, 삼화사에도 철불을 조성했다.

9C 선종과 화엄종 중심으로 유행하기 시작하여 고려로 이어지며 크게 성행한다. 구산선문 가운데 성주사 ,봉암사, 보림사, 실상사 등 4개 절에 금당이나 제2금당 또는 선법당에 철불상을 봉안했다.

 

철불은 9C 초에 수용한다.

9C 중엽 유행하기 시작한다.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온 유학승, 특히 선종 유학생들의 개창 사원인 각 지방사원에서 대거 철불을 조성한데 힘입은 것으로 보인다.

 

신라 유학승들은 會昌廢佛(당나라 武宗, 845) 때 대거 귀국한다. 당나라에서는 8C 유행하기 시작한 철불들에 익숙해진 그들은 철불 조성에 적극적이었다. 유학승들은 귀국하여 지방으로 분산된다. 각 지방에서 새로운 사원을 건립하거나 중수한다. 이러한 불사 붐을 타고 새로운 불상을 많이 조성하게 되는데 이미 중국에서부터 익숙해진 철불을 조성한다.

 

8C에는 금동상을 많이 조성했다.

또 동경, 금속공예품등의 조성에 의 수요가 크게 늘어 동 부족이 심해져 국가에서 동 사용을 제한한다. 이런 까닭으로 유통이 활발해진 철 불상을 조성한다.

 

신라 사회는 지방분권화가 신장되어 각 지방별로 준 독립화된 지방 호족들이 군림하면서 새로운 유학승을 후원하거나 독자작인 사원을 건립했는데 동의 제한으로 그들은 익히 사용하기 시작한 병장기의 재료였던 철로 지방의 주물공장에서 불상을 조성했다. 또 철은 땅을 진압하고 사원을 보호하는 재료로 적당하다고 생각하여 사찰과 불상으로 비보하는 방편으로 삼았다. <희양산 봉암사 지증대사적조탑비>鑄鐵佛二軀 以衛之철불 이구를 주조하여 절을 호위하게 했다라는 말이 있다.

 

철 생산의 적극적인 장려로 철 주조 기술이 향상되고 철 재료의 구입과 철불 주조가 용이해져 적극적으로 철불 조성이 이우어졌다.



 

* 실상사부도(보물 제36)는 고려시대의 부도로 누구의 부도인지는 알지 못한다. 높이는 3.2m이다.

 

8각원당의 일반적인 양식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장식이 없는 8각 지대석 위에 기단부가 놓여있다. 8각 하대석은 밑에 높직한 테가 있고, 그 윗면에 운룡문을 둘렀다.

다시 그 위의 중앙에 높고 낮은 3단의 8각 굄을 마련하여 중대석을 받치고 있다. 중대석은 높이가 낮고 폭이 좁은 8각으로 표면에는 아무런 무늬가 없다. 하대석의 용트림과 구름무늬는 선명하여 이색적이고, 상대석은 거의 반구형에 가까우며 연꽃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또 각 모서리마다 귀꽃이 조각되어 있다.

 

팔각의 몸돌에는 한면에만 문이 얕게 조각되어 있다. 지붕돌의 낙수면은 경사가 급한 편이고, 기와골은 조각하지 않았다. 추녀 끝에는 큼직한 귀꽃이 조각되어 있다. 지붕돌 위에는 꽃무늬를 새긴 원형 석재가 있고, 그 위에는 보주가 놓여있다.

앙련과 탑신 굄대의 연판배치는 신라시대 양식을 충실하게 계승하고 있다. 

 

 

* 실상사 증각대사 凝蓼塔(보물 제38)은 탑비의 뒤편 언덕에 있다.

실상산문을 연 증각대사 홍척국사의 부도이다.

통일신라시대의 부도로 높이 2.42m이다. 지면에 넓은 방형 지대석이 놓이고 그 위에 층단을 이루는 82단의 하대석이 놓였는데, 하단에는 전면에 운문이 조각되었으나 상단에는 위에 넓은 굄이 있을 뿐이다. 하대석 위에는 높은 8각 중석받침이 따로 놓였는데, 밑에는 턱이 있고 위에는 각 모서리이 우주가 있다.

증각대사 홍척이 실상사를 개창한 것이 흥덕왕 3(828)이므로, 그의 입적연대를 9세기 후반으로 추정할 수 있어서, 이 부도의 건립연대도 이에 따라 추정하고 있다.

 

 

증각대사 응료탑

 

 

 

* 증각대사 응료탑비(보물 제39)

비신는 일찍이 상실되고 현재는 비받침과 비머리만 남아 있다. 비받침은 너비가 1.61m이다. 오랜 풍화작용에 의해 세부의 조식을 판별하기는 어려운데, 당대에 일반화된 용머리 형상이 아니라 거북 머리 그대로를 충실히 따랐다.

비머리의 모습은 신라의 대표적 작품인 태종무열왕릉비와 비슷하다. 거북 등에는 귀갑문이 있고, 비신을 끼우는 비좌가 있다.

비머리는 높이가 1.03m로 앞면에 오각형 평면이 구분되어 그 앞에 凝蓼塔碑란 글씨가 새져져 있다. 밑 둘레에는 구름과 용머리 무늬가 있다.

 

 

증각대사 응료탑비

 

 

 

* 실상사 수철화상 楞伽寶月塔(보물 제33)

실상산문의 제2조 수철화상의 부도로 극락전을 향하며 그 오른쪽에 있는데 현재의 위치가 원래의 자리이다. 높이는 2.42m이다.

 

신라 부도의 전형 양식인 8각원당형을 기본으로 삼고, 높직한 8각지대석 위에 세웠다.

지대석 위에는 굄단 등 아무런 시설도 없이 기단부를 놓았다.

 

8각하대석은 하단에 높직한 갑석을 두르고 측면에는 그 주연을 따라 운문을 조각하였으며 각 면에는 운룡 또는 사자상을 양각하였다.

8각으로 된 상하 2단으로 된 높직한 중대석 받침이 놓여 중대석을 받치고 있다. 상대석은 하면에 8각으로 3단의 각형받침을 각출하였고 측면에는 단연의 앙련을 삼중으로 조각하되 1열에 16판씩 둘렀는데 판내에 아무런 조각이 없으나 모두 48판의 연화문이 사실적으로 조각되어 화려하다. 상면에는 별다른 조각이 없고 2단의 각형굄을 새긴 위에 별석으로 조성하였는데, 낮은 측면에는 각면에 1구씩의 세장한 안상이 있고, 상단의 갑석형에는 각형으로 큼직한 받침을 새겨 마치 부연으로도 보인다.

 

탑신은 8각 각면에 양 모서리기둥이 각출되고 전후면에는 문짝이 모각되었으며 그 좌우면에 사천왕상을 양각하였다.

지붕돌은 전체적으로 납작한데, 하면에는 탑신석 위에 놓이는 부분에 1단의 각형 받침이 있고, 처마부분은 완만한 곡선을 이루어 비천상을 조각하였으며, 또한 그 밖으로는 각형의 연목을 조각하였다. 

 

 

실상사 수철화상 능가보월탑

 

옆에 있는 비문으로 이 부도의 건립 연대를 진성여왕 7(893)으로 보고 있다.

수철화상 능가보월탑은 양식상으로 증각대사 응료탑보다 앞선다. 각 부분의 구조와 정도가 염거화상 부도와 기본적으로 같다.

 

증각대사 응료탑은 9C 정형을 벗어나, 지대석 3단이 한 돌로 되어있다.

대석이 높은 편이며 심부에는 난간이 투박하게 조각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높고 좁아서 능가보월탑보다 미감과 안정감이 훨씬 덜하다.

수철화상 능가보월탑은 약부조이나 매우 섬세하고, 사천왕상의 자세나 양식이 염거화상 부도와 같다. 증각대사 응료탑은 평면부조에다 자세도 경직되고 부자연스러워서 고려조의 양식을 보인다.

 

* 수철화상 능가보월탑비(보물 제34)

높이 2.9m로 비는 청석으로, 이수와 대석은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수철은 신라말기의 선승으로 본래 심원사에 머물다가 뒤에 실상사에 들어가 실상사의 제2조가 되었다.

진성여왕 7(893) 577세로 실상사에서 입적하자 왕이 시호와 탑명을 내렸다고 한다.

 

비문에는 수철의 출생에서 입적 및 탑을 만든 경위가 기록되어 있다. 일찍이 비가 쓰러져 조선 숙종 40(1741)에 중건한 사실이 새겨져 있다. 그는 실상사에서 입적하였으나 원래는 심원사의 승려이었기 때문에 비문에는 沈源寺國師秀澈和尙으로 되어 있다.

비문을 마멸과 손상이 심한 편으로 글씨는 2cm내외의 해서로 구양순체를 따랐다.

 

 

실상사 수철화상 능가보월탑비

 

 

건립연대 또한 명확하지 않으나, 비문 가운데 贈太師景文大王贈太傳獻康大王이라는 구절이 중요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동문선> 33에 있는 최치원이 지은 <사은표> 및 <동사강목> 효공왕 17월 조에 위와 같이 前大王들을 추증한 기록이 있으므로,

건립연대는 효공왕대(897~912)로 추정된다.

 

탑비의 형식은 당시의 일반적인 탑비형식과 달리 귀부가 없고 대신 안상 6구를 새긴 장방형의 간단한 대석 위에 비를 세웠다.

그리고 비좌에는 큼직한 복련을 둘렀다. 비머리에는 구름 속에 蟠龍 두 마리가 대칭하여 여의주를 다투는 듯한 모습이 조각되어 있는데, 비머리의 두 용이 상자 틀에서 찍어낸 듯 규격화되어 있다.

조각수법이 형식적이며 莊嚴彫飾이 약화된 경향이 뚜렷하다. 중앙에는 능가보월탑비라는 전액이 음각되어 있다.

 

* 실상사 동종1967년 절 경내에서 발견되어 현재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있다. 발견 당시 상반부는 없어졌고, 연곽, 당좌, 비천상만 남아있다. 조각이 우수하여 상원사 동종이나 성덕대왕 신종을 연상하게 한다. 남아있는 부분의 입지름으로 보아 상원사 동종보다 약간 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상원사 동종은 높이는 1.67m, 입지름이 91cm이다.

실상사 창건 당시에 주조하였을 것으로 보고있다.

 

 

  실상사 동종


 

* 약수암은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에 있다.실상사에서 숲길을 따라 1km쯤 올라가야 한다. 백장암과 더불어 실상산파의 수행처로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신라 흥덕왕 3(824) 증각 홍척이 실상사를 창건하면서 부속 암자로 함께 창건했다.

그뒤 조선 숙종 5(1679) 불탔고,

1901년 재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보광전에 정조 6(1872)에 제작한 목각탱이 있다. 이 목각탱은 현존하는 조선후기 목조탱화 6점 중 한 점이다.

 

목조탱화 6점은,

예천 용문사 대장전목각탱(보물 제989호) , 문경 대승사 목각탱(보물 제575호)

상주 남장사 보광전 목각탱(보물 제922호)

상주 남장사 관음선원 목각탱(보물 제923호)

서울 경국사 목각탱(보물 제749호),

이곳 실상사 약수암 목각탱(보물 제421)이다.

 

목판에 아미타불과 여덟 보살, 2대 제자가 상하 2단으로 조각되어 있다. 하단 중앙에 아미타불이 연화대좌에 앉아 있다.

광배는 목판에 새겨져 있으나 본존불은 돌출하여 거의 입체조각에 가깝다. 아미타불 좌우에 각각 2구씩 입상의 협시보살을 새겼는데, 안쪽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바깥쪽에,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서있다.

상단에는 지장보살 등 보살 넷과 2대 제자가 배치되어 있다. 높이 1.8m, 너비 1.9m이다.

조선후기 목조탱화 중 구도가 가장 간략하다. 보물 제421호로 지정되어 있다.

 

 

 약수암 목각탱

 

 

상무주암함양군 마천읍 삼정리에 있다.

고려 신종 원년(1197) 普照國師 知訥이 몇 명의 수행승들과 함께 창건했다.

지눌은 이곳에서 3년 동안 외부와 인연을 끊고 수행하며 <大慧普覺禪師語錄>을 읽고 크게 깨달았다. 이때부터 그는 은둔생활에서 떠나 적극적 보살행으로써 현실참여를 지향한다. 1200년 조계산 송광사로 옮겨 修禪社를 만들었다.

 

공민왕(1351~1374)龜谷 覺雲이 이절에 머물며 저술에 전념했다.

지눌이 이곳에서 크게 깨달은 뒤 이 절은 聖地가 되어 많은 승려들이 머물며 수행했다. 그 뒤의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

 

현존 건물로는 因法堂만 있다. 절 왼쪽에 작은 3층석탑이 하나 있는데, 각운의 筆端舍利塔이다.

각운이 <禪門佔頌說話> 30권의 저술을 끝냈을 때 붓통 속에 떨어졌다는 사리를 봉안한 탑으로서 放光했다고 한다.

 

 

普照國師 知訥(1158~1210)은 황해도 시흥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지눌, 호는 牧牛子이다

8세 때인 1173년 굴산문 승려 宗暉에게 출가하였다.

명종 12(1182) 25세에 승과에 합격하였고, 곧 담양군 창평면의 淸源寺로 가서 그곳에 머물면서 <육조단경>을 탐독하였다.

그리고 개경 普濟寺에 머물면서 이때 개최된 談禪法會에 동참했던 승려들과 세속의 모든 명리를 버리고 산림에 은거하여 결사를 맺자고 약속하였다.

1185년 경상북도 의성에 있는 下柯山 普門寺에서 대장경을 읽다가 李通玄<화엄론>을 읽어 화엄의 요지를 파악하였다 

 

그뒤 1188得才가 팔공산 居祖寺(현재의 거조암)에 머무르면서 동지들을 모은 뒤 지눌을 청했으므로 거조사에 와 머물렀다.

1190년 뜻을 같이 한 사람들을 모아 보제사에서 한 약속대로 <定慧結社文>을 반포하여 불교 결사인 정혜결사를 결성하였다. 정혜결사는 고려 후기 불교계가 밖으로는 정치와 밀착하여 순수성을 잃어버렸고, 안으로는 의 대립으로 혼탁해지자 기존 불교계를 반성하고자 하여 펼친 수행운동이다.

 

그뒤 거조사는 너무 좁아 모여드는 사람들을 수용하기 어렵게 되어, 1197년 결사 동지들과 함께 송광산 吉祥寺로 가는 도중 지리산 상무주암으로 들어가 3년 동안 수행하여 크게 깨달았다.

1200定慧結社를 송광산 정혜사(송광사)로 옮겼다. 이곳에서 11년 동안 대중을 거느리고 도를 설하며 선을 닦게 하였다.

1205년에는 인근에 또다른 정혜사가 있어 이름을 조계산 修禪寺로 바꾸었다. 인근에 있다는 정혜사는 순천시 서면 청소리에 있다. 여수 흥국사 창건

 

숙종 6(1210) 53세로 입적하니, 희종(1204~1211)佛日 보조국사란 시호를 내리고 국사로 추증하였다. 그리고 왕명으로 비명을 짓게 하였다. 송광사에 부도와 탑비, 국사전(국보 제56)에 영정이 있다.

 

 

보조국사 지눌 진영/ 송광사 국사전

 

 

 

송광사에 있는 보조국사 감로탑과 탑비

 

 

지눌이 수선사에서 입적하자 그의 제자인 眞覺 慧諶이 왕명으로 수선사 제2세 주가 되었고 이때부터 조선 초에 이르기까지 16명의 국사가 이곳을 중심으로 수선사의 정신을 이어받아 우리나라 선종을 이끌어왔다.

지눌은 고려 초에 제기되었던 교선일치 사상을 계승하였다. 특히 현휘가 추구했던 선종을 중심으로 하여 교종을 통합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선 수행과 함께 지혜를 갖추는 定慧雙修頓悟漸修를 주장했다.

 

 

영원사는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삼정리에 있다.

신라 진덕여왕 때(647~ 654) 사람 靈源이 창건하여 영원사라 했다 한다.

다른 기록에는 영원을 조선 중기의 승려로 보기도 한다.

<祖室案錄>에 따르면 芙蓉 靈觀(1485~ 1571),  淸虛 休靜(1520~ 1604), 靑梅 印悟(1548~ 1623), 泗溟 惟政(1544~ 1610), 雪坡 尙彦(1707~ 1791) 등 큰스님들이 이 절에 머물렀다.

1948년 여순반란사건 때 몽땅 불에 탔고,

1971년 중건했다. 

 

영원사 창건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창건설화가 전한다. 

영원은 원래 범어사에서 수행하다가 욕심 많은 스승의 곁을 떠나 지리산으로 들어가 토굴을 짓고 10년 동안 정진해 크게 깨달았다.

그뒤 다시 범어사로 돌아가서 흑구렁이로 면한 스승의 業身을 제도한 뒤 영혼을 인도하여 지리산 토굴로 돌아가던 중 한 부부를 만났다.

그는 부부에게 열 달이 지난 뒤 아들이 태어날 것이니 일곱 살이 되거든 나에게 데려다 주시오라 당부하고 토굴로 돌아와 7년 동안 절을 지어 영원사를 완성했다.

이때 찾아온 제자를 방안에 가두고 밖에서 문을 잠근 뒤 작은 구멍을 뚫어 놓고 이 구멍으로 황소가 들어올 때까지 열심히 정진하라고 일러두었다.

그뒤 동자는 문구멍으로 황소가 뛰어 들어오는 것을 보고 크게 깨달아 전생의 모든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염거화상 부도 탑신에서 나왔다는 동판으로 염거화상 부도로 널리 알려져 제작연대를 848로 확정했다. 그래서 신라부도의 시원양식으로 본다. 그러나 어디서 나온 것인지 분명하지 않고, 탑지동판의 크기(28.9cm×17.2cm)가 탑신의 원형 구멍(사리공 지름이 약 30cm)보다 커서 의문이다.

하대석이 빈약하다. 수철 것과 구성과 조각 솜씨가 너무 닮아 동일한 설계자와 동일한 장인에 의해 조성되었다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그런데 염거화상 부도에는 수철화상 능가보월탑에 있는 연화하대석과 지대석이 없다.

 

가장 오래된 것으로는 文聖王 6(844) 廉居和尙 부도(국보 제104)인데 우리나라 석조 부조 양식의 기점을 이룬다. 廉居(?~844)화상은 도의선사의 제자이다. 가지산문 제2조이며, 보조 체징은 제3(804~880)이다. 지대석을 제외한 전체가 팔각당 형식에 건물형이다.

염거화상부도는 일제때 일본인들이 원주 흥법사에 있던 것을 일본으로 가져가려다 실패라고, 1914년 서울 탑골공원에 두었다고 한다. 지금 국립중앙박물관 뜰에 있다. 광복후 흥법사터를 조사하였지만 거기에서 반출되었다는 증거를 찾지 못해 원래의 있었던 곳은 알 수 없다.

 

 

 

* 실상사 백장암 - 남원시 산내면 대정리 수청산(722m) 중턱

실상사의 부속암자로 누가 창건했는지는 모르지만, 실상사와 같은 시기인 9C 초에 창건했으며, 실상사가 禪風을 떨칠 때에는 실상산파의 참선도량으로 활용했다.

조선 선조 25(1592)에 조일전쟁으로 실상사가 폐허가 됐을 때 약 200년 동안 실상사 승려들이 이 절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현재 因法堂과 칠성각, 산신각이 있다. 그러나 남아 있는 건물 터로 보아 상당히 규모가 컸던 것을 알 수 있다.

*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국보 제10)

9세기 이후 신라 석탑에는 표면장엄이 가해지는 일이 유행하였는데, 이 탑은 그 중에도 장식성이 가장 많은 예이다. 기단구조와 각부 장식 조각에서 특이한 양식을 보여주는 異型石塔이다.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이 탑은 높이는 약 5m이다.

기단은 특히 이형에 속하여 지대석 위에 하대석 · 중대석 · 덮개돌을 결합한 듯한 석재가 놓였는데, 옆면에는 난간형이 조각되어 있다. 일층 몸돌은 폭에 비하여 높이가 높은 편이다. 남면에는 문짝이 있고 그 좌우에 보살입상과 사천왕상이 조각되어 있고, 다른 세 면에도 보살상 · 천왕상 · 동자상이 조각되어 있다. 상단에는 중앙과 좌우에 두공을 양각하였다. 2층과 3층 몸돌은 밑에 난간형을, 위에 두공형을 양각하고 각 면 2층에는 2구씩 3층에는 1구씩 奏樂天人상을 양각하였다. 지붕돌은 두꺼운 편이고 굵은 우동이 있다. 밑의 받침에는 층단이 없는 대신 1층과 2층에는 앙련이 있고 3층에는 각 면에 삼존상을 조각하였다.

상륜부에는 찰주를 중심으로 노반 · 복발 · 앙화 · 보륜 · 수연 등 많은 부재가 남아있다.

19802월 도굴꾼이 파손한 것을 이후 다시 복권하였다.

 

이례적으로 낮은 기단을 내고 그 위에 탑신 전체에 난간, 신중, 주악천인상, 불상 등을 조각하였다.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탑 전체에 새김장식을 하였다. 이전의 장식은 기단부 또는 1층몸돌까지만 허용되었는데, 그 질서가 무너지고 2층기단도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