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상사
실상사의 아침/ 2007년 10월
■ 실상사(사적 제309호)는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에 있다.
신라 제42대 흥덕왕 원년(828)에 證覺國師 弘陟이 구산선문의 하나인 실상산문을 열면서 창건했다.
홍척은 도의선사와 함께 당나라에 들어가 西堂智藏(739~814)에게 선법을 깨우친 뒤 흥덕왕 원년(826)에 귀국하여 이 절을 세우고 선종을 전파했다.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이곳에 절을 세우지 않으면, 우리나라의 정기가 일본으로 가 버린다 하여 절을 세웠다고 한다.
그 뒤 2代祖 秀徹(817~893)을 거쳐 3대조 片雲이 크게 절을 중창하고 선풍을 크게 떨치게 되었다.
930년에는 견훤이 실상사에 많은 시주를 하여 세력을 과시한 적도 있다.
<지리산실상사사적>에 따르면, 조선 세조 14년(1468)에 화재로 몽땅 불타고 승려들은 백장암에 기거하면서 그 명맥을 이어 왔다. 200여년 동안 폐허로 있다가 숙종 5년(1679)에 碧巖 覺性(1575~1660)이 삼창했다.
1690년 枕虛를 중심으로 300여 명의 수도승들이 절의 중창을 조정에 상소하여 숙종 5년(1700)에는 36동의 건물을 세웠다.
순조 21년(1821)년에도 중건되었다.
그러나 고종 19년(1821) 함양 출신 양재묵과 산청 출신 민동혁 등이 불을 질러 건물들이 불타버렸다.
1884년 月松 등이 10여 채의 건물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 17교구 본사인 금산사의 말사이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보광전을 비롯하여 약사전 · 명부전 · 칠성각 · 선리수도원 · 누각 · 극락전 등과 부속 건물이 있다.
실상사는 지리산 천왕봉을 바라보며 여러 봉우리를 꽃잎으로 삼아 꽃밥에 해당하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반야봉, 노고단, 고리봉 등지에서 흘러내린 물이 모여 만수천이 작은 개울을 이루어 실상사 앞을 흐른다.
절은 지리산 자락의 다른 절과 달리 평지에 들어서서 사역을 따라 담장을 낮게 두르고 담 안으로 키 큰 나무들로 둘러 색다른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절 앞을 흐르는 만수천에 해탈교가 있다.
해탈교를 지나기 전후 세 기의 돌장승이 있고, 해탈교를 건너 논길을 200m쯤 걸어가면 천왕문이 나온다.
천왕문으로 들어서면 절 마당에 삼층석탑 두기가 동서로 나란히 서있고, 뒤쪽 중앙에 석등과 금당인 보광전이 서있다.
보광전 양 옆으로 약사전과 칠성각이 있다. 석등 양 옆으로는 명부전과 요사채 들이 들어서있다.
천왕문과 삼층석탑 중간에 종루, 종루 뒤쪽에 건물터가 있다.
이 건물터는 원래의 가람과는 별도로 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이야기만으로 전하는 오층목탑이 있었던 장육전 지리로 추정하고 있다.
요사채 쪽 사잇길로 들어가면 극락전이 있고, 극락전 주변에 홍척스님의 부도와 부도비 그리고 수철스님의 부도와 부도비가 있다.
실상사 천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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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 기의 돌장승은, 해탈교를 지나기 바로 전에 하나가 서있다. 높이는 약 3m로 큰 편이다.
몸통에 擁護金沙逐鬼將軍이란 글씨가 희미하게 남아있다. 수염을 땋아 왼쪽으로 구부렸고, 머리에는 벙거지 같은 모자를 썼다. 눈은 물안경을 쓴 듯 튀어나왔다. 주먹 같은 코는 벌름거리는 듯하고 굵은 이빨은 입술 밖으로 드러났으며 송곳니는 八자 모양으로 길게 튀어나왔다. 목에는 힘을 준 듯 힘줄이 솟아있다. 본디 마주보고 있는 장승이 하나 더 있었는데. 1963년 홍수 때 떠내려갔다고 한다.
실상사 장승/ 용호금사축귀대왕
해탈교를 건너면 왼쪽 나무 밑에 대장군, 마주보고 上元周將軍이 있다.
대장군은 높이는 2.5m이다. 받침돌에는 “擁正三年乙巳三月立東邊”이라는 글자가 있다. 옹정 3년은 1725년이다. 숱이 많아 보이는 수염은 왼쪽으로 구부러져 있다. 검은 줄이 바위 위로 눈과 입을 가르며 그어져 있어 험상궂어 보인다. 미간 위에 불상의 백호처럼 둥글게 도드라진 점이 있다. 눈썹을 치켜올려 사납게 보이며 비뚤어진 입은 비죽거리며 비웃는 듯하다.
실상사 장승/ 대장군
상원주장군은 높이는 2.5m이며 몸통에 辛亥年五月이란 글자가 있어 마주보고 있는 대장군보다 6년 뒤에 세운 것이다. 눈알이 동그랗게 튀어나왔다. 역시 대장군처럼 백호로 보이는 동그란 점이 있다. 이것이 두 장승이 사찰장승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턱수염이 세 갈래로 나뉘어 있는데 점잖으면서도 무서운 인상을 준다. 상원주장군 뒤 논 가운에 입석 하나가 있다.
장승 3기 모두 비교적 큰 편이고 조각도 정교하다. 옹호금사축귀장군과 상원주장군은 모습이 비슷하고 대장군은 약간 다른 모습이다.
* 실상사 동 · 서삼층석탑(보물 제50호)
실상사 금당인 보광전 앞에 동서로 나란히 세워진 쌍탑으로 높이는 8.4m이다.
수법과 규모는 거의 동일하다. 2중기단위에 건립되었는데, 탑의 주변에는 넓은 방형의 탑구가 돌려있다.
넓은 지대석 위에 하대석과 중대석을 한데 붙여 4매로 짠 하층기단을 올렸다. 하층기단 중석에는 버팀기둥을 새겼다.
덮개돌은 한 장으로 이루어졌는데, 경사가 심하다. 상층기단 중석 역시 4매로 구성되었는데, 역시 버팀기둥을 새겼고, 덮개돌 역시 경사가 심한 편이다.
몸돌과 지붕돌은 따로 만들었으며 각층 몸돌에는 모서리기둥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의 추녀 밑은 수평이고 층급받침은 4단이다.
상륜부는 찰주를 중심으로 노반, 복발, 앙화, 보륜, 보개, 수연, 용차, 보주의 순으로 되어있는데, 동탑은 용차가 반쯤 훼손되었고 서탑은 수연이 없어졌으나 각 부분이 이처럼 거의 보전된 것은 희귀한 예이다.
불국사 삼층석탑의 상륜부를 만들 때 모델로 삼았다.
탑의 상륜부 세부 명칭
탑 상하의 체감률이 자연스럽고 조각은 섬세하고 우아하여 매우 아름답다.
세부의 조각은 섬세하여졌으며 기단이 탑신에 비하여 높아져 전체적으로 고준해 보인다.
이것은 탑의 장식적인 의의가 가중됨에 따르는 변형이라고 할 수 있다. 두 석탑의 위치는 정확히 중문터와 금당 사이 1/3 지점에 세워졌고, 다시 금당과의 중간 자리에 석등을 세워 정확한 비례로 배치하였다.
실상사 건립연대와 같은 흥덕왕 3년(826)에 증각대사가 세웠다.
실상사 동서삼층석탑과 석등
* 실상사 석등(보물 제35호)은 높이는 5m이며 간주석은 고복형이다. 전체적인 형태는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이나 임실 용암리 석등과 비슷하여 이 지방에서 유행한 지역적 특수양식이다.
석등의 측면에는 등을 켤 때 오르내릴 수 있는 석조계단이 남아 있다. 이것은 현존하는 석등 가운데 유일한 예로, 석등이 供養具로서의 장식적인 의미와 더불어 실용적 등기로 사용된 사실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실상사 석등
8각의 지대석 위에 폭이 좁은 기대석을 놓고 각 측면에 안상을 새겼다. 하대석은 기대석보다 폭이 넓으며 귀꽃을 갖추었다. 윗면에는 3단의 간주석 받침을 새기고 그 위에 고복형 간주석을 올렸다. 중간 장구형의 표면 중앙에 3줄의 띠를 두르고 여덟 곳에 4엽의 무늬로 장식하였다. 장고의 상하에 16엽의 앙련과 복련을 새겼다. 상하의 장고에도 각각 아래 위에 복련과 앙련을 새겨 이를 합하면 가운데 장고와 같은 모양이 된다. 8각의 상대석은 밑면에는 3단의 받침을, 윗면에는 3단의 화사석 받침을 새겼다. 8엽의 연판 안에는 보상화문과 한 개씩 꽃무늬를 새겼다.
화사석 8면에 모두 화창이 있고 그 주위에 1단의 틀을 만들었는데, 그곳에 문을 고정시키기 위한 못구멍이 있다. 8각의 지붕돌은 8엽 연화로 장식하였고, 끝에는 귀꽃이 있다. 그 위에 복발 모양의 노반이 있다. 찰주 위에 작은 보개를 덮고 그 위에 보주를 올렸다.
조성연대는 실상사의 창건(828)과 비슷한 시기인 9세기 중엽 이후로 보이며,
크기가 장중하고 장식이 화려하며, 단정한 비례미가 돋보여 통일신라 후기의 대표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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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광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본디의 금당터 기단 위에 또 하나의 작은 기단을 만들어 세운 작은 건물이다.
본디 금당은 정면 7칸, 측면 3칸의 건물로 추정된다. 안에는 홍척, 수철 두 스님의 영정과 범종이 있다. 범종은 현종 5년(1664)에 제작하였다. 당좌는 일본 지도 비슷한 무늬가 그려져 있다. 한때 이 종을 치면 일본이 망한다는 소문이 있었다고 한다.
실상사 보광전과 석등
* 약사전의 실상사 철제여래좌상(보물 제41호)
약사전은 현존 건물 중 유일한 조선 중기의 격식을 갖춘 단정한 건물이다.
전설에 따르면 당시 왜구가 남해안과 전라도 일대에 자주 출몰하여 노략질을 일삼던 때라 홍척이 도선에게 부탁하여 절터를 알아보고 있었는데, 현재의 약사전 자리에 절을 세우지 않으면 우리나라의 정기가 일본으로 빠져나간다는 말을 듣고 절을 세웠다고 한다.
약사전의 창호는 무궁화이고 약사전 앞에는 무궁화나무가 있다.
약사전에 봉안된 철제여래좌상은 전신의 높이는 273cm이다.
후대에 기록된 사적기에 약사불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인지 현재 약사전에 봉안되어 있다. 이 철제여래좌상은 수철이 4천근의 철을 들여 주조한 것으로 현재 지리산 최고봉인 천황봉과 일직선상에 있는데, 우리나라의 정기를 일본으로 보내지 않겠다는 호국적 이념에서 이곳에 안치하였다고 한다. 이 불상은 나라에 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땀을 흘린다고 한다.
이 불상은 약 2세기 동안 절터의 노천에 방치되었기 때문에 곳곳에 산화가 진행되고 있는데, 광배는 없어졌다. 특히 무릎 부분이 많이 손상되었다. 대좌는 흙으로 된 方形土壇인데 현재는 허물어지고 깨어져 제 모습이 많이 없어졌다. 하체의 파손 정도가 심하다. 대좌 위에 꼿꼿한 자세로 결가부좌하여 정면을 향하고 있다.
1987년 복원불사 때 복장에서 손이 나왔다.
오른손은 가슴에 들어 엄지와 셋째 손가락을 맞대고 다른 손가락은 활짝 편 시무외인을 하고 있으며, 왼손은 무릎에다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올려놓고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맞대고 있는 모양이다. 아미타불의 하품중생인이다. 그러므로 이 불상은 아미타불이다.
원래는 오른손은 팔목이 절단되었고 엄지와 중지 외에는 손가락 끝마디가 잘렸으며,
왼손은 손목이 약간 파손되었고 엄지와 새끼손가락 끝마디가 약간 손상되었다.
현재의 손은 나무로 만들어 끼웠는데, 복장에서 나온 원래의 손을 그대로 복제한 것이다.
이 불상은 9세기 중엽을 전후하여 그 조성이 늘어난 철불의 한 예로, 구체적인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양식적인 면에서 볼 때 8세기의 긴장감과 활력이 넘치던 불상양식이 보다 해이해지고, 보다 활력이 감퇴된 양식으로 변하였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듬직한 얼굴, 당당한 가슴, 불쑥 나온 아랫배 등에서는 아직도 긴장감이 나타나 있으나, 8세기에 나타나던 유연한 탄력감이 아닌 경직되고 이완된 모습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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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상사부도(보물 제36호)는 고려시대의 부도로 누구의 부도인지는 알지 못한다. 높이는 3.2m이다.
8각원당의 일반적인 양식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장식이 없는 8각 지대석 위에 기단부가 놓여있다. 8각 하대석은 밑에 높직한 테가 있고, 그 윗면에 운룡문을 둘렀다.
다시 그 위의 중앙에 높고 낮은 3단의 8각 굄을 마련하여 중대석을 받치고 있다. 중대석은 높이가 낮고 폭이 좁은 8각으로 표면에는 아무런 무늬가 없다. 하대석의 용트림과 구름무늬는 선명하여 이색적이고, 상대석은 거의 반구형에 가까우며 연꽃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또 각 모서리마다 귀꽃이 조각되어 있다.
팔각의 몸돌에는 한면에만 문이 얕게 조각되어 있다. 지붕돌의 낙수면은 경사가 급한 편이고, 기와골은 조각하지 않았다. 추녀 끝에는 큼직한 귀꽃이 조각되어 있다. 지붕돌 위에는 꽃무늬를 새긴 원형 석재가 있고, 그 위에는 보주가 놓여있다.
앙련과 탑신 굄대의 연판배치는 신라시대 양식을 충실하게 계승하고 있다.
* 실상사 증각대사 凝蓼塔(보물 제38호)은 탑비의 뒤편 언덕에 있다.
실상산문을 연 증각대사 홍척국사의 부도이다.
통일신라시대의 부도로 높이 2.42m이다. 지면에 넓은 방형 지대석이 놓이고 그 위에 층단을 이루는 8각 2단의 하대석이 놓였는데, 하단에는 전면에 운문이 조각되었으나 상단에는 위에 넓은 굄이 있을 뿐이다. 하대석 위에는 높은 8각 중석받침이 따로 놓였는데, 밑에는 턱이 있고 위에는 각 모서리이 우주가 있다.
증각대사 홍척이 실상사를 개창한 것이 흥덕왕 3년(828)이므로, 그의 입적연대를 9세기 후반으로 추정할 수 있어서, 이 부도의 건립연대도 이에 따라 추정하고 있다.
증각대사 응료탑
* 증각대사 응료탑비(보물 제39호)
비신는 일찍이 상실되고 현재는 비받침과 비머리만 남아 있다. 비받침은 너비가 1.61m이다. 오랜 풍화작용에 의해 세부의 조식을 판별하기는 어려운데, 당대에 일반화된 용머리 형상이 아니라 거북 머리 그대로를 충실히 따랐다.
비머리의 모습은 신라의 대표적 작품인 태종무열왕릉비와 비슷하다. 거북 등에는 귀갑문이 있고, 비신을 끼우는 비좌가 있다.
비머리는 높이가 1.03m로 앞면에 오각형 평면이 구분되어 그 앞에 凝蓼塔碑란 글씨가 새져져 있다. 밑 둘레에는 구름과 용머리 무늬가 있다.
증각대사 응료탑비
* 실상사 수철화상 楞伽寶月塔(보물 제33호)
실상산문의 제2조 수철화상의 부도로 극락전을 향하며 그 오른쪽에 있는데 현재의 위치가 원래의 자리이다. 높이는 2.42m이다.
신라 부도의 전형 양식인 8각원당형을 기본으로 삼고, 높직한 8각지대석 위에 세웠다.
지대석 위에는 굄단 등 아무런 시설도 없이 기단부를 놓았다.
8각하대석은 하단에 높직한 갑석을 두르고 측면에는 그 주연을 따라 운문을 조각하였으며 각 면에는 운룡 또는 사자상을 양각하였다.
8각으로 된 상하 2단으로 된 높직한 중대석 받침이 놓여 중대석을 받치고 있다. 상대석은 하면에 8각으로 3단의 각형받침을 각출하였고 측면에는 단연의 앙련을 삼중으로 조각하되 1열에 16판씩 둘렀는데 판내에 아무런 조각이 없으나 모두 48판의 연화문이 사실적으로 조각되어 화려하다. 상면에는 별다른 조각이 없고 2단의 각형굄을 새긴 위에 별석으로 조성하였는데, 낮은 측면에는 각면에 1구씩의 세장한 안상이 있고, 상단의 갑석형에는 각형으로 큼직한 받침을 새겨 마치 부연으로도 보인다.
탑신은 8각 각면에 양 모서리기둥이 각출되고 전후면에는 문짝이 모각되었으며 그 좌우면에 사천왕상을 양각하였다.
지붕돌은 전체적으로 납작한데, 하면에는 탑신석 위에 놓이는 부분에 1단의 각형 받침이 있고, 처마부분은 완만한 곡선을 이루어 비천상을 조각하였으며, 또한 그 밖으로는 각형의 연목을 조각하였다.
실상사 수철화상 능가보월탑
옆에 있는 비문으로 이 부도의 건립 연대를 진성여왕 7년(893)으로 보고 있다.
수철화상 능가보월탑은 양식상으로 증각대사 응료탑보다 앞선다. 각 부분의 구조와 정도가 염거화상 부도와 기본적으로 같다.
증각대사 응료탑은 9C 정형을 벗어나, 지대석 3단이 한 돌로 되어있다.
대석이 높은 편이며 심부에는 난간이 투박하게 조각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높고 좁아서 능가보월탑보다 미감과 안정감이 훨씬 덜하다.
수철화상 능가보월탑은 약부조이나 매우 섬세하고, 사천왕상의 자세나 양식이 염거화상 부도와 같다. 증각대사 응료탑은 평면부조에다 자세도 경직되고 부자연스러워서 고려조의 양식을 보인다.
* 수철화상 능가보월탑비(보물 제34호)
높이 2.9m로 비는 청석으로, 이수와 대석은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수철은 신라말기의 선승으로 본래 심원사에 머물다가 뒤에 실상사에 들어가 실상사의 제2조가 되었다.
진성여왕 7년(893) 5월 77세로 실상사에서 입적하자 왕이 시호와 탑명을 내렸다고 한다.
비문에는 수철의 출생에서 입적 및 탑을 만든 경위가 기록되어 있다. 일찍이 비가 쓰러져 조선 숙종 40년(1741)에 중건한 사실이 새겨져 있다. 그는 실상사에서 입적하였으나 원래는 심원사의 승려이었기 때문에 비문에는 ‘沈源寺國師秀澈和尙’으로 되어 있다.
비문을 마멸과 손상이 심한 편으로 글씨는 2cm내외의 해서로 구양순체를 따랐다.
실상사 수철화상 능가보월탑비
건립연대 또한 명확하지 않으나, 비문 가운데 ‘贈太師景文大王’ 및 ‘贈太傳獻康大王’이라는 구절이 중요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동문선> 33권”에 있는 최치원이 지은 <사은표> 및 <동사강목> 효공왕 1년 7월 조에 위와 같이 前大王들을 추증한 기록이 있으므로,
건립연대는 효공왕대(897~912)로 추정된다.
탑비의 형식은 당시의 일반적인 탑비형식과 달리 귀부가 없고 대신 안상 6구를 새긴 장방형의 간단한 대석 위에 비를 세웠다.
그리고 비좌에는 큼직한 복련을 둘렀다. 비머리에는 구름 속에 蟠龍 두 마리가 대칭하여 여의주를 다투는 듯한 모습이 조각되어 있는데, 비머리의 두 용이 상자 틀에서 찍어낸 듯 규격화되어 있다.
조각수법이 형식적이며 莊嚴彫飾이 약화된 경향이 뚜렷하다. 중앙에는 능가보월탑비라는 전액이 음각되어 있다.
* 실상사 동종은 1967년 절 경내에서 발견되어 현재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있다. 발견 당시 상반부는 없어졌고, 연곽, 당좌, 비천상만 남아있다. 조각이 우수하여 상원사 동종이나 성덕대왕 신종을 연상하게 한다. 남아있는 부분의 입지름으로 보아 상원사 동종보다 약간 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상원사 동종은 높이는 1.67m, 입지름이 91cm이다.
실상사 창건 당시에 주조하였을 것으로 보고있다.
실상사 동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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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수암은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에 있다.실상사에서 숲길을 따라 1km쯤 올라가야 한다. 백장암과 더불어 실상산파의 수행처로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신라 흥덕왕 3년(824년) 증각 홍척이 실상사를 창건하면서 부속 암자로 함께 창건했다.
그뒤 조선 숙종 5년(1679) 불탔고,
1901년 재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보광전에 정조 6년(1872)에 제작한 목각탱이 있다. 이 목각탱은 현존하는 조선후기 목조탱화 6점 중 한 점이다.
목조탱화 6점은,
예천 용문사 대장전목각탱(보물 제989호) , 문경 대승사 목각탱(보물 제575호)
상주 남장사 보광전 목각탱(보물 제922호)
상주 남장사 관음선원 목각탱(보물 제923호)
서울 경국사 목각탱(보물 제749호),
이곳 실상사 약수암 목각탱(보물 제421호 )이다.
목판에 아미타불과 여덟 보살, 2대 제자가 상하 2단으로 조각되어 있다. 하단 중앙에 아미타불이 연화대좌에 앉아 있다.
광배는 목판에 새겨져 있으나 본존불은 돌출하여 거의 입체조각에 가깝다. 아미타불 좌우에 각각 2구씩 입상의 협시보살을 새겼는데, 안쪽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바깥쪽에,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서있다.
상단에는 지장보살 등 보살 넷과 2대 제자가 배치되어 있다. 높이 1.8m, 너비 1.9m이다.
조선후기 목조탱화 중 구도가 가장 간략하다. 보물 제421호로 지정되어 있다.
약수암 목각탱
■ 상무주암은 함양군 마천읍 삼정리에 있다.
고려 신종 원년(1197) 普照國師 知訥이 몇 명의 수행승들과 함께 창건했다.
지눌은 이곳에서 3년 동안 외부와 인연을 끊고 수행하며 <大慧普覺禪師語錄>을 읽고 크게 깨달았다. 이때부터 그는 은둔생활에서 떠나 적극적 보살행으로써 현실참여를 지향한다. 1200년 조계산 송광사로 옮겨 修禪社를 만들었다.
공민왕(1351~1374)때 龜谷 覺雲이 이절에 머물며 저술에 전념했다.
지눌이 이곳에서 크게 깨달은 뒤 이 절은 聖地가 되어 많은 승려들이 머물며 수행했다. 그 뒤의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
현존 건물로는 因法堂만 있다. 절 왼쪽에 작은 3층석탑이 하나 있는데, 각운의 筆端舍利塔이다.
각운이 <禪門佔頌說話> 30권의 저술을 끝냈을 때 붓통 속에 떨어졌다는 사리를 봉안한 탑으로서 放光했다고 한다.
※ 普照國師 知訥(1158~1210)은 황해도 시흥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지눌, 호는 牧牛子이다.
8세 때인 1173년 굴산문 승려 宗暉에게 출가하였다.
명종 12년(1182) 25세에 승과에 합격하였고, 곧 담양군 창평면의 淸源寺로 가서 그곳에 머물면서 <육조단경>을 탐독하였다.
그리고 개경 普濟寺에 머물면서 이때 개최된 談禪法會에 동참했던 승려들과 세속의 모든 명리를 버리고 산림에 은거하여 결사를 맺자고 약속하였다.
1185년 경상북도 의성에 있는 下柯山 普門寺에서 대장경을 읽다가 李通玄의 <화엄론>을 읽어 화엄의 요지를 파악하였다.
그뒤 1188년 得才가 팔공산 居祖寺(현재의 거조암)에 머무르면서 동지들을 모은 뒤 지눌을 청했으므로 거조사에 와 머물렀다.
1190년 뜻을 같이 한 사람들을 모아 보제사에서 한 약속대로 <定慧結社文>을 반포하여 불교 결사인 정혜결사를 결성하였다. 정혜결사는 고려 후기 불교계가 밖으로는 정치와 밀착하여 순수성을 잃어버렸고, 안으로는 敎와 禪의 대립으로 혼탁해지자 기존 불교계를 반성하고자 하여 펼친 수행운동이다.
그뒤 거조사는 너무 좁아 모여드는 사람들을 수용하기 어렵게 되어, 1197년 결사 동지들과 함께 송광산 吉祥寺로 가는 도중 지리산 상무주암으로 들어가 3년 동안 수행하여 크게 깨달았다.
1200년 定慧結社를 송광산 정혜사(송광사)로 옮겼다. 이곳에서 11년 동안 대중을 거느리고 도를 설하며 선을 닦게 하였다.
1205년에는 인근에 또다른 정혜사가 있어 이름을 조계산 修禪寺로 바꾸었다. 인근에 있다는 정혜사는 순천시 서면 청소리에 있다. 여수 흥국사 창건
숙종 6년(1210) 53세로 입적하니, 희종(1204~1211)은 佛日 보조국사란 시호를 내리고 국사로 추증하였다. 그리고 왕명으로 비명을 짓게 하였다. 송광사에 부도와 탑비, 국사전(국보 제56호)에 영정이 있다.
보조국사 지눌 진영/ 송광사 국사전
송광사에 있는 보조국사 감로탑과 탑비
지눌이 수선사에서 입적하자 그의 제자인 眞覺 慧諶이 왕명으로 수선사 제2세 주가 되었고 이때부터 조선 초에 이르기까지 16명의 국사가 이곳을 중심으로 수선사의 정신을 이어받아 우리나라 선종을 이끌어왔다.
지눌은 고려 초에 제기되었던 교선일치 사상을 계승하였다. 특히 현휘가 추구했던 선종을 중심으로 하여 교종을 통합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선 수행과 함께 지혜를 갖추는 定慧雙修와 頓悟漸修를 주장했다.
■ 영원사는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삼정리에 있다.
신라 진덕여왕 때(647~ 654) 사람 靈源이 창건하여 영원사라 했다 한다.
다른 기록에는 영원을 조선 중기의 승려로 보기도 한다.
<祖室案錄>에 따르면 芙蓉 靈觀(1485~ 1571), 淸虛 休靜(1520~ 1604), 靑梅 印悟(1548~ 1623), 泗溟 惟政(1544~ 1610), 雪坡 尙彦(1707~ 1791) 등 큰스님들이 이 절에 머물렀다.
1948년 여순반란사건 때 몽땅 불에 탔고,
1971년 중건했다.
영원사 창건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창건설화가 전한다.
영원은 원래 범어사에서 수행하다가 욕심 많은 스승의 곁을 떠나 지리산으로 들어가 토굴을 짓고 10년 동안 정진해 크게 깨달았다.
그뒤 다시 범어사로 돌아가서 흑구렁이로 면한 스승의 業身을 제도한 뒤 영혼을 인도하여 지리산 토굴로 돌아가던 중 한 부부를 만났다.
그는 부부에게 “열 달이 지난 뒤 아들이 태어날 것이니 일곱 살이 되거든 나에게 데려다 주시오”라 당부하고 토굴로 돌아와 7년 동안 절을 지어 영원사를 완성했다.
이때 찾아온 제자를 방안에 가두고 밖에서 문을 잠근 뒤 작은 구멍을 뚫어 놓고 이 구멍으로 황소가 들어올 때까지 열심히 정진하라고 일러두었다.
그뒤 동자는 문구멍으로 황소가 뛰어 들어오는 것을 보고 크게 깨달아 전생의 모든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염거화상 부도 탑신에서 나왔다는 동판으로 염거화상 부도로 널리 알려져 제작연대를 848로 확정했다. 그래서 신라부도의 시원양식으로 본다. 그러나 어디서 나온 것인지 분명하지 않고, 탑지동판의 크기(28.9cm×17.2cm)가 탑신의 원형 구멍(사리공 지름이 약 30cm)보다 커서 의문이다.
하대석이 빈약하다. 수철 것과 구성과 조각 솜씨가 너무 닮아 동일한 설계자와 동일한 장인에 의해 조성되었다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그런데 염거화상 부도에는 수철화상 능가보월탑에 있는 연화하대석과 지대석이 없다.
가장 오래된 것으로는 文聖王 6年(844) 廉居和尙 부도(국보 제104호)인데 우리나라 석조 부조 양식의 기점을 이룬다. 廉居(?~844)화상은 도의선사의 제자이다. 가지산문 제2조이며, 보조 체징은 제3조(804~880)이다. 지대석을 제외한 전체가 팔각당 형식에 건물형이다.
염거화상부도는 일제때 일본인들이 원주 흥법사에 있던 것을 일본으로 가져가려다 실패라고, 1914년 서울 탑골공원에 두었다고 한다. 지금 국립중앙박물관 뜰에 있다. 광복후 흥법사터를 조사하였지만 거기에서 반출되었다는 증거를 찾지 못해 원래의 있었던 곳은 알 수 없다.
* 실상사 백장암 - 남원시 산내면 대정리 수청산(722m) 중턱
실상사의 부속암자로 누가 창건했는지는 모르지만, 실상사와 같은 시기인 9C 초에 창건했으며, 실상사가 禪風을 떨칠 때에는 실상산파의 참선도량으로 활용했다.
조선 선조 25년(1592)에 조일전쟁으로 실상사가 폐허가 됐을 때 약 200년 동안 실상사 승려들이 이 절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현재 因法堂과 칠성각, 산신각이 있다. 그러나 남아 있는 건물 터로 보아 상당히 규모가 컸던 것을 알 수 있다.
*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국보 제10호)
9세기 이후 신라 석탑에는 표면장엄이 가해지는 일이 유행하였는데, 이 탑은 그 중에도 장식성이 가장 많은 예이다. 기단구조와 각부 장식 조각에서 특이한 양식을 보여주는 異型石塔이다.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이 탑은 높이는 약 5m이다.
기단은 특히 이형에 속하여 지대석 위에 하대석 · 중대석 · 덮개돌을 결합한 듯한 석재가 놓였는데, 옆면에는 난간형이 조각되어 있다. 일층 몸돌은 폭에 비하여 높이가 높은 편이다. 남면에는 문짝이 있고 그 좌우에 보살입상과 사천왕상이 조각되어 있고, 다른 세 면에도 보살상 · 천왕상 · 동자상이 조각되어 있다. 상단에는 중앙과 좌우에 두공을 양각하였다. 2층과 3층 몸돌은 밑에 난간형을, 위에 두공형을 양각하고 각 면 2층에는 2구씩 3층에는 1구씩 奏樂天人상을 양각하였다. 지붕돌은 두꺼운 편이고 굵은 우동이 있다. 밑의 받침에는 층단이 없는 대신 1층과 2층에는 앙련이 있고 3층에는 각 면에 삼존상을 조각하였다.
상륜부에는 찰주를 중심으로 노반 · 복발 · 앙화 · 보륜 · 수연 등 많은 부재가 남아있다.
1980년 2월 도굴꾼이 파손한 것을 이후 다시 복권하였다.
이례적으로 낮은 기단을 내고 그 위에 탑신 전체에 난간, 신중, 주악천인상, 불상 등을 조각하였다.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탑 전체에 새김장식을 하였다. 이전의 장식은 기단부 또는 1층몸돌까지만 허용되었는데, 그 질서가 무너지고 2층기단도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