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시집

김현승/ 가을의 기도, 가을, 견고한 고독, 플라타너스

추연욱 2013. 10. 28. 22:10

 

가을의 기도

 

김현승(1913~1975)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가을

 

김현승

 

봄은

가까운 땅에서

숨결과 같이 일더니

 

가을은

머나먼 하늘에서

차가운 물결과 같이 밀려온다.

 

꽃잎을 이겨

살을 빚던 봄과는 달리

별을 생각으로 깎고 다듬어

가을은 

내 마음의 보석을 만든다.

 

눈동자 먼 봄이라면

입술을 다문 가을

 

봄은 언어 가운데서

네 노래를 고르더니

가을은 네 노래를 헤치고

내 언어의 뼈 마디를

이 고요한 밤에 고른다.

 

김현승 시초, 1957  

 

 

 

견고한 고독

 

김현승

 

껍질을 더 벗길 수도 없이

단단하게 마른

흰 얼굴.

 

그늘에 빚지지 않고

어느 햇볕에도 기대지 않는

단 하나의 손발.

 

모든 신들의 거대한 정의 앞엔

이 가느다란 창끝으로 거슬리고,

 

생각하던 사람들 굶주려 돌아오면

이 마른 떡을 하룻밤

네 살과 같이 떼어 주며.

 

결정(結晶)된 빛의 눈물,

그 이슬과 사랑에도 녹슬지 않는

견고한 칼날――발 딛지 않는

피와 살.

 

뜨거운 햇빛 오랜 시간 회유에도

더 휘지 않는

마를 대로 마른 목관 악기의 가을

그 높은 언덕에 떨어지는,

굳은 열매.

 

쌉슬한 자양

에 스며드는

에 스며드는

네 생명의 마지막 남은 맛

 

 

 

플라타너스

 

김현승(1913~1975)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

플라타너스

너의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  

 

너는 사모할 줄을 모르나

플라타너스

너는 네게 있는 것으로 그늘을 늘인다.  

 

먼길에 올 제

호올로 되어 외로울 제

플라타너스

너는 그 길을 나와 같이 걸었다. 

 

이제 너의 뿌리 깊이

나의 영혼을 불어넣고 가도 좋으련만

플라타너스

나는 너와 함께 신(神)이 아니다!  

 

수고로운 우리의 길이 다하는 어느 날

플라타너스

너를 맞아 줄 검은 흙이 먼 곳에 따로이 있느냐?

나는 오직 너를 지켜 네 이웃이 되고 싶을 뿐

그 곳은 아름다운 별과 나의 사랑하는 창이 열린 길이다.

 

 

 

고독의 시인 김현승,


그는 <절대고독>, <견고한 고독>을 추구한다. 그런 상태를 “마른 나뭇가지에 다다른 까마귀”, "뜨거운 햇빛 오랜 시간 회유에도/ 더 휘지 않는/ 마를 대로 마른 목관 악기의 가을/ 그 높은 언덕에 떨어지는,/ 굳은 열매."라 형상화했다.

절대고독은 그에게는 종교적인 깨달음의 경지다. 그 경지가 오래 지속되는 것이 견고한 고독이다.

그래야 인간은 세상에서 벗어나 자신의 내면을 응시할 수 있다.

그때 진정으로 절대자를 찾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가치있는 삶이라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굽이치는 파도” 같은 감정의 기복을 잠재워야 하고,

“백합의 골짜기” 같이 아름다운 지상적 존재를 버려야 한다.

 

그런 김현승에게도 동반자는 필요했다.

그 동반자는 세계가 아닌 나무임에야 무슨 상관이냐. 하늘을 향해 팔을 벌린 나무는 신을 향해 기도하는 모습이 아닌가.

 

플라타너스는 외롭게 먼 길을 걷는 화자에게 유일한 반려자요 벗이다.

고독을 위로하며 그 외로운 길을 동행해준다.

지상의 삶이 다하는 날까지 함께 이웃하며 지켜보는 영원한 반려자가 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