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lke/ 가을 날, 고독, 사랑의 노래, 그대 어둠이여
가을 날Hersttag
Rainer Maria Rilke(1875~1926)
주여, 때가 왔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길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얹으십시오.
들에다 맑은 바람을 놓으십시오.
마지막 과실을 익게 하시고
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을 주시어
그들을 완성시켜, 마지막 단맛이
짙은 포도주 속에 스미게 하십시오.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고독한 사람은 이 후도 오래 고독하게 살아
잠자지 않고, 읽고, 그리고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바람에 불려 나뭇잎이 날릴 때, 불안스러이
이리저리 가로수 길을 헤맬 것입니다.
<형상시집>, 1902.
고독 Einsamkeit
Rainer Maria Rilke(1875~1926)
고독은 비와도 같은 것
저녁을 찾아 바다에서 오른다
멀고 먼 외진 들녘에서 오른다
늘상 고적하기만 한 하늘로 옮겨갔다가
하늘에서 비로소 도시에 내린다
아침을 향해 골목골목이 몸을 일으키고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한 육신들이
실망과 슬픔에 젖어 서로 떠나갈 때
서로 미워하는 사람들이
같은 잠자리에서 함께 잠들어야 할 때
낮과 밤이 뒤엉킨 시각, 비가 되어 내리면
고독은 강물과 함께 흘러간다……
사랑의 노래 Liebes - Lied
Rainer Maria Rilke(1875~1926)
내 영혼이 당신의 영혼에 닿지 않고서
어찌 내 영혼을 간직하리까/ 어찌 내가
당신 위 다른 사물에게도 내 영혼을 쳐 올려버릴 수 있으리까?
아아 어둠 속 잃어버린 자리에
당신의 깊은 마음이 흔들려도 흔들리지 않는
조용하고 낯선 곳에
내 영혼을 가져가고 싶습니다.
우리에게 당신과 나의 몸에 닿는 모든 것은
확실히,
흡사 두 줄의 현에서 한 음을 짜내는,
바이올린처럼 우리를 한데 묶어 놓습니다.
어떤 악기에 우리는 얽혀져 있는 것인가요?
어떤 바이올리니스트가 우리를 사로잡은 것인가요?
오, 달콤한 노래입니다.
그대 어둠이여 Du Dunkelheit
Rainer Maria Rilke(1875~1926)
그대 어둠이여, 나는 그대에게서 태어났노라
나는 불꽃보다 그대를 사랑하네.
불꽃은 세상에 붙어있는 것.
밖에서는 아무도 그를 알지 못한는 한 둘레를 반짝이는 것.
그러나 어둠은 제 몸에 모든 것을 품고 있네.
형상과 불꽃, 짐승과 나
인간과 권력도
어둠은 붙잡고 았네-.
어느 커다란 힘이 내 이웃에서
움틀 수도 있는 것이지요.
나는 밤을 믿습니다.
Rainer Maria Rilke, 윤동하 역편, <고독>, 태학당,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