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영시

Rilke/ 가을 날, 고독, 사랑의 노래, 그대 어둠이여

추연욱 2013. 10. 28. 22:08

 

가을 날Hersttag

 

         Rainer Maria Rilke(1875~1926)

 

주여, 때가 왔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길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얹으십시오.

들에다 맑은 바람을 놓으십시오.

 

마지막 과실을 익게 하시고

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을 주시어

그들을 완성시켜, 마지막 단맛이

짙은 포도주 속에 스미게 하십시오.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고독한 사람은 이 후도 오래 고독하게 살아

잠자지 않고, 읽고, 그리고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바람에 불려 나뭇잎이 날릴 때, 불안스러이

이리저리 가로수 길을 헤맬 것입니다.

 

<형상시집>, 1902.

 

 

Einsamkeit

 

Rainer Maria Rilke(1875~1926)

 

고독은 비와도 같은 것

저녁을 찾아 바다에서 오른다

멀고 먼 외진 들녘에서 오른다

늘상 고적하기만 한 하늘로 옮겨갔다가

하늘에서 비로소 도시에 내린다

 

아침을 향해 골목골목이 몸을 일으키고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한 육신들이

실망과 슬픔에 젖어 서로 떠나갈 때

서로 미워하는 사람들이

같은 잠자리에서 함께 잠들어야 할 때

낮과 밤이 뒤엉킨 시각, 비가 되어 내리면

 

고독은 강물과 함께 흘러간다……

 

 

사랑의 노래 Liebes - Lied

 

Rainer Maria Rilke(1875~1926)

 

내 영혼이 당신의 영혼에 닿지 않고서

어찌 내 영혼을 간직하리까/ 어찌 내가

당신 위 다른 사물에게도 내 영혼을 쳐 올려버릴 수 있으리까?

아아 어둠 속 잃어버린 자리에

당신의 깊은 마음이 흔들려도 흔들리지 않는

조용하고 낯선 곳에

내 영혼을 가져가고 싶습니다.

우리에게 당신과 나의 몸에 닿는 모든 것은

확실히,

흡사 두 줄의 현에서 한 음을 짜내는,

바이올린처럼 우리를 한데 묶어 놓습니다.

어떤 악기에 우리는 얽혀져 있는 것인가요?

어떤 바이올리니스트가 우리를 사로잡은 것인가요?

오, 달콤한 노래입니다. 

 

 

 

그대 어둠이여 Du Dunkelheit

 

 Rainer Maria Rilke(1875~1926)

 

그대 어둠이여, 나는 그대에게서 태어났노라

나는 불꽃보다 그대를 사랑하네.

불꽃은 세상에 붙어있는 것.

밖에서는 아무도 그를 알지 못한는 한 둘레를 반짝이는 것.

 

그러나 어둠은 제 몸에 모든 것을 품고 있네.

형상과 불꽃, 짐승과 나

인간과 권력도

어둠은 붙잡고 았네-.

 

어느 커다란 힘이 내 이웃에서

움틀 수도 있는 것이지요.

 

나는 밤을 믿습니다.

 

Rainer Maria Rilke, 윤동하 역편, <고독>, 태학당,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