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부/ 지리산
그리움
내가 걷는 백두대간 58
이성부
낯선 길에 들어서야
나는 새로운 내음 가슴 가득히 채워 발기한다.
이 길에서는 온통 그대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 너무 많아
마음이 나를 떠나 천리 밖을 떠돈다.
절도 중도 없어 바위 턱에 나를 앉히고
숨을 고르게 하고
내 몸도 알맞게 식혀 구름에게라도 맡겨야 한다.
이성부 시집, 지리산, 창작과비평사, 2001.
노고단에 여시비 내리니
내가 걷는 백두대간 71
이성부
노고단에 여시비가 내리니
산길 풀섶바다
옛적 어머니 웃음빛 닮은 것들
온통 살아 일어나 나를 반긴다
내 어린 시절 할머니에게 지천 듣고
고개만 숙이시더니
정재 한구석 뒷모습
흐느껴 눈물만 감추시더니
오늘은 돌아가신 지 삼십여년 만에 뵙는
어머니 웃음빛
이리 환하게 풀꽃으로 피어 나를 또 울리느니!
이성부 시집, 지리산, 창작과비평사, 2001.
보석
내가 걷는 백두대간 72
이성부
지리산을 여러 차례 오르내렸는데 그 모습 모르고만 다녔다. 이 골 저 골 이 등성이 저 등성이 많이 더투고 헤집고 돌아다녀도 그 산은 저를 보여주지 않았다 함께 잠자며 뒹굴며 살 섞어 땀 흘려보아도 거듭 알 수 없었다 어느 해 겨울 기진맥진 청학이 골 내려와서 강 건너 남쪽 보았더니 크낙한 산줄기 또 하나 무겁게 버티고 있었다 이듬해 겨울 한달음에 그 남쪽 산 올랐더니 비로소 옆으로 누운 지리산 긴 몸둥어리 한꺼번에 보이더라 빛나는 큰 보석 병풍 펼쳐져서 내 그리움 딜려가 북받치게 하더라 사랑하는 것들 멀리 떨어져 바라보아애 더 잘 보이느니
이성부 시집, 지리산, 창작과비평사, 2001.
처용을 닮아간다
내가 걷는 백두대간 77
이성부
나는 아무래도 게을러서 한눈팔기 좋아하고
아둥바둥 세상 일에 등 돌리기 일쑤이고
너무 부끄러움 많아 좋은 사람 빼앗기는 일 적지 않았다
산에 올라 멀어버린 시간 멀어버린 사람 돌이켜보니
그 일들은 아프기는 했지만 그래도 참을 만하였다
섭섭하다라는 느낌은
어릴적 황토산에서 엎어져 입속 흙을 앞니로 깨물던 느낌
뱉어내고 입맛 다시던 느낌
정령치 풀밭에 달빛 물들어 스산해도
한판 춤이나 출까부다 어릿광대 같은 붉은 웃음 날리며
북소리 장구소리 없어도 신명나게 춤이나 출까부다
이성부 시집, 지리산, 창작과비평사,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