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연욱 2013. 8. 6. 21:54

■ 鷰谷寺는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에 있다.

 

연곡사의 연혁에 대해서는 1993년 전남대학교 박물관에서 펴낸 <구례 연곡사 지표조사 보고서>에 믿을 만한 내용이 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신라 제35대 경덕왕(742~765 재위) 때 緣起祖師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연기조사는 연곡사 말고도 화엄사, 대원사를 창건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연기조사는 <백지묵서 화엄경사경>(호암미술관 소장)을 총감독한 스님으로 알려져 있지만 유물이나 기록은 남아있는 것이 없다.

 

고려시대에는 眞靜國師가 주석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 중종 때(1530) 나온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구례현에 연곡사가 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때까지 맥을 이어왔던 것으로 보인다.

 

정유재란 때 몽땅 불타 폐허가 되고만다. <亂中雜錄>에 따르면 “1598년 4월 10일 왜적 400명이 하동, 악양을 거쳐 쌍계사, 칠불사, 연곡사에 들어와 살육과 방화를 자행했다.”

그후 인조 5년(1627) 逍遙大師 太能(1562~1648)이 복구하였다. 소요대사는 서산대사의 제자이며, 서부도의 주인이다.

이 무렵 <석가여래 성도기>를 목판으로 찍어낸 것으로 보아 사세가 제법 확장되었던 듯하다.

 

1728년 이인좌의 난이 일어났을 때 승려 大有와 승려 출신 술사 宋賀가 쌍계사와 연곡사를 중심으로 明火賊들과 연합하여 이 반란에 가담하였는데, 반란이 실패하자 그들은 지리산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조선 영조 21년(1745) 10월 왕가의 神主木(위패를 만드는 나무)으로 쓰이는 밤나무를 봉납하는 栗木封山之所로 지정되었다. 연곡사 주지는 밤나무 단지를 경영하는 책임자가 된 것이다. 이로인해 지방 향리의 경제적 수탈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1895년경에도 신주목을 봉납하였는데 밤나무를 남벌하여 栗木封山之所로서의 역할을 못한 책임이 두려워 승려들이 절을 버리고 떠나 폐사가 되었다.

 

1906년 을사조약으로 의병이 일어나자 담양 출신 의병장 高光洵이 1907년 8월 26일 연곡사를 근거지로 삼아 항일투쟁을 벌였다. 얼마간 전공을 거두었으나 이해 10월 10일 일본군의 야간 기습을 받아 의병들은 연곡사 옆 피아골 계곡에서 전멸하고 연곡사는 잿더미가 되었다.

 

이후 일제강점기 한 불자가 암자를 지어 경영하다가 한국전쟁 때 다시 불탔다. 1

960년대 후반에 작은 절이 들어섰고, 80년대 후반까지도 법당 한채와 농가 같은 요사채, 동부도, 북부도, 서부도, 삼층석탑만 있었다.

1983년 대적광전이 준공되고, 85년에 요사채와 선방이 완성되었다. 대적광전 오른쪽에 명부전이 있다.

 

연곡사는 박경리의 소설 <토지>의 한 무대이다. 최참판댁 안주인 윤씨부인이 죽은 남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연곡사에 백일기도를 드리러 갔다가 연곡사 주지 우관스님의 동생이며 동학군 장수인 김개주에게 겁탈당하여 사생아 김환을 낳는다.

 

 

 

 

 

 

 

 

* 동부도(국보 제53호)는 대웅전 북동쪽에 있다.

팔각원당형으로 경내의 세 기의 부도 중 조각이 가장 정교하다.

완벽한 형태미와 섬세한 장식조각의 아름다움으로 부도 중의 꽃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쌍봉사 철감선사 부도와 쌍벽을 이룰 치밀하고 섬세한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다.

 

네모난 지대석 위에 8각 2단의 하대석을 놓고, 하단에는 운룡문을 얕게 조각하였다. 상단에는 둥근 윤곽선을 돌린 각 면에 자세를 달리 한 사자를 양각하였다. 하대석 윗면에는 각형으로 된 3단의 굄이 중대석을 받치고 있다. 중대석은 낮은 편이며 각 면에는 안상과 그 안쪽에 8부중상을 조각하였다. 상대석을 받치고 있는 3단의 굄대는 중대석을 받치고 있는 굄대와 대칭을 이룬다. 상대석은 두겹 앙련으로 연잎마다 국화 같은 꽃무늬를 돋을새김하였으며 그 위에 몸돌받침을 얹었다.

몸돌받침에는 난간 같은 고복형의 마디가 있는 모서리기둥이 몸체와 분리되어 있고, 여덟 개의 면에는 각 면마다 안상 안에 가릉빈가 1구씩을 조각하였다. 몸돌받침 윗면에는 낮은 3단의 굄이 돌출되어 있고, 그 위에 8각형의 몸돌을 놓았다.

몸돌에는 사천왕상과 문짝을 새겼다. 몸돌은 아래보다 위가 좁은 사다리꼴로 위를 좁게하여 날렵한 인상을 주고있다.

몸돌 각 면에는 문비형, 사천왕, 가마 등을 새겼다.

 

 

 

동부도 가릉빈가상

 

 

목조 건축의 지붕 구조를 따르고 있는 지붕돌은 아래쪽에 서까래와 부연, 위쪽에는 기와골과 막새기와를 표현하였으며, 맵시있게 반전하여 경쾌하게 보인다. 지붕돌 끝에는 풍탁을 걸었던 구멍이 있으며 밑에는 구름무늬를 돋을새김하였다.

 

상륜부에는 앙화 위에 날개를 활짝 편 채 비상하려는 가릉빈가 네 마리가 사방으로 향해 있고, 그 위에 연꽃이 장식된 앙화, 복발, 보륜 등이 차례로 얹혀있다.

 

높이는 3m로 신라시대 다른 부도보다 높아진 듯하나 안정된 비례를 유지하고 있으며 조각 수법이 섬세하다.

신라 말기에 만들었다.

도선국사(827~898)의 부도라는 말이 전하고 있지만, 누구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일제 강점기에 일인들이 동경 제국대학으로 옮겨가기 위해 수개월 동안 연구하였으나 산길로는 운반이 불가능해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

 

* 동부도비(보물 제153호)는 비신은 없고 비받침과 비머리만 있어 주인을 알 수 없다.

귀갑문을 얇게 조각한 거북 등위에 전체를 덮을 정도로 양쪽에 날개가 조각되어 있는데 이는 매우 드문 장식이다. 거북에게 신성을 부여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거북은 네 다리를 사방으로 쭉 뻗고 납작 엎드린 모습으로, 오른쪽 앞발을 살짝 들어 전진하려는 모습이다. 이에 비하면 용머리는 조각수법이 뒤떨어진다.

목이 짧아 부자연스럽다. 현재 똑바로 서 있는 용머리는 떨어져 나간 것을 다시 붙인 것이다.

 

비받침의 중앙에 네모난 비신 받침이 있다. 구름무늬를 깊게 조각하였다. 三山形의 비머리에는 힘찬 운룡문이 조각되었고, 그 위에 불꽃에 둘러싸인 보주가 있다. 전면 중앙에 재액이 있으나 읽기는 어렵다.

비받침은 적갈색이고 비머리는 암갈색인 것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화재와 풍화 등으로 색이 변한 것이다.

규모도 아담해지고, 양식적인 면에서도 통일신라시대와는 다른 여러 가지 변화를 보이고 있어, 고려시대의 것으로 보인다.

동부도와 연관성을 고증할 길이 없다. 높이는 1.2m이다.

 

 

 

 

 

* 북부도(국보 제54호)는 동부도에서 북쪽으로 150m쯤 떨어진 곳에 있다. 

동부도 양식을 모방하였으나 나름대로 뚜렷한 멋이 있다. 팔각하대석에는 입체감이 다소 부족한 운룡문이 조각되었고, 그 위에 귀꽃이 있는 복련석이 얹혀 있다. 중대석에는 8부중상이 조각된 동부도와는 달리 안상이 조각되었다.

상대석은 두겹의 앙련석인데 꽃잎의 조각 장식에 긴장감이 부족하다. 앙련 안에는 또 다른 꽃무늬가 있다. 상대석 위에 놓인 몸돌받침에는 난간처럼 생긴 고복형 모서리기둥으로 장식돼 있으나 동부도처럼 몸체와 떨어져 있지 않았고, 면마다 안상 안에 가릉빈가 1구씩이 조각되어 있다.

상륜부는 앙화와 복발이 한개의 돌로 되었고, 그 위에 가릉빈가, 보륜이 차례로 얹혀있다. 높이는 3m이다.

 

 

 

북부도 가릉빈가상

 

 

동부도보다 제작 시기가 약간 뒤인 고려 초기로 추정된다. 주인을 몰라 북부도라 부르고 있으나 돌의 재질과 제작시기로 보아 현각선사 부도비와 관련하여 현각선사 사리탑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현각선사가 누구인지 알려진 것은 전혀 없다.

신라 말 고려 초 선종 사찰에는 대선사의 부도와 고려시대 충창한 스님의 부도가 쌍을 이루는 경우가 많다. 문경 봉암사, 곡성 태안사, 남원 실상사, 장흥 보림사, 여주 고달사 등이 그런 예에 속한다.  

 

* 현각선사 부도비(보물 제152호)는 고광순 순절비 아래쪽에 있다.

비받침과 비머리만 남았다. 남아 있는 옛 탁본에 의하면 고려 초인 제5대 경종 4년(979)에 세웠다. 나라를 새로 연 시기의 포부와 힘을 담은 듯 거대하고 당당한 모습이다.

 

거북은 네 다리를 사방으로 뻗쳐 납작 엎드린 모습으로 동부도비와는 반대로 왼쪽 앞발을 살짝 들어 앞으로 나서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몸체에 비해 큰 머리와 비석 받침 네 면에 새긴 안상과 귀꽃이 인상적이고, 부리부리한 두 눈과 큼직한 입 주변에 수염도 새겼다. 이수 앞면에 ‘玄覺王師碑銘’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전액이 있다. 용의 형상이 좀 해학적이다.

 

조일전쟁 때 화재로 손상을 입은 것이 풍화에 의해 무너지고, 구한 말 일본군의 약탈과 방화로 철저히 파괴되었다. 비신은 19세기 초반에 깨졌는데 이때 남쪽산이 3일 동안 울었다 한다. 1970년에 흩어져 있던 거북 조각을 한데 모아 붙였다.

 

1686년 우담 정시한이 이곳을 찾았는데, “연곡사 비전을 보았다. 禪覺선사 비는 쪼개진 지 이미 7년이 되었으나 당우는 매우 크고 화려했다.”고 기록하였다.

선각선사는 懶翁 慧勤(1320~1376)이다. 정시한이 말한 禪覺선사는 先覺禪師 곧 도선국사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玄覺’을 ‘禪覺’을 잘못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현각선사 비신은 조일전쟁 때 없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시한의 기록에 의하면 비신이 '쪼개진 지 7년이 지났다'고 했으니 그때는 비신이 남아있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도 정시한은 “影子殿에는 진감국사 이하 10여 분의 영정이 걸려 있는데, 전부 기이하고 오래 된 것이라 볼 만했다”고 했다. 연곡사와 진감국사와 어떤 관계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 서부도(보물 제154호)는 북부도에서 100m 내려온 경내 서쪽에 있다.

逍遙大師 太能의 사리탑이다.

몸돌 한면에 ‘逍遙大師之塔’ ‘順治六年庚寅’ 이란 글씨가 두 줄로 쓰여있어 소요대사가 입적한 순치 5년(1648) 다음해인 1649년에 세운 것을 알 수 있다. 부도비를 따로 세우지 않고 부도의 몸돌이나 다른 부분에 글자를 새기는 예는 조선시대에 많이 나타난다.

 

서부도는 동부도를 모방하면서 익살스럽게 변화시켰다. 특히 사천왕상 조각은 능글맞고 넉살스럽게 표현되어 경쾌함을 나타내고 있다. 희화화시키면서도 동질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계승이라 볼 수 있다.

 

8각원당형으로 아름다운 균형을 이루고 있으나 조각수법은 날렵한 동부도나 북부도에 비해 둔중한 편이고,

키도 조금 커서 3.6m이다.

 

팔각지대석에 홈이 패여 있고 그위에 하대석을 놓았다. 하대석 측면에는 장식이 없으나 윗면에 곡선을 그린 흔적이 있다. 그위에 얹은 중대석은 가운데가 각진 타원형이며, 아래 위 대칭으로 앙련과 복련이 조각된 독특한 모습이다. 상대석은 8각 앙련으로 아래에 각형 2단의 받침이 있고, 뒷면에 弧形의 높은 굄이 있다. 몸돌은 8각이며 한면에 문비를 새겼고, 다른 한면에 글씨, 나머지 여섯 면에는 따로 돌을 붙여 만든 것처럼 불룩하게 여섯 구의 신장상을 조각하였다. 4구는 사천왕상, 2구는 신장상으로 보이나 확실하지 않다.

 

8각의 지붕돌은 추녀 끝이 얇고 넓다. 낙수면은 급경사를 이루었고, 귀꽃이 큼직하게 솟아있다.

상륜부에는 앙화, 두줄의 횡대에 꽃무늬가 수놓인 복발, 다시 그 위에 높직한 보개와 보주가 놓여 있다.

북부도가 동부도를 모방한 것이라면, 서부도는 동부도를 변형 모방한 것이다. 조선 사람의 검소한 멋이 풍긴다.

 

 

 

소요대사의 속성은 吳氏이며, 소요는 호이다.

담양 사람으로 13세에 백양사에 들어가 출가하고 뒤에 남쪽의 명산을 두루 돌아 浮休禪師 善修(1543~1615)에게 경전을 배웠고, 다시 묘향산으로 가 서산대사 문하에 들어가 20년을 공부하여 깨달음을 얻었다.

40세부터 금강산 · 오대산 · 구월산 등지에 머물면서 선풍을 떨쳤다.

그뒤 조일전쟁으로 불타버린 연곡사를 크게 중창하였다.  

 

* 삼층석탑(보물 제151호)은 대웅전 남쪽 채마밭에 있다.

탑신은 전형적인 삼층석탑이나 3중으로 기단부를 이루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각단에는 모서리기둥과 버팀기둥이 있다. 기단부에 비해 탑신부가 소홀한 느낌이 든다.

3층지붕돌이 떨어져 뒹굴던 것을 1967년에 복원하였다. 이때 상층기단에서 높이 23.5cm의 금동여래입상이 나왔는데 현재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있다.

 

몸돌과 지붕돌이 각기 다른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몸돌에는 모서리기둥이 표현되었을 뿐 다른 장식은 없다.

2층과 3층의 몸돌이 1층에 비해 크게 줄어들었다. 지붕돌은 각층마다 받침이 4단이고 추녀 밑은 평평하다. 지붕돌의 경사는 경쾌한 곡선을 그리며 네귀의 반전도 우아하다. 상륜부는 없어졌다. 높이는 6m이다.

하층기단에서 탑신부까지 체감률이 온화하여 아름답다.

탑 안에서 발견된 금동여래입상의 연대가 고려 초인 것을 보면 현각선사가 활동하던 10세기 중반쯤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 조선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자그마한 부도 3기가 주변에 흩어져 있다.

특히 보주형의 葆月堂塔靈은 조형적 성실성과 깔끔한 세련성을 갖추고 있고, 팔각형 몸체에 팔각 지붕을 얹은 부도는 조선 후기의 전형적 양식으로 구조적으로 잘 짜인 부도이다.

 

* 70m 정도 내려오면 동백나무 숲속에 義兵將 高公 光洵 殉節碑가 서있다. 본디 초분 자리였는데, 1958년에 세웠다.

梅泉 黃玹(1855~1910)은 1907년 “燕谷戰場 弔高義兵將光洵”이란 시를 지었다.

 

“千峰燕谷 鬱蒼蒼 小刦忠沙 也國殤 戰馬散從 禾隴臥 神烏齊下 樹陰翔 我曹文字 終安用 名祖家聲 不可當 獨向西風 彈熱淚 新墳兀 菊花傍. 첩첩 싸인 봉우리 연곡사 골짜기에 이름없는 사람들 나라 위해 죽었구나. 싸우던 말은 흩어져 논두렁에 누워있고, 까마귀만 모여들어 나무 그늘 아래 나래 치네. 글 한다는 우리 어디에 쓰일까, 조상과 가문의 명성으로 견딜 수는 없으리라. 가을바람에 홀로 서서 뜨거운 눈물 뿌리는데, 들국화 옆에다 만든 새 무덤만 우뚝하다” 

 

연곡사에서 30~40분쯤 오르면 피아골 마을이다.

마을의 한자 지명은 稷田이며, 피아골 골짜기를 직전계곡이라 한다. 오른쪽으로 지리산 통꼭봉이 보이고 그 북쪽 등성이가 불무장등이다.

이곳은 한국전쟁 전후 빨치산의 본거지였고, 1955년에 나온 이강천 감독 영화 <피아골>의 주무대여서 이 지리산의 오지가 세상에 잘 알려지게 되었다.

피아골이란 이름은 조일전쟁 때 많은 살상이 있었고, 한말의 의병의 항쟁, 여순 반란사건, 한국전쟁 등 싸움이 벌어질 때마다 많은 피를 흘린 곳이라 하여 붙여졌다고 한다. 또 피난지로서 ‘피하는 골’이란 뜻에서 붙여졌다는 견해도 있다.

 

피아골은 본디 ‘피받(밭)골’로 피밭이 있는 골짜기의 뜻일 것이다. ‘피받’의 ‘ㅂ’이 모음화하여 ‘피왇골’로 다시 ‘피앗골’, ‘피아골’로 변화했을 것이다. 이곳의 한자 지명이 직전인 것을 보면 분명해진다. 피는 밭곡식으로 벼과에 속하는 일년생 초본이다. 救荒식물에 가까운 농산물이다.

이곳의 지명이 본디 피밭[稷田]골이지만 사람들은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적군의 주력부대의 거점이었고, 아군과 빨치산 간에 치열한 전투를 벌여 피를 많이 흘렸다는 점에서 땅 이름과 역사적 상황이 들어맞아 피아골이 ‘피[血]의 골짜기’로 인식하게 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