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시집

나무는/ 류시화

추연욱 2013. 3. 26. 15:49

나무는

 

류시화

 

나무는

서로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않기 위해

얼마나 애를 쓰는 걸까 

 

그러나 굳이 바람이 불지 않아도

그 가지와 뿌리는 은밀히 만나고

눈을 감지 않아도

그 머리는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있다

 

나무는

서로의 앞에서 흔들리지 않기 위해

얼마나 애를 쓰는 걸까 

 

그러나 굳이 누가 와서 흔들지 않아도

그 그리움은 저의 잎을 흔들고

몸이 아프지 않아도

그 생각은 서로에게 향해 있다 

 

나무는 저 혼자 서 있기 위해

얼마나 애를 쓰는 걸까

 

세상의 모든 새들이 날아와 나무에 앉을 때

그 빛과 그 어둠으로

저 혼자 깊어지기 위해 나무는

얼마나 애를 쓰는 걸까

 

 

 

물안개  

 

류시화 

 

세월이 이따금 나에게 묻는다. 

 

사랑은 그후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안개처럼

몇 겁의 인연이라는 것도

아주 쉽게 부서지더라

 

 

물안개 / 류시화

 

세월이 이따금 나에게 묻는다.

사랑은 그 후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안개처럼

몇 겹의 인연이라는 것도

아주 쉽게 부서지더라

 

세월은 온전하게 주위의 풍경을

단단히 부여잡고 있었다

섭섭하게도 변해버린 것은

내 주위에 없었다

 

두리번거리는 모든 것은 그대로였다

사람들은 흘렀고

여전히 나는

그 긴 벤치에 그대로였다

 

이제 세월이 나에게 묻는다

그럼 너는 무엇이 변했느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