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답사 사진

안동문화유산 답사- 2013년 1월 18일

추연욱 2013. 1. 21. 22:32

 

 

안동문화유산 답사- 2013년 1월 18일

 

1. 봉정사

 

용트림소나무/ 주차장에서 만세루 가는 길 왼쪽에 있다. 

보호수, 안동시 서후면 태장리

수령 180년, 높이 15m, 둘레 70cm

 

 

 

작은 문 眞如門으로 들어간다.

 

 

 

 

봉정사 대웅전

 

 

 

 

■ 대웅전(국보 제311호)은 지금까지 확실한 건립연대가 밝혀지지 않아, 조선 초기에 지은 건물로 보고 있었다. 근래에 대웅전 보수를 위해 해체하던 중 4종의 먹글씨를 발견하였는데, 이 먹글씨 중에 종보(맨 위쪽에 있는 보) 보아지 상부에 쓰인 <법당중창기>에 “조선 세종17년(1435)에 이르러 법당을 중창하였다”는 기록과 지붕 속 종보 받침 長舌에서 “1428년에 미륵하생도를 그렸다”는 묵서가 발견되었다. 또 목재연륜연대 측정 결과에서도 1400년대 이전에 벌채된 부재임이 확인되어 대웅전을 건립한 시기가 1435년 이전이라는 사실이 거의 확실해 졌다. 1363년 극락전을 중수할 때 새로 대웅전을 지어 봉정사의 구획을 이렇게 다시 잡았을 것으로 보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대웅전은 고려 말에 지은 건물이며, 현존하는 다포계 건물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그러다가 2000년 3월 문화재청은 해체 수리하던 중 고려 제10대 공민왕(1351~1374 재위) 10년(1361) “불단조성”이란 먹글씨를 발견하였다.

그렇다면 1308년에 지은 수덕사 대웅전 다음으로 오래된 건물이다.

 

대웅전은 정면, 측면 3칸의 팔작지붕집에 다포식 건물이다. 안정된 비례와 웅건한 구조로 극락전보다 완성도가 높다. 앞쪽에 사대부집처럼 툇마루 난간이 있는 점이 특이하다.

 

천장은 다른 다포집처럼 우물천장이다. 井자 하나하나마다 그 안에 꽃문양을 그렸다.

특히 불단 위쪽 부분을 깊이 파고 작은 공포들로 굽을 돌려 파올렸다. 이는 궁궐의 정전인 경복궁 근정전이나 창덕궁의 인정전 천장의 한가운데를 파올린 것과 같은 방법으로 보개천장 또는 닫집이라 한다.

이 닫집의 천장판에는 쌍룡이 그려져 있는데, 용의 발톱은 다섯 개다.

 

후불벽을 치고 가운데에 석가모니불과 좌우 협시로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을 모셨다.

건물의 뒷벽이 아니고 건물 가운데에 이처럼 따로 벽을 마련하여 불상을 안치하는 것은 조선 전기부터 나타난다. 수미단에는 모란꽃이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다. 모란꽃이 불교 장식문양으로 등장한 것은 고려 말부터이다. 1625년, 1809년에 대대적인 중수가 있었다.

 

 

※ 용의 발톱 수는 중국에서 황제의 상징으로 7개를 썼다. 중국의 영향 아래 있는 다른 나라들은 다섯을 넘지 못했다. 한 나라 안에서는 왕의 상징으로 5개, 왕비나 세자는 4개나 3개를 썼다. 그러므로 발톱 5개는 왕의 상징이다. 공민왕이 봉정사를 중창할 때 대웅전을 지은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은 이런 점에 근거한다.

 

 

※ 문화재청은 2009년 6월 30일 보물 제55호 봉정사 대웅전을 국보 제311호로 승격 지정했다.

이에 따라 봉정사는 극락전(국보 제15호)과 함께 국보 2점을 보유하게 됐다.

또 문화재청은 6월 29일 경주 남산 칠불암 마애석불(보물 제200호)과 강진 무위사 극락전 아미타후불벽화(보물 제1313호), 순천 송광사 화엄전 화엄탱(보물 제1366호) 등 국가지정문화재 3건을 국보로 승격 지정 예고했다. 이들 문화재는 국보 승격과 함께 각각 '경주 남산 칠불암 마애불상군', '강진 무위사 극락전 아미타여래삼존벽화', '순천 송광사 화엄경변상도'로 지정명칭이 변경된다.

이에 따라 2007년 12월 국보 제310호 '백자대호'가 지정된 이후 처음으로 국보 3점이 추가된다.


대웅전 현판은 고려 제31대 공민왕(1351~1374 재위)의 친필이라고 한다.

공민왕은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으로 피난온 적이 있다.

이때 봉정사 보수에 관여했을 것으로 보고있다.

"光緖 八 季 壬午夏 改彩……"라는 말이 있다.

"光緖"는 청나라 德宗 광서제(1875~1908 재위)의 연호다.

광서 8년 임오년은 조선 고종 19년 1882년이다.

고려 공민왕이 쓴 현판을 이때 다시 칠을 한 것 같다. 

 

 

 

 

봉정사 화엄강당(보물 제418호)

승려들이 공부하는 강당 건물로 온돌방 구조를 갖추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남쪽에 두칸 부엌, 북쪽에 4칸 온돌방이 있으나,

원래는 정면 4칸 측면 4칸으로 현재의 온돌방 뒷쪽으로 4칸의 마루가 있었다.

강당으로 사용한 건물이므로 불당에 비해 낮은 기둥을 사용하였다.

측면의 중앙에 사각기둥 3개를 세워 들보를 받치게 하였으며 그 사이에 창을 내었다.

  

 

극락전 

 

 

 

 

■ 극락전(국보 제15호)은 1972년 완전 해체 복원하였는데, 이때 “신라 문무왕 때 능인대덕이 창건하고 고려 이후 원감 등 여섯 스님이 여섯 차례나 중수를 하였으나 지붕이 새고 초석이 허물어져 지정 23년 용수사의 축담스님이 와서 중수한 것을, 지금에 와서 다시 지붕이 허술하여 수리한다.”는 상량문을 발견하였다. ‘지금’이란 인조 13년(1625)이고, 축담이 중수한 것은 공민왕 12년(1363)이다. 이때 공민왕은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에 와있었으므로 극락전 중수에 공민왕도 관여했을 것으로 보인다.

 

한 건물이 지어진 후 고쳐 짓는 것은 대개 100년에서 150년을 지낸 뒤이다. 그렇다면 이 건물은 13세기 초 또는 12세기 중엽까지 거슬러 볼 수도 있다. 따라서 이 건물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최근 중국의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 南禪寺의 대전과 비슷한 옛 방식을 갖추고 있어 남선사와 마찬가지로 8세기경까지 거슬러 보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배흘림기둥에 주심포 맞배지붕집이다. 가운데만 문을 내고 양쪽에는 창살을 달았다. 최근에 복원하면서 조선시대에 건물의 모습이 변형된 것을 고려시대 건축양식으로 돌려놓았다. 이 건물의 공포와 결구 처리방식이 고구려 고분 벽화에 나오는 것과 비슷한 점이 많다는 것과 고려 초에 삼국시대 복고풍이 일어 건물이나 석탑이 지방 양식을 띠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고구려계 건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공포와 결구 등은 필요한 구성요소만 있을 뿐 장식은 거의 없다. 바닥과 주위에 검은 전돌을 깔았는데 이런 방식은 고려시대에는 매우 일반적이었다. 안에는 후불벽을 치고 아미타불을 모셨다. 불상의 위쪽으로 닫집이 있는데, 고려 말의 다포계로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본디 극락전 앞마당에는 우화루라는 작은 누각이 있었는데, 극락전을 해체 수리하면서 영산암으로 옮겼다.


 

※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

① 봉정사 극락전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다. 1972년 해체 수리할 때 1363년에 지붕을 중수했다는 기록이 나왔다. 13세기 초 내지 12세기에 지은 것으로 부석사 무랑수전 보다 50년쯤 앞서 지은 것이다.

② 그 다음이 부석사 무량수전이다. 1916년 해체 공사 때 발견된 귀 공포의 墨書에 “공민왕 7년(1358) 왜구에 의해 건물이 불타서 우왕 2년(1376) 원응국사가 중수하였다”고 한다. 목조건물은 일반적으로 건물을 지은지 100~150년이 지나 중수한다. 또 건축양식도 고려 후기 건물과는 다르다. 조사전보다 100년쯤 앞선 양식이다. 따라서 원래의 건물은 이보다 100년 정도 앞선 13세기 중엽에 건립된 것으로 본다.

③ 수덕사 대웅전은 1937~40년 해체 수리할 때 “충렬왕 34년(1308) 건립”이라는 먹글씨가 발견되어 창건 연대를 확실히 아는 최고의 건물이다.

 

 

 

 

 

극락전 영역/ 사진은 2009년 5월에 찍었다.

 

 

극락전

 

 

극락전 옆면

 

 

■ 古金堂(보물 제449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집으로 1616년에 중수한 조선 초기 건물이다. 주심포식 건물이지만 조선 중기 주심포식이 결구가 단단한 익공계로 발전해가는 과도적인 모습을 보인다. 작은 건물치고는 지붕이 크고 처마가 깊다.

 

이 건물이 본디 금당이었다면 이 자리에는 본디 극락전이나 대웅전이 들어서기 전인 초창기에 수도하던 암자가 있었을 것이다. 암자가 있던 자리에 금당이 지어졌고, 뒤에 절의 중심이 대웅전으로 옮겨지면서 옛 금당이란 뜻의 고금당이란 이름으로 남았을 것이된다. 금당이란 명칭은 조선시대 사찰의 원로스님의 거처로 쓰인 건물에 붙는 경우가 있다. 운문사가 그 예이다. 지금은 요사채이다.

 

1969년 크게 해체 수리했는데 해체 전에는 북쪽 지붕이 팔작지붕이었고, 방 앞에는 쪽마루가 달려 있었다.
 

 

 

 

 

김치독을 묻어둔 듯

 

 


 

영산암 雨花樓

 

 

봉정사 영산암(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26호)

봉정사 동쪽 약 100m 떨어진 곳에 있는 부속암자다. 응진전 송암당 삼성각 우화루 관심당 등 6개 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건물의 건림연대는 알 수 없으나 19세기 말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건물들은 口자 형으로 이루어져 폐쇄적인 느낌이 든다. 그러나 지형의 높이를 이용한 3단의 마당 구성과 우화루의 벽채를 없애고 송암당을 누마루로 처리한 기법 등에서 폐쇄성적인 느낌이 들지 않도록 하였다.

영산암의 입구인 우화루의 현판은 본디 극락전 앞에 있던 누각의 현판이었다고 한다.

“雨花”는 석가모니께서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처음 설하였을 때 하늘에서 꽃비가 내렸다고 한 데서 유래한다.

 

 

 

 

 

 

 

영산암의 법당 응진전

 

 

 

 

 

삼성각

 

 

 

봉정사로 돌아왔다.

들어오는 문 만세루를 통해 나간다.

만세루(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25호)는 대웅전 앞에 있는 2층 누각이다. 조선 숙종 6년(1680)에 건립되었다고 전한다.

본디 德輝樓라 했는데 언제부터인가 만세루로 바뀌었다. 건립 후 여러 차례 보수가 있었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지형의 경사를 자연스럽게 이용하여 앞면은 2층 뒷면은 단층으로 처리하였다.

 

 

 

 

 

 

 

 

 

 

 

 

 

  

 

올라올 때 차를 타고 주차장까지 왔다.

그래서 일주문을 지나쳤다.

그래서 거꾸로 내려가면서 일주문을 바라본다ㅣ

 

 

 

명옥대도 역시 내려가면서 들렀다. 

  

 

 

鳴玉臺(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74호)는

퇴계 이황(1501~1570)이 후학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던 곳을 기념하기 위해 조선 顯宗 6년(1665)에 사림들이 건립한 누각 형태의 정자이다.

옛 이름은 落水臺였으나 陸士衡의 시에 나오는 “飛泉漱鳴玉 솟구쳐 나는 샘이 명옥을 씻어 내리네.”라는 글귀에 따라 명옥대로 이름을 고쳤다 한다.

자연석 초석 위에 원형 기둥을 세우고 누마루를 설치하였는데 정면 2칸 측면 2칸의 평면에 鷄子欄干을 두르고 4면 모두를 개방하여 주변 경관을 감상하기 좋게 하였다.

1920년경에 고쳐 재었다고 하는데, 內陣柱와 기둥 위에 남아있는 흔적으로 보아 원래 뒤쪽 2칸은 방으로 꾸며져 이Tesj 것을 후대에 지금과 같은 누마루 형식으로 개조한 것으로 보인다. 원형이 일부 상실되어 건축적 가치가 약하다. 맞은편 바위 표면 에 “명옥대”라고 새겨놓은 글이 남아있다.

 

 

 

 

 

2. 병산서원

 

屛山書院(사적 제260)은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에 있다.

西厓 柳成龍(1542~1607)과 그의 셋째 아들 修巖 柳袗(1582~1635)을 배향한 서원이다. 본디 고려 때부터 안동부 풍산현에 풍산 류씨 가문의 豊岳書堂이 있었는데,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이 고장에 왔을 때 공부하는 유생들에게 토지 800두락을 내려준 적이 있다.

그뒤 선조 5년(1572) 류성룡이 서당이 큰길가에 있어서 학문하기에 적당하지 않다고 하여 조용하고 경치가 좋은 이곳으로 옮겼다. 조일전쟁 때 병화를 입었으나 광해군 6년(1614) 류성룡의 제자인 遇伏 鄭經世(1563~1633)를 중심으로 한 사림에서 류성룡의 업적과 학덕을 추모하여 사묘인 존덕사를 짓고 향사하면서 서원이 되었다. 1629년에는 셋째 아들 修巖 류진을 추가로 배향했다. 철종 14년(1863) “병산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았으며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에도 철폐되지 않고 남은 47곳 가운데 하나이다.

 

병산서원은 꽃뫼[花山]의 동남쪽 경사면에 남향으로 앉아있다. 서원 앞에는 낙동강이 흐르고 강변에는 넓은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고, 그 언덕에 노송들이 서있다. 강 건너에는 병풍 같은 병산이 있어 강물에 병산의 그림자가 떠있다.

 

병산서원은 서원이라는 사설교육제도가 어느 정도 자리잡은 17세기 초반에 건설되었다. 그래서 서원 구조의 전형을 잘 보여준다.

 

 

 

병산서원의 정문 복례문

“克己復禮 자기의 사사로운 욕망을 이겨내어 예를 회복한다면 천하가 仁으로 돌아갈 것이다

<論語 顔淵> 편

 

 

2005년 11월 13일, 미국 제41대 대통령 George H. W. Bush와

그의 부인 Barbara여사가 이곳을 방문한 기념으로 심었다는 나무다.

  

 

만대루

 

 

 

 

 

입교당

 

 

 

  

입교당 뒤,

오른쪽 계단 위에 사당 존덕사가 있다.

사당 문은 향사 때인 4월과 10월 첫 丁日에만 열린다.

 

 

사당 존덕사

   

 

서원 관리자의 새택 고직사를 나오면 머슴들의 화장실이 나타난다. 

 

 

병산을 바라본다.

 

 

  

 

  

  

 

3. 하회마을 

 

하회마을(중요민속자료 제122호, 민속마을)은 안동시 풍천면 낙동강이 크게 S자를 그리며 동 · 남 · 서 방향으로 하회를 감싸 안으며 흐르는 곳에 있다.

낙동강은 안동에 이르러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흐르는데, 하회에 이르면 동에서 서로, 충효당 앞에서 만송정까지는 남에서 북으로, 만송정을 지나면 서에서 동으로 흐름을 바꾼다.

북동쪽으로 굽이를 틀어 광덕동을 지나면 본디의 방향인 남서쪽으로 흐른다.

그래서 물돌이동, 한자로 河回라 한다. 그 물길이 감싸는 중심에 있는 꽃뫼[花山] 자락의 양쪽 끝에 하회마을과 병산서원이 있다.

강 건너 부용대에서 보면 자루가 달린 다리미 모양이다.

 

  

 

 

慕來村門/ 그리워서 찾아온 시골집 

 

 

 

 

양진당(보물 제306호)은 하회 류시 대종택이다.

서애 류성룡의 맏형 謙庵 柳雲龍(1539~1601)의 종가이다.

이 마을의 중심, 연꽃의 꽃술에 해당하는 곳이다. 

입향조 류종해가 처음 자리잡은 곳이다.

 

 

 

 

사랑채 대청 앞 정면에 ‘立巖古宅’이란 한석봉이 쓴 편액이 걸려있다.

입암은 유운룡과 류성룡의 아버지인 류중영의 號이다.

 

 

대청 안 북쪽 벽 양진당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오늘은 문이 닫혀 있어 옛날 사진을 올린다.

사진은 2012년 7월에 푸른불루가 찍었다. 

 

 

 

  

 

 

 

충효당 솟을대문 바깥마당에 있는 구상나무는,

 1999년 4월 21일 영국 여왕인 엘리자베스 Ⅱ세가 전통과 문화가 살아 숨쉬는 안동 하회마을 방문을 기념하기 위하여 심은 것이다.

구상나무는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한국 고유의 수종으로 소나무과에 속하는 상록수이다.

한라산과 지리산 등에 자생하는 한대성 수종인 구상나무의 열매는 원통형으로 하늘을 향하고 있으며, 떨어지는 순간 조각조각 흩어져 자취를 남기지 않는다. 그리고 좋은 향기를 가지고 있다.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와 목욕할 때 옷을 걸어 놓는다는 아름다운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구상나무는 힘찬 기상과 추위를 이기는 굳건한 힘을 지니고 있어 우리민족의 내유외강한 모습과 같으며 선녀처럼 아름답고 우아한 모습은 여왕의 품격을 나타내고 있다.

 

 

충효당(보물 제414호)은 류성룡의 종가다.

류성룡의 종손이 대대로 살고있다.

 

 

 

 

 

忠孝堂이란 현판은

眉叟 許穆(1595~1682)이 썼다.

 

 

만지송

 

  

永慕閣은 서애 류성룡의 유물전시관이다. 

안에는 <懲毖錄>(국보 제132호)과 그밖의 여러 문서들과,

류성룡이 생전에 썼던 갑주, 가죽신, 갓끈 등(보물 제460호)도 전시되고 있다.

 

 

 

 

 

 

 

  

 

■ 만송정숲(천연기념물 제473호)은 마을 서북쪽 끝에 있다.

원지산에서 부용대로 이어지는 경관과 마을 사이 공간이 허한 것을 비보하기 위한 수구막이로 솔숲을 조성했다고 한다.

북쪽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을 막아주며 防水災, 防沙의 기능을 한다.

류운룡이 지은 만송정은 1905년 대홍수로 유실되었다.

만송정이란 소나무 만 그루가 있는 숲속의 정자란 뜻이다.

 

 

萬松亭碑

옛날 이곳에 만송정이란 정자가 있었다.

정자는 1905년 홍수에 떠내려 가버렸다.

  

 

 

 

 

 

 

 

 

 

 

 

 

 

 

 

 

하회세계탈 박물관

 

 

 

 

 

 


 

소설 <서유기> 등장인물들의 가면

 

 

인도신화의 신들의 가면,

초록색 얼굴을 한 신이 파괴의 여신 칼리다.  

 

 

 

  

 

4. 부용대

 

■ 芙蓉臺는 하회마을에서 강을 건넌 곳에 있다.

일월산에서 뻗은 지맥에 이어져 있다.

‘부용’은 곧 연꽃이이다. ‘부용대’란 연꽃을 내려다보는 대란 뜻이다.

부용대에서 보면 화회마을은 물위로 떠오르는 한 송이 연꽃으로 보인다.

부용대는 양반문화를 펼치는 현장이다. 이곳이서 하회줄불놀이가 시작된다.

 

 

부용대 입구 화천서원은 문이 잠겼다. 껍데기만 보았다.

 

 

 

 

 

 

화천서원의 정문 由道門과 누각 地山樓가 보인다.

 

■ 화천서원은 부용대 동쪽 기슭에 있다.

정조 10년(1786) 文敬公 겸암 류운룡을 받들기 위해 지방 유림에서 사당 景德祠를 세웠다. 1802년 강당 崇敎堂을 짓고, 1822년 문루 地山樓를 지으면서 서원의 면모를 갖추었다. 본디 부용대 북쪽 언덕에 있었는데,

1934년과 1936년의 대홍수로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고종 5년(1869) 대원군이 내린 서원철폐령으로 강당과 살림집인 廚所만 남기고 헐리게 되어 한동안 화천서당으로 불려오다가 1994년 가을 다시 서원이 되었다.

 

 

화천서원/ 2010년 3월에 찍은 사진이다.

 

 

  

 

 

누각 앞에서 낙동강을 바라본다.

 

 

부용대로 올라간다. 

 

화천서원 옆에서 부용대로 오르는 길은 온 눈이 다져지고 얼어 빙판이다.

 

부용대에서 하회마을을 내려댜 본다.

 

 

 

 

 

 

 

 

 

 

 

 

 

 

 

글과 사진/ 달마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