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시집
겨울나무를 보며/ 박재삼
추연욱
2012. 12. 14. 23:03
겨울나무를 보며
박재삼
스물 안팎 때는
먼 수풀이 온통 산발을 하고
어지럽게 흔들어
갈피를 못잡는 그리움에 살았다.
숨가쁜 나무여 사랑이여.
이제 마흔 가까운
손등이 앙상한 때는
나무들도 전부
겨울 나무 그것이 되어
잎사귀들을 떨어 내고 부끄럼 없이
시원하게 벗을 것을 벗어 버렸다.
비로소 나는 탕에 들어 앉아
그것들이 나를 향해
손을 흔들며
기쁘게 다가오고 있는 것 같음을
부우연 노을 속 한 경치로써
조금씩 확인할 따름이다.
울음이 타는 가을 강
박재삼(1933~ 1997)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 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으러 눈물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 녘 울음이 타는 가을 강(江)을 보것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
소리 죽은 가을 강을 처음 보것네.
<사상계>, 1959년 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