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 나들이 2./ 선비문화 탐방로/ 미리 가보니- 2012년 11월 16일
함양 나들이 2./ 선비문화 탐방로/ 미리 가보니
7시 사상 서부시외버스 터미널에서 함양 가는 직행버스를 타서,
9시에 함양터미널에 내렸다. 차비 10,500원.
9시 15분 출발하는 안의행 직행을 타서,
35분에 안의에 도착했다. 차비는 2000원.
서상 가는 완행버스를 타고 봉전마을로 가야한다.
버스는 10시에 있다.
시간이 좀 있다.
오리숲을 바라보고,
광풍루
함양군 서하면 봉전마을 거연정휴게소, 10시 15분.
봉전초등학교 옛 교정.
이곳에 선비문화탐방관, 다볕자연학교가 있다.
그리고 함양의 선비문화탐방로의 시작이며 끝이기도 하다.
함양의 선비문화탐방로는 10㎞쯤 된다.
선비문화탐방로 1구간은
선비문화탐방관~ 군자정~ 동호정~ 호성마을~ 람천정~ 황암사~ 농월정에 이르는 길로 6㎞쯤 된다.'
'정자탐방로'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 길은 데크로드 · 농로 · 징검다리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선비문화탐방로 2구간은
농월정에서 월림마을~구로정~오리숲~광풍루에 이르는 4㎞의 길이다.
'선비탐방로'란 이름이 붙었다.
선비문화탐방로 1구간인 정자탐방로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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찻길을 건너 거연정으로 간다.
거연정은 섬 안에 있다.
* 거연정은 정자가 놓인 자리는 바닥을 고르지 않고,
방문을 뗄 수 있도록 하여 필요할 때, 마루를 넓게 쓸 수 있도록 하였다.들쑥날쑥한 바위 위에 자연스럽게 높낮이를 맞추어 팔각의 주춧돌을 놓아 누각을 세우고 추녀 네 귀에 활주를 세워 안정감 있게 보이도록 했다.
뒤쪽 가운데 한 칸짜리 방을 두었다.
※ 영남의 정자들은 계곡과 강변의 경승에 세운 것이 많고,
호남의 정자들은 삶의 근거지에서 멀지 않은 곳 곧 전원생활의 현장에 세운 것이 많다.
영남의 정자는 자연을 지배하고 경영하는 모습으로,호남의 정자는 자연과 일치하는 조화로움과 아늑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놀이문화, 곧 풍류룰 위한 정자와 생활문화 정자의 차이이다.
그 영남지방 정자의 전형적인 성격을 거연정에서 볼 수 있다.
군자정은 보수공사 중이다.
군자정에서 나와 봉전교를 건너,
본격적인 탐방길에 오른다. 10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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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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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에 동호정이 보인다.
동호정
* 동호정은 규모가 큰 정면 3칸 측면 2칸의 누각으로 노송에 둘러쌓여 있다.
1층 기둥은 나무의 울퉁불퉁한 멋을 자연스럽게 살렸고, 추녀 네 귀에 활주를 세웠다.
東湖 章萬里의 후손들이 동호를 추모하여 세웠다고 한다.
정자 앞의 암반에 ‘遮日岩, 琴笛岩, 詠歌臺’ 등 글씨가 새겨져 있다.
건물 안은 온갖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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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孔子聖蹟圖>도 있다.
<공자성적도>는 공자의 탄생부터 사후에 이르기까지 행적과 가르침을 표현한 그림 및 목판화를 말한다.
탄생, 배움, 관직생활, 제자양성 등으로 분류돼 있다.
조선시대에 제작된 3종만이 현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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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성마을, 11시 45분.
바위에 "李好雨 永慕洞"이라 쓰여있다.
경모정, 11시 50분.
람천정, 12시.
람천정 앞 너럭바위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직진하여 황암사로 가는 길은 이 강 물이 많아 건널 수 없을 때를 위해 임시로 낸 길이다.
물을 건너 가는 것보다 100m 더 멀다.
이 길이 더 좋아 보인다.
하여튼 나는 여기서 징검다리를 건너 황암사로 간다.
서하교, 12시 40분.
다리 건너기 전 왼쪽으로 황암사가 있다.
여기서 황석산청소년수련원, 황석산성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고,
다리를 건너 농월정으로 간다.
농월정에 다 왔다. 1시다.
농월정 집단시설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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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월교를 건너 옛 농월정터로 가보기로 한다.
배롱나무 2그루가 있는 이곳에 농월정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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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월정 - 달바위[月淵岩]라 부르는 넓은 너럭바위 전체를 바라볼 수 있는 자리에 정자를 세우고,
‘달을 희롱한다’는 뜻으로 弄月亭이라 이름지었다.
인조 때 관찰사와 예조참판을 지냈고, 조일전쟁 때 의병을 일으켰던 知足堂 朴明榑가 은퇴한 뒤 지은 정자이다.
그의 발자취가 오른쪽에 비스듬히 누운 바위에 ‘知足堂杖屨之所’라는 글로 남아 있다. ‘杖屨’는 지팡이와 신이라는 뜻으로 곧 ‘산보’를 뜻한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며, 처마에 활주를 세웠다. 넓은 2층 누각에 가운데 바람막이 한 칸짜리 작은 방을 두었다. 걸터앉거나 기댈 수 있도록 세 면에 계자난간을 돌렸다.
강 건넌 곳에서 바라본 농월정집단시설지구
선비문화탐방로 1구간
정자탐방로는 농월정에서 끝나고,
농월정에서부터 안의 광풍루까지 선비문화탐방로 제2구간
선비탐방로로 이어진다.
여기서 안의까지 4km가 조금 넘는다.
월림마을로 간다.
월림마을, 1시 45분.
안의면 월림리 보호수
나무의 나이 420살, 높이 2.6m, 둘레 6.9m
구로정, 2시.
오리숲에 들어왔다.
안의에도 거의 다 왔고.
광풍루가 보인다.
선정비들이 늘어 서있고.
광풍교, 2시 25분.
터미널은 바로 곁에 있다.
함양 가는 직행버스는 2시 50분에 있다.
함양까지 20분 걸렸다. 차비는 갈 때보다 100원 더 주었다.
학사루 느티나무와 상림에 가려고 길을 나섰다.
날씨 흐리고 곧 비가 올 것 같았다.
아쉬워도 학사루 느티나무를 보는 것으로 마쳐야겠다.
학사루 느티나무는 이렇게 완전히 벗었다.
그의 참 모습은 이렇다.
터미널로 돌아와 4시에 출발하는 직행버스를 탔다.
부산까지 2시간이 조금 더 걸렸다.
십년을 경영하여 초려삼간 지어내니,
나 한 간, 달 한 간, 淸風 한 간 맡겨 두고,
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 두고 보리라.
宋純(1493~1583)
옛날 선비들은
그윽한 계곡과 계류 주변 호젓한 강호에 터를 잡아 누정을 짓고 그곳에 은거하기를 즐겼다.
물 가까이 있으면서 먼 산을 바라볼 있는 곳,
그들은 여기서 옛 정신적 즐거움을 얻고, 심오한 대자연의 이치를 터득하고자 하였다.
누정은 선비들에게 있어서는 정신적 휴식과 재충전의 공간이며, 모임의 장소였다.
벗과 함께 정담을 나누다가 시흥이 일면 시를 읊조리며 풍월을 즐겼다.
그들은 자연에 회귀하여 물아일체의 경지에 이르고자 했다.
고려말의 문신 安軸(1287~1348)은 누정을 짓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적었다.
천하 물건이 형체가 있는 것은 모두 이치가 있으니, 크게는 산수, 작게는 주먹만한 돌, 한 치의 나무라도 그렇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이치를 보고 흥취를 느끼고 즐거워하는 것이니, 누대와 정자를 짓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형체가 기이한 것은 겉으로 나타난 것이나 눈으로 구경하게 되는 바이고, 이치는 미묘한 데에 숨어 있으므로 마음으로 찾게 되는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강릉도호부 누정조,
그들에게 山水는 단순한 산과 물이 아니고 총체적인 자연현상을 상징하는 것이다.
자연은 道의 본질이 내재된 것으로 지형적, 물질적 세계가 아니고 정신적 세계였다.
산수의 도리는 인간 수양의 방편으로 이해되었다.
함양의 선비문화탐방로는 10㎞쯤 된다.
선비문화탐방로 1구간인 '정자탐방로'는 선비문화탐방관~군자정~동호정~호성마을~람천정~황암사~농월정을 거치는 길로 6㎞쯤 이어진다. 데크로드 · 농로 · 징검다리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선비탐방로'란 이름이 붙은 2구간은 농월정에서 월림마을~구로정~오리숲~광풍루에 이르는 4㎞의 길이다.
■ 화림동 계곡의 정자들 - 함양군 서하면
안의에서 서하, 서상을 거쳐 육십령을 넘어 전라북도 장계, 진안, 전주로 가는 26번 국도를 따라, 길 오른쪽으로 花林洞(남천강 또는 남계천) 계곡이 흘러간다.
이 계곡은 골이 넓고, 물 흐름이 완만하며 풍부한 물줄기가 기암괴석 사이로 굽이굽이 돌면서 작은 소를 이루며, 너럭바위를 타고 유연하게 흘러서 경치가 좋은 곳이다.
* 농월정 - 달바위[月淵岩]라 부르는 넓은 너럭바위 전체를 바라볼 수 있는 자리에 정자를 세우고,
‘달을 희롱한다’는 뜻으로 弄月亭이라 이름지었다.
인조 때 관찰사와 예조참판을 지냈고, 조일전쟁 때 의병을 일으켰던 知足堂 朴明榑가 은퇴한 뒤 지은 정자이다.
그의 발자취가 오른쪽에 비스듬히 누운 바위에 ‘知足堂杖屨之所’라는 글로 남아 있다. ‘杖屨’는 지팡이와 신이라는 뜻으로 곧 ‘산보’를 뜻한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며, 처마에 활주를 세웠다. 넓은 2층 누각에 가운데 바람막이 한 칸짜리 작은 방을 두었다. 걸터앉거나 기댈 수 있도록 세 면에 계자난간을 돌렸다.
* 군자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누각으로,
성종 때 정여창이 찾아와 시를 읊었던 곳이라 하여 군자정이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전세걸이란 선비가 지었다고 한다.
현판에 朱夫子 君子亭詩'라는 명문이 있다.
이런 기막힌 내용이었으니 비로소 정자 이름을 ‘군자정‘이라고 진 의미를 알게 됐다.
정자 이름을 왜, ‘군자정’ 이라고 지었을까?
朱夫子는 朱子다. 중국 사람들이 공자를 공부자(孔夫子)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주자의 墨莊五詠 중에
군자정을 읊은 데서 취해 온 것이다.
현판 명문을 풀이하면 이렇다.
倚杖臨寒水 지팡이 의지한 채 한수에 임하여
披襟立晩風 옷깃 헤치며 해질녘 바람에 섰네
相逢數君子 서로 만난 여러 군자들
爲我說濂翁 나를 위해 염옹을 설명하네
염옹은 송나라 때 濂溪 주돈이 周敦 )를 말한다.
염계는 진흙에서 자라도 더럽혀지지 않는 蓮이야말로 군자의 기상과 닮았다고 읊은 愛蓮說을 지었다.
이래서 주자는 주렴계를 기려 군자정이라 이름하였고,
군자정을 지은 전세걸은 일두 정여창를 기려 정자를 짓고 ‘군자정’이라 한 것이다.
* 거연정은
정자가 놓인 자리는 바닥을 고르지 않고 들쑥날쑥한 바위 위에 자연스럽게 높낮이를 맞추어 팔각의 주춧돌을 놓아 누각을 세우고 추녀 네 귀에 활주를 세워 안정감 있게 보이도록 했다.
뒤쪽 가운데 한 칸짜리 방을 두었다. 방문을 뗄 수 있도록 하여 필요할 때, 마루를 넓게 쓸 수 있도록 하였다.
※ 영남의 정자들은 계곡과 강변의 경승에 세운 것이 많고,
호남의 정자들은 삶의 근거지에서 멀지 않은 곳 곧 전원생활의 현장에 세운 것이 많다.
영남의 정자는 자연을 지배하고 경영하는 모습으로,호남의 정자는 자연과 일치하는 조화로움과 아늑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놀이문화 정자와 생활문화 정자의 차이이다.
'화림동(花林洞)'이라고도 불리는 남계천 가에 자리한
居然亭으로, 영남 양반들의 풍류 문화를 간접적으로나마 접할 수 있는 곳이다.
영남 지방에 남아 있는 조선의 정자들은 호남 지방에 남아 있는 그것들과는 달리 말 그대로 풍류를 위한 정자로, 경치 좋고 물 맑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즉 호남 지방의 정자들이 너른 평야로 대표되는 곡창지대에 세워져 일반적인 삶과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 반면, 이곳 영남 지방의 정자들은 일상생활과는 떨어진 자연 속으로 파고든 모습을 취하고 있다.
특히 거연정의 경우에는 세워진 위치가 다소 독특하다. 계곡을 끼고 세워졌다는 점에서는 다른 정자들과 별반 차이가 없지만,
거연정은 일종의 '섬' 위에 세워진 정자이다. 즉 계곡 한쪽에서 거연정으로 오르기 위해서는 철로 만들어 다소 그 멋이 떨어지긴 하지만 하여튼 화림교(花林橋)라는 구름다리를 건너야 한다.
마치 현실 생활과는 뚝 떨어져 이 멋들어진 자연과 시상이나 즐기라는 듯이.
▲ 은둔의 사대부를 만나다 영남 지방의 정자들은 호남 지방의 그것들과는 달리 말 그대로 풍류를 위한 정자로, 경치 좋고 물 맑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남강은 함양군 서상면 남덕유산 자락에서 발원한다. 서상을 지나 서하면에 이르러 화림동계곡을 거쳐 안의면을 지나 지곡면 개평리를 지난다.
경호강은, 함양군 마천에서 고리봉에서 흘러온 물과 합하여한 산청군 생초면 상촌리에서 북쪽에서 오는 위천과 남계천이 합하여 생초면 어서리 외어교를 지나 남동쪽으로 꺾여 금서면과 산청면의 경계에 이르러 경호강이 된다. 계속 남동쪽으로 흘러 산청군 묵곡리와 범학리를 거쳐 단성면과 신안면의 경계를 지으며 남동쪽으로 흐르다가 단성면 성내리에 이르러서 양천을 합하여 진양군 대평면 중앙을 지나 진주시에 이르러 남강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