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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해사와 부속 암자들

추연욱 2012. 11. 2. 15:27

은해사와 부속 암자들

 

 

■ 은해사는 영천군 청통면 치일리 팔공산 동쪽 기슭에 있다.

신라 헌덕왕 3년(811) 寂忍 惠哲國師(785~861)가 해안평에 창건하여 해안사라 했다.

그뒤 普照 知訥(1158~1210)이 은해사 근처에 있는 거조사에서 신행결사를 도모한 이래 크게 주목을 받았다.

고려 원종 11년(1270) 弘眞국사 惠永이 중창했다. 혜영의 지도 아래 이 절은 선교양종의 총본산이 되었다.

이후 충렬왕 1년(1275) 元旵이 중건,

조선 중종 38년(1543)에 중수했다.

 

조선 명종 1년(1546) 天敎가 지금의 장소로 옮겨 새로 절을 지었다.

그때 법당과 비석을 건립하여 인종의 胎室을 봉안하였다.

 

팔공산 중의 명당이라는 백지사 뒷 봉우리에 태실을 안치하자 백지사는 태실 수호사찰의 소임을 맡았다.

인종이 세자로 책봉된 것은 중종 15년(1520)이고 왕위에 오른 것은 1544년이다. 인종은 즉위 8개월 만에 죽는다.

 

그러자 문정왕후가 낳은 이복동생 명종이 즉위(1545)하고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되었다.

문정왕후의 불교진흥책으로 은해사도 사세를 늘릴 수 있었을 것이다. 이를 계기로 은해사 측에서는 백지사에 만족하지 않고 인종의 태실 수호와 세자의 복을 기원한다는 명분으로 왕실의 원찰을 크게 지을 수 있었다.

이 무렵 은해사라 이름을 바꾼 듯하다.

중종 25년(1530)에 편찬한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2권 佛宇 조에 은해사란 이름이 처음 나타난다.

 

조일전쟁을 겪으면서도 승군들이 절을 잘 지켜 큰 피해는 입지 않았던 것 같다.

효종 2년(1651) 전각들에 단청을 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1563년 불이 나서 이듬해 중건했고, 선조 22년(1589) 法英대사가 법당의 사방에 새로 건물을 세우고 단청을 하는 등 일대불사를 일으킨다. 불교가 탄압받던 시대 은해사 측에서는 인종의 태실 수호사찰임을 내세워 확장을 꾀하였을 것이다.

또 파계사를 원찰로 하는 영조가 왕자시절 은해사를 잘 수호하라는 完文(증명, 허가, 명령 등 처분에 관해 발급한 문서다. 관청의 잡역에 승려를 동원하지 않고 양반과 관아의 침탈이 미치지 못하게 한다 따위의 내용이 적혀있다)을 지어 보낸 적이 있다.

영조가 등극한 후 어제완문이라 하여 이 절을 수호하는데 절대적인 위력을 발휘하게 된다.

 

숙종 38년(1712)에는 이 절을 종친부에 귀속시켰다.

영 · 정조시대에는 당대 화엄교학의 대가 影波 聖奎(1728~1812)가 이 절에 머물면서 화엄학을 크게 펼쳤다.

 

철종 13년(1862) 混虛 智照가 지은 <은해사중건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헌종 13년(1847) 큰 불이 나서 극락전을 제외한 1천 여간 건물이 모두 불탔다. 인종의 태실을 수호하는 사찰이며, 영조의 완문을 보관하고 있는 사찰이므로 당시 영천 군수 김기철이 솔선하여 300꿰미의 돈을 박봉에서 털어내어 시주하는 것을 비롯하여 대구 감영과 서울 왕실의 시주가 답지하여 수만 냥의 재원을 확보하여 3년의 불사 끝에 헌종 15년(1849)에 중창불사를 마무리 했다.

이때 지은 건물로는 대웅전, 향실, 고간 심검당, 설선당, 청풍료. 보화루, 옹호문, 안양정, 동별당, 만월당, 향적각 등인데,

대웅전, 보화루, 불광의 삼대 편액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라서 마치 화엄누각과 같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 4대 부자 절의 하나로 10만 석을 받는다고 하였다.

이런 능력으로 승속을 가리지 않고 많은 인재를 길러내었다. 서구식 교육에 눈을 떠 현재 능인학교의 전신인 오산학교를 세워 인재를 양성하였다. 절 서편 극락전 뒤에 학생들의 기숙사를 지어놓았다고 한다.

토지개혁 때 대부분 소작인들에게 나누어주고, 한국전쟁 때까지도 만 석 추수를 받았다 한다. 그러다가 1950년대 말 청담스님이 사기꾼들의 속임수에 걸려 모든 절 제산이 어느 재벌의 손으로 넘어갔다. 그후 전 총무원장 의현이 나서서 1967년부터 소송을 걸어 빼앗긴 3000정보 중 1200정로를 되찾았다고 한다.

 

현존 건물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설선당, 심검당, 종루, 보화루, 독성각, 승당, 요사채, 객실 등이 있다.

현재 조계종 10교구 본사이다.

부속 암자는 백련암, 서운암, 百興庵, 雲浮庵, 居祖암, 寄寄庵, 妙峰庵, 中巖巖 등이 9개나 있다.

 

① 근래에 지은 ‘八公山 銀海寺’란 현판이 걸린 커다란 건물 기둥 사이를 지나 숲 길을 걸으면,

② 왼 쪽에 부도와 비석들을 모아 둔 곳이 있고,

③ ‘極樂橋’란 다리를 건너면,

④ ‘普華樓’란 현판이 붙은 건물 밑을 지나면, 왼 쪽은 범종각.

⑤ 맞은편에 대웅전. 그 앞에는 당간 지주.

⑥ 대웅전(벽에는 심우도) 오른 쪽이 심검당.

⑦ 심검당 뒤에 지장전.

 

* 사천왕문에 추사 김정희가 쓴 ‘은해사’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고종 16년(1879) 영천군수 이학래가 쓴 <은해사연혁변>에 “문액의 은해사와 불당의 대웅전, 종각의 보화루가 모두 추사 金侍郞의 글씨이고, 노전을 一爐香閣이라 했는데, 역시 추사의 예서체이다.”고 했다.

 

추사 김정희(1786~1856)는 안동 김씨와 세도 다툼에 패하여 1840년 54세에 제주도로 유배되어 9년 세월을 보내고 1848년 12월 귀양에서 풀려나 서울로 돌아온다. 그때가 바로 은해사 중창불사가 마무리되어 현판을 써 준 것으로 생각된다.

추사는 유배 중에 불교에 깊이 귀의하게 되었고, 진외고조부인 영조대왕의 어제 완문을 보관하고 있기에 써 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851년 친구 영의정 권돈인 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는 사이 2년 동안의 서울 생활에 쓴 것이다.

 

 

이 현판에 대하여 최완수는 이렇게 말했다.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어 모두가 허술한듯한데 어디에서도 빈틈을 찾을 수 없다. 둥글둥글 원만한 필획이건만 마치 철근을 구부려 놓은 듯한 힘이 있고 뭉툭뭉툭 아무렇게나 붓을 대고 뗀 것 같은데 起收의 법칙에서 벗어난 곳이 없다. 얼핏 결구에 무관심한 듯하지만 필획의 태세 변화와 공간 배분이 그렇게 절묘할 수가 없다.” 334쪽

 

문 안에는 일섭스님이 그린 사천왕탱이 좌우 두 폭씩 걸려있다. 그 내부 문미에 옹호문이란 편액이 걸려있는데 동국진체 풍의 글씨이다.

 

* 보화루의 현판과 佛光이란 현판도 추사가 썼다.

 

* 대웅전 현판도 추사가 쓴 것이다.

안에는 석가모니불을 독존으로 모셨다. 본디 극락전에 모셨던 아미타불인 듯하다.

선조때 중창할 때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1847년 대화재 때 극락전은 불길을 피했다 하는 것으로 보아 화재 때 협시보살은 소실되었을 것이다.

목불로 다소 밋밋하고 측면이 지나치게 얇다.

후불탱화인 극락구품회탱은 1750년 成淸과 玉蓮이 그렸다. 아미타삼존으로 극락전에 모셔져 있던 것이다. 극락전에 모셔져 있던 불상과 탱화를 대웅전을 중창하고 우선 옮겨와 모셨던 것으로 추측된다.

서쪽 벽에 삼장탱이 걸려있는데, 화기에 건륭 20년 곧 영조 31년(1755)에 조성했다고 했다.

 

 

 

 

* 청풍료는 태봉의 수호각이다.

 

* 은해사 성보박물관은 은해사 본말사 및 산내암자에 소장돼 있던 중요한 성보문화재의 도난과 훼손을 방지하고 체계적인 보존관리와 전시를 위해 1996년 12월에 착공하여 2009년 5월 2일 개관했다. 본말사 문화재 및 성보 총 205건 540점을 교환ㆍ전시할 예정이다.

 

영천은해사순치3년명 금고 및 금고거(보물 제1604호)와 대웅전 후불탱(경북도유형문화재 제342호) 및 삼장탱, 고려 때 조성된 소조나한상과 조선시대 목조여래좌상 등의 불교조각과 신중탱 복장유물을 비롯해 아미타삼존도, 신중도, 목각산신도 등 불화가 전시되어있다. 그 밖에 편액 등 은해사 관련 유물과 역대 조사의 진영을 전시하고 있다.   

 

■ 백흥암은 신라 경문왕 1년(861) 적인 혜철이 착공하여 873년 완공하였다.  

절 주변에 잣나무가 많아 栢旨寺라 했다 한다. 그 뒤 조선 전기까지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

 

조선 중종 15년(1520) 암자 뒤에 있는 태실봉은 뒷날 인종이 되는 왕세자의 태가 봉안된다. 이로서 백지사는 태실수호사찰의 소임을 맡아 ‘莫重守護之所’로 지정되어 국가의 보호를 받게된다.

 

조선 명종 1년(1546)에 天敎和尙이 백흥암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은해사에서 팔공산에 이르는 산세가 용이 등천하는 기세이므로 등 너머 운부암에서 상서로운 구름이 더욱 많이 일어나 용의 승천을 돕도록 한다는 뜻에서 그렇게 이름지었다고 한다.

효종 2년(1651)에 중건했으며, 숙종 3년(1677)에 중수했다.

영조 6년(1730) 보화루를 중건했고, 철종 9년(1858) 영산전을 중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정조 22년 완문을 하사받아 관의 침탈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태실의 수호와 완문 수장으로 백흥암은 사세를 유지한다.

현재 비구니의 수도 도량으로 백흥암은 평소 일반에게 공개하지 않고, 사월초파일 하루만 출입이 허용된다.

 

현존 유물로 극락전 · 심검당 · 보화루 · 진영각이 네모진 공간을 이루고 있다.

심검당과 진영각의 처마가 극락전의 귀기둥 안까지 들어와 아늑한 공간을 이루고있다.

 

백흥암 극락전(보물 제790호)

 

 

* 극락전(보물 제790호)은 1643년 중건된 건물이다.

극락전 현판 방서에 “聖上二十二年乙丑六月日 書”라 쓴 것으로 보아 영조 21년(1745)에 쓴 것이다.

아미타삼존상은 모두 목불이다. 극락전 현판과 같은 시기인 영조 21년에 조성된 듯하다.

 

* 극락전 수미단(보물 제486호)은 높이 125cm, 폭 413cm 상하대 각 1단 중대 3단의 5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대와 하대에 갖가지 짐승과 꽃과 새들이 새겨져 있다. 1968년 극락전보다 먼저 보물로 지정되었다.

불단은 부처님을 모시기 위해 한 단계 높게 만든다. 그 모양은 우주의 중심에 있는 수미산 모양을 취한다. 그래서 불단을 수미단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수미단은 하대 중대 상대로 구분한다. 중대는 수미산 중턱 모양 좁아지고 하대와 상대는 층급을 지닌다. 상대에는 연꽃무늬를 새기는데 아래에는 복련 위에는 앙련의 형식으로 배치하고 중대에는 초화문 등의 화려한 장식과 함께 사슴 봉황 게 거북 등 길상을 상징하는 동불의 그림이나 조각을 배치한다. 때로는 격자문으로 배치한 위에 연꽃문양을 놓기도 하고 물결문 칠보문 등으로 장식하기도 한다.

이 수미단 위에 다시 불상 대좌로 수미좌를 설치하여 그 위에 불상을 봉안한다.

 

 

 

 

 

 

 

* 1762년에 제작된 감로탱은 몇 년 전 도난당했다. 지금 복사본을 걸어두었다.

 

* 진영각의 편액 ‘十笏方丈’과 주련은 추사 김정희가 썼다.

'十笏’이란 홀 열 개를 이어놓은 방의 길이, 곧 사방 1丈(10尺)되는 작은 방을 뜻한다.

산중의 어른인 방장이나 그가 쓰는 방을 가리킨다.

 

 

 

진영각 주련에,

 

我觀維摩方丈室 유마거사의 방을 보니

能受九百萬菩薩 능히 구백만 보살을 받을 수 있겠네.

三萬二天獅子座 삼만 이천 사자좌를

皆悉容受不迫迮 모두 들이고도 비좁지 않아

又能分布一鉢飯 한 발우 밥을 나누어도

饜飽十方無量衆 무량 대중 배 불리리라.

 

이 글은 송나라 문인 蘇軾(1037~1101)의 <石恪畵維摩頌>이라는 글 중 6구절을 딴 것이다. 그 출전은 <維摩詰所說經>이다. 유마힐 거사는 부처님 당시 재가신도인데, 그는 병을 핑계로 문수보살, 가섭존자 등 당시 불제자들을 문병을 유도하여 사방 1장되는 자신의 방으로 불러들여 진리에 대해 토론을 벌인다. 이 자리에 무수한 보살과 천신과 불제자들이 동참하여 900만 보살이 들어서고 3만 2천 앉을 자리를 마련하고도 오히려 자리가 넉넉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 남쪽 끝 방에 화엄실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방서에 “影波沙門手額雲浮同題 영파사문이 운부에 손수 써서 걸고 함께 글제를 내다”라 썼다. 

안에 이 절을 거쳐 간 24인의 큰스님들의 영정이 보관되어 있다. 

 

* 보화루 이층 누각에 걸린 현판 보화루는 추사가 썼다.

그는 철종 13년(1862)의 임술년 진주 농민항쟁 때 按覈使로 임명되어 사건의 진상조사와 수습을 맡아 경상도에 온 적이 있다. 이곳의 현판들은 이 무렵에 썼을 것이다. 박규수는 연암 박지원의 손자이며, 김옥균 ․ 유길준 ․ 박영효 ․ 김윤식 등 개화파를 길러낸 개화사상가이다.

瓛齋 朴珪壽(1807~1877)가 쓴 ‘百興蘭若’라는 커다란 현판이 걸려있다.

 

보화루 안 현판에 “八峰大師眞讚”은 말미에 瓛齋居士朴珪壽라는 款識가 있지만 환재의 글씨는 아니라 한다. 아마 환재의 글씨를 받아 베낀 것으로 보인다.

 

백흥암 보화루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쓴 현판 보화루



보화루 안에 ‘百興蘭若’이라 쓴 현판이 보인다.

瓛齋 朴珪壽(1807~1877)가 썼다.

 

극락전 쪽에서 바라보면 추사가 쓴 "山海崇心"이라 쓴 현판도 있다.

 

'산은 높고 바다는 깊다.'고.

그거 누가 모르나?

그게 부처님의 높고 깊은 마음이라면?

  

 

山海崇心- 心海慧自在通如來

아난이 부처님의 설법을 가장 많이 들어 불교경전을 받들고 지혜가 깊고 높아 통달한 까닭에 그 과보로 얻은 명호이다.아난의 지혜는 산을 감추고 바다를 걷두어들일 만큼 신통함이 넓고 크며, 거두고 폄이 자재하여 장차 성불하게 되면 불법중에 왕이되기 때문에 이같이 이름붙여졌다. 

 

* 중종 26년(1531)에 간행된 법화경판이 있다.

 

■ 雲浮庵은 진덕여왕 5년(631) 의상대사가 창건하였다고 하고, 구산선문의 하나인 실상산문을 연 洪陟國師가 창건했다는 말도 있어 정확한 것을 알 수 없다. 절을 처음 지을 때 상서로운 구름이 하늘에 떴다 하여 운부사라고 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운부사라 기록되어 있어 16세기 초까지는 운부사라 불렀음을 알 수 있다. 본디 독립된 큰 절이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은해사가 태실의 수호사찰로 규모가 커지면서 그 산내 암자로 사격이 낮아진 듯하다.

그뒤 관음기도 도량으로 전승되어 오다가 조선 철종 11년(1860) 화재로 불타자 應虛와 枕雲이 중건했고, 1900년 보화루를 신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본전인 원통전을 중심으로, 현재 요사채로 쓰이고 있는 좌우의 심검당과 禹義堂, 그리고 정면의 누각인 寶華樓가 있다. 누각이 보화루인 것은 본절인 은해사나 백흥암과 같다. 이는 화엄경을 보배로 여긴다는 뜻으로 화엄과 관계있는 절인 듯하다. 보화루 현판은 海觀 劉漢翼(1844~1923)이 고종 때인 1900년 7월 상순에 썼다.

운부암에는 환재 박규수(1807~1877)의 글씨 두점이 있다. 원통전 편액과 원통전 동쪽 요사채에 걸려있는 ‘雲浮蘭若’라는 글씨이다. 원통전 편액은 단아정중하고, 심검당의 그것은 부드럽고 넉넉하며 무게가 있다. 두 편액에 ‘癸亥仲冬’이란 傍書가 있으니 철종 14년(1863)년이다.

 

* 원통전 관세음보살좌상(보물 제514호)은 청동불상으로 높이가 102cm이다. 몸에 비하여 머리가 크다. 등이 약간 굽고 얼굴이 앞으로 나왔다. 상체에 비하여 하체는 마르고 빈약하다. 양쪽 볼과 턱은 살이 찐 듯 두툼하며, 가늘고 긴 눈은 밑을 향하여 내리뜨고 있다. 눈썹과 이어진 콧등의 선이 두툼한 볼과 대조를 이룬다. 얼굴에 비하여 입은 불교회화처럼 작다. 표정은 평화롭고 자비로워 보인다.

보관에는 화불이 있는 정면의 것을 위시하여 수많은 화염장식이 있고, 외부에 용, 봉황, 꽃 등의 조각이 붙어있다. 보관은 화려하긴 하지만 정교하거나 섬세하지는 않다. 몸에도 가슴, 양쪽 어깨, 배, 무릎에 온통 영락 장식이 요란하고 번잡하게 드리워져 어지럽다. 이 장식들은 생동감도 없고 입체적이지도 못하다. 이러한 장식은 고려 후기 원나라의 영향을 받아 유행한 라마 계통의 불상에서 전해진 것으로 그 잔재가 여기에 남아있는 것으로 보인다.

* 원통전 서쪽 우의당에는 영파 성규대사의 진영을 비롯하여 다른 여러 진영이 모셔져 있다고 한다.

 

■ 중암암은 은해사 일주문을 지나 이정표를 따라 4km 지점, 약 1시간 20분 정도 좁고 험한 길을 올라야 한다.

흥덕왕 9년(834) 심지가 창건했다. 그 뒤 수도승들의 수도처로 이용되었다.

조선 순조 34년(1834) 宇一과 有瞱이 중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현존 건물로는 법당과 요사채, 객사가 있다.

소운당은 승려들의 공방이다. 소운당을 지나면 곧 돌기둥 두 개가 서로 기댄 돌구멍이 나타나고 암자의 처마 끝이 살짝 보인다.

삼층석탑은 창건 당시 건립된 것이라 한다.

석등은 장방형으로 장식이나 기교를 가하지 않았다.

 

“우리 절은 법당 문이 어찌나 큰지 한 번 열고 닫으면 그 문지도리에서 쇳가루가 한 말 서 되나 떨어진다.”고 통도사의 한 스님이 은근히 절의 규모를 자랑했다. 해인사에서 온 스님은 “우리 해인사는 스님이 얼마나 많은지 가마솥이 하도 커서 동짓날 팥죽을 쑬때 배를 띄워야만 저을 수 있다.”며 자랑했다. 두 스님의 자랑을 듣고 있던 중암암 스님은 “우리 절 뒷간은 그 깊이가 어찌나 깊던지 정월 초하룻날 볼일을 보면 섣달 그믐날이라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고 자랑했다.

 

절 주변에는 三印巖, 건들바위, 장군수 등이 있는데,

건들바위에는 옛날 한 승려가 참선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큰 소리가 나서 밖으로 나가보니 큰 바위가 암자로 굴러 떨어지려 하므로 급히 법당에 들어가 기도를 드리자 바위가 떠올라 훨씬 뒤 안전한 곳으로 옮겨 앉았다는 전설이 있다.

장군수는 김유신(595~673)이 17세 때 이곳에서 수련하면서 마셨다고 한다.

 

 

 

삼인암 만년송 

 

 

 

소운당과 건들바위 

 

 

■ 기기암

신라 헌덕왕 8년(816) 正秀가 창건했다. 조선 명종 1년 箕城 快이 중건하여 安興寺라 했으며 당시 60명의 승려들이 살았다고 한다. 그뒤 순조 23년(1823)에 중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 묘봉암

신라 흥덕왕 8년(833) 심지가 창건했다. 그 뒤 관음기도와 수행처로 전승되어 왔다.

조선 성종 16년(1485) 竹淸과 義贊이 중창했고, 정조 4년(1780) 惠玉과 瑞澄이 중수했다.

현존 건물로는 원통전과 요사채, 산령각, 염불당 등이 있다.

 

* 원통전은 정사각형에 가까운 모양으로 매우 높다. 내부에 큰 돌이 뻗어있어 그 아래 관세음보살을 모시고 왼쪽 위에 2층을 만들어 석가모니불을 봉안했다. 

 

■ 거조암은 영천시 청통면 신원리 팔공산 동쪽 기슭에 있다.

신라 효소왕 2년(693) 원효가 창건했다는 설과 경덕왕 때(742~765) 왕명으로 창건했다는 설이 있다. 원효는 신문왕 6년(686)에 입적하였으므로 원효가 창건했다는 말은 틀렸다. 창건할 때 이름은 居祖寺였다.

 

고려 명종 18년(1188) 봄 보조국사 지눌(1158~1210)이 당시 거조사 주지였던 得才禪伯의 청에 따라 이곳 거조사에 왔다. 이에 앞서 명종 12년(1182) 개경 普濟寺에 있을 때, 개최된 談禪法會에 동참했던 승려 10여 명과 “세속의 모든 명리를 버리고 산림에 은거하여 定과 慧에 전념하는 길”을 가자는 結社를 발기하고 함께 盟文을 지어 후일을 기약했다.

1190년 뜻을 같이 한 사람들을 거조사에 모아 보제사에서 한 약속대로 정혜결사를 결성하고 <勸修定慧結社文>을 반포하여 본격적인 운동에 들어간다. 이 글의 취지는 당시 불교계가 자신의 본분보다는 정치와 밀착하여 세속의 명리를 탐하고, 자파의 이익만을 구해 교종과 선종의 대립상이 심한 것을 개탄하고, 이를 혁신하기 위해 결사를 만든다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敎가 되고, 도사께서 마음으로 전한 것은 禪”이라는 선교일원론을 통해 한국 불교사에 큰 획을 그었다.

뒤에 송광사로 옮겨 정혜결사(修禪社)라는 신앙공동체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조계종의 시발점이다.

 

수행자가 늘어나자 거조사는 좁아 모여드는 사람들을 수용하기 어렵게 되어, 보조국사는 1197년 결사 동지들과 함께 송광산 吉祥寺(지금의 송광사)로 가는 도중 지리산 상무주암으로 들어가 3년 동안 수행하다가 1200년 定慧結社를 송광산 정혜사(송광사)로 옮겼다.

 

정혜결사는 당초 선종일각의 자각에서 시작된 운동이었다. 그러나 내외에 미친 영향은 매우 컸다. 정혜결사의 영향으로 천태종의 了世(1163~1245)가 1232년 강진 만덕산 백련사에서 白蓮結社를 결성하여 고려 후기에는 이 두 결사가 불교계를 주도한다. 이후 지눌의 선사상은 조선조를 거쳐 오늘날까지 그 영향력을 발하고 있다.

 

충렬왕 24년(1298) 정월 元旵이 밤중에 樂西라는 도인을 만나 아미타불 本心微妙眞言과 극락왕생 懺法을 전수받았다 하여 기도도량으로 크게 부각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거조사라 기록되어 있다. 은해사의 사세가 커지자 산내의 다른 암자처럼 암자로 불렸을 것이다. 조선 정조 23년(1799)에 편찬된 <梵宇攷>에 이미 폐사되었다고 했다. 그뒤 연혁은 알려진 것이 없다. 

현존 건물로는 영산전과 영산루, 요사채 2동이 있다.

 

* 영산전(국보 제14호)은 해체 수리하는 과정에 “洪武 8년에 건립”했다는 먹글씨가 나왔다.  

홍무 8년은 고려 우왕 원년인 1375년이다. 이로써 고려시대 건물임이 확실해졌다.

막돌허튼층 쌓기로 한 기단 위에 정면 7칸, 측면 3칸의 가로로 기다란 건물이다. 가로 세로 칸 수의 비례는 7 : 3이지만 길이는 가로 30m, 세로 10m로 3 : 1이다. 덤벙주초 위에 약간의 배흘림이 있는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단순 간결한 공포를 짜올렸다. 공포는 기둥머리에 2개의 헛첨차를 겹쳐 내밀고, 그 위에 소로를 얹고 살미첨차를 얹어 외목도리를 받치게 했다. 제공의 앞부리는 초각하여 날카롭게 했다. 이런 점은 백제계 고려건축에서 나타나는 모습이다. 그런 의미에서 수덕사 대웅전 양식을 계승한 건축물이다. 그위에 맞배지붕을 올렸다.

 

정면 7칸 중 어칸은 약간 넓고 나머지 칸은 너비가 모두 같다. 어칸에 삼분합 출입문을 달았고, 좌우 양쪽 두칸씩은 붙박이 살창을 냈다. 붙박이 살창은 양쪽 측면에 있다.

천장은 서까래가 그대로 들어나는 연등천장이다.

 

이 건물에는 단청도 없다. 처음부터 단청이 없었다. 이런 집을 백골집이라 한다.

단청이 없는 점, 긴 장방형 건물에다가 벽면에 살창을 낸 것 등으로 보아 본디 법당이 아니고 경전을 보관하는 판고로 사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어느때 알 수 없는 이유로 법당으로 사용하게 되었을 것이다.

 

거조암 영산루 2009년 10월 18일.

 

2012년 9월 15일.

 

 

 

 

* 거조암 삼층석탑(경상묵도 문화재 자료 제104호)은 높이 3.15m이다.

기단부의 면석 일부와 지대석은 후대에 보수한 것이다.

상층기단 면석과 각층 몸돌에는 모서리기둥이 새겨져 있다. 몸돌과 지붕돌은 모두 별석으로 되어있고, 상륜부에는 노반이 남아있다.

기단에 버팀기둥 1개를 새긴 점, 덮개돌 윗면이 경사진 점, 추녀가 두꺼운 점 등은 고려시대 석탑의 특징이다. 이 탑은 고려시대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2009년 10월 18일 사진


2012년 9월 15일 사진


영산전

 

 

 

 

영산전 안에는 청화화상이 부처님의 신통력을 빌어 앞산의 암석을 채취하여 조성했다는 석가삼존불과 오백나한상이 있다.

영산전은 영축산의 준말로 부처님이 설법했던 영산 불국을 상징한다. 영축산은 부처님이 <법화경>을 설한 곳으로, 불교 성지를 영산전을 통해 현현시킨 것이며, 이곳을 참배함으로써 사바세계의 불국토인 영산회상에 참배하는 것이 된다. 이곳에는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좌우에 갈라보살과 미륵보살을 협시로, 후불탱화로 영산회상도를 봉안하여 영축산에서의 <법화경> 설법상을 묘사하며 그 주위에 팔상도를 봉안한다. 그래서 팔상전이라고도 한다.

오백나한은 羅漢의 경지에 든 500명의 성인의 무리 또는, 佛 入滅 후 제1차 경전 결집 때 모인 가섭존자를 비롯한 500명의 성인들이 여기에 포함된다.

 

 

 

* 영산탱은 화기에 “건륭 50년 병오 9월 日 新畵成”이란 명문이 있다.

건륭 50년은 정조 9년(1785)이고 병오년은 1786년이다. 시대에 착오가 있었는 듯하다.

영산탱은 尙彦이란 사람이 그렸다.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제자 4명과 천왕 2명만 그려 영산회상의 모습을 간략하게 압축하였다. 조선시대 다른 불화들과 달리 붉은 바탕에 호분으로 선묘하고 다른 색은 극히 제한적으로 사용하였다. 바탕색으로 모든 색을 대신하여 붉은색이 화폭에 가득하다. 그러면서도 색깔은 침착하여 전아한 기품을 보이고 있다. 영산전이 가진 단순함에 맞추어 이처럼 단조로운 구도와 색상을 택했을 것이다.

 

* 나한상은 모두 526명이다. 그래서 이 절은 오백나한절이란 별명이 붙었고, 오백나한 기도 도량으로 유명하다.

조성한 연대는 영산전을 지은 고려 말기일 것으로 보고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화강암을 깎아 만들어 호분을 입히고 얼굴과 머리에 칠을 하였다. 나한들은 각기 앞에 명찰이 있는데, 운부암의 영파스님이 이름을 지어 적었다고 한다. 온갖 모습에 온갖 표정이 나타나 마치 인간의 삶의 모습과 희노애락의 감정을 표현한 것 같다. 법계도를 따라 봉안된 나한상은 하나하나의 모양이 특이하여 영험이 있다고 한다.

 

 

 

 

 

산신각


2009년 10월 17일

 

2004년 2월 27일

 

 

선본사 주차장

 

 

일주문에서 은해사로 가는길

 

 

산문을 들어서자 이런 설명이 붙어있다.

"은해사 일주문을 지나 보화루까지의 울창한 숲길을 금포정이라 하는데,

기록에 의하면 1714년 조선시대 숙종 임금 때에 일주문 일대의 땅을 메입하여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

소나무숲을 조성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약 300년생의 높이 10미터의 송림이 2km정도 울창한 이곳에는 일체의 생명을 살생하지 아니하였다 하여

禁捕町이라고 한다.

또한 2007년에는 과거의 식수를 기리기 위해 금강송 1080주를 경내지에 식재하고,

2008년에도 1080주를 금포정 경내지 곳곳에 식재하였다."

 

 

 

사랑나무(연리목)

 

 

부도밭

 

 

大小下馬碑 

은해교를 건너면 초월적인 세계로 들어간다.

사바세계에서 높은 사람, 낮은 사람, 부자 사람, 가난한 사람, 잘 난 사람, 못난 사람,

여기서는 아무 의미 없다.

 

 

보화루

금강문을 겸하고 있다.

 

 

 

 

 

추사  김정희가 쓴 대웅전 현판 

 

현판은 성보박물관에 있을까?

박물관은 잠겨있다.

 

"보화루"란 현판도 추사가 쓴 것인데,

배낀 듯하다.

 

 

 

중암암삼층석탑은 절에서 조금 올라간 능선에 있다.

 

 

 

 

갓바위부처님

문화재청 공식 명칭은 관봉석조여래좌상(보물 제431호)이다.

이곳은 경산시 와촌면 대한리다. 팔공산 갓바위 해발 850m지점에 있다.

 

 

 

  

 

불상 높이 4.15m, 대좌를 포함한 전체 높이는 5.6m에 이른다.

소발의 머리에 큼직한 육계가 솟았고, 그 위에 지름 180cm, 두께 15cm의 판석이 올려져 있다. 부처님이 갓을 쓴 것과 같은 모습이다. 갓바위부처님, 이 부처님의 자리 갓바위[冠峰], 모두 여기서 나왔을 것이다.

이 갓은 처음 만들 때부터 올려져 있었던 것은 아닌 듯하고, 아마 고려 때 이렇게 했을 것이다. 고려 때 만든 큰 석불들에 이런 모습들이 많기에 그런 추정이 가능하다.

광배는 처음부터 없었다. 불상을 두르고 있는 큰 바위가 광배보다 불상과 잘 어울린다.

 

눈꼬리는 길게 올라갔고, 코는 반듯하다. 콧방울에서 양쪽 입 언저리로 여덟팔자를 그리며 깊게 주름살이 패여있다. 볼과 턱은 두툼하여 굵고 짧은 목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한층 더 근엄하며 엄격한 모습이다.

백호 또한 구슬을 박은 것이 아니고 도드라지게 새겨 엄격한 모습을 돋보이게 한다.

 

이 부처님에는 미소도, 자비로움도 보이지 않는다. 얼굴은 굳었고, 부드러움도 긴장감도 보이지 않는다. 여느 부처님과 달리 엄숙한 父性을 강조한다.

그런 점에서 신라 불상의 전성기를 지난 9세기의 조성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불상의 관리를 맡고있는 선본사의 사적에는 신라 선덕여왕 7년(638년)에 원광법사의 제자 義玄이 돌아가신 어머니를 위해 조성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이 말은 받아드릴 수 없다.

 

약사여래불인 것 같다.

분명하지는 않아도 왼손에 약합같은 것이 있다.

사람들은 그가 어느 부처님인지는 별로 관심이 없다. 대부분 사람들들은 미륵불로 보는 것 같다.

 

팔공산은 우리나라 약사신앙의 중심이다. 동화사 입구 마여래좌상, 동봉 석조약사여래좌상, 비로봉 마애약사여래 입상, 굴불사 석조약사여래입상, 이 관봉약사여래좌상, 그리고 1992년에 조성된 동화사 통일약사대불 등이 있다.

 

 

동봉 석조약사여래좌상

 

동화사 통일약사대불

1992년 11월 27일 점안식,

대선 전에 점안식이 베풀어질 때 대통령 후보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크게 보도되기도 했다.

전북 익산군 야산의 화강암 원석 2천t을 깎아 만든 것으로 불상 높이만 17m에 주변시설 설치비용까지 포함한 총예산이 1백50억원에 이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규모 때문에 첫눈에 그만 압도되고 만다. 이 부처도 약사불로 왼손에 약병을 들고 있다.

겨레의 흐트러진 마음을 모아 분단의 병을 치유하고 민족자존의 시대를 열어가자는 것이 불상 조성의 취지라고 동화사쪽은 밝히고 있지만, 이에 대한 비판적 시선도 적지 않았다.

 

 

 

약사신앙과 약사여래불

 

약사여래불은 동방 유리광세계에 사는 부처님이다.

정식 미름은 약사유리광여래다. 한자 문화권에서는 大醫王佛이로도 부른다. 그는 병의 고통에 시달리는 중생들을 구제하는 부처다. 조형예술로 표현될 때는 촉지항마인은 갖춘 왼손바닥에 약합을 든 모습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또 중생의 두려움을 없애주고, 소원을 들어준다는 뜻이 담긴 여원시무외인을 갖추는 경우도 있다.

나아가 개인의 육체적 정신적 병만이 아니라 자연으로부터 생기는 재앙과 고통, 사회적 병리현상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부처님이기도 하다.

 

<삼국유사>, 제5권 密本催邪조에, 선덕여왕 때 밀본법사가 <약사경>을 읽어 와의 병을 거쳤다는 기록이 있으며.

<삼국유사> 제3권 榻床에는 경덕왕 14년(755년)에,

구리 30만 7,600근으로 약사여래상을 조성하여 분황사에 모셨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 보아 약사신앙은 7세기 전반에 신라에 소개되었으며, 8세기 중반에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약사신앙이 성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약사신앙의 유행으로 약사여래상이 많이 만들어졌다.

 

 

백률사 약사여래불(국보 제28호)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칠불암마애불상군(국보 제312호)

동면 약사여래상